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25)
프레더릭 존 매크래이 목사 (1984. 5.14-1973. 1. 6)
한국명: 맹호은(盟皓恩) 목사, 진주 1910-12; 거창 1912-15; 마산 1915-40
프레드 매크레이는 스코틀랜드 콕펜(Cockpen)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1년 아버지가 투락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호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멜번 대학에서 석사(M.A)를 졸업하고 글래스고(Glasgow)에 있는 연합자유대학(the United Free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매크레이는 1910년 11월 2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언어를 공부하면서 그의 선생과 함께 장날에 거리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매우 가난한 한국 사람과 거리의 여성들과 죄수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또한 이 사역을 마을 시장들로 확장시켜나갔고 2년이 지났을 때 그는 40-50개의 장터에서 설교했다고 셈을 하였다. 한국에 도착한지 1년 후, 그는 커를 의사와 함께 진주의 북서쪽에 있는 교회들까지 거의 300km의 이르는 장거리 순회여행을 하였다.
기독학생운동의 발전을 격려하는데 민감했던 그는 1912년 라이얼 목사와 함께 서울북쪽에서 열린 학생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1913-14년 동안 매크레이는 거창, 안의, 함양 지역의 9개의 교회를 보살피도록 배정받았다. 거창 선교지부를 설립하면서 그와 켈리 목사부부는 1913년 6월 18일에 그곳으로 이전했다. 매크레이는 코넷(cornet)을 연주하면서 찬송가 곡조를 가르쳤다. 이것은 장터에서 군중들을 끌어 모으는데 유용했다. 그는 한국인의 예절과 관습을 빠르게 배웠는데 복음을 전달하는데 그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1915년 1월 9일, 매크레이는 일본에서 온 마가레트 홀 양(Margaret Hall)과 결혼했는데, 그해 말 그들은 거창에서 마산으로 옮겨갔다. 그들의 딸 캐슬린(Kathleen)은 한국에서 죽었으나 아들들은 선교사로 섬기려고 아프리카와 중국에서 살았다.
매크레이는 활동적이고, 지혜롭고, 성실한 지역 교회들의 감독자였다. 처음에는 거창에서 안의와 함양지역을 보살폈고, 1915년부터 25년 동안 함안에서 창영, 웅천, 창원, 진통을 그리고 마산 지역들 안에서 교회들을 보살폈다. 이따금, 그는 또한 밀양과 다른 지역들 안에 있는 교회들도 책임을 맡았다. 그는 한국인 목사들이 섬기는 많은 교회들의 동사 목사로 섬겼다. 마산교회도 그중의 하나였다. 30년이 지난서, 이러한 교회들의 나이든 교인들은 그를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마산 안에서 매크래이 목사는 라이얼 목사가 휴가를 간 1916-18년의 시기에 그리고 1920-38년까지 창신학교의 교장으로 섬겼다. 이 일은 직원과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키라는 정부의 강력한 압력에 저항하는 것을 수반하였다.
매크레이는 선교회의 생활에 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중요한 건축시기에 건축위원회에서 일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주일학교와 교육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권서들의 사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감독했다(매크레이 목사가 감독했던 권서들은 오형선 <1914-15>, 염재로<1915-17>, 함태영<1920-27>, 동기권<1927-30>) 등이다).
호주 본국 선교부는 1945년 한국이 해방된 이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는 이 요구를 신중하게 검토했으나 부인의 건강 악화 때문에 돌아가려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