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우리는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나?
[예배의 부름 초대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난의 길을 먼저 걸어가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섭니다.
마가복음 8장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얻음이 아니라 잃음을,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리를 내려놓고,
자기를 붙잡던 손을 잠시 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는 조용하지만
깊은 초대 앞에 나아옵시다.
잃는 자가 얻고,
죽는 자가 사는
하나님의 신비가 시작되는 자리로
지금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예배합시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마가복음 8:31–38)
[설교의 부름 초대 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가복음 8장의 말씀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십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라는 그 부르심 앞에,
두려움과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마음을 엽시다.
잃음 속에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지금 함께 말씀을 깊이 경청합시다.
1.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매우 불편한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존재의 심장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교회는 커졌고
건물은 화려해졌고
프로그램은 다양해졌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잃어버렸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2. 고난 예고 — 하나님은 왜 실패의 길을 선택하실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막 8:31)
여기서 중요한 헬라어 동사 δεῖ (dei, 반드시) 는 단순한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 필연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구원과
하나님의 구원은 구조적으로 다르다.
당시 제자들의 충격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세계관 붕괴였습니다.
메시아 = 승리
예수 = 고난
이 충돌 속에서 신앙이 태어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존재론적 전환입니다.
인간은 힘을 통해 구원된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자기 비움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닙니다
묵시적 계시의 흐름을,
즉 하늘의 영광이 땅으로 내려와
다시 영광으로 돌아가는 구속 드라마로 설명합니다.
성경의 핵심 사건들을 따라
높음 → 비움 → 순종 → 죽음 → 부활 → 영광
이라는 구조를 성경 말씀은 구성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단어는 “버림받는다”입니다.
메시아가 버림받는다?
이것은 제자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성공 = 하나님의 축복
실패 = 하나님의 저주
그러나 예수는 정반대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은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존재론적 혁명입니다.
인간은 힘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공은 타인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사랑은 타인을 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정말로 생선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생선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에는 가장중요 요소 4가지 있습니다
보호/책임/존경/이해 입니다
이론적으로 완벽합니다
그러나
진장한 사랑은 능동적으로
나 자신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많은 것을 받고 싶어서
남들에게 내가 무언가를 선물받고 싶어서
남들이 나에게 뭔가를 해주기를 바래서 하는 것은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겁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족건 희생만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받기만하는 사랑만큼이나 나뿐 건
주기만 하는 사랑입니다
주는 과정에서 내가 비어가는 사랑입니다
내가 텅 비었는데 주기만 하는 것
그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는 과정에서 내가 채워질 때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의미와 가치가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때 사랑은 건강한 사랑이 됩니다
자기 생명을 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목숨받쳐 사랑했는데 극단으로 달립니다
왜냐하면 비운만큼 채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3. 베드로의 책망 —
신앙은 왜 항상 십자가를 거부할까요?
본문은 놀라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그리고 예수는 말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3)
여기서 사탄은 악마가 아니라 사고방식입니다.
인간 중심 사고
성공 중심 사고
권력 중심 사고
십자가 없는 메시아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은 극적인 아이러니 구조를 가집니다.
고백 직후 → 책망을 듣습니다
칭찬 직후 → 사탄 선언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몇 절 전에는 신앙의 모범이었지만,
곧바로 “사탄”이라는 호칭을 받습니다.
이 문학적 장치는 매우 의도적입니다.
마가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정말 예수를 이해했는가?”
여기서 사탄이라는 표현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 하나님 생각은 → 십자가
— 인간 생각은 → 자기 영광
즉, 사탄은 악마라기보다
십자가 없는 구원 욕망의 상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장면은 2000년 전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베드로와 너무 닮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복음을 원합니다.
고난 없는 축복
회개 없는 은혜
희생 없는 영광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 상품이 되어습니다.
4. 제자도의 선언 —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현대 독자에게 십자가는 종교 상징이지만,
200년전 1세기에서는 다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국가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반란자, 노예, 사회적 위협 인물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영적 비유가 아니라 현실적 공포 언어입니다.
이 말의 사회학적 의미는 충격적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제국 질서에
저항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개인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선언합니다.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한 순교가 아니라
명예 포기/ 권력 포기/ 사회적 안전 포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는
경쟁 사회와 정반대 구조를 가집니다.
세상은 지위 성공/ 부의 축적/ 권력 지배
예수는 나눔/ 섬김/ 자기희생
철학적으로 이것은 니체적 권력 의지의 전복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혐오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자아를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가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공해야 가치 있다는 자아
인정받아야 존재한다는 자아
소유해야 안전하다는 자아
그러나 그것은 진짜 자아가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방어적 자아입니다.
예수는 그 방어를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방어가 강할수록 불안은 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보호에 집착할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는 역설을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이 두 문장은 사실 하나의 진리입니다.
