시드니인문학교실, 3월 첫 모임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 언어철학 이야기” 주제로 실시 [강의 전문포함]
다음모임은 3월 17일, 주경식 교수 “고대 문명의 세계 II : 신 바빌로니아 문명과 성서의 세계” 주제로 … 3월 2일 ‘마티스 걸작선’ 단체 관람도 실시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2년 3월 첫 모임을 지난 3월 3일 (목) 오후 7시, 온라인으로 가졌다.
3월 3일 강사로 선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는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 언어철학 이야기”란 주제로 강연했다.

홍길복 목사는 서두에 “시드니 인문학교실을 통해서 우리들이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 온 주제는 ‘인간’과 ‘자아’ 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찾아서,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 성찰해 보기 위해서 지난 5년을 함께 해 왔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주로 서구인들이 추구해온 文史哲, 특히 그 중에서도 서양 철학사를 중심하여 공부해 왔으나, 때로는 詩書畵를 비롯하여 노래와 소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쳐 가까이 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분야를 통해서도 우리는 ‘인간과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 볼 수 있습니다.”라며 “주제는 하나지만 추구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목표는 하나이지만 그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일 수 있습니다. 목표와 주제는 ‘인간과 자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과 자아를 찾아가는 길과 방법에는 여러가지 갈레길들이 있습니다. 조각, 그림, 글씨, 음악, 시, 소설, 희곡, 수필, 연극, 드리마, 영화, 스포츠 등등… 그리고 이런 것들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말과 글)를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내고, 말하는 자기 자아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말’ (언어와 글)을 살펴보고 그것을 분석해 보고 그 의미를 찾아봄으로 ‘인간이란 무엇이고 나란 어떤 존재인지’를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현대철학자들은 ‘분석철학’ 또는 ‘언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의 역할과 영역을 새롭게 규정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분석철학 (Analytic Philosophy) – 러셀을 중심으로’ 사상과 대표저서들을 살피고, ‘언어철학 (Linguistic Philosophy, Philosophy of Language)’에서는 “언어철학의 핵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가 가장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언어 (말, 글, 이름)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언어철학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위의 하이데거의 생각과 연계되는 것으로서,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건을 만들고 창조해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먼저 존재하거나 생김으로, 거기에다 언어나 이름이 붙여진다고 생각하지만 이들 언어철학자들은 그것을 거꾸로 보았습니다. …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름을 붙이면 존재가 되지만,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지우거나, 이름을 상실하면, 그 존재는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꽃’이라고 부르기 전, 너는 실재로 ‘꽃’이라는 존재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이름 없는 무형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후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소쉬르가 <이 세계에는 언어에 의해서 표기된 것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나 사물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이름이 있어야만 마침내 ‘존재’ 혹은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는 것’ naming은 존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라고 했다. 이어 “핵심은 <언어는 사건을 만든다> <이름과 호칭이 그 존재를 존재되게 해주고 존재의식을 갖게해 준다> <사건이나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언어와 이름이 그 존재를 존재되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라고 했다.
강연후 질의응답시간에는 “(1)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타락된 언어들> <오염된 말들>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2)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대로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도 함께 성장해 왔다고 보는지요? 아니면 별 변화가 없다고 보는지요? (3)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별로 잘 못하는 편인가요? 그 이유는 각각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 내가 하는 말에서 고치거나 키워 나가야 할 부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서 기초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등에 대해 나눴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2월부터 5월까지, 8월부터 11월까지 1년 8달, 매달 첫째와 셋째 목요일 저녁 7시부터 함께 자리(1년에 모두 16번 모임)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한편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3월 2일(수) 오후 1시 NSW 주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마티스 걸작전: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단체로 관람했다. 이번 마티스 걸작전은 한국어 투어로 진행됐는데 마티스 초기 작품부터 말기 작품까지 시대별 작품들을 안내 받으며 마티스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피는 좋은 시간이었다는 평이다. 올해로 11번째인 Sydney International Art Series로, 이번 전시에는 파리 퐁피두 센터, 프랑스 국립 현대 미술관 등에서 온 60여년에 걸친 100여점이 넘는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시드니인문학교실 3월 모임은 3월 3일 (목) 홍길복 목사를 강사로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 언어철학 이야기)와 3월 17일 (목) 주경식 교수를 강사로 ‘고대문명의 세계 II : 신바빌로니아 문명과 성서의 세계’란 주제로 오후 7시 대면과 온라인을 병행해 열린다.

