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티투스와 베레니케
로마제국의 수많은 황제 중 당시의 인기와 업적에 비해 덜 알려진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티투스(AD 39~81, 재위 79~81)’다. 티투스가 그나마 유명한 건, 유대 공주 ‘베레니케’와의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티투스의 짧은 재위기간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콜로세움’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선왕인 베시파시아누스 대에 착공, 건설해 오다가 티투스 때 완공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티투스는 콜로세움(당시에는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으로 불렸다.)을 단순한 격투장을 넘어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와 같은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5만명에 달하는 다양한 계층의 로마시민이 콜로세움에 모여 격투사의 잔인한 살육전을 즐겼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민의를 수렴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문화를 만든 이가 티투스였고, 로마시민들은 그런 티투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만든 콜로세움 정치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콜로세움의 황제 옆자리에 동방의 공주 ‘베레니케’를 앉힌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티투스의 유대 정복과 깨끗한 인품으로 봤을 때, 전혀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시민들에겐 선대에 동방요녀라고 일컫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녀로 인해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시저와 안토니우스가 방탕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티투스를 사랑하는 로마시민들은 콜로세움에서 끝없는 야유를 베레니케에게 퍼부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티투스와 베레니케는 끝내 이별을 하고 만다. 베레니케는 본국 유대로 돌아가고, 티투스는 베레니케가 돌아간 후에도 독신으로 지내다가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게 된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기원전 83년 1월 14일 ~ 기원전 30년 8월 1일)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장군이였다. 그는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상당부분 과장 미화된 점이 없지 않다.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 강화와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품의 지원에 이집트가 필요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곧 괴뢰정권으로 세우고, 이어 다음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해 들어갔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이무렵 로마에서는 레피두스는 실패한 정치로 실각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공화파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하고, “정숙한 로마인 부인을 버리고 난잡한 이집트의 여왕과 놀아나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라고 안토니우스를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소되어 몇 차례 로마로 소환당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다시한번 이집트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원정에서 돌아와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로마인들에게는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반감을 샀다. 개선식 직후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중왕’으로 선포하고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파르티아는 단 한번도 로마에 정복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등 거창한 제왕의 칭호를 붙였다. 특히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던 카이사리온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발표는 옥타비아누스는 물론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2년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임을 위조하고 적법한 후계자가 아님에도 권력을 찬탈한 자라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외국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영토를 이집트의 자기 자식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제 두 진영사이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그리스에 있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1년 드디어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 아테네, 파트라스에 잇달아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 해를 건너는 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드디어 9월 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하였다. 두사람은 남은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권력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의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패배의 절망속에서 자살했고, 며칠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카이사리온은 살해 되었다.

○ 티투스와 베레니케
티투스 (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로마 제국의 열 번째 황제이며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이다.
집정관이 된지 7년 째 되는 기원후 79년에,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며 그 해에 아버지가 죽자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사람들은 그가 다시 네로와 같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고 훗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이유는 애인인 유대 여인 베레니케로,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의 재래로 여겨졌고, 시민들의 두려움을 깨달은 티투스는 베레니케를 아내로 하는 것을 단념했으며 이를 계기로 시민의 동정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대신해 유대항쟁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 외에 유대인을 싫어했던 흔적은 없다.

티투스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도 나오는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누이동생 베레니케를 사랑하였으나 과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일을 기억하고 있던 로마 시민들의 정서상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이 도시의 야외극장을 방문한 티투스에게 유대계 주민들을 안티오키아에서 추방해줄 것을 진정했지만 티투스는 허락하지 않았고, 로마에서 유대계 주민들의 권리를 새겨놓은 청동판을 철거해달라는 요청도 티투스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베레니케는 본국 유대로 돌아가고, 티투스는 그 이후 어떤 여인도 안 만나고 홀로 지내다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 로마 대화재, 대역병 등을 수습하고 재건사업을 하다가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게 된다.
티투스는 베레니케가 돌아간 후에도 독신으로 지냈다. 중간에 딱 한번 티투스를 못 잊은 베레니케가 로마로 왔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티투스에겐 베레니케보다 로마시민들과의 약속이 더 중요했기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