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짊어지시심과 짊어짐 (이사야 46:8–13; 요한복음 1:1–14)
(부활후 5번째 주일 설교)
1.우리는 무엇을 짊어지고 살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실 때
여러분은 무엇을 짊어지고 오셨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어떤 무게나
마음 깊은 곳에 눌려 있는 어떤 짐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관계의 무게를 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신앙 그 자체 조차도
무거운 짐처럼 느끼며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늘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2. 이사야 본문: “너희가 나를 짊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의 이사야 본문은 제 2이사야로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선포됩니다.
본문은 두 개의 대조 구조를 가집니다
우상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우상은 짐승에 실려 이동하고 침묵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업고”
능동적으로 이동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사야 46장의 핵심동사는“נשא”(나사/나싸)
(들다, 짊어지다, 운반하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업는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떠맡는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셨다
죄를 “들어 올려 제거하다”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옯겨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관계적 의미로 누군가를 높인다/ 존중한다/ 얼굴을 들어준다는 것은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즉,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짊어지는가에 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 구조는
인간이 신을 섬기고 신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을 짊어지시는 분이십니다
이 “נשא” 개념은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
여기서 “지다”는 개념이 바로
히브리적 “נשא”입니다
사도바울은 죄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신 짊어짐 즉 대속이 여기에서 나온 겁니다
고대 제국에서 신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신상들은 늘 정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각종 종교들은 사회 통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 구조를 전복합니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은 인간을 짊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개혁이 아니라
존재론적 혁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짊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업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낯설게 들리십니까?
우리는 늘 이렇게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나를 짊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신앙의 방식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3. 우상과 인간: 우리가 만든 것의 무게
이사야는 바벨론의 신들을 말합니다
그 신들은 짐승 위에 실려 다닙니다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말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비웃습니다
“어떻게 저런 걸 신이라고 믿었을까”
그런데요 조용히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성공/ 인정/ 안정/ 종교적 열심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놓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전복: “내가 너를 업는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업는다”
여러분, 이 말씀이 단순한 위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를 완전히 뒤집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를 살리고 있다”
5. 삶의 고백: 왜 우리는 이렇게 지쳤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지쳤습니까?
왜 신앙이 기쁨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습니까?
왜 기도가 생명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켜내려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6. 요한복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때 요한복음이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은 헬레니즘 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차용합니다.
로고스는 질서/ 이성/ 우주의 원리
그러나 요한은 이것을 전복합니다.
“로고스는 육신이 되었다”
이 선언은 형이상학의 중심을 완전히 이동시킵니다
존재의 근원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입니다
신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지는 존재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멀리서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가 아니라니
지금 우리 안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지금 내 안에 계시다는 겁니다
7.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우리는 늘 하나님을 찾습니다
– 더 깊은 기도 속에서
– 더 거룩한 자리에서
– 더 높은 차원에서
– 더 넓은 전도차원에서
그런데 요한은 말합니다
“그분은 이미 여기 계신다”는 겁나다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고통 속에 계시다는 겁니다
8. 바울의 고백: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갈 2:20)
여러분, 이 말씀을
한 번 진지하게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나는 더 이상 나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9. 존재의 전환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내가 해야 한다”
“내가 버텨야 한다”
“내가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아니다”“너는 이미 붙들려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와 요한을 존재론적으로 완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갈 2:20)
이것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인간 주체의 해체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했지만
사도 바울은 “나는 죽었고, 타자가 나를 존재하게 한다” 는 겁니다
바울의 인간 이해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여기서 결판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수로 좋아하는
오늘의 은혜의 개념을 살펴 봅시다
어거스틴은
말씀을 통해 밝견한 지대한 공헌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성을 발견하여
하나님 은혜의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아 존재를 위계화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영혼이며/
육체는 하위에 있는 존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존재론적 체계로 만들었습니다
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은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칼빈의 지대한 공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구원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교리화하고 제도화 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은 획신 시드템으로 만들었고
교회는 질서 시스템으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존재 사건입니다
어거스틴은 은혜를 내면 구조로 축소해 버렸습니다
칼빈은 은혜를 교리 체계로 만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역사적인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조건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핵심 문제는
첫째는 은혜의 거래화입니다
헌신하면 축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의 성과주의입니다
성장 제일주의로 변질 되었습니다
숫자라는 우상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과정보다 결과에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를 짊어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증명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중립적 공간이 아닙니다
항상 권력과 연결 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교회는 권력을 비판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정당화하는가?
이사야는 거대 바벨론의 권력을 해체합니다
요한은 로마 황제를 거부합니다
바울은 인간 주체를 해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다시 권력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작금의 상황이고 비극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인간은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붙들려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붙듦의 이름이 은혜입니다
우상에 붙들려 있는 건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성서가 은혜라는 개념의 용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느라
지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손을 놓았을 때
우리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누군가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품이 성서가 말하는 은혜입니다
10. 교회의 문제: 은혜가 다시 짐이 될 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 더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 더 헌신하라고 합니다
– 더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다시 짐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결국 관계가 짐이 되고 부담이 된 것입니다 (혼밥)
11. 다시 복음으로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업는다”
“내가 너 안에 산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짊어지고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짊어져질 것인가?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버티며/ 견디며/ 붙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우리는 손을 놓습니다 (실패.질병.이별)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누군가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붙들려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를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이
더 이상 짐을 지지 않고
삼위일체 은혜에 짊어져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