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한나 아랜트의 담론에 대한 주장에 대해…
*2.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이 현상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과도 일맥상통합니다.▪︎나치 학살의 주범이었던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승진하기 위해 상부의 명령을 비판 없이 따랐던 평범한 관료였습니다.▪︎”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누구나 가장 잔인한 사냥개가 될 수 있다.”
*3.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기득권의 달콤함과 상실의 공포: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누리던 지위, 인맥, 경제적 이익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눈을 멀게 합니다.◇인지부조화의 해결:▪︎”내가 틀렸거나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거짓을 “이것이 진짜 정의다”라며 과도하게 옹호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합니다.▪︎결국, 루이스와 함께 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경고를 던집니다.▪︎우리 역시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의 작은 이익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나아가 진실을 짓밟는 사냥개의 무리에 합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입니다.▪︎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고갈된 사회는 결국 부패하기 마련이기에, 불편한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신적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을 침몰시키려, 체제와 조직의 권위(?)의 힘으로 누르려해도, 언젠가 기어코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자신의 이익땜에 취하는▪︎매국행위나 정치체제나 종교(신학)이념 때문에,▪︎앞잡이, 하수인으로 불리우는 주구(走狗, Running dog)가 되어서는, 진실을 태양을 가리는 자들 편에 서게된다.** 위 글은 기독교를 개독교, 추종하거나 따르는 목사나 신부나 신자들을 개라고 비난을 넘어 비방의 수준까지 이른다 이글은 어떤 상황도 맥락도 모른째 단편적인 문장을 엮어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와 아귀한 내용들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논리가 뮨제인지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성서학적으로 구리고 심리헉적으로 비판하고 명제가 있는 담론으로 비판하시오
—– 위 자료는 반기독교모임 카페에서 인문학 모임 한 회원이 퍼온 글 ——
위 글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할 수 있으며,
정치든 종교든 맹목적 추종은 위험하다는 경고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이 곧바로 특정 집단 전체를
“개”, “주구(走狗)”, “사냥개”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글은 비판적 담론이라기보다
감정적 낙인과 혐오의 언어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1. 문학적으로 볼 때: 은유가 진실을 드러내는가?, 왜곡하는가?
문학에서 은유는 진실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은유가 인간을 비인간화할 때는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사냥개”, “주구”, “개독교”라는 표현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언어가 아니라,
상대를 배제하려는 언어다.
이러한 언어는 독자로 하여금
“저 사람들은 생각 없는 존재다.”
“저 집단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라고 믿게 만든다.
문학은 인간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위대한 문학은 언제나 .
“악은 타인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악은 내 안에도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학은 혐오보다 성찰을 선택한다.
2. 철학적으로 볼 때: 위 주장은 한나 아렌트를 오해하고 있다
아랜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저들은 악한 인간이다”
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생각하기를 멈추면
악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경고다.
아렌트가 비판한 것은
특정 집단, 특정 종교, 특정 민족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 조건 자체였다.
그런데 위 글의 주장은
“저들은 주구다.”, “저들은 사냥개다.”라고 말한다.
이는 아렌트의 사상을 거꾸로 사용한 셈이다.
아렌트는 타인을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하는 사람 자신도 사유를 멈출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바로 기독교 비난의 잣대를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 된다.
3. 논리적으로 볼 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위 글의 가장 큰 문제는
개별 사례 → 전체 집단으로 뛰어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일부 목회자가 권력에 협조했다.
2)기독교는 권력의 하수인이다.
3)기독교를 따르는 사람은 주구다.
이는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이다.
한 사람의 잘못이 모든 신자의 잘못은 아니다.
일부 종교인의 타락이 종교 전체의 본질도 아니다.
4. 심리학적으로 볼 때: 투사(Projection)의 위험요소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자신 안의 분노와 두려움을 타인에게 덧씌우는
현상을 투사(Projection) 라고 부른다.
이 글은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진실의 편”으로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인간 심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는 정의롭고 상대는 악하다는 이분법은
오히려 독재적 사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5. 성서학적으로 볼 때:
예수는 사람을 정죄보다 회복으로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셨다.
그러나 예수의 비판은 사람 자체를 제거하거나
인간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였다.
또한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다.
성서의 핵심은
악인을 찾아내는 데 있지 않고
악 속에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6. 신학적으로 볼 때: “개독교”라는 말의 문제점이다
“개독교”라는 표현은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조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1)수많은 평범한 신자
2)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교회
3)진실을 위해 싸운 목회자까지
동일한 혐오의 대상으로 묶어 버렸다.
이것은 비판이 아니라 낙인(Stigma) 이다.
건강한 비판은 행위를 비판하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7. 명제가 있는 담론으로 다시 말한다면
위 글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명제 1
진실은 어떤 체제나 권력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진실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수는 없다.
명제 2
종교는 언제나 권력과 결탁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종교 전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비판자는 자신이 비판하던 독단을 반복하게 된다.
명제 3
악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악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신만 옳다고 확신하며,
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순간,
우리 모두 안에서 시작된다.
명제 4
진실은 상대를 침묵시키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힘이어야 한다.
혐오는 사람을 굴복시키지만,
진실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다시 말하면
진실은 태양과 같다.
그러나 태양은 누군가를 태워 없애기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게 하기 위해 빛난다.
누군가를 “개”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포기한 것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아랜트가 가장 두려워했던,
생각하기를 멈춘 상태,
곧 “악의 평범성”이 시작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진실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네가 옳다는 확신을 사랑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만,
종교도 정치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신념도
겸손하게 다시 서게 된다.
하나의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명제가 해석과 질문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그 명제는 대학에서
교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개”, “주구(走狗)”, “사냥개”라는
인문학모임의 회원들에게 주구창창
명제가 아닌 자기 감정과 편협한 사고와
맥락과 전 이해가 없이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자기것도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퍼와서
반 인문학적 언어로
같은 자료를 3 번찍 보내어 펌훼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어느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오면
그 주장의 상황과 맥락을 모른 채
왜곡하여 사용하고
문장 전후 흐름을 단절시키는
무지와 무능 그리고 독단과 독선으로
인문학을 오염시키는
인문학의 패륜적 발상이 안습이다.
P/S
이 글을 시드니 인문학모임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담론을
필자는 반론으로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