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걷는 기도 (27)

걷는 기도 (27)
비움과 채움 사이에서
남태평양의 끝없는
수평선 앞에 섭니다.
밀려오는 물결은
무언가를 가져오고,
물러가는 물결은
무언가를 남깁니다.
바다는 비워야
다시 채워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비움과 채움이
처음부터 하나의 생명이 쉬는
두 호흡이었을까요.
(전3:1-8; 시107:23-30)
오늘도
바닷가를 걸으며 오래 붙들고
살아온 것들을 생각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과
내려놓지 못한 자존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했던 마음과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들……
(야1:19-20; 에4:31-32)
이제는 그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게 하소서.
비움이 나를 잃는 일이 아니라,
다른 생명이 머물 수 있도록
내 안에 자리를
내어 주는 일임을 알게 하소서.
(롬15:7; 빌2:3-5)
내 생각으로 가득 차
타인의 이야기를
밀어내지 않게 하시고,
내가 옳다는 이유로
사랑의 문을 닫지 않게 하소서.
바다는 물러가도
깊이를 잃지 않고,
썰물 속에서도 다시 밀려올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기를 소망합니다.
젊음이 물러가고,
힘과 이름과 역할이
하나씩 저물어 갈 때에도
그 빈자리를
실패라 부르지 않게 하소서.
(시92:12-15; 고후4:16-18)
앞서 걸어온 사람은
이제 뒤처진 이의 걸음에 맞추고,
가르치던 사람은
이제 다른 이의 삶에서 배우며,
강했던 사람은
이제 아픈 이의 곁에서
조용히 머물게 하소서.
십자가의 비움이
사랑의 끝이 아니었듯,
우리의 상실도
삶의 마지막 문장이 되지 않게 하소서.
(빌2:6-11; 고전15:54-58)
비움은
상실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상실 속에서도
사랑할 자리를 남기는 일입니다.
오늘도 나는
당신과 함께 걷습니다.
밀려오는 물결을 감사히 맞이하고,
물러가는 물결을 억지로 붙잡지 않으며,
얻었을 때 감사하고
잃었을 때에도 사랑하는 길을 걷습니다.
주님,
내 삶이 더
많이 소유하는 여정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품으며,
마침내 기꺼이 놓아줄 줄 아는
여정이 되게 하소서.
바다는
비움으로 깊어지고,
사람은
내려놓음으로 넓어지며,
사랑은 다른 생명이
머물 자리를 내어 줄 때
비로소 더 큰 바다가 됩니다.
(요13:1-17; 막10:42-45)
오늘 내가 비워 낸 자리에
누군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오늘 내가 내어 준 자리가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이 되게 하소서.

글, 사진 = 전현구 목사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배경음악 / Mischa Maisky plays
Bach Cello Suite No.1 in G
https://www.youtube.com/watch?v=mGQLXRTl3Z0
20261010
Parramatta 교회 서재에서
匍越의 [걷는 기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