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빌립보서 3:12–21)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장 깊은 고백 중 하나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2절)“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고백은 단순한 신앙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시간 속에 던져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하나의 심연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언어입니다.
- “이미”라는 은혜 — 붙잡힌 존재
먼저 우리는 바울의 이 놀라운 선언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12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무엇을 “잡았다”가 아니라
바울이 먼저 “붙잡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내가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붙잡혔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그 깊이는 바다와 같고, 그 높이는 하늘과 같습니다
우리가 붙든 믿음은 늘 흔들립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환경에 따라 믿음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드신 것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언어로 늘 “이미 (already)”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확신은 칭의받은 성도가 누리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증거이며 이 확신 속에서 성화(거룩해짐)의 과정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칭의란 단순히 법정적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존재의 재정의입니다.
“너는 이제 나의 것이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의롭다.”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이미”입니다.
- “아직”이라는 긴장 — 달려가는 존재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아직 얻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하늘의 계시를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아직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신앙은 도착이 아니라 여정입니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달려가는 존재다.”라고 말합니다.
이 달려감은 단순한 노력이나 열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방향성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언제 무너집니까?
더 이상 달리지 않을 때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를 바라보지 않을 때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성화는 자기 계발이 아닙니다.
성화는 붙잡힌 존재가
그 붙잡힘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운동입니다.
- 뒤를 잊어버리고 — 시간의 전환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13절)
여러분, 이 말은 단순한 기억 삭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한 태도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묶여 살아갑니다.
실패의 기억
상처의 흔적
후회의 그림자
과거는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그것을 놓아버린다.”
왜입니까?
그는 이미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의 시간은
미래가 현재를 끌어당기는 시간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절)
여러분,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보이는 것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 두 부류의 사람 — 땅 vs 하늘
바울은 이어서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절)
그리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20절)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대조를 봅니다.
땅의 사람/ 하늘의 사람
현재에 갇힘/ 미래를 향함
욕망 중심/ 소망 중심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여러분, 바울은 단순히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체성을 말합니다.
“너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늘 시민권은 죽어서 가는 나라의 여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 몸의 변형 — 종말론의 절정
마지막으로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1절)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매우 유대적이고 구체적인 종말론입니다
몸이 변합니다. 전인적 변형(몸 포함)
몸의 부활을 믿으며( 갈3:21)/ 신앙고백
우리는 지금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들고/ 늙어가고/ 무너지는 몸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몸이 변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은 단순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성입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 정체성 형성에 있습니다.
- 통합 — 칭의, 성화, 종말론
이제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보게 됩니다.
“나는 이미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달려간다”
여기서 칭의-성화-종말론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칭의(이미): 이미 붙잡힌 힘으로 존재의 근거입니다.
성화(아직): 달려감으로 존재의 운동입니다.
종말론: 변형된 몸으로 존재의 목적입니다.
이 구조를 철학적으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Martin Heidegger의 시간성과 닮아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아직-아님” (not yet)이다.
그러니 이미 “던져진 존재/현존재” (already)라는 것입니다.
피투와 기투………
이것을 바울의 언어로 번역하면
던져짐은 칭의가 되고
가능성은 성화가 되며
완성되는 것은 종말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이제 기독교 전통의 교리를 내려 놓고
바울의 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미 우리는 붙들린 자들입니다.
예수가 먼저 우리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발은 여전히 먼지를 일으키며 시간의 들판을 가로지릅니다.
의로움은 선언되었지만
삶은 아직 번역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쓰여지고 있는 문장입니다.
종합하여 비교해 보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루터는 “이미”를 붙잡았습니다.
(simul justus et peccator)
“인간은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이다”
칼빈은 “아직/과정”을 정리했습니다.
칼빈은 신앙을 순간적 감격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아직 진행중인
하나님의 형상 회복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루터의 “이미”를
역사적·윤리적·교회론적으로 확장한 셈입니다.
현대신학은(Rudolf Bultmann) “미래”를 끌어왔습니다.
“종말이 언제 오는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질문했습니다.
“종말은 지금 여기서 인간 존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종말론을
우주적 사건 예측보다
실존적 결단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두를 거부하지 않고
하나의 문장으로 엮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어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그러므로 우리는 달려간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흐름이 서로 대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신약성서 자체의 긴장을 나누어 붙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탄식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영광을 기다립니다.
특히 로마서 8장은 이 긴장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창조세계는
이미 새 창조의 빛을 받았지만(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직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지만,
아직 완성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절망할 수도 없고,
완성되었다고 착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와 종말론이
서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구조라는 증거입니다.
현대 교회의 위기 중 하나는
이 세 차원 중 하나만 절대화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만 강조하면 값싼 은혜가 됩니다.
“과정”만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미래”만 강조하면 현실 도피가 됩니다.
참된 종말론은
세 시간을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은혜로,
아직 진행 중인 변화를 통해,
미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부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완성되지 않은 채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쩌면 신앙이란,
바로 그 “사이”를 견디는 존재의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의 특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만 강조하는 곳은(구원파/신천지)
아직만 강조하는 곳은(극우 기독교 모두입니다/칼벵)
미래만 강조하는 곳은(일반 기독교입니다)
여기서 이미와 아직(과정)과 미래(종말)는
인간의 시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미와 아직과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달려갑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변형될 것입니다.
- 존재의 시 — 우리는 누구인가
이제 이 말씀을 마음으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붙잡힌 자들입니다.
어둠 속에서 이름이 불린 자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걸린 다리와 같습니다.
한쪽 발은 은혜 위에
다른 한쪽 발은 소망 위에
그 사이에서 우리는
흔들리며, 넘어지며. 깨지며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걸어갑니다.
- 결론 — 왜 우리는 달려가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달려갑니까?
완전해지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인정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달려갑니다.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직이다.
그러나 나는 달려간다.”
이 달려감 속에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미래에 의해 이끌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는 날
그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온 모든 길이 은혜였습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