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인문학교실

인간: 그 위대한 미스테리 – 과학과 철학, 그리고 인문학의 경계에서 묻다
인간 그 신비하고 복잡한 존재
오래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가요 ‘타타타’의 가삿말이 그 해 한국 노랫말 대상을 탔던 적이 있었다. 노래가사가 재미있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 난들 너를 알겠느냐? /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 다 안다면 재미없지 /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 그런 거지∙∙∙
인간의 인생에 대한 회한과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노랫말에서 그려냈다.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는 실제로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부부관계에서도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의 일화도 인간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시사해준다.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인간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며 걷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쳤다. 갑자기 부딪친 사람이 화가 나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이 염세주의 철학자는 깊이 생각에 잠긴채 “내가 누구냐고요?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인간만큼 복잡하고 신묘막측 (fearfully and wonder -fully) 하며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바른 정의를 어떻게 내려 볼 수 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라는 속담처럼 사람만큼 다층적이고 복잡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실, 인간인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복합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문명화되어 있는 동시에 야만적이며,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동시에 적개심 넘치는 위험한 존재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이를 가리켜 인간을 ‘위대한 신비 (The Great Mystery)’라고 부른다.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설명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존재다. 과학은 인간을 분석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분석되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존재이다.
생각하는 인간, 유희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 그러나 그 정의를 넘어서는 존재
인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인류 문명만큼 오래되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설명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규정의 역사 역시 인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 철학자들부터 현대 인류학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정의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곧 “생각하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다. 이 정의는 인간의 이성 능력을 핵심으로 삼는다. 인간은 단순히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원인을 묻고, 결과를 예측하며, 논리를 구성한다.
수학을 만들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우주의 구조를 계산한다. 이성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으로 오랫동안 존중받아 왔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계산하는 존재만은 아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했다. 그는 인간 문화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았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 상징을 만들고, 규칙을 세우며, 공동체를 형성한다. 스포츠, 연극, 음악, 축제, 예술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드러내는 활동이다.
놀이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상상하고, 세계를 재구성한다. 인간은 현실을 넘어서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유일한 존재다.
또 다른 정의는 인간을 호모 파버 (Homo faber), 즉 “만드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존재다. 돌을 깎아 도구를 만들던 시기부터, 인공지능과 우주 탐사를 논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환경을 변형해 왔다. 기술은 인간의 확장된 신체와도 같다.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고, 컴퓨터는 기억의 확장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확장하며 문명을 형성한다.
이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놀이하는 존재이고,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의들이 모두 일정 부분만을 포착한다는 데 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충동적이며, 창조적이지만 동시에 파괴적이다. 인간은 합리성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그 과학은 전쟁과 대량 학살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제 1·2 차 세계대전은 인간 이성의 진보가 도덕의 진보를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성은 인간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정교하게 잔혹하게 만들 수도 있다.
놀이와 예술은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지만, 그 자유는 때로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기술은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소외시키고 통제하는 구조를 낳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 정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인간을 하나의 기능이나 능력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특정한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등장한다. 과학은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뇌의 구조를 연구하고, 유전자를 분석하며, 행동의 통계적 패턴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은 언제나 구조와 메커니즘의 차원에 머문다. 인간의 감정은 신경세포의 반응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왜 의미 있는지에 대한 해석은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예를 들어 사랑을 생각해 보자. 사랑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이 사랑의 깊이와 희생, 헌신의 의미를 대체하지는 않는다. 음악 역시 물리적으로는 공기의 진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 울림은 단순한 파동 이상의 것이다.
설명은 구조를 밝히지만,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인간은 단순히 반응하는 생물학적 개체가 아니라, 의미를 묻고 해석하는 존재다. 우리는 경험을 단순히 겪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해석한다. 실패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어떤 이에게는 좌절이고 다른 이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된다. 동일한 사실도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세계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의미화한다. 이 의미화 능력이 인간을 독특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를 넘어서 “왜”를 묻는다. 우리는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따진다. 우리는 단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지 질문한다.
이처럼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해석적 존재다. 인간은 구조 속에 있으면서도, 그 구조를 넘어서 질문한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그 환경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결국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루덴스이기도 하며, 호모 파버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정의를 넘어서는 존재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생각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이지만, 놀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존재이지만, 도구 사용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의미를 묻는 존재, 인간 – 설명을 넘어 해석으로
인간은 정의를 넘어서는 존재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인간은 특정 기능이나 능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가? 그 답은 인간이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돌은 존재하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는다. 동물은 생존하지만, 자신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사건을 겪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묻는다. 인간은 경험을 단순히 축적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것을 이야기로 엮는다.