예수는 길을 말씀하셨고 (역사)
바울은 그 길을 경험했습니다. (신학)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십자가라는 사건 속에서
인간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자기를 부인하라
바울: 옛 사람이 죽었다
예수: 십자가를 지라
바울: 함께 못 박혔다
예수: 나를 따르라
바울: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
이것은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제자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가 아닙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5. 생명의 역설 — 잃어야 얻는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구원하리라” (막 8:35)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은 자기 보존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생존 충동)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말합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역설 명령(paradoxical injunction)입니다.
왜 이런 선언이 나올까요?
인간은 자기 보호에 집착할수록 불안을 강화합니다.
지위 유지 불안/ 죽음 공포/ 실패 공포
현대 심리학에서도 확인됩니다.
자기 중심성 강하면 강할수록↑ → 불안은 더 커집니다 ↑
예수의 길은 정반대입니다.
자기 포기를 실천하면 → 참 자유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 상징이지만
동시에 존재 탄생 장소입니다.
생명은 붙잡을수록 사라지고
내어줄수록 살아납니다.
씨앗은 보관하면 썩지만
땅에 묻으면 열매가 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계산하는 순간 죽습니다.
내어줄 때 살아납니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존재의 법칙입니다.
존재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6. 한국교회 비판 —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매우 정직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많은 교회들이 세상의 성공 논리를 그대로 따릅니다.
숫자 성장
건물 확장
영향력 확대
정치 권력 도모
그러나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본문의 중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한가?
여기서 “생명(ψυχή)”은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존재 전체입니다.
즉 질문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성공했는데 존재를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대 문명은 이 질문 앞에서 무너집니다.
— 부는 증가했지만 의미는 감소했습니다.
— 정보는 넘치지만 방향은 사라졌습니다.
— 연결은 많지만 고독은 깊어졌습니다.
예수의 선언은 윤리가 아니라 존재론입니다.
인간은 소유를 위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얻고 복음을 잃으면
그것은 교회입니까?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산업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소비하고
은혜를 소비하고
하나님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소비가 아니라 변혁입니다.
7. 수치와 영광 — 인간의 근본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막 8:38)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아닙니다.
수치입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두려움
인정받지 못하는 두려움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숨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선언합니다.
수치를 통과하지 않고는 영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나 취약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8. 십자가의 철학 — 하나님은 왜 약함 속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왜 십자가를 선택하셨을까요?
전능으로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힘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계시입니다.
정죄에서 새 창조로 (롬 7:24–25; 롬 8:1–2; 갈 2:19–20; 고후 5:17)
24)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롬 7:24–25)
1)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a성령의 법이 b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a 그, ‘영’ b 다른 고대 사본에는 ‘나’ 또는 ‘우리'(롬 8:1–2)
19)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19–20)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예배의 부름 초대글]
사도는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그러나 그 탄식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은총의 문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를 심문하던 영혼이,
이제는 십자가 위에서 함께 죽고
부활의 숨결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오늘 우리는 정죄의 언어를 내려놓고,
새 창조의 숨을 들이마시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신비(갈 2:19–20) 안으로
우리의 전 존재를 열며 예배로 나아갑시다.
정죄에서 새 창조로 (롬 7:24–25; 롬 8:1–2; 갈 2:19–20; 고후 5:17)
[설교의 부름 초대글]
한 사람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절규—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 7:24)
이 질문은 고대의 사도만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외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정죄의 법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롬 8:2).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기의 공로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19–20)
고백하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죄에서 새 창조로 건너가는 이 거룩한 전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사유와 영혼을 열며
복음의 빛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 사순절은 인간의 진실을 직면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절제와 금식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직면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자신을 속이며 살아갑니다.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문제없는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순절은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괜찮습니까?
사도 바울은 인간의 가장 깊은 진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은 신앙 좋은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존재가 무너진 사람의 절규입니다.
- 로마서 7장의 인간은 누구인가
역사적으로 로마서는
1세기 유대-헬라 세계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통해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헬라인들은 철학과 이성을 통해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 세계 모두를 무너뜨립니다.
율법과 할례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철학과 이성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행동이 아니라
존재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의 인간은 단순히 바울 개인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의 대표입니다.
즉 이것은 모든 인간 보편의 이야기입니다.
- 절망에서 감사로의 극적인 전환
로마서 7:24와 7:25 사이에는
놀라운 문학적 전환이 있습니다.
절망에서 → 감사로 이어집니다
죽음 에서→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전환은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적 사건을 말합니다.
문학적으로 이것은 드라마의 절정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속에 서 있고
구원은 외부에서 들어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존재 구조입니다.
- 율법, 권력, 그리고 정죄의 구조는 같다
1세기 사회에서 율법은 단순한 종교 규범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과 권력 구조였습니다.
