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년 5월 2일, 정통신앙의 아버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Alexandria, 293 ~ 373) 선종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Alexandria, 그: Αθανάσιος, 293년 ~ 373년 5월 2일)는 4세기에 활동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이다. 아타나시오, 아타나시오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로부터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개신교로부터는 위대한 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325년 기독교 최초의 세계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본질을 말한 그의 주장을 인정받아 ‘정통 기독교 신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대표 저서로 <부활전 서한>이 있다

– 성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Alexandria;주교, 교부)
.본명: Athanasius
.출생: 로마 제국 아이깁투스 속주 알렉산드리아 (現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주 알렉산드리아)
.선종: 373년 3월 2일 (75~77세), 로마 제국 아이깁투스 속주 알렉산드리아 (現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주 알렉산드리아)
.묘지: 이탈리아 베니스 Chiesa di San Zaccaria, 이집트 카이로 성 마르코 콥트 정교회 대성당
.학력: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
.교파: 보편교회
.직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대표 저서: <부활전 서한>
.축일: 5월 15일 (콥트), 5월 2일 (서방), 1월 18일 (동방)
아타나시오스 (Αθανάσιος)라는 이름은 죽음을 뜻하는 θανατος (타나토스)에 부정형 접두사 α-가 붙어 변형된 ‘불멸’이란 뜻이라고 한다.
‘정통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집트의 대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30대의 젊은 나이로 당시 동방 최고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에 올랐지만, 46년간 다섯 번이나 주교직에서 쫓겨나면서 도피와 은거, 유배로만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교회사가들은 그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업적은 예수의 신성을 지켜낸 것과 함께, 신약성경 27권의 목록을 최초로 확정한 것을 꼽고 있다.
아리우스파의 등장으로 니케아 신경에서 어렵사리 정리됐던 ‘예수의 신성’은 다시 혼돈에 빠졌고, 이와 관련해서는 4가지가 넘는 학설이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이 논쟁에는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황제까지 가담한 터였다. 아리우스 신학은 정치적인 지원 아래 주류 신학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엄격한 자기 절제, 신념에 찬 용기, 진리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일관되게 아리우스파와 싸워 나갔다. 그는 물러나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함에 실수가 없었다. 황제와 협력하기도 했지만 맞서기도 했고, 때로는 유혈과 폭동이 그를 도운 적도 있었다. 그의 도피는 갓 피어나기 시작한 사막의 수도 문화와 은수자 안토니우스를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우리가 매일 낭송하는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는 뿌리를 내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본질에서 나오는 세 위격’이라는 것이다. 셋인 듯 하지만 하나이고 하나인 듯 하지만 셋인 관계, ‘저 바닷물을 모두 퍼서 이 구덩이에 옮기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 생애 및 활동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Alexandria, 그: Αθανάσιος)는293년, 로마 제국 알렉산드리아 (현 이집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라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자주 들리면서 학문을 닦는 한편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며, 사막에서 활동하던 교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수도자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지켰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으며, 성격이 무척 불같았다고 한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데르의 심복이 되어 사목활동을 전개했다.
– 니케아 공의회
318년경 부제(보제)로 선임된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아리우스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알렉산데르의 편에 섰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 으뜸 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씀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알렉산데르와 아타나시오는 “성자는 신적인 것이므로 창조될 수 없고,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 등이 예수를 신으로 추앙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비판했고, 알렉산데르와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른다면 교회는 그동안 피조물을 흠숭한 게 된다”라며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며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알렉산데르 대주교는 아리우스에게 파문 조치를 내렸고, 파문 통보를 받은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대주교 에우세비우스를 찾아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에우세비우스가 지지 의사를 밝히자, 그는 재차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알렉산데르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자신의 이론을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데르가 단호히 거부하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이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레반트 전역에서 거세게 전개되었다. 324년 로마 제국을 통합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알렉산데르파와 아리우스파에게 서한을 보내 “니케아에서 이 문제를 놓고 논의하자”고 권고했고, 두 세력 모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325년에 개최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함께 참석했다. 그가 공의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정설로 굳어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발언 기회를 거의 부여받지 못했고, 공의회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 대주교 에우세비우스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서방교회 인사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때에서야 처음 접했는데,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말에 격분하여 연설 중이던 에우세비우스를 강제로 끌어냈다. 그리하여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일당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체 (ὁμοούσιος)’임을 규정하는 니케아 신경을 공표했다.
