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구원이란 무엇인가? (1)
1. 구원론의 어려움
성경의 주제를 여러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지만 중요한 주제 중 한 가지는 “인간의 구원”이다. 인간의 구원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선뜻 쉽게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구원이라는 개념이 쉽지 않음에도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원과 연결하여 설명해야 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창조와 타락 그리고 신론과 기독론 등 연결되어 있는 많은 주제들을 함께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신교 조직신학에서의 구원론이라 함은 성령의 사역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자에 따라 “성령론”을 따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신교 성령론은 구원론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기반으로, 우리를 위하여 객관적으로 성취하신 구속사역에 대해 다루는 것이라면,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으로 성취하신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원론을 하나님의 경륜적인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협력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작정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사역을 완수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인간들에게 적용하심으로 실제적으로 구원을 가져오게 하심으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하나님 모두의 협력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에서는 성령론을 따로 구분하여 다루지 않고 구원론에서 다루는 이유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신자 개인에게 주관화하여 적용시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승룡교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건을 역사하시어 모든 신자에게 주관화시키는 사역을 하 신다. 따라서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모든 주된 요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된다고 해 서 놀랄 이유가 전혀 없다.
웨스트민트터 신앙고백서도 “성령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이시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구원론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지만 사실 구원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된 사역은 무가치하다고 강조한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 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조명하는 과거(past)와 관계되어 있다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객관적 사역을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현재(present)와 관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개혁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현재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과정을 탐구하는 성령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럼 개신교의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다시 돌아와서 그럼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신학적 주제로서 구원론은 일차적으로 구원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인간이 획득하고 완성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연구이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구원을 다루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객관적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들을 살펴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객관적인 속죄 사역을 다루는 것이라면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론은 조직신학에서 항상 기독론 다음에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와 화해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기독론 없이는 구원론이 먼저 올 수 없는 것이다.
3. 객관적 구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9-10).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사역, 즉 객관적인 구원사건이다. 조직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객관적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적용하는 과정을 구원론에서 세분하여 다룬다.
4.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
다시 강조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직신학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구원사건을 성령께서 우리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소위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고 부르는 구원의 순서 또는 단계들을 다룬다.
학자들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개혁주의 구원론의 순서로는 부르심(소명) – 거듭남(중생) – 회개(회심) – 믿음(신앙) – 칭의 – 성도의 견인 – 성화 – 영화의 순으로 나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구원의 순서가 시간상의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해야 한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지적한 대로, “구원의 서정에 나타나는 여러 단계들은 전자가 후자를 대치하는 일련의 연속적 단계가 아니라, 그것이 시작된 후에 동시적으로 함께 진행되는 구원 과정의 다양한 측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헨리 티슨(Henry C. Thiessen) 역시 회개, 칭의,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입양 등에는 시간적인 순서가 없고 이 모든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우리의 구원이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견인 – 성화의 시간적인 순서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이 시작 된 후에 부르심–중생–회심–신앙 – 칭의 – 견인 – 성화가 동시적으로 함께 진행되기에 구원의 순서가 논리적인 순서이지 시간적인 순서는 아닌 것이다. 다음은 구원론에 있어 구체적으로 부르심(소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게 될 것이다.
4.1 부르심(소명, Calling)
일반적으로 부르심(소명)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 구원사역,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우리 인간이 받을 수 있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부르심, 즉 소명(calling)이라고 한다. 이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도 있고 내적인 부르심도 있다. 성령께서는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 양쪽에서 다같이 역사하신다. 또한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 양쪽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부르심의 도구로 사용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외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내적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임한다고 보는 것이 개혁주의적 관점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복음적 부르심, 즉 말씀이 전하여 지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효과적이 아닌 것으로 본다. 오히려 성령께서 말씀을 인간의 심령에 구원적으로 적용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효과적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부르심을 일반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4.1.1 외적 부르심(External Calling)
외적인 부르심은 복음이 만민에게 차별 없이 전파되는 것으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적인 부르심, 외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내적인 부르심을 구분하고 있는 용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 되지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러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반적인 복음전파는 외적인 부르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제한되지 않고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 차별없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인과 악인, 선민과 버림받은 자에게 다 같이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런 외적인 부르심에 대해 부르심은 받았으나 오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마 22:2-14; 눅 14:16-24)과 복음이 전해졌지만 배척받은 것(요 3:36; 행 13:46; 살후 1:8)을 묘사하고 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 막 16:15)을 통해 외적인 부르심을 증거한다.