– 시드니인문학교실 3월 모임 안내
.일시: 2022년 3월 3일 (목) / 3월 17일 (목) 오후 7~9시
3월 3일 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주제: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 언어철학 이야기)
3월 17일 강사: 주경식 교수 (호주기독교대학 교수 및 AVII 디렉터)
주제: 고대문명의 세계 II : 신바빌로니아 문명과 성서의 세계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3월 17일은 대면과 온라인 병행해 모임)
.문의: 아래와 같음
주경식 (0401 017 989, drjks709@hotmail.com)
임운규 (0425 050 013, woon153@daum.net)
시드니인문학교실 (3월 3일 강의전문)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I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 언어철학 이야기)

Ⅰ. 들어가는 말
시드니 인문학교실을 통해서 우리들이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 온 주제는 ‘인간’과 ‘자아’ 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찾아서,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 성찰해 보기 위해서 지난 5년을 함께 해 왔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주로 서구인들이 추구해온 文史哲, 특히 그 중에서도 서양 철학사를 중심하여 공부해 왔으나, 때로는 詩書畵를 비롯하여 노래와 소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쳐 가까이 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분야를 통해서도 우리는 ‘인간과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 (Pieta)나 그의 천정화 ‘천지창조’에는 르네상스시대의 문을 연 미켈란젤로라고 하는 한 위대한 조각가요, 화가요, 건축가의 사상과 삶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나 수많은 자화상들 속에는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그의 사상과 자신의 모습들이 온전히 담겨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는 로댕이라는 조각가의 생각과 삶이 묻어 있고,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시대를 살아온 피카소의 생각과 철학과 삶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가 하면,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을 마주 할 때 우리는 소용돌이 치는 정신적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 시대의 한 천재 화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천경자의 작품 속에서는 천경자의 생각과 삶을 보게 되고, 천옥영의 그림 속에서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은 천옥영의 생각과 삶의 다른 면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석봉의 글체에는 한석봉이 나타나고, 김정희의 그림과 서예에는 추사의 삶과 사상이 그려져 있고, 최진의 서예속에는 최진의 생각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나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 우리는 450여년 전의 바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운명’ ‘영웅’ ‘합창’ 같은 교향곡들을 비롯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와 협주곡들을 통하여 우리의 심금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베토벤 ! – 그의 음악세계에는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직’ ‘터키 행진곡’ ‘’반짝반짝 작은 별’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40여개도 더 되는 교향곡들과 그와 버금가는 협주곡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퀴엠’을 비롯한 그 많은 미사곡들은 모차르트라는 한 신동이요 천재 음악가란 사람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정말 열거하기도 어렵게 많은 위대한 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단테의 ‘신곡’,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등등… 이 모든 작품들 속에는 그 작품을 쓴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온 그 시대의 생각과 역사가 고스라니 그려져 있습니다.
주제는 하나지만 추구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목표는 하나이지만 그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일 수 있습니다. 목표와 주제는 ‘인간과 자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과 자아를 찾아가는 길과 방법에는 여러가지 갈레길들이 있습니다. 조각, 그림, 글씨, 음악, 시, 소설, 희곡, 수필, 연극, 드리마, 영화, 스포츠 등등… 그리고 이런 것들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말과 글)를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내고, 말하는 자기 자아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말’(언어와 글)을 살펴보고 그것을 분석해 보고 그 의미를 찾아봄으로 ‘인간이란 무엇이고 나란 어떤 존재인지’를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현대철학자들은 ‘분석철학’ 또는 ‘언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의 역할과 영역을 새롭게 규정했습니다.