누가 의로운가?
누가 죄인인가?
이 판단이 공동체 권력을 형성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종종 정죄 구조를 만듭니다.
신앙 좋은 사람
부족한 사람
실패한 사람
그러나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 문장은 기독교 복음의 심장과 같습니다.
바울은 왜“정죄가 없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착해졌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일까요?
우리가 의로와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핵심 표현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in Christ)
이것은 공간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70인역 헬라어 관점에서 번역하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N. T. Wright 는 바울 신학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도덕 개선이 아니라 위치 이동입니다.
— 아담 안에서 → 죽음을 얻고
— 그리스도 안에서 →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루터와 칼벵)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바울).
사도 바울이“무엇을 했는가?”를 강조했다면
율법과 할례를 강조했겠죠?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를 강조하므로
방향을 묻고 있습니다
누구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나 중심적이냐?
그리스도 중심적이냐?
철학적으로 이것은 관계 존재론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 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바울도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망가진 존재가 아니라
잘못된 관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수리가 아니라 이동입니다.
구원은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이 선언은 개인 위로가 아니라
사회 질서를 뒤집는 혁명입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수 많은 규범으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교회안에서까지
율법과 할례(유대 기독교인)
그리고 철학과 이성(이방 기독교인)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평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정죄 없는 공동체 —> 이것이 교회입니다.
- 인간 내면의 분열
로마서 7장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깊은 텍스트입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롬7:19)
이것은 내면 분열입니다.
현대 심리학은 인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
욕망과 도덕의 갈등
자아와 그림자의 갈등
인간은 통합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갈라진 존재/ 분열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낯선 존재입니다.
사순절은 이 분열을 나 자신과 직면하는 시간입니다.
- 갈라디아서 — 존재의 죽음 선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이 말은 은유가 아닙니다.
존재 선언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자아 해체입니다.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참된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되는 관계이다”
진짜 나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심리학자 칼 융 은 인간이 참 자기(Self)를 만날 때
“죽음 같은 경험”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칼벵의 기독교 강요 (3,2,14)
믿음의 3가지 요소/ ‘지식, 확실성, 확인이다’
믿음은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존재의 전환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는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라는 삶을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In Christ
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나는 개선되는 존재가 아니라 죽는 존재입니다.
현대 종교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죽입니다.
자아가 죽고
교만이 죽고
자기 의가 죽습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언어/ 관계적인 언어라고 말합니다
- 로마서 8장 — 정죄에서 자유로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급진적인 선언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정죄
사회의 정죄
종교의 정죄
자기 자신의 정죄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선언합니다.
너는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
이것은 심리 치료 이상의 선언입니다.
존재 선언입니다.
8.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욕망에 묶여 있고
두려움에 묶여 있고
인정 욕구에 묶여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말합니다. (2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a성령의 법이 b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a 그, ‘영’ b 다른 고대 사본에는 ‘나’ 또는 ‘우리’)
자유는 의지 강화가 아니라
존재 해방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이 계산하며 살아갑니다
- 고린도후서 — 새 창조의 선언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여기서 핵심은 “안에”입니다.
위치 변화입니다.
아담 안에서 → 그리스도 안으로
죽음 안에서 → 생명 안으로
절망 안에서 → 희망 안으로
구원은 미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존재 변화입니다.
바울은 윤리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언어, 창조 언어를 사용합니다.
성서학자 James D. G. Dunn 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새로운 창조 질서의 시작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시작되는 몸의 부활, 새 창조입니다.
구원은 낡은 사람이 고쳐지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사건입니다.
겨울 땅속에서 전혀 다른 봄이 올라오듯이 말입니다.
- 사순절의 영성은 —> 죽는 연습입니다
사순절은 절제나 금식 연습이 아닙니다.
죽는 연습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명예/ 돈/ 인정/ 자존심/ 권력/ 권위
이것들이 죽어야 부활이 시작됩니다.
- 사순절 묵상 / 존재의 새벽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존재의 탄생입니다.
어느 날 한 인간 안에서
— 두려움이 끝나고, 사랑이 시작됩니다
— 죽음이 물러가고,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갈2:20)“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인간은 밤과 같습니다.
길을 잃은 별과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밤을 가르는 새벽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무너졌다고 느끼는 순간
하나님은 새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문입니다.
절망은 끝이 아니라 통로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새 생명입니다.
- 결론 — 사순절의 초대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여전히 정죄 속에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 속에 살 것인가?
너는 옛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 창조로 살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믿음은 결단이 아니라 문이 열리는 순간이며
구원은 보상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입니다.
어느날, 한 인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선언합니다.
너는 곤고한 존재로 끝나지 않는다.
너는 몸의 부활로 새 창조가 시작된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