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9강의)

순례자들을 잠들게 하는 미묘한 마법의 땅
『The Pilgrim’s Progress』에서 마법의 땅 (Enchanted Ground)은 천성 가까이에 위치한 매우 독특하고도 위험한 장소로 등장한다. 이곳의 위험은 의심의 성처럼 노골적인 절망이나 핍박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 평안하고 조용하며 안전해 보인다는 데 있다. 순례자는 이곳에서 공격받기보다 잠들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마법의 땅은 신앙 여정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가장 미묘한 영적 유혹을 상징한다.
천로역정에서 마법의 땅은 처음에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은 순례자들이 지금까지 지나온 어떤 길보다도 더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길은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고, 따뜻한 바람은 얼굴을 스치며 피곤한 몸을 감싸 주었다. 멀리서는 새들의 조용한 노랫소리가 들렸고, 나무들은 깊은 그늘을 드리워 순례자들을 쉬게 하려는 듯 보였다. 그곳에는 전쟁의 소리도, 절망의 거인의 포효도, 허영의 시장의 시끄러움도 없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평안했다.
그러나 바로 그 평안함 속에 이 땅의 가장 무서운 위험이 숨겨져 있었다.
길가에는 아름다운 정자 (arbour)가 세워져 있었다. 마치 오랜 여행자에게 속삭이는 듯하였다.

“조금만 쉬어라.
이제 거의 다 오지 않았는가?
너는 충분히 애썼다…”
순례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공기 자체가 졸음을 품고 있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단지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쉼은 점점 천성을 잊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잠든 자들은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길을 걸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망은 거의 눈을 감으려 하였다.
“기독도여…
잠시만 쉬면 안 되겠소?”
그러나 기독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오!
이곳은 몸을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잠들게 하는 곳이오.”
그래서 두 사람은 억지로 걸음을 옮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천성의 약속을 말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졸음은 조금씩 물러갔다.
멀리 천성의 빛이 다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마법의 땅의 가장 큰 유혹은 죄가 아니라, 천성을 잊게 만드는 편안함이었다.
마법의 땅 (The Enchanted Ground)이 주는 위험
『The Pilgrim’s Progress』의 마법의 땅은 단순한 상상 속 장소가 아니라, 존 번연은 이 장면을 통해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이 반드시 노골적인 죄나 핍박만이 아니라, 신앙을 잊게 하는 영적 무감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마법의 땅은 “영적 잠듦 (spiritual sleep)”의 위험이다. 순례자들은 박해 속에서는 깨어 있으나, 평안과 안정 속에서는 쉽게 긴장을 잃는다. 이는 성경이 반복해서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4:42)고 경고하는 이유와 연결된다. 잠든다는 것은 단순히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잃고 현재의 편안함 속에 머무는 상태이다.

둘째, 마법의 땅은 “종말론적 긴장의 상실”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순례자가 천성 가까이에 왔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긴장하지 않게 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순례자는 천성을 향한 비전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셋째, 마법의 땅은 교회의 안일주의를 비판한다. 교회가 성장과 안정, 제도적 성공 속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게 된다. 신앙은 살아 있는 순례의 여정인데, 교회가 현실의 안락함 속에 정착해 버리면 결국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게 된다.
마법의 땅을 통과하면서 기독도와 소망은 서로 대화하며 졸음을 이겨낸다. 그들은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각성한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과 성례, 설교와 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처음 사랑과 복음의 중심을 계속 기억하도록 도와야 한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5)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은 영적으로 잠들어 가는 순례자를 깨우며, 마법의 땅을 통과하도록 돕는 은혜의 수단이 된다.
교회의 사명과 교회의 영적 각성
『The Pilgrim’s Progress』에서 존 번연은 기독도와 소망이 마법의 땅을 지나며 잠들지 않기 위해 계속 서로 이야기하게 한다. 그 대화는 단순한 잡담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어떤 은혜를 경험했으며, 어떤 실패와 회복을 지나왔는지를 다시 기억하는 영적 성찰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말씀과 은혜를 새롭게 해석함으로 영혼을 깨어 있게 하는 신앙의 행위였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마법의 땅은 소비문화, 스마트폰과 미디어 중독, 성공과 자기만족, 편리함과 안락함이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지만 더 깊은 의미를 잃어가고, 많은 정보를 얻지만 삶의 방향을 성찰할 시간은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잠든 영혼을 깨우는 말씀의 선포이다. 교회는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다시 묻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사회적 풍요 속에서도 길가에 쓰러진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노인, 난민, 가난한 자, 외로운 자, 정신적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교회는 성도들을 훈련하여 예배당 안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상처 입은 이웃을 돌보는 순례자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오늘날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여전히 전통과 비전통의 논쟁에 갇혀,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가시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다. 어떤 교회들은 과거의 방식과 안정에 머문 채 다음 세대의 질문에 응답하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한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잠든 상태의 문제이다. 마법의 땅에 사로잡힌 교회는 천성을 향한 비전과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감각을 잃어버린다.
교회는 “치유와 회개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영적 무감각에 빠진 사람을 정죄만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들이 다시 깨어날 수 있도록 인내하며 동행해야 한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다가가 말씀을 풀어주시며 마음을 뜨겁게 하셨던 것처럼 (누가복음 24:32), 교회는 다시 영적 감각을 회복시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마법의 땅에 빠진 신앙인을 향한 교회의 치유는, 다시 천성을 바라보게 하고 서로 깨어 있도록 돕는 공동체적 돌봄에 있다.
열 처녀의 비유: 마법의 땅에서 잠든 교회의 경고
『The Pilgrim’s Progress』에서 기독도와 소망이 마법의 땅을 지나며 서로 계속 이야기하게 하는 장면은 성경의 열 처녀 비유와 깊이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을 기다리던 처녀들 가운데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5:1–13). 모든 처녀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 길어지자 모두 졸며 잠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신랑이 왔을 때 다시 깨어 일어날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 처녀들은 예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의 상징이다.

번연의 마법의 땅 역시 같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순례자들은 천성 가까이에 왔지만, 바로 그 순간 잠들 위험에 처한다. 이 잠듦은 단순한 육체적 피곤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잃어버리는 영적 무감각이다. 따라서 기독도와 소망은 서로 자신의 회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며 깨어 있으려 한다. 이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말씀을 새롭게 기억하고 성찰함으로 영혼을 깨우는 영적 행위이다.
현대 교회 역시 열 처녀의 비유와 마법의 땅 사이에 서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 활동을 하지만, 점점 하나님 나라의 긴장과 기다림을 잃어버리고 있다. 편리함과 자기만족, 교리의 안주, 전통에 사로잡힘 속에서 신앙은 익숙한 습관으로 변하기 쉽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해서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고 선포하며, 왜 우리가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지를 다시 기억하는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될 것을 기대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따라서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깨어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마법의 땅에서 잠든 신앙인의 모습을 경고한다. 성령은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깨어 이 시대를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에베소서 5:14). 깨어 있는 교회만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고, 다시 세상의 빛으로 설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세상의 절대적 가치를 상대화하는 순례자의 성찰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주에 계속).

이상택 목사
(아이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