4.1.2 내적인 부르심(Internal Calling), 효과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
내적인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진정한 부르심을 받은 죄인의 마음속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와 신앙으로 응답하도록 하시며 확실히 그렇게 되어지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부르심을 다른 말로 효과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적인 부르심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구원적으로 적용되는 부르심이다(고전 1:23-24). 그러므로 이것은 능력있는 부르심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행 13:48; 고전 1:23, 24). 이것은 또한 후회가 없는 부르심이며, 변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부르심이다(롬 11:29).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확실히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1.3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이처럼 효과적인 부르심은 구속받지 않은 자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를 진정한 구세 주로 보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특별하신 역사이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의대로 살며 방황하고 또 그리스도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르심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자들이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실 구속받지 않은 자는 영적으로 소경이며 죽은 자이며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멸망속에 갇혀 소망 이 끊어진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우리로 받고 하나님과 화목 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자기 뜻과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러한 부르심은 우리가 잘나서 부르신 것도 아니고 지혜가 많아서 부르신 것이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 부르심을 생각하여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 택하사, ···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30).
이상을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히 큰 은혜이고 무한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성경과 역사, 그리고 실제 우리 삶을 통해 볼 때 인류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님도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 14)”라고 말씀하시며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 을 열어 자신의 실존과 죄를 인지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이신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전적인 역사에 감사하며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엡 4:1) 살아야 할 것이다.
4.2 거듭남, 중생(重生, Regeneration, Reborn, Re-new, Re-creation)
4.2.1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필요성
구원의 순서에 따른 구원론의 두번째는 거듭남, 중생이다. 중생은 사실 부르심(소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부르심(소명)과 중생사이의 순서를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말씀전파에서 벌어지는 외적 소명은 중생보다 먼저 오게 되거나 동시에 오게 된다. 말씀 전파를 통하여 성령께서 인간내적 성향에 영향을 주는 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인 것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중생을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됨으로 인간 영혼의 성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과 효과적인 소명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부르심은 인간의식을 대상으로 하고 인간 밖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면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속에서 발생하고 인간의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으며, 인간안에서 발생한다는 차원에서 부르심(소명)과 구별된다.
중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새로운 출생, 즉 영적인 출생을 필요로 한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로마서 3:9-20에 보면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은 어떤 한 부분만의 수정이나 개량을 통해서 고쳐질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근본적인 변화나 새로운 출생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즉 영혼의 성향 전체가 변화되고 전환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중생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설파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4.2.2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남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거듭 중’(重), ‘날 생’(生), 즉 ‘중생’(重生)이다. 한자어 표현의 의미는 “거듭해서 태어난다”, “반복해서 태어난다”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찾아온 관원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에 놀란 니고데모는 그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라고 반문한다. 이에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대답한다.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주석학자들은 “물과 성령”을 다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해한다. 물과 성령을 똑같이 성령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거듭나는 역사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 새로운 출생의 역사이다. 사실 우리말 성경에는 “거듭남”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거듭남”의 희랍어의 의미는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로”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의 정확한 의미는 “위로부터 다시 나지 아니하면”의 의미이다. “위로부터” 다시 말해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나는 것”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4.2.3 중생(重生)의 신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라는 예수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중생의 개념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은 꽃과 잎사귀들을 흔들고 그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린다. 그러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의 거듭나는 과정과 거듭난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분명히 대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생은 성령의 주도적인 신비한 사역이다.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낸다. 이와 같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모든 사람의 행위 가운데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거기에는 변화가 수반된다. 회개와 거듭남은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신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사랑하고 악을 추구하는 마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 영혼이 거룩한 사랑에 빠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벌코프는 중생의 정의를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속에 뿌리시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Regeneration is that asct of God by which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is implanted in man, and the govering disposition of the soul is ade holy)”라고 정의한다.
4.2.4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중생은 초자연적 현상이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생은 분명한 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은 성령이 인간의 심령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생에는 인간의 어떤 협력도 필요하지 않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사역이다(겔 11:19; 요 1:13; 행 16:14; 롬 9:16; 빌 2:13). 구원이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사역이지만 신자들의 삶과 영혼에 주관적으로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다르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사건을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오직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음호에 계속)
주경식 교수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