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프랑스> 방문기(2)
느와용(Noyon) 대성당
로마 네스크양식에서 고딕양식 과도기 형태의 성당
| 지난 2016년 6월 20일(월)부터 7월 2일(토)까지 호주에서 출발해 한국을 경유한 유럽(프랑스)방문이 있었다. 6월 21일(화)부터 24일(금)까지 파리한인침례교회(이상구 목사 시무) 비전센터(수양관)에서 “유럽한인디아스포로 신앙공동체 이해(Understanding Korean Christian Diaspora in Europe)”란 주제로 열렸으며 포럼 후 파리인근의 기독문화유적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_편집자 주 |
한디포 포럼 마지막 날인 6월 24일(금)에는 ‘기독 유적지 탐방’의 시간을 가졌다. 먼저 느와용(Noyon)에 위치한 칼뱅의 생가박물관을 방문한 후 이어 느와용 대성당을 찾았다. 파리에서 북쪽으로110km가량 떨어진 느와용은 인구 15,000명 정도이며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중심도시이다.
1145년부터 약 90년 동안 건축된 12세기 고딕양식의 느와용 대성당의 위세를 느낄 수 있는 근처에서 1509년 7월 10일 출생한 칼뱅은 유년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칼뱅이 14년 동안 살았던 느와용은 유럽의 도시가 다 그렇듯이 대성당이 생활 중심지였다. 칼뱅의 생가에서 느와용 성당까지 도보로 불과 2-3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성당 주변을 돌아보니 도서관과 교육관련, 심지어 감옥 등의 부속건물과 수도원 및 사제관 등이 자리잡고 느와용의 대소사를 관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느와용 대성당은 768년 샤를마뉴 대제가 프랑크족 왕으로 즉위할 정도로 북부지방의 정신적 중심지였다.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느와용의 천주교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칼뱅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대성당 참사회의 법률 자문관이었다. 거기다 느와용 주교의 비서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는 성직자들과 언쟁을 벌이고 자식들이 출세하도록 갖은 노력을 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느와용 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 그리고 전반적인 신조주의의 대기가 바뀌었고 칼뱅은 법학을 공부하며 사제가 되는 바람은 성사되지 못했다.
고딕양식의 느와용 성당은 위엄이 있었다. 마을 진입 전부터 우뚝 솟은 성당의 두 탑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느낀 것은 화려함 보다는 투박함이었다.
중세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느와용의 주교가 머무르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보베(Beauvais)시의 교구
로 편입되었다. 전형적인 중세고딕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종교 건축물이면서도 로마네스크 양식이 일부 남아있다. 이는 본래 대성당이 있던 자리에 1131년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딕 교회건물은 대화재가 일어난 후 재건 작업을 하면서 세우진 것이다.
1145년 시작된 공사는 90년 후인 1235년경에야 끝이 났다. 완공된 교회의 본당 건물은 좌우의 길이보다 상하가 긴 라틴십자(Latin Cross) 형태였다. 예배당의 제단 부분은 거대한 반원형으로 만들어졌으며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23m 높이의 천장은 양쪽에서 받치면서 올라온 아치 모양으로 지어졌다. 서쪽 출입구에는 두 개의 종탑이 높게 솟아있는데 입구와 창문 모두 크고 작은 아치형태이다. 13세기에 지어지다 미완성으로 남은 이 쌍둥이 탑은 오늘날 느와용 성당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1840년 그 오랜 역사적 가치와 시대를 반영하는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느와용 성당 동쪽 방사선 형태의 벽면은 총탄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남쪽 외벽 쪽은 작은 공원과 세계대전 전사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뒤편에는 12세기에 지어진 옛 주교의 개인용 예배당과 16세기에 세워진 도서관도 있다.
한편 건축사학자 임석재 교수(이화여대 건축학과)는 느와용 성당을 ‘제2 초기고딕의 시작’이라고 언급하며, “로마네스크의 한계를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2 초기 고딕의 문을 연 느아용(Noyon)이었다. 1150/55-1185년 사이에 지어진 앱스, 트랜셉트, 네이브 부분이며 그 내용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네이브 월을 4분법으로 처리하면서 높였다(도 6-39). 갤러리와 천측창 사이
에 한 층을 더 넣었는데, 이 부분은 갤러리가 한 번 더 반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천장이 없는 단순 이중벽이라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는 막힌 벽체이다. 네이브에서 보면 천장을 높이기 위해 갤러리 층을 둘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둘째, 네이브 월과 외벽이 모두 얇아졌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건물이 높아지면서 벽체가 얇아지는 상반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단서를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창 면적도 커지면서 빛의 유입량이 늘어나 실내는 밝아졌다.
셋째, 리브와 대응기둥 사이의 관계는 6분 볼트에 해당되는 더블 베이이나, 볼트의 형상 자체는 4분 볼트로 돌아갔다. 로마네스크 때 사용되던 6분 볼트의 모습이 사라진 건 분명한 발전이었고, 그럼에도 기둥이 더블 베이로 남은 것은 로마네스크의 잔재였다.
넷째, 다발기둥 자체가 발전했는데 주 기둥이 특히 그랬다. 단면적이 줄어들고 높이가 높아졌으며 대응기둥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끊어지지 않고 내려간 점이다. 부 기둥에서 주두까지 내려오다 끊긴 것과 비교되는 대목으로, 선형부재에 의한 골격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임석재 교수는 이처럼 느와용은 고딕 구조만의 정체성이 처음 본격화되기 시작한 중요성을 갖는데 전성기 고딕의 성당들에 비해 아직 완성도나 수직성 등은 떨어지지만 느와용 자체만 놓고 보면 일정한 내재적 아름다움을 얻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느와용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라 들었고, 이후의 건물들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랑이나 스와송(Soissons, 1180년경 이후 시작: 남측 트란셉트)과 같은 메이저급 건물들도 느와용의 영향을 받았으며 렝스의 성 레미(St.-Remi, Reims) 같은 마이너급 건물은 느와용 체계를 그대로 반복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유서 깊은 느와용 성당은 12세기 초반 세워진 교회로 종교도시 느와용의 명성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변화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과도기 형태의 느와용 성당은 그래서 신앙사와 건축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
– 느와용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안내
.주소: Place du Parvis, 60400 Noyon, France
.전화: +33 3 44 44 21 88
임운규 목사(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