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13)

피터 캠블(캠) 램 (1920. 7. 5)
김천, 1971-72
캠 램은 군대를 제대하고 질롱 근처 메레디스(Meredith)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었던 헌신적인 장로였다. 대전 농촌훈련소는 양을 목축하는 협동 프로젝트를 세우기 위해 호주선교부에 초청장을 보냈고, 호주선교부는 이에 응답하여 캠을 한국에 가도록 임명했다. 캠은 처음에 대전으로 가서 제안의 가능성을 검토하려고 1970년 1월 19일에 한국으로 갔고 2월 12일에 돌아왔다.
한국에 있는 동안 그는 호주정부가 한국에서 양-사육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불충분한 자금으로 작은 프로젝트를 세우는 것보다 정부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가능성들을 조사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호주에서 그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전문가와 상담을 한 후에, 양-경영에 경험을 얻기 위해 지역 농부들을 돕는 제2차 프로젝트를 택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4년 프로젝트로 예상되었다.

캠은 지역교회들, 양사육자협회들, 그리고 로터리클럽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재정, 음식, 양들을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확보했다. 그는 1971년 2월까지 그 양들을 한국에 옮기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양을 옮기기 전에 땅, 건물 등과 같은 설비들을 확정짓기 위해 1970년 10월 한국을 두 번째 방문했다. 폴와스 사육자협회(Polwarth Breeders’ Association)와 라이랜드 양사육자협회(Ryeland Sheep Breeders Association)가 양들을 기증했다. 캠은 그 프로젝트의 비용은 장비, 설비, 등 $27,150로 평가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양 사육을 통해 산지를 유익하게 사용하여 마을 사람들의 소득을 증진시킨다는 것이었다. 240마리의 암양들과 10마리의 숫양들이 적절한 토지의 중심지에서 사육되고 그 땅의 50에이커는 방목지를 만들기 위해 씨를 뿌린다는 계획이었다. 캠은 정부가 지원하는 농장과 협력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한국인 조수 한 명이 호주로 왔고, 그는 한국으로 양을 보내기 전 4개월 동안 메레스에 있는 땅에서 램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램 가족과 문씨는 1971년 5월 31일 한국으로 갔다. 그 센터는 김천 근처의 산지에 설립되었다. 램은 기초설비와 일의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6개월을 일했다. 그는 목양견들을 한국에 도입했고 그가 씨를 뿌린 목초지에서 풀을 먹였다. 양들은 겨울 내내 밖에서 살게 했으나 모두 생존했다. 암양들은 새끼를 낳았고 1972년 5월에 양털을 깎았다.
캠은 이 프로젝트의 목적에 대해 대전 센터와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1972년 8월 말 사임했다. 몇 차례의 협상 후에 그 다음 해 혹은 2년 동안 램은 중요한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양 사육, 털깎기, 꼴 저장을 감독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1973년 4-5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캠은 훗날 로즈데일(Rosedale)에서 국내선교사로 섬겼다. 그리고 호주로 돌아간 후에 킬메니 보이스 농장(Kilmany Boy’s Farm)의 직원으로 일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