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11) :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배경
1. 들어가며
중세기의 유럽은 엄청난 재앙과 불길한 징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일반적인 대중들은 암울한 시대상과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세기말처럼 유럽역사를 휘감았고, 그 당시 종교와 정치를 아우르는 교황과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중세 교회의 통일성은 명목상으로만 지탱 되었고 진정한 일치와 정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때까지의 교회는 로마 주교, 곧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 지상 대리자로 여김을 받았고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세속적 통일왕국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보다 언제나 높은 서열에 위치했다. 이러한 교황의 권위는 세속국가의 황제보다도 더 높은 지위를 갖춘 것으로 인정되었고 당연히 영적우위권이 세속우위권을 보장했고 이것은 우주적 우위권까지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교황청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교회의 타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존 에머리크 에드워드 달버그).
종교개혁에 대한 구교(로마카톨릭)의 입장과 신교(개신교)의 입장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세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부패되어 있었고 역사적, 시대적 배경은 종교개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종교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요인들로는 직접적으로는 중세 기독교 특히 ‘교황청과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는 십자군전쟁 등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기근과 페스트 재앙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도시들이 생겨나며, 상인들의 발달 등 중세 정치·경제구조의 변화가 가져온 역사적·사회적 배경들을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 경제적 요소와 함께 그 당시 사람들의 저변의식을 바꾸어간 인쇄술의 발달과 ‘르네상스(인문주의)의 흥기야 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내적 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는 한마디로 “신중심”, “종교중심”의 사회였다. 종교가 모든 세속적 권위 위에 군림하고 있었고 성직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모든 음악과 미술, 예술의 주제는 종교와 신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신의 뜻은 인간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이 착취당하고 가장 압제당하는 시대가 중세였다.
2. 종교개혁의 일반적인 배경
2.1 전쟁, 기근, 재앙으로 인한 흉흉한 소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유럽은 전쟁과 질병, 그리고 기근으로 황폐한 시기였다. 11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거의 200년 가까이 지속된 십자군전쟁 등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315-1317년 유럽을 강타한 기근은 가히 비극적이었다. 여기에 1346년엔 전염병으로 유럽에서만 2,5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백년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와 사상자가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1419년 보헤미아의 후스파가 일으킨 종교전쟁으로 동유럽의 상당부분이 피폐화 되었고 영국 역시 1455년 이후 30년 동안 장미전쟁으로 인해 지리멸렬한 상황에 처해졌다. 따라서 1499년에서 1502년 사이 유럽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다. 독일의 라인란드와 스와비안 지역에서는 전염병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이와 같은 인구의 감소로 1500년대의 유럽의 인구는 1300년대의 인구와 거의 같은 숫자였으며, 자연히 노동 인구의 감소 현상을 초래하여 경제적인 불안을 낳게 되었다. 게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후 이슬람이 발칸 반도에 진격했다는 소식은 유럽 기독교 제국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중세 후기의 유럽 기독교 신앙이 죽음과 관련된 진혼미사(레퀴엠), 면죄부 등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2 경제 사회구조의 변화
십자군전쟁으로 인하여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추락했고, 십자군에 참여한 제후와 기사들은 자신의 영지를 돌보지 못함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십자군전쟁은 봉건제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사계급을 몰락시키며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봉건제도의 붕괴는 곧 새로운 중산층을 양산하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중세사회는 소수의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지배계급의 피라미드 형식의 구조였는데 이러한 구조가 붕괴되고 상업과 무역으로 인해 자본을 형성한 다수의 중산층이 생겨남으로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상업과 무역으로 자본을 형성한 다수의 중산층은 중세 말기에 시작된 조선술과 해양기술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15세기 경에는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었으므로 최고의 수송력은 배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은 14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발전된 항해술로 서남 아프리카의 노예들과 금, 직물, 향료, 목재, 양곡, 가죽, 옷, 소금, 포도주 그리고 인도의 후추, 상아, 중국의 비단들을 가져왔다.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에 힘입어 1492년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교회는 두려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중세의 미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무역업은 크게 발전하였다. 피에르 (Pierre)와 초운스(Huguotto Chaunce)의 통계에 따르면 1550년경에는 스페인의 세빌(Seville)에서 신대륙까지 200척의 배가 30,000톤의 물건을 날랐고, 1660년에는 50,000톤의 물건을 운송하였다.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노동력이 요구되자, 노예무역이 성행하였고, 노동력의 도시로의 유입을 재촉하였다.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하자, 넓은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이제 노동력의 빈곤을 체험하여야 했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기계화를 촉진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과 함께 협동조합과 은행들이 생겨났고, 은행제도의 출현과 함께 신용제도, 지폐, 할인제도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재정구조가 등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경제력의 집중화 (concentration of economic power)를 가속화 시켰다.
