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기독교세계관 적용 – 제 눈에 맞는 안경을 쓰고
1. 서론
로마서 12장 1-2절을 보면 바울은 구속의 교리를 설명한 다음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만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습관과 세속의 생활 태도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활의 원칙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전(全) 생활영역 (Whole life)에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온전히 파악한다면 바른 안경을 쓰고 세상과 주 님에 대해 바로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2. 생각보따리를 풀며 (문제 제기)
Case 1
고등학생(High School student)인 M은 노점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홀어머니와 함께 단둘이 살고 있다. M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폐암이셨던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 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때문에 여태껏 고생해 오셨고 또 자기만 바라보고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 그는 늘 마음이 어둡다.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학교 등록금 날짜를 맞추지 못해 교무실에 끌려가서 꾸지람을 듣고 왔다.
오늘따라 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렇게 다가올 수가 없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들풀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잠깐이며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왜 불타 없어질 세상에 그렇게 연연하십니까? 이 세상에 정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뿐 입니다.” M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 오직 저 하늘나라에만 빨리 가고 싶었다. 모 집사님의 말처럼 아예 어머니를 모시고 기도원에나 들어가 주님 오시기만을 고대하며 살까? 하는 생각이 그를 엄습해 왔다.
Case 2
작년에 졸업을 한 L양은 그 어려운 취업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잘한 덕이라 생각하여 매사에 적극적으로 일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요즘 들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여자의 월급치고는 꽤 괜찮은 편에 속하는 월급을 받는데도 월말이 가기 전에 300만원이나 되는 월급이 바닥나는 것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L양은 어느 날 가계부를 적어 보기로 했다.
십일조 – 300,000원
교통비 – 600,000원 (새로 뽑은 차 할부금에 보험료 기름값 등)
의복비 – 450,000원 (지난해 카드로 긁은 코트와 양장 부츠 지불 대금이 아직도 몇 회나 더 남아 있다.)
화장품비 – 230,000원 (여기에는 때때로 파머하는 미용실 이용료뿐만 아니라 여자들 특유의 비누나 세척비 등까지 포함시켰다.)
주택청약 – 500,000원 (부모님의 강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주택청약적금을 들었다.)
경조사비 – 200,000원 (매월 경조사비용으로 이 정도는 정기적으로 지출되는 것 같다.)
문화비 – 500,000원 (친구들과 영화, 음악회관람, 그 외 음반과 도서비 등)
용돈 및 잡비 – 외식, 비상금등 월 평균 족히 200,000원은 쓰는 것 같음
모두 총 합계를 내 보았더니 2,980,000원이었다. 약간은 여유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월말이 가기 전에 통장에 잔고가 바닥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자질구레하게 모든 지출을 적지 않아서 생각지 못한 씀씀이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L양은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고 있다는 뿌듯한 마음과 함께 교회에서 자신의 믿음 (십일조)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이 흐믓하다.
Case 3
농부인 P씨는 논 20마지기와 밭 10마지기를 일구어 풍족하진 않지만 5식구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부인을 따라 나간 인근 교회에서도 성실하다는 칭찬 때문인지 조그만 농촌교회지만 봉사 또한 열심히 하고 있다. 이번 맥추감사절에는 P씨가 가장 먼저 햅쌀과 크고 잘 익은 호박을 예물로 드려 목사님이 흡족해 했다. 다른 집보다 먼저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작년에 그는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올 해처럼 독한 농약을 2-3회 더 뿌렸다면 좋은 열매들을 먼저 거둘 수도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요즘 벌레들은 얼마나 독하고 농약에 내성이 생겨 왠만한 농약으로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가 바뀔수록 더 독한 농약들이 나오고 이렇게 몇 해 더 지나면 땅이 견뎌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이 당장 급한데”라는 생각이 P씨를 다른 농부들과 같이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미 땅은 황폐해 질대로 황폐해 져있다.
