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초대석
남한드라마 ‘모레시계’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 탈북자, 박광일 목사
박광일 목사는 함경남도 함흥시의 교육자 집안 출신으로 1998년 탈북, 2001년 대한민국으로 입국해 2005년에는 신학을 마치고 목회자가 되어 현재까지 사역하고 있다. 이에 북한인권개선 호주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2015년 제2회 호주 북한인권주간’을 맞아 시드니를 방문한 박광일 목사를 만나 걸어온 삶과 사역의 근황을 나눠본다.
저는 북한의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구역 련지동 25반에서 고등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부모님 슬하의 3여 1남 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가정은 조부모님들은 고향이 남한입니다. 일제통치시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이주하여 사시다가 1970년대 초, 조총련의 귀순공작에 속아 북한으로 귀순하여 정착하게 된 재일교포가정입니다.
저도 북한에서 ‘김형직 사범대학’을 졸업해 고향에 있는 성천강 고등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교사였습니다.
이렇게 북한에서 교원 가정에서 자랐고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탈북을 하게 된 것은 98년 ‘모래시계’라는 제목의 남한드라마 비디오테이프를 친구들과 돌려 본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남한드라마 ‘모레시계’ 테입복사의 주모자로 몰려 중국으로 탈북해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살면서 탈북이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8년 7월 당시 고향에서 비디오테입 6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구입한 비디오테입에는 남한의 방송국에서 제작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북한의 적대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 만든 드라마를 보면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의 발전상을 드라마를 통하여 직접 체험하면서 제가 살고 있었던 북한에 대한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 친구들에게 ‘모래시계’ 드라마 비디오 테입을 빌려준 것이 제가 북한을 탈북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희 친구들이 빌려간 비디오 테입에 들어있는 ‘모래시계’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비디오 테입 복사본을 만들기 시작했고 1998년 9월 중순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함경남도 보위부 반탐처에 적발되게 된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제 친구들이 비디오 테입 복사본을 만들기 시작할 즈음 김정일의 방침이 떨어졌었습니다. 북한에서 황색소탕 작전이라고 자본주의 문화 유포, 비사회주의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남한 비디오를 본다든가, 방송을 듣는 다든가 하면 조사 대상이 됐습니다. 특히 남한 비디오나 일본 영화, 남한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전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고 그럴 때입니다. 제가 걸린 것이 아니라 3자에서 걸렸어요. 그때는 보위부에 걸린 것이 아니라 비사회주의 구루빠라고, 특별히 중앙당 안전 보위부와 합동으로 조사단이 전국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비디오 테입의 주모자가 되어 1998년 10월 1일,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으로 갔으나 붙잡혀 강제북송 뒤 갖은 고문들 경험, 이송중 극적으로 재탈북 성공해
중국으로 탈북하는데 성공했지만 당시 중국을 잘 몰랐던 저는 중국에서 15일만에 중국 연변조선족 자치주 화룡현 버스터미널에서 중국 공안원에게 체포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으로 강제북송 되어 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 구류장에 7일 동안 감금된 후, 함경북도 보위부로 이송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에서 40일 간 무자비한 고문을 경험하면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비둘기고문’, ‘물귀신고문’, ‘관절꺾기고문’, ‘각목고문’ 등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당하면서 하루10시간 이상의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40일 간의 보위부 조사를 마친 후, 함경북도 농포집결소에 20일 수감된 후, 저는 함경남도 보위부로 이송 도중 죽기를 각오하고 달리는 열차에서 족쇄를 찬 상태에서 뛰어내렸지만 죽지 않고 다시 중국으로 재탈북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중국으로 2차 탈북 후, 중국 국경도로에 기절하여 쓰러져 있던 저는 당시 중국에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시던 한국인 선교사님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남한선교사님들의 은혜입어 서원하고 신학대학 입학해
저는 2001년 3월 남한에 입국해 다음해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머물때 남한 선교사님들의 1년 8개월동안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 신학을 공부해 그 은혜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에 신학대학을 입학한 겁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뒤에는 같은 탈북자 출신들과 북한인권운동에 동참을 했고, 2010년도에는 목사안수(서울강남노회)를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목사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북한사역을 위하여 현재까지 헌신하고 있습니다.
남쪽 비디오를 봤다는 이유 하나로 갑자기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 저를 볼 때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그 사회에 대한 원망이랄까. 그런 생각에 내 인생이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내가 그때 사건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세상을 알고, 내가 북한 사회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됐고,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감사합니다. 탈북하며 고생은 됐지만 북한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 사역자의 길을 가고 있으니 이렇게 나를 인도하시려고 그랬나보다 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목사안수 후부터 현재까지 4년여 동안 사역하는 부분들이 북한인권사역과 관련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탈북민들을 만나 전도하고, 북한인권문제 등에 사역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도 회복되고 제2의 삶을 찾은겁니다. 교회에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셔서 결혼하고 아들과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주변에는 탈북민들이 많아요. 할 일이 많아요.
제가 탈북을 하고 남한여성을 만나 결혼을 한 모든 것이 하늘의 인도하심이라고 봅니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해 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간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현재 북한 보위부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백혈병을 알고 있으며 저의 탈북으로 인하여 부모님들은 ‘연좌죄’로 15호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습니다.
북한에서 저는 죽고 싶어 몸을 던졌는데 하나님께서 은혜주셔서 한국에서 사역하게 하셨고 2달 전부터는 개척하시도록 인도하셔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호주에서 제2회 북한인권주간을 위해 불러주셔서 도구로 쓰임받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북한과 통일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 이루시잖아요. 우리가 도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준비하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통일도 이루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남은 인생의 목표는 북한 보위부 고문만행에 대하여 전 세계에 알리고 오늘도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의 인권개선을 위하여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사역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제가 호주연방국회에서 공청회를 갖겠지만 제가 기도하기는 어떻게 하면 의원들의 마음이 북한을 생각하며 북한인권이 개선되도록 마음을 모을까 고민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역이 북한을 바꾸는데 쓰임받고 오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사역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어 임운규 목사(크리스천라이프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