이와 같은 경제적인 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경제 구조와 사회구조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물가의 상승이다. 중세 말기에 물가는 매년 2∼3% 인상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신대륙에서 금과 은이 유럽에 수입되면서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초반 영국에서 양곡의 도매가격이 5배나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7배, 스페인에서는 그보다 더 많이 올랐다. 따라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전매업자들, 고리대금업자들, 상인들, 특히 양곡 상인들의 농간에 대하여 비난하곤 하였다. 물가상승으로 식량 폭동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 상인들의 창고와 집은 공격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인 혼란은 사람들에게 개혁이든 혁명이든 간에 어떠한 변화를 요청하게 되었다.
2.3 정치구조의 변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십자군전쟁은 장원제도의 몰락과 함께 봉건군주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봉건제도가 무너지자 영지에 있던 농노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상인으로 바뀌었고 상업으로 치부한 상인들은 중산층으로 변모하였다. 상인들이 경제를 장악하면서 그들은 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속권은 중산층의 후원으로 점차로 절대 군주화하였다. 이와 같이 시작된 절대 군주들은 다른 왕에 대해 도전함으로 전쟁을 수행하거나, 교황권에 대항하여 왕권신수설 (the divine right of kings)을 주장함으로 왕권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왕권확장운동과 함께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등에서 절대 왕조들이 일어났다. 절대군주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국의 재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가재산이 로마교황청으로 유출되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로마교황청은 유럽의 3분의 1을 소유하면서 소작인들로부터 물질을 긁어모아 왔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국민 총수입의 40%가 로마로 유출되었기 때문에 독일 통치자들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국가 재산의 로마 유출을 막는 길은 바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이는 바로 제후들이 종교개혁과 종교개혁가들을 후원하게 된 정치적인 이유가 되었다(실예-작센의 프레데릭 선제후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운 것).
3. 종교적 배경
중세 후기의 유럽은 많은 변화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하나의 집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세 기독교와 교회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의 사회는 매우 종교적인 사회였지만, 비기독교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리용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던 피터 왈도(Peter Waldo, d. 1217)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면서 로마카톨릭을 개혁하고자 할 때, 교회의 당국자들은 피터 왈도와 그의 제자들을 눈의 가시처럼 취급하였다. 왈도의 개혁사상이 온 프랑스에 번지자, 로마교황청 당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229년에 발렌시아 교회회의(Council of Valencia)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교회회의를 통하여 왈도의 성경중심적 개혁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왈도를 따르는 자들을 적어도 백만 명이나 살해하였다. 또한 교권주의자들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 그들에게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자, 평신도나 하층 성직자가 성경을 소유하거나 연구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따라서 1229년 이후 로마카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중세교회는 교회당국에 의하여 말씀의 빛이 가려지면서 말씀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말씀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인간적이요 미신적인 신앙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중세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미신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의 모든 생활은 미신적이 되었다.
더구나 당시에 잔인하였던 흑사병의 만연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계속적인 터어키인(이슬람)의 위협은 서구인들로 더욱 미신가운데 빠지게 하였다. 무지와 미신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하였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인간편에서 무엇인가 고행과 종교적인 행사를 수행해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거닐던 성지를 고행으로 순례하면 모든 죄들이 감면된다는 사상이 나왔고, 지옥의 공포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안위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하여 암송하는 풍습과 분위기있는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사상이 나와 촛불예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교인들이 현세의 고뇌를 잊기 위하여 사용하는 묵주가 알레인 로쉬(Alain de Roche)에 의하여 교회에 소개되면서 중세인들은 묵주를 만지면서 그들의 소원을 아뢰기 시작 하였고, 죽음의 공포를 덜기 위한 죽는 기술(The ars moriendi)도 고안되었다. 말씀의 빛이 가리워져 하나님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인간의 구원이 모호해지면서 중세인들은 미신에 더욱 빠졌다. 이와 같은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은 바로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더구나 한심스러운 것은 중세교회의 지도자들이 성경적인 기독교대신 미신적이요 반기독교적인 종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Ignorance is the mother of devotion)”라는 격언으로 중세인들을 세뇌한 것이다.