다만 동일본체라는 단어는 사벨리우스주의적 해석의 여지가 너무 컸기에 꺼림직함이 있었고, 아타나시오 본인이 니케아 신경을 고백하는데 2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어린 시절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보냈고, 325년 부제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를 수행,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 논쟁의 현장을 목격했다.
328년 알렉산데르 주교가 죽었을 때 약간의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알레산드리아 주교직을 계승했다.
주교가 된 후 처음 몇 년 동안은 이집트와 리비아의 모든 지역을 포함한 자신의 광범위한 주교구를 직접 찾아다니며 방문하는 데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나일강 유역의 콥트 교회 수도사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그 때부터 리코포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의 이론을 이단으로 공격하며 평생을 그 투쟁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인생에서 다섯 번이나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망명자로 쫒겨다니는 신세가 된다.

– 박해와 추방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대체로 아리우스주의자들로 아리우스의 가장 큰 적인 아타나시우스를 박해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비록 아리우스파가 패했지만 당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오히려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절치부심하던 아리우스파는 335년 그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 박탈을 결의했고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티레 (오늘날의 레바논)으로 추방시켰다. 이것이 그의 다섯 번에 걸친 주교직 박탈과 추방의 역사의 시작이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다시 복권되었다.
339년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아리우스파는 안티오키아에서 교회회의를 열고 알렉산드리아 주교 자리에 그레고리우스라는 인물을 임명하고 아타나시우스를 해임하고 추방한다.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의 열열한 지지와 도움을 받고, 343년 이탈리아 반도의 주교 50명이 모인 사르디카 교회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주교로 선언하였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를 담당하던 황제 콘스탄스를 직접 만나 그의 신임을 얻고, 345년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황제 콘스탄스의 비호 아래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복권되었는데 이때 콘스탄스는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일전을 불사하며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였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굴욕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우스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영웅으로 위대한 개선장군처럼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다.
350년 아타나시우스의 옹호자였던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다시 상황은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콘스탄티우스와 아리우스파는 다시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하기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집트 민중의 열열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를 숙청하기는 쉽지 않았고 급기야 356년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아타나시우스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성 테오나시오 교회를 급습하고 수많은 신도들을 죽이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거의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사막에 있는 수도사에게로 피신했다. 약 6년간 계속된 도피는 박해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끝났다.
율리아누스의 전통 로마 종교에 대한 옹호에 맞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긴급 회의를 열어 기독교 교리의 오해를 해소하고 일치점을 찾으려 하였는데, 기독교의 일치를 원치 않았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362년에 다시 추방하였다.
그 후 율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발렌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복권되었는데 그것도 잠시, 아리우스파였던 발렌스 황제는 365년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추방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황제는 결국 아타나시우스를 366년에 다시 복권시켰다. 약 4개월 만에 복권된 것이다.
그 후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5월 2일까지 78세의 고령으로 죽기까지 평온하게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냈다.

– 27권 신약성서의 확립
아타나시우스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모든 기독교에서 신약성서로 쓰이는 27권 신약성서 체제의 목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모든 박해와 망명에서 벗어나서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직에 복귀한 직후인 367년 부활절에 그의 교구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때까지는 신약성서로 정해진 성서가 없었고 수많은 복음서와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편지가 교우들에게 성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아타나시우스의 역사적인 367년 부활절에 쓴 서신의 일부이다.
… 많은 사람들이 외경적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는 책들을 가지고 와서 근사하게 장난질을 쳐서 하느님의 영감을 받는 성서와 혼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것으로 고백되고 우리들에게 전승되어 온 정경 (the cannon)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용옥, 기독교 성서의 이해, 통나무, 2007, p.378~379)
그가 만든 27권 목록은 383년 당시 교황 다마소 1세의 주도로 로마 공의회에서 논란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용되었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져 공포되었다.