Ⅱ. 분석철학 (Analytic Philosophy) – 러셀을 중심으로

버트란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웨일스에서 태어난 영국의 철학자요, 역사가요, 사회비평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엔 수학자로 출발했던 수리논리학자였습니다. 수리 논리학의 성립에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서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러셀은 20세기 초 전통적 관념론을 반대하며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을 창시하는데 선두적 역할을 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양심의 자유’와 ‘인본주의’를 주창한 참여적 사회활동가로 오히려 그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참전에 반대하고 병역거부운동을 펼치며 반전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베르사유조약에도 반대했고 히틀러와 나치에 항거했으며 당연히 스탈린정권에도 저항했습니다. 전체주의 체제를 반대해 온 그는 그 후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와 비판에 이어 반핵운동 등을 꾸준히, 그리고 줄기차게 전개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촉구해 왔습니다. 이런 활동과 연계되어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자신이 귀족가문으로서 물러받은 재산과 노벨상금 등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참여하는 사회단체에 기부했고 노년에는 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닐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집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일생을 통하여 3가지 열정을 위해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고픈 열정, 둘째는 알고 싶은 열정, 셋째는 고통 받는 이들과 공감하려는 열정 – 그는 현대 프랑스 지식인들에 앞선 영국의 참여하는 지식인, 앙가주망 (Engagement –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말과 행동으로 비판하며 항거하는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의 분석철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1) 모든 사물은 제각기 하나의 성질로만 되어있지는 않다. 하나의 사물 속에도 여러가지 성질이 함께 있다. 2) 모든 사물들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 연계되어 있다. 3) 우리가 사실 (facts)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복합적이다’ ‘사실’이란 ‘단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여러개의 사실들이 모여 있는 ‘집합적 사실’이다. 4) 따라서 ‘사실’은 늘 ‘분석되어야만 한다’ ‘사실은 복합적 사실’이기에 쪼개어 보고, 나누어 보고, 분석해 보아야, 비로소 그 실체가 좀 더 명확하게 들어난다. 5) 철학의 과제는 그 동안 우리가 사실이라고 말해왔던 것 (명제, 이론, 관념, 주장, 사고 등)들을 하나하나 쪼개보고, 분석해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은 구체적 사물과 명제를 분석함으로 보다 더 실체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 – 그는 이것을 ‘분석철학’ (分析哲學 Analytic philosophy)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석철학이란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 추구해 온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적 명제를 다루지 말자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새로운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라는 점 입니다. 분석철학은 단지 철학하는 방법론을 달리하자는 것입니다. 분석철학은 과거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기반으로해 온 전통과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추구해 나가는 방법론이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수학적’이고 보다 더 ‘과학적’이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러셀은 수학자로 출발해서 수학적, 과학적, 논리적 방법론으로 철학을 하자는 것 입니다. 그래서 논리실증주의자인 러셀은 <논리적으로 명확한 언어만이 의미있는 언어>라고 규정하고, 종래의 형이상학적 언어, 추상적 언어, 무호성 있는 언어들은 거부했습니다.
