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60)
에셀 빅토리아 딕슨(Miss Ethel Victoria Dixon RN, 1889-1975. 7. 5)
한국명: 덕순이(德順伊) 선생, 거창/서울 1922-27; 진주 1928-29; 거창/진주 1933-41
에셀 딕슨은 멜번에 있는 오스틴 불치환자 병원(the Austin Hospital for Incurable)과 부인병원에서 훈련받은 간호사였다. 그녀는 PWMU에 의해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922년 9월 16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후 거창으로 배속을 받은 후 딕슨은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를 했다. 그러나 매켄지 목사 부인이 딸 쉴라(Sheila)를 출산하기 전후, 그리고 아들 지미(Jimmy)가 죽기 전후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한국어 공부는 중단되었다. 그녀는 또한 멘지스가 가벼운 디프테리아에 걸렸을 때 간호했고, 서울의 매클라렌 부인이 몇 번의 심장 발작에서 회복되었을 때 1925년 6월부터 1926년 2월까지 그녀를 간호했다. 딕슨은 또한 한동안 진주병원을 지원했다. 이러한 긴급한 요청들 사이에서 그녀는 거창의 자신의 일에 정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1927년의 휴가 중에 딕슨은 유아복지 클리닉 분야의 공부를 마친 후에 약혼을 발표했고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28년 6월에 그녀는 1년 동안 진주로 돌아가서 병원을 지원하기로 동의했다. 그녀는 1928년 7월부터 1년 동안 한국에 돌아갔다.
1932년 6월 한국의 선교협의회는 딕슨을 한국으로 초빙하도록 PWMU에 건의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딕슨은 몇 달 동안 개인적인 문제를 정리한 후에 이 초빙을 받아들였고 1933년 9월 큰 환영을 받으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딕슨은 1933년에서 1936년 11월까지 거창에서 유아복지 클리닉을 운영했다. 그리고 공시에 다른 차원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6년 11월에 그녀는 진주로 이전해서 엘시 에드거가 휴가를 떠난 동안 수간호사의 자리를 대체 했다. 딕슨은 진주에 살고 일하면서도, 일주일에 한번 거창으로 가서 유아복지 클리닉을 지도했다. 1938년 3월 에드거가 돌아온 이후, 에델 딕슨은 10개월의 휴가를 가졌고 1939년 3월 거창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1941년 다른 여선교사들과 함께 철수할 때까지 그곳에서 사역을 하였다.
에델 딕슨은 장기간 동안 이따금씩 찾아오는 고통스런 질병을 겪은 후에 1975년 7월 5일 멜번에서 사망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