우리는 “그때 그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인간 존재의 구조가 담겨 있다.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해석하며, 미래를 상상한다. 인간은 시간을 단순한 흐름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을 의미의 연속성으로 재구성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적 설명의 한계가 분명해진다. 과학은 인간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감정이 어떤 신경 경로를 통해 형성되는지 밝힐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왜 중요한지, 왜 한 사람의 선택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는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은 “어떻게”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인간은 “왜”를 묻는 존재이다.
사랑이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설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이 왜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힘을 가지는지, 왜 사랑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지, 왜 배신이 그렇게 깊은 상처가 되는지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음악이 공기의 진동이라는 사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진동이 왜 어떤 이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왜 한 곡의 선율이 한 시대의 기억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세계를 단순히 인식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를 의미화한다. 같은 실패라도 어떤 이에게는 좌절이 되고, 다른 이에게는 성장의 전환점이 된다. 동일한 사건이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그 차이는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해석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이 해석 능력은 인간을 독특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현실을 재해석한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상실 속에서도 희망을 구성한다. 인간은 단순한 반응의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발견하는 것인가?
현대 사회는 종종 의미를 개인의 선택 문제로 환원한다. “네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의미다.” 그러나 만약 의미가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면, 그 의미는 얼마나 견고할 수 있을까? 고통과 상실, 죽음 앞에서 개인이 만들어낸 의미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가?
인간은 단순히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기보다, 의미에 반응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의를 단지 편리하기 때문에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옳다고 느끼기 때문에 옳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단순한 취향의 산물로만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넘어서는 무엇과 닿아 있다고 느낀다.
인간은 세계를 완전히 무의미한 공간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세계가 이해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살아간다. 과학 자체도 세계가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신뢰 위에서 출발한다. 만약 세계가 전적으로 혼돈이라면, 우리는 탐구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미 추구는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구조에 깊이 새겨진 움직임이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의미를 필요로 한다. 의미 없는 삶은 단순한 생존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인간은 답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정의될 수 있지만, 정의를 넘어서 질문을 계속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하나의 신비이다. 설명은 가능하지만, 해석은 끝나지 않는다. 이해는 깊어지지만, 완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놀이하는 존재이며, 도구를 만드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의 지속성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그 위대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파열과 가능성 사이에 선 존재
인간을 의미를 묻는 존재라고 규정했다면, 이제 우리는 더 불편한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인간은 왜 그토록 의미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의미를 파괴하는가? 왜 인간은 정의를 외치면서도 부정의를 행하는가? 왜 인간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증오를 선택하는가?
인간은 단순히 위대한 가능성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동시에 깊은 파열의 존재이다.
인류의 역사는 찬란한 문명과 참혹한 폭력이 교차하는 기록이다. 인간은 예술을 창조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같은 인간은 학살을 조직하고, 전쟁을 일삼으며, 타인을 체계적으로 억압해 왔다. 제 1·2 차 세계대전에서 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학살은 이성의 진보가 곧 도덕의 진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합리성을 통해 더 정교하게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균열을 마주한다. 인간은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이다. 인간은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잔혹해질 수 있다. 인간은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도, 그 공동체를 배타적 폭력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
이 모순은 단순한 오류나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구조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긴장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로 형벌받은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자유는 가능성을 열어 주지만, 동시에 실패의 책임을 떠안게 한다. 인간은 본능에만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이 자유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를 넘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재구성하는 존재다.
그러나 같은 자유는 인간을 파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선택의 가능성은 곧 부패와 타락의 가능성이며, 창조의 능력은 곧 파괴의 능력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나 두 방향으로 열려 있다.
이 점에서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이미 정해진 본질을 단순히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를 매 순간 선택한다. 그 선택은 작은 습관에서부터 역사적 결단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자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력과 성찰, 때로는 고통을 통해 길을 찾는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갇힐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긴장은 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체는 연대를 통해 성장하지만, 집단적 광기에 빠질 수도 있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 헌신할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 정의를 구현하려 하지만, 그 제도는 언제든 억압의 수단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단순히 선한 존재로 미화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로 단정하는 것도 모두 인간을 단순화 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두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다.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 인간 – 유한성 속에서 의미를 모색하다
인간이 파열과 가능성 사이에 서 있는 존재라면, 그 긴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은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동물도 죽지만, 자신의 죽음을 사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하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살 수 없다.