러셀의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상관관계는 사물을 분석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사과는 빨갛고 달고 향기롭습니다>라고 할 경우 그는 이 명제를 3가지로 나누어서 분석합니다. <첫째 사과는 빨갛다. 둘째 사과는 달다. 셋째 사과는 향기롭다>는 것 입니다. 어떤 사실을 분석함에 있어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거나 더 이상 분석 할 필요가 없을 경우, 그는 그것을 <원자적 사실, Atomic Facts> 혹은 <원자적 명제, Atomic Sentence>라고 이름했습니다. / 여기 홍길복 (혹은 권태원, 전현구, 강성형, 김마리아, 박혜경, 김동숙…)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홍길복이란 사람의 이름 석자만 가지고서는 그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국적, 출생지, 성장과정, 신체적 상태, 정신적 영향, 가정, 사회, 종교, 정치 환경 등등을 하나하나 쪼개보고 분석해 보아야 비로소 홍길복이란 사람이 조금은 더 명확해 집니다. 왜냐하면 홍길복이란 사람은, 하나의 사실이나 하나의 성질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고, 여러 사물이나 환경 등과 연계되어 있는 <복합적 존재, Compound Being> 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 컴퓨터 (모발 폰, 자동차, 책상, 의자, 책…)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이 역시도 ‘복합적 실체’입니다. 때문에 컴퓨터를 알기 위해서는 이 물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 또 다른 예로 여기 어떤 교회, 시드니인문학교실, 한인회, 언론사, 시민단체, 정치조직, 종교단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만 가지고, 또는 그 단체가 표명하는 대로 ‘우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하는 말만 가지고서는 그 교회를 판단하기가 퍽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숨겨진, 혹은 들어나지 않은 복합적 사실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러셀의 분석철학은 흔히 <fact 분석하기> 혹은 좀 어려운 표현으로는 <논리적 원자론, Logical Atomism>이라고 합니다.
러셀의 대표적 저서들 중 한국어로 출판된 것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 – 언어학과 철학, (러셀의 저서에 노암 촘스키의 책을 첨부함), 박병수, 신일철 공역, 삼성출판사, 1986 / 수리철학의 기초, 임정대 옮김, 경문사, 2002 /철학이란 무엇인가, 황문수 옮김, 철학사상, 1977, 서상원 옮김, 스마트북, 2012, / 철학이란 무엇인가 – 행복의 정복, 정광섭 옮김, 동서문화사, 2017 / 서양철학사,(개정판),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20 /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이학사, 2000 / 과학이란 무엇인가, 장석봉 옮김, 사회평론, 2021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5 / 행복의 정복, 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2005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최혁순 옮김, 문예출판사, 2013
Ⅲ. 언어철학 (Linguistic Philosophy, Philosophy of Language)
철학과 인문학의 목표와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인간인가?>에 두고 있습니다. <언어철학>은 <인간들>과 <나>와 <인간들의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언어를 분석함으로 <인간과 나와 인간집단>을 알고,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철학과 인문학의 한 방법론입니다.

꼼꼼하게 따지는 사람들은 언어철학의 역사를 아주 길게 보기도 합니다. 고대 인도의 베다경이나 힌두교의 철학으로 부터 諸子百家 중 名家에서 다루었던 이름에 대한 논의, 파르메니데스의 로고스론, 그리스철학시대 소피스트들이 사용했던 언어연구, 그리고 성서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의 기록출처 등을 언어철학의 시원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현대의 언어철학은 앞에서 잠간 살펴본대로 소쉬르,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 등이 연구한 분석철학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언어철학은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수많은 사물들 중에서 언어를 대상으로 합니다. 언어의 본질과 의미, 언어 사용자와 그 언어를 듣는 자 사이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의 관계 같은 것들을 우선합니다.
언어철학은 무엇보다도 <일상언어>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직업군 (목사, 스님, 의사, 법조인들, 과학자들, 정치인들, 경제인들 등등)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아닌 일상의 <생활 언어>를 분석함으로 그들의 사고와 언행의 배경과 구조, 성격과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일상언어> 속에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생각, 생각하는 방식으로 부터 삶의 태도와 방법과 목표가 다 들어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언어철학은 <인간 개개인>의 언어를 분석하는 일로 부터 시작합니다. 김, 이, 박은 물론,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서양 사람과 동양인은 모두 자신의 생각과 사고방식 및 개성에 따라 말을 달리 표현합니다. 말의 내용은 물론, 표현의 방법과 그 말이 지닌 의미는 천차만별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존재다’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서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같은 말의 속내를 헤아릴 것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평생을 오직 말 가지고 밥 벌어 먹고 살아온 사람인지라 <지난 날 내가 했던 말이 진정 사람을 살렸던 말인가, 아니면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는 없었던가?> 고통스런 자신을 되돌아 볼 때가 많습니다.