이와 같은 비성경적이요 미신적인 종교 형태로 나타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세에 가장 만연하였던 성자숭배사상이었다. 말씀의 빛이 가려지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간주하여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존엄하신 하나님보다는 성자(聖者)들을 통하여 기도하면 어려움 가운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자숭배사상이 나왔다. 중세인들은 성자들을 그들의 수호신으로 모셨는데, 성 죠오지(St. George)와 성 마틴(St. Martin)은 의사와 병자들의 수호신으로, 성 도로시아(St. Dorothea)는 정원사의 수호신으로, 성 바바라(St. Babara)는 사냥꾼의 수호신으로, 성 바돌로뮤(St. Bartholomew)는 정육업자들의 수호신으로, 그리고 성 안나(St. Anna)는 광부들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15세기경 독일의 경우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이던 이름만을 빼놓고는 성인들의 이름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을 지은 숫자가 가장 많았다.
특히 중세 말기에는 마리아숭배도 급증하였는데, 마리아는 대표적인 성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마리아를 “우리의 경애하는 여인(Our Dear Lady)”으로 부르면서, 그녀의 생애, 신앙심 등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중세인들의 또 다른 반기독교적인 미신적 신앙은 성물(聖物)숭배 사상에 잘 나타난다. 중세인들은 성물에는 죄를 면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어 성자들의 유물이라는 유물은 다 긁어모았다. 이와 같은 성물숭배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삭소니(Saxony)주 지배자였던 프레데릭 현인(Fredrick the Wise)일 것이다. 그는 성물에 대한 신앙심으로 5,000종류의 성물을 긁어모았다. 그 가운데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뽑아왔다고 하는 볏집, 예수께서 달리셨다는 십자가의 한 파편, 예수께서 유아시절에 차고 다녔다는 기저귀, 마리아의 어머니가 되는 성안나의 엄지손가락 등이 있었는데, 프레데릭 현인이 소장했던 성물들은 총 1,902,202일에 해당하는 면죄 효과가 있는 분량이었다.
칼빈이 태어난 프랑스의 뉘용(Noyon)의 한 성당에도 이른바 예수께서 쓰셨다는 가시관의 일부와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비텐베르그 성 안에도 5,005개의 성물이 보관되어 있었고, 성물 하나하나에는 100일의 면죄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왔었다. 중세인들의 미신적인 신앙은 성자숭배와 성물숭배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신에 빠져 중세인들은 영국의 켄터버리(Cantabury), 스페인의 콤파스텔라(Compastela) 등을 향하여 순례하였고, 독일 바바리아의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와 알트 욋팅(Alt Otting) 등을 향한 순례자도 계속 늘어났는데 이 무리에는 병 낫기를 원하는 자들, 특히 지체부자유자(불구자)가 다수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미신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의 경제적인 타락 역시 종교개혁을 요청하는 하나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교회의 재정적 타락은 성직을 가진 자가 사망할 경우 그의 성직록(benefice)을 교황이 마음대로 재할당할 수 있다는 교회법이 13세기에 제정되면서 가속화되었다. 교황의 교회의 재정에 대한 입지가 강화되면서, 교황들은 다양한 세금제도를 고안하였다. 그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어떤 지역의 성직자가 유고될 경우를 고려하여 그 자리에서 후보자를 약속하면서 후보자에게 미리 세금을 거두는 예약세(reservation), 성직자로 임직한 뒤 1년간의 수입을 교황청에 내는 임직세(annate), 어떤 교회의 성직의 자리를 놓고 대기하는 대기세(expection)를 고안하고, 성직매매(simony) 등의 방법을 통하여 축재했다. 특히 교황 레오 10세(Leo X, 1513-1521)는 돈 받고 팔 수 있는 많은 성직의 자리를 고안하여 매매하므로 그의 치하에서 돈 주고 살 수 있는 성직의 수는 사상 최고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카톨릭교회와 지도자들이 돈만 밝히자 로마교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교회의 탐욕을 빗대어 세상 사람들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라틴어(Radix Omnium Malomum Avaritia)의 첫 글자를 따서 중세교회의 중심지였던 이른바 거룩한 도시 로마를 탐욕의 도시 ROMA라고 풍자할 정도였다. 인노센트 8세 당시 로마를 방문하였던 아우구스부르그시의 서기였던 콘라드 퓨팅거(Conrad Peutinger)는 로마의 부패상을 1491년에 아래와 같이 지적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최고위직에서 최하위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직을 살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음모와 위선, 아첨이 아주 영예를 누리며, 종교는 탈선하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야비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으며 정의는 잠자고 있다. 폐허가 된 고대의 유적들을 볼 때마다 이 유명한 도시가 들어 보지도 못한 위선과 허식에 의하여, 그리고 모든 포악과 악독을 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악한 자들은 그러한 악때문에 규제받는 대신 칭송을 받고 있다. 내가 그들을 책망하자 그들은 운명이 그렇게 결정된 곳이라고 말하였다.”