과학은 수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유한성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살아간다. 이 자각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단순히 인간이 결국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끝을 의식하며 현재를 살아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기며 산다.
유한성은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겁게 만든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처럼 진지하게 선택할까? 사랑을 그렇게 절실하게 붙잡을까? 시간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다. 만남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 인간은 유한성을 통해 가치의 깊이를 경험한다.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며, 의미의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드는 사건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경험은 단순한 상실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불러오기도 한다. 죽음은 인간을 침묵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사유로 이끌기도 한다.
때로 인간은 죽음을 부정하려고 하기도 한다. 기술을 통해 영원을 꿈꾸고, 기억을 디지털로 저장하며, 이름을 역사 속에 남기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유한성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기에,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유한성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완전한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속에서 인간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질문은 유한하지 않다.
인간은 끝을 향해 가는 존재이지만, 그 끝을 알기 때문에 현재를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삶을 해석한다. 유한성은 인간을 절망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깊어지게 한다.
결국 인간은 유한성과 가능성 사이에 서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한계를 자각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는 사유를 시작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완전을 꿈꾼다. 우리는 끝을 알지만, 의미를 추구한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개체가 아니다. 인간은 유한성을 의식하며, 그 유한성 속에서 가치를 모색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지만, 그 사라짐을 아는 존재이기에 더욱 깊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하나의 미스테리이다.
결론, 여전히 성찰의 여정 위에 선 인간
우리는 인간을 다양한 각도로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라 부르고, 놀이하는 존재라 부르기도 하고, 도구를 만드는 존재라고도 불러 보았다.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이며, 해석하는 존재라고 말해 보았다. 인간은 파열과 가능성 사이에 서 있고,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며, 유한성을 의식하는 존재라고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이름을 붙이고 난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남는다. 정의의 문장 안에 다 담기지 않고, 규정의 틀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인간은 한 방향으로 기울어 있지 않다.
인간은 하나의 본질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인간은 설명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설명하는 주체이며,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다.
과학은 인간의 구조를 밝혀 준다. 철학은 인간의 조건을 사유하게 한다. 역사와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와 상처를 기록한다. 예술은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이 모든 시도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인간을 비추지만, 어느 하나도 인간을 완전히 소유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다양한 관점들이 겹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층적이며 복합적 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이고,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적이다. 인간은 공동체를 세우면 서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고, 자유를 노래하면서도 스스로를 속박할 수 있다. 인간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증오를 선택할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의미를 모색한다. 이 모순과 긴장, 이 파열과 가능성의 공존이야말로 인간을 단순한 정의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을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인간을 이성으로만 설명하면 감정과 상상력이 사라지고, 인간을 욕망으로만 설명하면 책임과 도덕이 희미해진다. 인간을 선한 존재로만 미화하면 폭력의 현실을 외면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로 단정하면 희망의 가능성을 지워 버린다. 인간을 하나의 문장으로 고정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복잡성과 깊이를 축소시키기 쉽다.
이 지점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진다. 인문학은 인간을 빠르게 결론짓는 조급함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오래 머무르는 사유의 공간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단순화하기보다는, 인간의 모순과 긴장을 드러내고, 서로 다른 관점들을 나란히 놓고 성찰하게 한다. 인간을 설명하는 언어와 해석하는 언어를 함께 견디게 하며, 질문이 끝나지 않도록 지켜 준다.
인간은 완결된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물어야 할 주제에 가깝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선택한다. 우리는 “무엇이 의미 있는가?”를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물음의 지속성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 남는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답으로 닫히는 존재가 아니라, 여러 가능성의 장 (場)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설명될 수 있으나 소진되지 않고, 해석될 수 있으나 고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그 유한성을 자각하며 무한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파열을 품고 있으나, 그 균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모색한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위대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을 모른다는 체념이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새롭게 드러난다는 인정에 가깝다.
인간은 정의로 닫히기보다, 성찰 속에서 열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전히 묻는 존재이며, 그 질문의 자리에서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주경식 (Ph.D)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