그 다음 언어철학은 <집단의 언어, 공동체의 언어>를 연구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개인의 언어는 집단의 언어와 연계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스페인, 아랍인, 이스라엘사람, 이탈리아사람들의 언어 속에는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물론, 그들 국민들의 성격과 특징,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인사말 하나만 보아도 거기에는 그들 국민들의 역사와 문화와 삶의 많은 것들이 담겨있습니다. <안녕하세요> <Good Morning> <곤니찌와> <니 하오> <Bonjour> <Guten Tag> <Buon Giorno, 부온 죠르노 – 이탈리아> <올라 올라 – 스페인> <씬 짜오> <샬롬> <마르하반 – 아랍> 그리고 호주의 <그 다이> 같은 인사말 중에는 모두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습니다. 또 같은 한국말이라 하더라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방에서 사용하는 방언들 역시 그 지방의 역사와 집단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신겨?> <안녕하셨지라?> <안녕하셔유?> <안녕하시구레이?> <안녕하우꽈?>에는 제각기 나름의 <언어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단어나 문장도 그 말이 쓰이는 나라의 언어에 따라 느낌과 의미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사과> <바나나> <강아지> <다문화 사회> <민주주의> <사실> <진리> <사랑> <죽음> <사람>을 영어로 <apple> <banana> <dog> <multicultural society> <democracy> <fact> <truth> <love> <death> <man>이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결코 그 의미가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언어는 표현되거나 나타난 현상 보다 훨씬 깊고, 함축성을 지닌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관계성>을 지닙니다. 한국어로 쓰는 말과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 관계성에는 제각기 다른 내용과 의미가 들어가게 됩니다. 김동숙과 한국, Phoebe와 Australia, / 안인승과 한국, Henry와 Australia는 각각 다른 관계성을 지닌 언어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와 내용을 지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과입니다, This is an apple>이란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사실을 기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진짜로, 참으로 사과>라는 뜻일 수도 있고, <이 사과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비교의 의미를 줄 수도 있고, <이 사과는 건강에 좋다>라는 광고의 뜻을 담을 수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이재명입니다> <저 사람은 윤석열입니다> <그이는 이제 은퇴자입니다>에는 모두 여러가지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이란 설명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를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말합니다. <코로나와 팬덱믹이 제일 큰 위기다. 지구의 온난화와 기후 변화와 생태계가 가장 큰 위기다.>로 부터 시작하여 경제적 위기, 양극화의 위기, 정치적 위기, 민주주의, 인권, 차별, 창조질서의 파괴… 등등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언어철학자들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위기도 그에 못지않은 인류의 위기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온갖 헛소리와 거짓말과 개소리로 부터 시작하여 인간들은 언어의 오용과 남용에다 비루한 침묵에 이르기 까지 언어를 발명해 놓고 자기들이 만든 그 언어에 빠져 죽어가는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타락과 오염된 실상들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오염되고 타락한 것이 <언어의 타락>과 <언어의 오염> 입니다. 무너져 가는 개인의 인격, 가정의 붕괴, 정치의 부패, 종교의 타락 – 거의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타락과 오염으로 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靑丘永言>에 실려 있다고 하는 문장입니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 것이 /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하는 것이 /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말에 대해서 잘 알려진 속담이나 격언들을 다시 들추어 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이 씨가 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음식은 갈수록 줄고 말은 갈수록 는다> <관 속에 들어가도 막 말은 하지 마라>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인간에게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라> <기쁠 때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슬플 때 말이 많으면 예의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동서양의 사상가들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경고를 했습니다. 시인 보들레르 (Chares Pierre Baudelaire)는 말합니다. <언어는 단 한마디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무기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는 말합니다. <언어는 인간과 사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말합니다. <언어란 모든 오해의 근원이다>. 莊子는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은 말합니다.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관의 한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한다>. 많은 종교에서는 침묵을 <默言修行>이라고 하면서, 이를 가장 고통스러운 수행 중 하나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나 언어철학의 핵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가 가장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언어 (말, 글, 이름)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로 번역된 그의 책 ‘Poetry, Language, Thought’에 나오는 글을 인용해 봅니다.