Case 4
K군은 오늘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대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마음이 더 찔렸던 것은 그는 가까이서 그 현장을 매일 목격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K군이 일하는 공장은 요 몇 년새 임금값을 줄이려고 공장주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공장은 그들이 외국인이고 불체자(불법체류자)란 구실을 가지고 자기 월급에 반밖에 안되는 금액으로 그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공장장은 기회만 되면 그들에게 욕을 하고 심지어는 폭행까지 한다. 그러나 공장 직원들중 누구하나 이를 말리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구경들을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네팔에서 온 젊은 청년하나가 선반작업을 하다 그만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공장주는 그냥 붕대만 감아주고 공장에서 쫓아 내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공장주의 그런 처사에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그들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울며 공장을 떠나는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Case 5
직장생활을 하는 J집사는 요즘 들어 부인과 티각태각 하는 일이 많아졌다. 믿음 좋다는 부인까지 자기를 이해 못해주는 것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봇물 터지듯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나서부터는 그는 하나님께 부담을 느끼고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그를 눌러왔다. 암만 생각해 봐도 자기의 하루 일과를 돌이켜 보면 실제로 믿는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직접 영광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주 적다는 게 그를 늘 안타깝게 해 온 것이다.
J 집사는 나름대로 하루 일과를 정리해 보았다.
새벽- 새벽예배
아침- 아침식사 후 회사 출근
오전 – 미팅 후 곧 바로 일 시작
오후 – 계속되는 직장일, 퇴근 무렵 직장 상사와 약간의 의견대립
저녁 – 퇴근 후 오늘은 구역예배 모임이 있어 부인과 B집사댁에 가서 예배드림 (교회 선교위원인 J집사는 평상시 이 시간을 7월 달에 있을 단기선교 계획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낸다.) 밤 – 잠깐 TV 시청 후 취침
J집사가 생각하기로는 이 날 하루생활 중 오직 새벽예배와 저녁에 B집사댁에서 드린 구역 예배만이 하나님과 직접 관련이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거의 관계가 없는 듯싶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온 시간을 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텐데, … J집사는 신학교에 가서 빨리 풀타임 교역자가 되어 온 시간을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Case 6
뜨거운 예배와 공동체의식으로 정평이 나있는 H교회 청년회원인 A는 같은 교회 청년 자매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 현재 그와 교제하기를 소원하는 자매들이 줄을 서고 있는 형편이다.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A는 요즘 인기있는 광고회사에 취직한지 얼마되지 않아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작한 광고의 대부분은 TV나 잡지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데, 그가 만들었다하면 대부분 히트를 하게 되서 그에게 광고를 의뢰하는 기업들이 점차로 많아지게 된 것이다. A는 혼자 생각하기를 자신의 능역에 대해 내심 뿌듯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조금만 자극하기만 해도 되는 일이라는 자신감에 사로 잡혔다. 식품광고든 가구선전이든 쭉쭉 뻗은 미녀들을 반나(半裸: nude) 차림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그 선전은 이미 90%는 성공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A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
Case 7
S교회는 오늘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이번에 새로 지은 교회양식은 그야 말로 으리으리 삐까삐까하다. 중세의 고딕양식처럼 겉은 뾰쪽하면서도 아아치 형을 복합해 우아하고 중우한 멋이 있다. 창문마다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감마저 풍겨 나게 한다. 새로 지은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감동과 하나님이 이 성전에 언제나 머무시면서 축복해 주실 것만 같았다. 공사한지 꼭 15개월 만에 완성된 것이다. 이 성전이 새로 지어지기까지 여러가지 해프닝이 많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구입한 땅이 주택상가 밀집지역이어서 새 건물을 짓는 것이 건축법상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땅을 구입한 당회는 처음에는 당황했고 많은 구설수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어느날 광고 시간이었다. 당회에서 공포하기를 교회를 지을 수 있다고 시에서 허가가 나왔고 다음 주부터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후담으로 들리기를 정부 건설부에 있는 H집사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건축허가를 받아내었고 원래 계획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교시간에 담임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H집사님을 보내 주신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다고까지 설교를 하였다. 그 후 실제 교회건축이 진행되면서 주위 주민들에게 많은 항의를 받아 건축이 얼마간 중지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택과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이 지역에 이렇게 큰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상가의 통행로와 도로를 막고 공사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상가의 매출이 감소되고 불편함을 겪는 주위의 주민들이 오랫동안 건축불가 데모를 하며 항의를 해왔다. 하여튼 이러한 난제들을 극복하고 어렵게 어렵게 지어져서인지 오늘 입당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이번 성전건축이 “기적”이니 “하나님의 은혜”였다느니 하는 단어들이 더욱 친근하게만 와 닿았다.