교회의 재정적인 부패는 결국 성직자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인 타락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로마의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1492∼1503)를 들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과 축첩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여러 명의 축첩을 둠으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돈으로 교황이 된 다음에도 여러 명의 첩을 더 두고 자녀들을 생산하였다. 탐욕을 채우기 위하 여 교황은 그의 일곱살 밖에 안된 아들 세사레 보르기아(Cesare Borgia)를 추기경에 임명할 정도였다. 성직자의 도덕적 부패상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직자의 타락은 재정적인 풍요때문에 주로 기인한다. 그러므로 중세의 지각있던 성도들은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가난과 동거하기를 서원하고 황금을 돌 보듯 하라고 하였다.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프란시스(Francis)의 물질관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면서 「규칙」에 다음과 같이 성직자와 물질의 관계를 말한다. – 수도사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혹 어디를 가든지 어떤 방법으로 돈을 취하거나 받아 서는 안된다. 의복을 의해서든 책을 위해서든 혹은 노동의 대가로든 아픈 형제의 긴급 한 필요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이유로든 돈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돈을 돌 같이 여겨야 한다. 돈을 가치있게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자의 눈을 가리려고 사단은 찾아다닌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부정한 후에 그처럼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하늘나라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 만일 우리가 어느 곳 에서 우연히 돈을 줍게 되었어도 그것을 발로 밟는 먼지 이상으로 여기지 말자. 돈이란 헛되고 헛된 것이다.
물질에 대한 금욕적인 자세를 요구한 것은 프란시스만이 아니다. 베네딕트(Benedict) 수도원과 도미니칸(Dominicans) 수도원 그리고 시토(Cistercians) 수도원에서도 수도사가 추구할 제일 목표는 청빈이라고 규정하였다. 비록 수도사들이 이와 같이 청빈을 강조하였음에도 교회 지도자들이 물질로 인하여 타락하게 된 것은 말씀에 대한 무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말의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교육 수준 역시 최저의 상태에 있었다. 당시에는 라틴어와 기초적인 교리문답 그리고 미사드리는데 필요한 예배 의식 정도만 공부하면 누구든지 지방의 사제직에 임직되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우트레히트의 주교 데이비드(Bishop of Utrecht David, 1457∼1494)가 성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을 평가하는 시험을 주관하였다. 데이비드는 부집사(subdeacon) 후보에게는 쉬운 문제를 묻고 집사와 사제가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러나 많은 응시자가 형편없는 무자격자임을 알게 된 데이비드 주교는 300명의 응시자 가운데 겨우 3명만 시험에 통과시켰다. 이러한 데이비스의 개혁운동을 옆에서 본 그의 동료들은 불평하기를 “요즘과 같은 현대 시대에는 성 바울이나 성 제롬과 같은 이가 필요하지 않고, 데이비드와 같은 이가 필요하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전야의 교회는 교회개혁에 대한 시도도 없었고, 그것을 시도하고자 하던 사람을 정죄하는 어두운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소수의 성직자만이 성당학교나 대학에서 수학했고 대부분은 라틴어도 읽을 줄 모른 경우가 많았다. 펠릭스 페이버(Felix Faber)가 쓴 「울름의 연대기」(Chronicle of Ulm)에는 15세기 말에 울름에 있던 1,000명의 성직자 가운데 대학촌을 구경한 이가 거의 없고, 그 가운데 학사 학위만 소지했다 하더라도 큰 학자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준이 낮은 성직자들 때문에 교회는 타락하고, 타락한 교회는 더욱 저질의 목회자를 배출하므로 중세교회의 타락은 가속화되었다.