이후로도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주장한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은 그의 주장대로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확립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 주요 생애와 업적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Alexandria, 296 ~ 373)는 4세기 초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 (Arianism)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한 ‘정통 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니케아 공의회 주역: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부제 자격으로 참석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 (homoousios)임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328년 스승 알렉산데르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는 황제와 정치 세력에 의해 평생 5번의 유배 (총 17년 이상)를 겪으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아타나시우스 대 세상” (Athanasius Contra Mundum): 온 세상이 아리우스주의로 기울었을 때 홀로 진리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칭이다.
신약 정경 확립: 367년 부활절 서신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 27권의 목록을 최초로 공식화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 평가
평화방송에서 20년 넘게 종교전문기자로 근무한 저자 김소일은 그의 저서 ‘사막으로 간 대주교 :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신성논쟁 다큐멘터리’ (서해문집 간)에 아타나시우스의 삶을, 정치와 종교, 정통과 이단, 황제와 주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신성논쟁 다큐멘터리’라는 부제처럼 무려 1700년 전 이야기를 실감나는 필체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4세기를 그처럼 뜨겁게 달궜던 교리 논쟁이 정말 순수하게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었는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신성 교리를 둘러싼 교회의 내분과 갈등을 단순한 권력 다툼으로 보는 시각은 분명 무리가 있지만, 폭력과 테러, 보복과 유혈 폭동으로 점철된 이 싸움의 배경에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었던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밀라노 칙령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거치며 교회의 특권이 거대하게 성장하고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시기의 역사는 길게 보면 정치와 종교가 뒤엉킨 채 몸부림쳤던 중세 역사의 예고편 성격이 강하다”고 정리한다.
아타나시우스에 대해서는 “당대 교회 안팎의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매우 합법적 수단만을 사용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거룩한 싸움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는 선에서 질문을 수습한다. “시대를 끌어안고 깊이 고뇌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당시 기독교가 직면했던 커다란 두 개의 도전-즉 교회 내부에서 오는 이단과 정통의 대립과 교회 밖에서 오는 권력의 간섭-의 최전선에서 생애를 바쳐 이단과의 싸움을 지휘했고, 황제의 권력에 맞서 교회를 지켰다.
여러모로 아타나시오는 신학, 사학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 아타나시우스의 축일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그가 선종한 5월 2일로 기념한다.
“내가 아타나시우스를 칭송할 때, 덕이 그 자체로 주제가 됩니다. 왜냐면 모든 덕을 지닌 그분을 언급할 때마다 덕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진실로 교회의 기둥이셨습니다. 그분의 일생과 행적은 주교의 지침이요, 그분의 교리는 정통 신앙의 규범입니다.” –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오스 주교
“그는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

○ 저서
아타나시오는 5차례에 걸쳐 추방당하고 수많은 정적의 맹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여러 저서를 집필하며 자신의 뜻을 널리 알렸다. <니케아 공의회 법령에 관한 편지>에서 니케아 공의회 절차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설명을 하였으며, 367년경에 신약성경 27권 목록을 최초로 정의한 서신을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며 예수를 하느님의 신성한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걸 강조하는 편지를 집필하였으며, <아리우스파의 역사>를 집필해 예수가 피조물일 뿐 신이 아니라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그는 구약성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러 주석을 달았다. 특히 <시편의 말씀을 영적 실천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는 후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담으로, 삼위일체를 변호하는 신경인 아타나시오 신경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대의 창작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타나시오는 일찍이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할 때 깊은 관계를 가졌으며, 망명생활을 하던 자신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던 은수자 이집트의 안토니오의 전기를 집필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하느님께 삶을 봉헌한 안토니오를 찬미하며, 독자들에게 이를 본받아 훌륭한 성인이 되라고 권했다. 후대의 수도자들은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표본으로 삼아 수도원 규칙에 적용하였다.
- 핵심 신학 및 저서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성육신에 관하여 (De Incarnatione):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 그리스도가 왜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는지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정립했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 (Vita Antonii): 사막의 교부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집필하여 기독교 수도원 운동을 서방 교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 Selected works
Athanasius. Contra Gentes – De Incarnatione (translated by Thompson, Robert W.), text and ET (Oxford: Clarendon Press, 1971).
On the Incarnation (at theologynetwork.org)
Letters to Serapion (on the Holy Spirit) – at archive.org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