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89) 중에서 _ 11월 18일자
에스텔 모리스와 퇴계

에스텔 모리스 (Estelle Morris) – 우리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기억하시는 이들도 계실 것입니다. 영국 버밍햄 (Birmingham)지역구 출신으로 십수년간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인입니다. 2002년 10월 토니 블레어 (Tony Blair) 총리 내각에서 교육부 장관을 하던 그녀가 장관재임 1년 6개월 만에 사임을 했습니다. 내각책임제를 하는 나라에서 장관 한 사람이 물러나는 일이 뭐 대단한 뉴스거리가 되겠습니까만, 가끔 에스텔 모리스라는 한 여성 장관이 다시 생각나는 것은 당시 그가 블레어총리에게 밝힌 사직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입니다’ – 그녀가 블레어총리에게 보낸 사직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친애하는 토니, 저는 지난 1년 6개월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나는 무엇을 잘하고 또 무엇을 못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저는 주어진 문제를 처리하고 일선교사들과 소통은 비교적 잘 해온 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이 거대한 정부안에서 교육부가 추진해야 할 장기적이며 전략적인 운영은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일국의 장관으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적 능력이 아주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는 총리인 당신이 필요로하는 만큼 능율적이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친절하게도 나에게 하루만 더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여기서, 제가 해야 할 가장 좋은 선택은 이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전날 블레어총리는 모리스장관을 개인적으로 만나 1시간 이상이나 만류했지만 그녀의 뜻을 꺽지 못했습니다. 블레어총리는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에스텔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장관직을 떠남으로 자신의 품위와 성실성을 지켰습니다”
BBC는 이런 보도를 했다고 합니다. “She was too nice for politics”
이런 이야기를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을 향하여 ‘이런 사람을 좀 보라’고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어서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인격과 삶의 태도는 지어먹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인간성의 훈련, 사람됨의 훈련이 가져다 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저희 인문학 친구들도 안동의 도산서원을 찿았댔습니다만, 잘 눈여겨 보질 못했는데, 그곳 사립문에는 “유정문”이라는 목판이 걸려있다고 합니다. 그 뜻은, 여러차례에 걸쳐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사양하다가 드디어 완전히 물러난 퇴계가 ‘은둔하지만 게을리 살지는 아니한다’ ‘뒤로 물러나 나를 돌아본다’는 의미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도산서원에서 퇴계는 자주 후학들에게 이리 말했다고 합니다. ‘권력은 책임이지 영달이 아니다’

실로 조선 역사에서 퇴계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판단한 지성 중 한분이며 ‘물러남의 미학’을 아름답게 보여준 선현 중 한분으로 꼽힙니다.
물러나는 것이 나아가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확실합니다. 이는 인생의 예지와 겸손과 사람됨이 갖추어져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퇴계’라는 이황선생의 호 자체가 ‘물러설 퇴’에 ‘시내 계’ ‘골짜기 계’ ‘계곡 계’로써 ‘나는 계곡으로 골짜기로 시냇가로 물러나서 살리라’는 뜻 아닙니까? ‘물러남’을 자신의 호로 만든 퇴계는 물러남으로 나아감 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 되었습니다.
동양의 선현들이 일러준 교훈들을 되새겨 봅니다.
“물러나기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니 처음부터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때 물러나는 것은 군자의 태도이고 가장 나쁠 때 물러나는 것은 소인의 자세다”
“시작 보다 어려운 것은 끝을 맺는 것이다. 그러니 유종의미를 거두도록 노력하여라”
“모든 물러섬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적절한 때, 박수쳐 줄 때 물러나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부끄럽고 욕된 마침이 온다”
“등산 할 때 보다 하산 할 때 더더욱 조심해야한다. 내려올 때 미끄러지면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에서 인문학교실을 함께 해 오고 있는 저도 가끔 물러날 때를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 까지’가 나의 일이고, 나의 한계임을 깨달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나 어머니의 일과 책임이 너무 크고 어렵다고해서 부모됨을 그만둘 수는 없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가 너무 어렵다고해서 인간됨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서도 않되지요. 분명 우리에겐 힘들고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일 처럼 느껴져도, 그래도 그 자리를 피해서는 않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근본적 삶의 원칙들과는 달리,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깨달으면 그 일과 그 자리를 떠나 ‘퇴계’ 해야 할 일이나 역할 또한 있습니다.
실로 버리지 말아야 할 일은 성실과 진심으로 헤쳐가야 할 것이로되, 떠나야 할 일과 자리는 미련없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는 아침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50가지 말’ 중에서 오늘 아침은 어떤 말이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시드니인문학교실 : 그리스·터키·한국 여행공부
안동 도산서원과 퇴계 이황
도산서원 –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은 퇴계 (退溪) 이황 (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 (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陶山面) 토계리 (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영남학파와 한국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 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 (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 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모 증축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 (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 (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그러나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 (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 (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 (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 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 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 (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 (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 (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 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 (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 (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 (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 (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 (玉振閣)’이 있는데, 퇴계 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증축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한국정신문화의 성지로 불리우며 성역화 되었다.

퇴계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 (眞寶), 자는 경호 (景浩), 호는 퇴계 (退溪)· 퇴도 (退陶) · 도수 (陶叟)이다. 좌찬성 이식 (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 (李堣)로부터 『논어 (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다고 전해진다.
27세에 향시 (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 (金麟厚, 1510~1560)와 교류하고, 모재(慕齋) 김안국 (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 (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 (賜暇讀書)를 받았다. 중종 말년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 (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 (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지만 끝내 퇴거 (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 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 주세붕 (周世鵬) 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扁額) · 서적 (書籍) · 학전 (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賜額書院)인 소수서원 (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 (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회에 이르렀다. 60세에 도산서당 (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 (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 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 (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 (招賢不至嘆: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 (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 (陶山記)」 및 「도산 잡영 (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行狀修 撰廳堂 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의 성망 (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 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 (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심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돌아가시던 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 (易愁: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 ·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 · 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 (遺誡) 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 (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의 사상과 신념
이황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와 양명학은 이단이자 화 (禍)로 간주 하고, 임금에서부터 동료,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교 배척, 양명학 배척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이황은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입수하려고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의 나이 지천명 때 1543년 (중종38년)에 드디어 주자대전을 입수한다. 그리고 그는 이언적이 쓴 저서들, 조광조가 쓴 저서들을 모두 탐독, 독파했는데 그중 이언적의 저서가 많고, 사서육경과 주자에 대한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석, 주해와 이언적 자신의 생각, 견해를 적은 것을 읽고 크게 칭송하였다. 이언적 조광조의 저서 외에도 그는 이미 심경부주,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주까지 이미 다 완독한 상태였다. 이황이 1543년 (중종 38)에 입수한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제 때에 재간 행한 가정간본 (嘉靖刊本)의 복각본 (復刻本)으로, 가정간본의 원본은 성화간본 (成化刊本)의 수정, 보충 본이었다 한다. 1549년 풍기군수를 사퇴한 직후부터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였다.
이황은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시대에는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 · 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 · 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글 _ 주경식 교수 (시드니인문학교실 강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