4. 인문주의, 르네상스(Renaissance)의 발현과 종교개혁
필자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의 부흥이야 말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요인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십자군 전쟁, 유럽의 대기근, 흑사병과 유럽의 여러 전쟁 등을 겪으면서 일반 농민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감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와 신학은 인간의 존귀함을 왜곡하였다. 교회는 겉으로는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만을 강조하면서도, 성직자들은 오히려 현세의 것들에 치중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교황과 추기경, 사제들은 여러 명의 축첩들을 거느리는 것이 보통으로 이해되어지는 시대였다. 교회가 신을 추구한다는 빌미로 인간성을 왜곡하고, 겉으로는 현세를 부정하면서도 주교들과 성직자들은 누구보다도 현세에 집착되어 있는 현실들을 보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중세는 또한 ‘신의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대였다. 당시 중세 종교지도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 일반 대중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에서 이슬람에게 패했을 때 일반 신앙인들의 의식에서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정말 기독교의 신이 살아 있다면 왜 이방신을 섬기는 이슬람에게 패배하는가 하는 회의를 갖게 한 것이다. 당시 교회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모든 것에 승리할 것이라 굳게 믿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실패와 같은 사건은 일반 대중들의 의식에 의심을 들게 하였고 이것은 르네상스를 가져오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어휘는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을 의미하고 있다. 이 말이 초기에는 고대미술 혹은 고전의 부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나 전 유럽의 문화전반에 걸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복고혁신운동”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신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세계를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의 십자군전쟁의 실패와 각종 전쟁과 질병으로 인해 죽음들, 중세 봉건제도와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안목, 그리고 도시문명의 발달에 따른 현실생활 등이 개별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핵심사상은 인문주의(Humanism)이다. 인문주의는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 = back to the sources)”는 모토를 가지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인간회복운동”이다. 인간은 모두 고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로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주체로서의 개인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 개인에 대한 발견의 높은 단계로서 개체적 인간(homo singolare)이라는 표현과 최고 단계로서의 유일무이한 존재(homo unico)라는 발견은 중세적 관점으로 본다면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르네상스운동은 중앙집권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중심의 사회로, 신중심의 시대에서 인간성 회복의 인간중심의 시대를 강조하며 발전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를 다른 말로 하면 문예부흥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문예부흥은 유럽으로 하여금 문학과 예술과 과학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인간의 사고와 정신에 중세적 틀에서 벗어나서 근대적 틀로 전이를 가져오게 했다. 사실 인문주의운동은 아랍인들이 고전적인 문서를 서구에 제공함으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로마가 추구했던 고전으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탐구함으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갱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주의운동은 학문적으로 고전을 공부하다보니 그 당시 무식했던 성직자들의 오류를 보게 되고 중세교회와 기독교가 잘못된 것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문주의 운동은 알프스를 넘어가 북유럽으로 퍼지면서 초대교부인 어거스틴과 성경의 원전을 연구함으로 종교개혁에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 멜랑히톤, 츠빙글리, 칼빈 등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인문주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사람들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미신과 공포, 무지의 시대가 끝나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단순화 시키고 이성을 드높이며 의식과 형식보다는 도덕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문주의자들이 가장 권위로 삼는 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르네상스와 함께 독일의 인문주의자들은 교부신학과 고전에 대해 연구하였고,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교부의 글들과 고대문헌을 함께 연구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로이힐린(Reuchlin)이 구약의 문법연구를, 화란에서는 에라스무스가 1516년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필자는 인문주의운동이 세 가지 면에서 종교개혁에 크게 공헌했다고 믿는다. 첫째는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인간의 위치를 높인 면이요, 둘째는 성경에 대한 연구의 강조이고, 셋째는 비판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인문주의 확산에 크게 기여를 한 플로렌스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rni Pico della Mirandola)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을 통해 진보를 향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가능성에 대해서 찬사를 보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인간이 중심이고, 인간의 지적인 성취와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찬사였다. 