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와 봉은사 판전 (板殿)

김정희의 자는 원춘, 호는 추사·완당 등 매우 많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18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823년 규장각 대교를 지냈고 1836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그 뒤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 북학의 중심인물인 박제가의 제자로서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서 북경에 들어가 그곳의 원로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중년학자 완원을 만나 스승·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고, 1848년 석방되었으나 1851년 헌종의 묘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주창자로 지목되어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풀려났다. 그 뒤 만년에 과천 등에 머물면서 시문과 서화로 자적하였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하며 고증적 태도를 견지했던 학자이다. 또 그는 서화에 두루 뛰어났으며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 (北漢山巡狩碑)를 발견·고증하는 등 금석학에도 뛰어났다. 저작으로 -예당금석과안록’ (禮堂金石過眼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완당선생전집’ (阮堂先生全集)이 전한다. 글씨는 예서(隸書)와 해서·행서를 많이 썼다. 예서는 전한(前漢) 시대의 고풍스런 예서를 바탕으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 추사 서예의 백미를 이루었고, 해서는 구양순(歐陽詢)을 위시한 당나라 해서풍에 옹방강의 서풍을 가미했으며, 행서는 붓을 틀고 꺾는 전절(轉折)이 강렬하고 붓에 먹을 많이 안 묻히고 쓴 갈필(渴筆)이 심한 특유의 개성을 이루었다.
김정희는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 봉은사 현판 ‘판전’ (板殿)
봉은사 판전(奉恩寺 板殿)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에 있는 판전이다.
정면 어칸 처마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판전(板殿)’ 두 글자가 양각되어 있는데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기의 사유로 “봉은사 판전(奉恩寺 板殿)”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
높은 단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식 맞배지붕으로 이뤄진 판전의 정면을 바라보니 ‘판전’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현판 글씨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걸려 있다. 71세의 추사가 별세 사흘 전에 썼다는 절필작 ‘판전’은 무심의 경지에 오른 추사를 보는 듯 아무런 욕심도 치장도 없다.
현판 왼쪽에 세로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글씨가 조그맣게 적혀 있다. 이 현판의 세로 글씨 가운데의 ‘과(果)’는 곧 ‘노과(老果)’를 말하는 것으로서, 추사가 만년에 이곳과 가까운 과천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호를 붙였던 것이다.
이처럼 서울 봉은사 ‘판전’ (板殿)은 추사 김정희 (1786~1856)가 죽기 사흘 전에 쓴 ‘판전’ (板殿)이란 편액이 걸린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순간에 추사가 심혈을 기울여 쓴 판전 글씨는 추사체의 완성이라 할 만큼 중요한 유물이다. 숭유억불 시대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서예가이자 유학자로 칭송받은 김정희는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글씨를 남기게 됐을까.
추사 김정희와 봉은사와의 숨은 인연으로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특별전을 갖기도 했다. 조선말 봉은사와 추사의 만남을 통해 불교와 유교와의 교류 과정을 살펴볼 수 있고,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사찰에 소장된 김정희 관련 유물도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문화재가 바로 봉은사 ‘판전’ (板殿) 현판이다.
사실 김정희 집안은 대대로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화암사를 원찰로 둘 정도로 불교와 관련이 깊었으며, 그의 부친인 김노경은 당대 최고 선지식이었던 대흥사 해붕스님과 교유했다.
집안 영향으로 김정희는 이른 시기부터 스님들과 소통했으며, 만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다녀온 이후 경기도 과천에 은거하며 자연스럽게 인근의 봉은사 스님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당시 봉은사는 주지 호봉응규 스님 주도로 화엄경을 판각하는 판전 불사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추사도 참여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판전 현판 글씨다. 무심에 경지에 오른 추사를 보는 듯 하면서, 불교와 유교의 원융한 만남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영천 은해사의 편액 불광. 추사와 은해사의 혼허 지조스님과의 교류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의 유물을 통해 김정희가 유학과 불교와의 소통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는 잘 알려진 대로 초의스님과 40여년 동안 교유했을 뿐 아니라 은해사 혼허 지조스님 등과도 교류하며 사상적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