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In its home man dwells. Those who think and those who create with words are the guardians of this house. … Man acts as though he were the shaper and master of language, while in fact language remains the master of man.>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인간은 언어 속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이더거는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언어의 창조자요 주인이 된 것 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언어철학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위의 하이데거의 생각과 연계되는 것으로서,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건을 만들고 창조해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먼저 존재하거나 생김으로, 거기에다 언어나 이름이 붙여진다고 생각하지만 이들 언어철학자들은 그것을 거꾸로 보았습니다. 작고한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 나의 이 빛갈과 향기에 알맞는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름을 붙이면 존재가 되지만,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지우거나, 이름을 상실하면, 그 존재는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꽃’이라고 부르기 전, 너는 실재로 ‘꽃’이라는 존재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이름 없는 무형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후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소쉬르가 <이 세계에는 언어에 의해서 표기된 것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나 사물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이름이 있어야만 마침내 ‘존재’ 혹은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는 것’ naming은 존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저의 경험 중 하나입니다. 제가 호주에 와서 목회를 시작한지 몇 년이 않되었을 때, 저의 교회 신도 중 한분이 안타갑게도 임신 후 7개월 만에 아이를 사산했습니다. 저는 RNS 병원에 입원 중인 그이를 찾아 갔습니다. 간단한 예배와 위로 드린 후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 병원의 social worker를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그이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7달이나 된 아이는 이미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짓고 담당 의사에게서 Birth Certificate를 발부 받고 동시에 사망 증명서에 서명도 받을 것입니다. 이름은 엄마와 상의를 했는데 Carol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이후 캐롤의 장례식은 목사님의 책임입니다.> 그 후 저는 장의사를 정하고 기독교 예식서에 따라 장례절차를 거친 후 어린 캐롤을 지금의 Macquarie Park 안에 있는 어린이 묘역에 안장했고 그 엄마와 상의해서 작은 묘비도 세웠습니다. 거의 40여년 전에 겪었던 그 경험이 저에게는 퍽 의미 있는 것이어서 저는 그 후에도 가끔 Macquarie Park에 가게 되면 캐롤이 누워 있는 자리를 찾아보곤 합니다. 그것은 유산된 태아는 모체의 신체 일부로 취급되었고 태아를 죽이는 일은 살인죄로 보지 않았던 그 이전 까지의 저의 생각을 뒤집어놓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비로소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는 이름이 있거나 이름을 주어야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웠습니다 (생명의 지배영역, 로널드 워드킨 지음, 박경신, 김지미 옮김, 이화대학 생명의료연구소, 2008 참고). <사람이란 일종의 자격입니다. 그 자격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됨의 인정은 이름을 필요로 합니다. …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줌으로 드디어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예전에는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사람으로 간주되는 데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에 올리고, 백일잔치나 돐잔치 같은 통과의례를 거쳐서 마침내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에 죽으면 태아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장례식을 치루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오늘날은 임신 부터 국가가 개입합니다. 물론 그것이 7주냐, 14주냐, 하는 논쟁은 있지만 말입니다. … 로마시대의 노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예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노예와 군인들은 번호로 이름을 대신했습니다. … 이름 없이 번호를 부르는 것은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표시였습니다. 따라서 노예는 죽어도 사람으로서의 이름이 없었으므로 일정한 장례절차가 없이 그냥 내다 버렸습니다. … 서양에서는 보통 강아지나 말 처럼 이름을 붙인 동물들은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존재를 인정해 주고 그런 이름이 붙여진 동물들의 고기는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죽는 경우에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장례의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지 않는 소나 돼지나 닭은 이름이 없으므로,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따라서 그런 비존재는 사람이 먹을 수도 있고, 또한 죽어도 아무런 의식을 치루지 않습니다. …>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이름이 붙여져 있는 존재인 개를 잡아 보신탕을 먹는 행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 문학과 지성사, 2015 참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 이것이 언어철학의 성격을 나타내는 명제 중 하나입니다.