인간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보면 인문주의 운동이 어떻게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종교개혁 전야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Disiderius Erasmus, 1468∼1536)는 1468년경 한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교육받고 파리대학에 유학한 후, 1495년부터 일정한 소속없이 유럽 전역을 여행하였고, 한동안 케임브리지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1535년에는 바젤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15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부패가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개혁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1524년에 쓴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에서 에라스무스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교육에 의하여 선한 양심을 소유케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깨끗한 양심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에게 있어서 깨끗한 양심은 연구하고, 좋은 글을 쓰고, 배우는 기쁨에 대한 열린 마음을 의미하였다. 인간은 배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은 학문 자체를 초월하면서 하나님과의 초월적인 연합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을 통하여 지상에서 윤리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라스무스는 실천적 경건을 보편화하기 위하여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하여 출판하였고, 교부들의 글을 편집하여 세상에 소개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하여 가혹할 만큼 잔인하게 풍자하는 글들을 써서 종교개혁으로의 길을 열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인 병사의 지침서」(Hand Book of a Christian Solidier, 1503) 같은 책을 통하여 경건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과 같은 책을 통하여 당시의 교회를 풍자하였다. 「우신예찬」은 1509년 그의 친구인 토마스 모아의 집에서 집필되었는데, 책이 나오자마자 매진되어 600회 이상이나 출판되는 기록을 세웠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을 통하여 교황들과 성직자들의 부도덕한 생활, 수도원제도, 중세 스콜라철학의 모호성 등 당대의 악폐를 꼬집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1517년경에 무명으로 「천국에서 추방된 율리우스」(Julius Excluded from Heaven)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을 통하여 악명 높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다. 율리우스는 천국 문전에서 베드로에게 추방당하는데, 다음은 율리우스와 베드로가 천국문 앞에서 행한 대화를 묘사한 글이다.
“율리우스―문을 빨리 열어라.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그대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면 하늘의 모든 의식으로 나를 영접하였을 것이네.
베드로―당신이 내게 명령하는 것 같소.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 말하시오.
율리우스―물론 당신이 나를 알꺼요.
베드로―내가? 나는 전에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특별한 사람이군.
율리우스―당신은 분명 눈이 멀었군. 당신이 율리우스 가(家)의 문장(紋章)인 이 황금 참나무를 모르지 않다면, 이 은 열쇠를 알아볼 것이요. 나의 삼층왕관과 보석으로 된 이 빛나는 옷을 본다면 말이오.
베드로―내가 은 열쇠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교회의 참 목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셨던 그 열쇠와는 전혀 다른데. 그리고 자네가 쓰고 있는 그 거만한 왕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보겠나?”
또한 그의 「담화집」(Colloquies)은 300회 이상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1527년 파리에서 비판되기 시작하였고, 반동 종교개혁과 함께 그의 모든 저작물은 1559년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에라스무스는 헬라어성경을 편집하며, 로마카톨릭의 부패상을 풍자와 해학의 방법으로 지적함으로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루터가 알을 품어 부화시켰다면, 그 알을 낳은 사람은 에라스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기존의 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정말 그것이 옳은 것인지 고전들과 성경을 뒤지며 비판적으로 탐구하였다. 심지어 인문주의자 로렌트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문서”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한다. 그것은 4세기 무렵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유럽을 지배하는 권리를 넘겨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그 문서가 사실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엉터리 문서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처럼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정신은 중세교회가 성경에서 얼마나 이탈되었는지 밝혀내었고, 치열하게 연구하여 근대 과학문명을 여는 첨병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현대교회에서는 ‘비판정신’을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치고 금기시 한다. 중세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정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없었을 것이요, 중세의 인간이 착취당하고 압제당했던 암흑시대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5. 인쇄술의 발달
