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2세 (Flavius Iulius Constantius II, 317 ~ 361)
로마 48대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 (Flavius Iulius Constantius II, 317년 8월 7일 – 361년 11월 3일)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로마 황제중 한 명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 아들중 둘째 아들로 337 ~ 361년 재위했다.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Iulius Constantius, 317 ~ 361일)는 337년부터 361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 왕조. 처음에는 형인 콘스탄티누스 2세 (340년 죽음) 및 동생 콘스탄스 (350년 죽음)와 공동 황제로 제국을 삼분 (三分)해 통치했으나 353~361년에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황후인 파우스타 사이의 둘째 아들로 317년 일리리쿰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다. 323년~337년 아버지 밑에서 부제 (caesar)로 있었다.
337년 5월 22일 아버지가 죽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콘스탄티우스의 할아버지 즉,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에서는 4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 그중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부제의 칭호를 받은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후손들이 학살을 당한것이다. 이 대학살은 콘스탄티우스 2세 자신이 사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살해되지 않은 것은 당시 12살인 갈루스와 6살 이었던 율리아누스뿐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 명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제국을 3분할했는데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그리고 나머지 제국동부의 속주들 (트라키아 · 마케도니아 지방 · 그리스 · 아시아 · 이집트)은 콘스탄티우스가 차지했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의 이탈리아를 침범해 싸우다가 전사하자 제국은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로 양분된다. 338~350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왕인 샤푸르 2세와 혈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350년에 이르러 두 명의 제위찬탈자가 나타났다. 하나는 도나우강 지역 주둔군 사령관인 베트라니오로 일리리쿰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으로 350년 콘스탄스를 처형하고 서부 로마의 통치자임을 주장한 마그넨티우스였다.
나이수스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니슈)에서 지내고 있던 콘스탄티우스는 베트라니오를 설득해 제위를 포기하게 하고, 사촌동생인 갈루스 부제를 부제로 삼아 제국동부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마그넨티우스와 격전을 벌였다. 351년 무르사 (지금의 크로아티아 오시예크)에서 마그넨티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그넨티우스는 갈리아로 도망가 결국 353년 자결했다. 이어 콘스탄티우스는 부제인 갈루스 부제를 반역죄의 명목으로 처형하고 나중에 다시 율리아누스를 부제에 앉혔다.
357~358년 도나우 강에서 사르마티아족 · 수에비족 · 콰디족과 전투를 벌인 뒤 다시 동부 변경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샤푸르 왕과 싸우기 위해 동부로 돌아왔다. 그러나 361년 갈리아에서 복무하던 부제 율리아누스가 병사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를 받자 다시 서부지역으로 가던 중 타르수스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하고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그리스-로마 신전의 파괴를 부추겼다. 또한 동시에 수많은 아리우스 반대파 주교들을 추방하고 박해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영향력있는 반(反)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처리 문제를 놓고 형제인 콘스탄스와 대립했고 나중에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추적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Iulius Constantius)
.출생: 317년 8월 7일
.사망: 361년 11월 3일, 병사
.재위: 337 ~ 361년
.가문: 콘스탄티누스왕조
.단독통치: 형 콘스탄티누스 2세, 동생 콘스탄스와 공동황제로 분할통치했으나 353~361년 단독통치
.사인: 서부로 가던중 타르수스에서 병사
○ 생애
– 3형제가 통치하던 시기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제국을 그의 세 자식과 조카 둘에게 나눠 통치하게 하려고 했으나 자식들이 조카 두 명을 살해함으로써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조카들의 담당 구역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막내 콘스탄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바로 옆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요구했지만 콘스탄스는 무시했고, 결국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쳐들어왔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는 살해되고 말았다. 해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통치하던 지역은 콘스탄스의 영역이 되고 이후에는 막내인 콘스탄스가 사실상 선임 황제가 되고 마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였던 반면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파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역대 동서 분할 제국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콘스탄스에게 압도되어, 생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에게 함부로 하질 못했다. 아타나시우스파를 탄압하자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항의”하러 왔을 때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조치를 철회해야만 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런 상황에서도 전력을 기울여 제국 방어에 전념하고, 그러던 중 콘스탄스가 350년도에, 야심만만한 휘하 장수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된다.
–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이후
그 당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둘러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 도나우 강 중류를 담당하고 있던 사령관 베트라니오도 황제로 들어섰기 때문에 콘스탄스가 통치하던 지역에 황제가 둘이나 있었다. 베트라니오에 대해서는 항복을 권유하여 그 휘하의 병사들을 흡수했고 베트라니오 본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우를 했지만, 마그넨티우스에 대해서는 3년 동안 내전을 벌여 마그넨티우스 휘하의 병사들의 2/3 이상이 죽고 마그넨티우스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
그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카파도키아 지역에 유폐해두고 있었던 사촌 갈루스를 351년에 부제로 임명해 동방을 담당하게 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오랜 유폐 생활로 콘스탄티우스 2세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혐오했으며, 결국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354년에 정제 살해 음모죄로 처형되었다.