이름과 존재에 대한 이해를 더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1974년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총회목사고시를 치루고 2년에 걸친 전도사 훈련 기간을 거친 다음,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서울 서노회 정기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제가 일하던 교회에 나가니 교인들이 한결같이 ‘목사님 목사님’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저는 그 말이 실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전도사님 전도사님’이라고 불리웠던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목사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라는 이름과 호칭이 저를 목사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름이 존재를 만든다>는 언어철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흔히 애기를 낳았을 때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아내가 애기를 낳았다고 해서 즉시 ‘아빠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애기가 집에서 엄마 한테 ‘아빠’라는 말을 배워 그 남자를 ‘아빠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처럼 ‘아 내가 아빠로구나!’하는 아빠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호칭이 그의 존재를 만들어 준다는 언어철학자들의 주장은 이런데 근거한 것입니다. / 물론 여기에는 잘못된 ‘이름 붙이기’나 잘못된 ‘호칭’의 실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데 사람들은 흔히 저를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저는 교수가 아닙니다. 저는 한번도 법적으로나 행정적 절차에 따라, 독일처럼 교수 시험에 합격한 적도 없고, 한 학교의 이사회나 교수회의나 고등교육기관의 법적 절차를 따라 교수로 임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한국이나 호주의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좀 하다보니학생들이나 다른 가르치는 사람들이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니까 내가 진짜로 교수가 된양 착각할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수는 고사하고 전임강사나 조교수, 부교수 조차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교수라고 불러주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농담 같이 들을 수도 있습니다만 자칫 ‘명예 사칭’이나 ‘호칭 도용’ 같은 범죄 행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렇듯 교수가 아니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저항이나 수정 없이 그냥 반복적으로 ‘교수님’이라 부르고 또 듣는 것은 우리 집단의 그릇된 전통과 문화, 우월감과 열등감을 포함하는 계층화 (hierarchal)된 의식과 구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 친일파란 말도 글자 그대로 하면 ‘일본과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그러나 스시나 우동이나 후지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친일파라고는 하지는 않습니다. ‘친일파’란 일제시대, 의도적으로 개인의 출세나 성공이나 영달을 목표로 해서 일본제국주의 정권에 가담하거나 부역한 사람이나 그런 집단을 이르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 ‘친일파’ 개념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됨으로 언어의 본질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친일파’와 ‘지난 날 일본제국주의 정권에 부역한 자들’을 좀 더 확실하게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고 보겠습니다. / <사람이나 사물은 이름이나 호칭 같은 언어행위에 의해서 그의 존재가 결정된다>는 언어철학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흔히 아이들을 향하여 Good boy, good girl 이라고 반복적으로 불러주면 실제로 good boy나 good girl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똑똑한 아이를 향해서도 지속적으로 <바보, 바보>라고 부르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는 경험측과도 연계가 됩니다.
핵심은 <언어는 사건을 만든다> <이름과 호칭이 그 존재를 존재되게 해주고 존재의식을 갖게해 준다> <사건이나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언어와 이름이 그 존재를 존재되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Questions, Comments & Sharing
두 번에 걸쳐 나누고 싶은 화두 (1)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타락된 언어들> <오염된 말들>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2)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대로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도 함께 성장해 왔다고 보는지요? 아니면 별 변화가 없다고 보는지요? (3)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별로 잘 못하는 편인가요? 그 이유는 각각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 내가 하는 말에서 고치거나 키워 나가야 할 부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서 기초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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