인쇄술의 발명은 종교개혁의 숨은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인쇄기가 1450년 구텐베르그에 의하여 발명되자 프로벤(Johannes Froben), 아메르바하(Johannes Amerbach),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와 같은 인문주의적인 인쇄업자들은 헬라의 고전들과 교부들의 책, 중세의 서적과 문서들, 경건서적과 성경을 인쇄·보급하였다. 인쇄기의 발명으로 1457년에서 150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100여종의 성경이 인쇄되었고, 그 결과 성경값은 이전에 비하여 20분의 1로 떨어졌다. 1500년경에는 4만여 종의 책이 출판되었고, 그 총 수량은 1,000만권 정도에 이르렀다. 종교개혁으로 인쇄업은 크게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한 인쇄업자가 년간 발행한 서적은 약 40여종이었으나 종교개혁으로 매년 500종류 이상이 출판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역으로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나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온 유럽의 사람들이 헬라어를 통하여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인쇄기의 발명으로 루터의 개혁사상을 즉시로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루이스W. 스피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종교개혁은 또한 구텐베르크(Gutenberg) 이후 최초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대규모적으로 사상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활자 인쇄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인쇄기는 두 계층, 즉 식자층과 일반대중들 양쪽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인문주의자 베아투스 레나우스(Beatus Rhenanus)는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가 95개조 신조를 발표하자마자 그의 항의문들은 2주 만에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슈피츠가 인쇄술이야말로 복음전파를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찬사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폭스(John Foxe)는 그의 저서 「순교자들의 기록」(Book of Martyrs)에서 “인쇄술의 발명은 하나님의 지혜가 이룩한 놀랄만한 업적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이 인쇄술로 인하여 올바른 지식과 분별하는 빛이 훌륭한 양식속에 자리잡게 되며, 어두움은 물러가고 무식은 드러나며 오류로부터 진리가, 미신으로부터 참된 종교가 구별되었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은 책(Bible & 고전)과 활자(인쇄술)를 통해 무지와 미신에 사로잡혔던 중세 사람들의 이성을 깨웠던 인문주의운동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6. 결론
16세기 종교개혁의 출발은 분명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인츠 주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의 명령을 받아 수도승 테첼의 면죄부 판매에 분노해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미 일반 대중과 생각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개혁과 변화에 대한 소망이 일고 있었다. 종교와 정치가 야합해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 계급을 미신과 거짓된 교조주의로 몰아붙임으로 인권을 유린할 때 이미 의식있고 깨어있는 사람들은 교황과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1세기 말부터 거의 2백년 가까이 끌고간 명분없는 십자군전쟁, 십자군전쟁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전쟁비용을 만들기 위해 교회는 무리한 면죄부 판매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면죄권은 돈과 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교권 다툼으로 아비뇽 유수와 교황청 분열은 교회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고, 이러한 시기에 지리상의 발견과 의식있는 사람들의 인문주의운동은 인간의식의 자각과 시야를 확대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교회와 교황이 타락하고 일반 대중들이 미신과 무지에 사로잡혀 신앙이 유린되어 갈 때, 종교개혁 100년 전에 이미 옥스퍼드 대학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프라하 대학의 얀 후스(Jan Huss, 1369-1498), 도미니크회 사보나롤라(Savonarola, 1425-1498) 등이 교회와 교황을 신랄히 비판하고 성경의 보급과 바른 교리들을 가르쳤다.
개혁자들이 거짓과 잘못된 교조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고전, 원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선현들이 진리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성경이 봉인되어 있을 때, 그 성경을 직접 접근하여 일반 대중의 언어로 번역하고 보급하여 성경의 진리들을 대중화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운동이다. 중세시대 널부러지고 끊임없는 인간의 주검들을 마주하면서, 교회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죽음을 내세라는 명목으로 방치할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회의와 의심은 인간 개인의 고유인권에 대한 자각과 사유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배경에는 다양한 여러 의견들이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교파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들도 다르고 종교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다양하다. 기독교인들은 종교개혁운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였다고 강조한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그렇게 한마디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역사” 운운하며 일축한다면 중세시대의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오류들과 부패들과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그 시대 깨어있고 의식있는 자들의 ‘진리’에 대한 헌신과 희생적 죽음은 차라리 숭고하기까지 하다. 존 위클리프는 교회권력이 세속권력을 추구하는 추한 모습들을 비판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위배되었다고 생각하고 민중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성경을 직접 번역했다가 교회로부터 탄압받는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후스가 나와 교회개혁을 주장하자 얀 후스를 화형시킨 후 그에게 위클리프가 영향을 주었다고 그의 시체를 다시 꺼내 ‘부관참시’ 한 후 위클리프의 저작들과 나란히 불태워 버렸다.
종교개혁 전의 100년 전의 개혁자들인 위클리프나 후스 모두는 학자였다. 진리에 대해 “검은 것은 검다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용감하게 진리에 대해 외쳤던 인문주의 학자들이었다.
▷ Questions & Comments
▷ Sharing Time
주경식 교수(현 호주비전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