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22)
제임스 노블 맥켄지 목사(James Noble Mackenzie, 1865. 1. 8-1956. 7. 2)
한국명: 매견시(梅見施) 목사, 부산진 1910-39
맥켄지는 1865년 스코틀랜드 서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유 섬(the Isle Ewe)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금의 바누아투(Vanuatu)인 뉴헤브리데스(New Hebrides) 안에 있는 산토(Santo)섬의 서해안, 노구구(Nogugu)에서 15년의 소중한 해를 선교사로 섬겼다.
그의 첫 부인 매기(Maggie)는 그곳에서 사망하여 묻혔다. 맥켄지 역시 15년의 사역 이후 열대성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의학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지원을 하였고 1910년 2월 21일에 도착했다. 45세의 나이에 그는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와 메리 켈리는 1912년 2월 10일에 결혼했고, 그들은 부산과 그 주변에서 27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맥켄지의 선교사역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그는 울산, 기장, 동래, 그리고 이따금 온양 지역들 안에서 많은 수의 시골 교회들을 감독하고 발전시키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또한 울릉도에 있는 교회들에 대한 책임도 있었다. 겔손 엥겔이 1919년 평양으로 옮긴 이후, 맥켄지는 부산진 교회, 동래교회 그리고 부산지역 안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 대한 동사 목사로서의 책임이 주어졌다.
둘째 그는 선교회 그 자체 안에서 많은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많은 기술이 있어서 선교회의 건축 프로젝트들에 대한 감독을 했다. 그리고 12년 동안 선교회의 회계로 봉사했다. 그는 부산에 살았기 때문에 전체 5개의 선교지부에 필요한 품목들을 수입하는 비즈니스 메니저로서의 책임도 감당하였다.
그러나 맥켄지는 무엇보다도 1912년부터 27년 동안 한센병-나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선교사역을 발전시키는 책임을 감당했다. 1912년에 그가 나환자요양소에 대한 관리를 맡았을 때 단지 36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그가 은퇴할 즈음에는, 600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그가 책임을 맡았을 때 환자사망률은 25%였으나 그가 은퇴할 때 사망률은 2%로 떨어졌다. 그는 나환자 치료에 공헌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많은 상장과 포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요양소에 입소를 요청하며 그를 찾아왔다. 요양소 안에 있는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많은 환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비록 맥켄지는 개업의사로 훈련을 받지는 않았으나 열심히 공부해서 나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익히는데 뒤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정부로부터 의사로 인정을 받았다.
맥켄지는 1939년에 선교사직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은퇴할 때에 그는 에큐메니즘을 촉진시켰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데 모든 기회를 사용했다.
맥켄지 목사와 부인이 선교에 기여한 공헌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그들의 장녀와 차녀는 중국의 운남성(Yunnan Province)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부산진에 일신부인병원을 세우고 사반세기의 봉사를 했다. 반면 나머지 두 딸은 간호사가 되었다.
맥켄지 목사 부부는 또한 개인적으로도 선교의 비용을 치렀다. 두 사람 다 질병을 겪었고, 그 후에 그들의 독자인 제임스 아서 고든(James Arthur Gordon)은 1922년에 두 살의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