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하학파 (稷下學派)
직하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시대적 상황에 연유하여 발전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철학이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문화는 중국 고대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문화사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철학사상은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그 역사가 길고 오래되었다.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120여 년 동안에 제(齊)나라에서 일어났던 제자(諸子)의 기풍있는 학설을 직하학(稷下學)이라 한다. 직하(稷下)란, 원래 직문 밑이라는 뜻이다. 직문은 제나라의 수도 임치의 성문의 하나인데 구설에는 성의 서쪽 문이라고 한다.
– 직하학파 (稷下學派)
공자는 그의 제자 중에 문학으로는 子游(자유)와 자하 두사람을 꼽았다.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西河(서하)에서 학단을 형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서하는 魏(위)나라 땅으로 황하의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러자 魏文候(위문후)는 그의 문하생이 되어 경학과 육예를 배웠으며,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하였다. 위문후는 위나라의 건립자이다. 그는 창업주답게 위나라를 크게 번성시켰다. 이러한 자하의 지혜로움으로 위문후의 브레인 탱크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전국시대정신을 이끈 직하학파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다.”
서문표는 직하학파출신이고 공자의 뜻은 여러제자를 통해 펼쳐졌다.
– 직하파 ‘서문표’의 활약
중국의 역사상 소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란 대략 BC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BC 221년 진시황에 의해 통일될 때 까지 약 550년 동안의 시기를 일컫는 말로서 이 중 BC 770년에서 BC 473(481)년까지의 약 300년간을 춘추시대, 그 이후를 전국시대라 할 수 있다.
춘추시대에는 왕실에서 왕실의 일가친척 및 관료들에게 영지를 떼어주고(‘분봉’)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사받은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가 되게 하는, 다시 말해서 봉건제도를 실시하였고 이 시대의 군주를 후(候: 제후의 의미)라고 칭했고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의 정신을 숭상하였다.
그런데 세대가 지나갈수록 서로 간에 한 핏줄이라는 개념도 옅어지고, 이웃한 제후국간에 영토분쟁도 생기고, 또한 주나라가 쇠퇴해 감에 따라 존왕양이의 정신은 점점 사라지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 살아남아 초기에 1800여개나 되던 제후국이 거의 멸망하고 전국시대에는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전국 칠웅만이 살아남아 군주를 ‘왕’(王)이라 칭하는 등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체제로 변모해가게 된다.
이 시대에 살아남은 나라와 사라진 나라의 차이가 무언지에 대해 사마천은 ‘개혁’ (改革)의 성공여부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즉 다른 나라에 먹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는 이론적 뒷받침이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수많은 이론가,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백화제방(百花齊放) 혹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가 꽃피우게 된다.
전국초기에 제일 먼저 강성한 나라는 위나라이다. 위나라의 군주인 문후[文侯]는 최초의 개혁가라 할 수 있는데 현인을 존경하고 인재의 등용에 적극적이어 오기(군사), 이극(경제), 서문표(행정) 등 수많은 전문가 그룹이 그를 도와 위나라를 강성하게 하였다. 이들 중 서문표의 지혜를 배워보고자 한다.
서문표가 ‘업’이라는 ‘현’의 태수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의 원로들에게 그들의 생활형편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일을 알게 되었다.
업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장’이라고 하는 강물의 범람 때문에 많은 피해를 겪고 있었는데 무당의 말에 따르면 ‘하백’이라는 물귀신이 노해서 그러니 매년 예쁜 소녀 한 명을 골라 하백의 신부로 바쳐야한다 하여 그 지역의 관리들은 주민들에게 은 수천 냥을 모으도록 해서 결혼식 비용으로 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수천냥 가운데 결혼식에 든 비용은 수백냥 뿐이었고 나머지는 장로 세 명과 관리들이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백성들은 자신의 딸이 하백의 신부로 뽑히지 않게 하려면 많은 돈을 기부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돈을 감당할 수 없는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딸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이 수년 동안 행해지자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서문표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집보낼 때가 되면 말해 주구려. 나도 가서 결혼식을 보리라.” 드디어 그 때가 오자 서문표는 강가에 나갔다. 마을 장로들과 아전 그리고 유지들도 모두 모였다. 무당은 나이든 여자로 여자 제자 열 명을 데리고 왔다. 그녀들은 모두 비단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우두머리 무당 뒤에 섰다.
서문표는 하백에게 시집갈 딸을 불러와서 그녀를 쭉 살펴보고 말했다. “이 여자는 도무지 예쁘지 않구나. 이래서야 하백이 노하지 않겠느냐. 무당께서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하백에게 가서 더 예쁜 처녀를 골라 오겠다고 알려주고 오시지요.” 그리고는 아전에게 명령해서 우두머리 무당을 붙잡아 물 가운데 던져 넣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어째 이리 오래 걸리나. 스승이 들어가서 않나오니 제자들에게 알아보도록 하라.” 그리하여 새끼무당 열 명을 차례로 강물에 집어 던지게 하였다. 그런 후 “왜 이리 않나오지? 오호라 무당이 여자자라서 온갖 사정을 다 말할 수 없는 모양이지?!
그러면 이번엔 세 장로께서 한 번 갔다 와 주시지요.” 이번에는 세 장로를 물속에 던져 넣었다. 서문표는 조금 있다 말했다.
“세 장로도 돌아오지 않는구나. 그러면 이번에는 아전들과 마을 유지 한 사람도 넣어 재촉해 보고 싶구나.” 그러자 모두 머리를 땅에 내동댕이치고 피를 흘리면서 용서를 청했다.
서문표는 말했다.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잡아두는 것은 아마 오래된 습관인 모양이니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라.” 관리들과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놀라고 두려워서 다시는 하백에게 시집보내자는 말을 하자 않았다.
서문표는 이렇게 개혁의 칼로 구습에 물든 모든 이들을 단칼에 숙청한 후 백성들을 동원해서 열두 개의 수로를 파고 강물을 끌어들여 밭을 개간하여 모두 물의 혜택을 보게 했다. 주민들은 풍족하고 부유해졌다. 이 일로 서문표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명행정가인 서문표도 고관들의 부패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즉 그가 임지에서의 치적을 임금에게 올리는 상계(上計)에 고가점수를 메기는 고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음으로 해서 임금에게는 항상 좋지 않은 보고만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임금이 화가나 그를 불러 그만두라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1년만 기회를 달라 간청하여 1년 후 임금을 알현하게 된다. 임금이 보니 이번에 올라온 고가점수는 지금까지 올라온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은지라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글쎄요, 저는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게 있다면 단 한 가지… 작년까지는 고관들에게 뇌물을 준 적이 없고 올해는 뇌물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마디로 그는 누명을 벗고 위문후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