3.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물론 가상의 시나리오들을 꾸며 본 것이지만 이것이 절대 가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일들이 아니다. 위의 가정들은 실제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수집하여 다만 문학양식 (Fiction: 허구)을 빌어 재구성했을 뿐이다. 실제 이런 Case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며 매일 우리의 삶속에서 벌어지는 갈등들 때문에 의식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번쯤 고민해본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의 매일의 삶과 신앙속에는 이런 커다란 차이(Gap, hole)가 존재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위에 열거한 예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복잡하며 많은 부분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다원화된 문화와 삶속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들을 해야 한다. 이 결정과 선택들은 당연히 우리 삶의 방식들로 표현되어지고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내리는 결정과 선택들이 비그리스도인의 선택, 결정과 다를 바 없거나 훨씬 악하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자(표면적으로)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습관과 생활양식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세계관과 생활 방식으로 우리의 전(全) 삶의 영역에서 살아가야 할 자들인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인생의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의 시기를 거쳤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서도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7-8).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한마디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이런 거듭남과 같은 놀라운 변화들이 있었는가? 또 이런 변화들이 한 순간의 회개로 끝나지 않고 삶 전체를 날마다 변화시키고 있는가? 신앙이란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무르도록 종용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1-2).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외적형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과 동기가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종교적인 영역에만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역 에서 타락으로 잃어버리고 고통받는 영역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우리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란 우리의 일부,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만 신자로 머물거나 교회에서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시간과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의 신앙이 고백되어져야 하고 우리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중립지대란 없다.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오직 두 가지 세계에서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의 말씀처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정도의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이전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 전혀 다른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계보와는 다른 새로운 인류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한 계보를 잇지 않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Renewal) 다시 태어난 (Regenerate: 거듭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바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인 창조(Creation) – 타락(Fall) – 구속(Redemption)을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 하여 온 세계를 관리하도록 맡기신 피조물중 으뜸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타락에 빠지므로 원창조의 아름다움을 훼손시키고 이 땅에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처럼(롬 8:19-22) 인간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원창조로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두 번째 의미는 이전의 생활방식, 즉 아담의 계보를 잇는 실패한 아담의 생활 방식으로 삶을 사는 자들 이 아니라 둘째아담으로 오셔서 순종하심으로 성부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시고 인간과 만물을 회복(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생활 방식으로 삶을 사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골로새서 3장 10절(“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의 말씀처럼 자기를 창조하신 자(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다시 말해 우리 삶의 가치관, 세계관, 문화관, 전 삶의 생활방식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4.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그의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 5가지 전제 질문을 통하여 기독교 세 계관의 적합성을 설명한다. 그의 5가지 질문은 이러하다. (1)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인간은 무엇인가? (3)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위의 질문은 환원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이세계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 등으로 질문하여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창조(Creation) – 타락(Fall) – 구속(Redemption)의 세계관의 틀(Frame)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든다면, 기독교 세계관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은 창조(Creation), 타락(Fall), 구속(Redemption)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다시 말해 창조관점에서의 인간: 피조물, 하나님의 형상, 전인적 존재로서의 인간/타락관점에서 인간: 타락한 죄인으로서의 인간/구속관점에서 인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다. 결국 이 질문은 하나님 – 인간 – 만물의 순서가 창조 – 타락 – 구속 구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질문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앞의 Case들에 대하여 답할 수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교정하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에 부합하는지 한번 나누어 보자.
질문
1.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자들인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 신자, 제자)
2. 기독교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3. 당신에게 ‘세상” “세상적’ 이라고 말할 때 어떤 의미 또는 늬앙스로 다가오는가?
4. 교회 밖에서 할 수 있는 신앙행위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