– 뛰어난 내치 능력과 탁월한 조직력을 겸비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영 자질이 없었지만, 조직력이 뛰어났고 책임감도 대단했다. 내치와 법률 집행에 관심을 두고 직접 관리했으며, 관료들의 탐학을 막는 법률도 여러 차례 제정했다. 또한 359년에 로마 시에만 있었던 로마 특별시장 (Praefectus Urbi)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설치하였으며 또한 Byzantine Senate (동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고 정원을 2000명으로 확 늘림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완전히 기존의 로마 시와 행정적, 법적으로 동급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트라키아 속주로부터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의 324년~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야전군 관리와 군인들 생활 상에도 관심이 많아, 황궁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던 동생 콘스탄스와는 달리 국경 지대 순행에 열의를 쏟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 있던 시간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역시 콘스탄스와는 달리 야전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그를 자기보다 뛰어난 이들을 제거하는 권모술수만 능하고 자랑거리는 집착하며, 자랑할 건 혈통 밖엔 없고 능력 있는 장교 숙청에 열을 올린 암군으로만 묘사하고 있으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군사적 공헌을 무시하고 단점만 부각시키는 이런 짓은 왜곡과 오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서 묘사되는 특유의 성격적 결함과 음험함 그리고 군사 지휘력의 무능함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갈수록 강해지는 사산조를 상대하고, 중앙군을 강화하려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프레센탈 야전군을 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으로 증설 개편하여 두 배로 늘린 것은 바로 콘스탄티우스 2세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이 군 조직 개편은 이후로 무려 사백 년 넘게 기본 틀을 유지하게 된다! 또한 그전까진 그저 말을 탄 보병에 불과했던 제국 기병들이 정말로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되기 시작한 게 그의 치하에서부터며, 기병의 비율을 대폭 늘린 것도 그의 조치다.
아미다를 잃은 것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집중적으로 부각되는데, 콘스탄티우스가 다스렸던 동방 제국은 역대 동로마 제국들 중 최약체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일리리쿰 속주가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죄다 서방 제국에게 넘겨준 상태의 동방 제국을 가지고, 한창 다시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직력과 행정적인 수완 덕택이었다. 때문에 한참 전성기에 있었고 또 역대 가장 뛰어난 장군 황제를 보유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샤푸르 2세는, 성장 동력만 낭비한 채 세월만 보내게 된다.
– 기독교 통합 노력
당시 기독교는 선친인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험악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심지어 같은 아리우스파끼리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등 (아타나시우스파도 마찬가지) 각 지역의 기독교 세력가들끼리 사분오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콘스탄티우스도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신앙은 대체로 아리우스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종교성향이 그리 강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자신의 신앙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며, 자신이 로마 유일의 황제가 된 이후 당시 분열되어 있던 기독교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재임기간 동안 여러 번 공회의를 개최하였다.
콘스탄티우스의 기독교 통합 노력은 신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교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유연성이 있었다. 그 점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았다. 그는 자주 공의회를 개최하여 주교들 간의 대화 기회를 늘렸으며, 아리우스주의와 아타나시우스주의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온건한 주장들을 모아서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경 (creed)을 작성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강경파들을 축출하고 성직을 박탈하는 한편, 유명한 기독교 명망가들을 적극 회유하였다.
이와 같은 시도는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제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던 아타나시우스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교파의 맹주였던 그는 아리우스파와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으며, 그것은 황제의 통합 의지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콘스탄티우스는 355년 그를 반역혐의로 체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지지자들로부터 체포 계획을 미리 전해 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서 이집트의 사막지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콘스탄티우스의 감시망을 피해서 이집트를 중심으로 자신의지지 세력을 공고히 하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아타나시우스를 일시적으로나마 축출한 후, 시르미움 공회의 (Sirmium Council)에서 선친 시절에 채택된 니케아 신경 (Nicene Creed)을 아리우스 주장이 많이 반영된 새로운 신경으로 대체하였으며 직권을 발동하여 채택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이 신경은 당연히 친 아타나시우스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아리우스파 강경파들은 반대로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이 너무 모호하다고 반발하였다. 결국 콘스탄티우스 사후 이 신경은 유야무야 되어 버렸으며,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지지세력들에 의해 니케아 신경이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교리로 다시 부활하였다.
한편으로 콘스탄티우스는 기독교 선교에도 열의를 보였는데, 고트족 (Goth) 선교로 유명한 울필라스 (또는 불필라, Ulfilas, Wulfila)가 바로 이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활약했던 선교사이다. 덕분에 콘스탄티우스 시절에 다수의 게르만 부족이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한편 로마 시에서 원로원 내에 있었던 승리의 제단 (Altar of Victory)를 폐쇄했다. 이는 율리아누스가 다시 살렸다가, 그라티아누스가 다시 없앴다. 다시 살리려는 로마 고위층의 여러 청원이 있었지만 그 뒤의 황제들에게 모두 거부당했다.
– 부제 율리아누스
갈루스를 처형한 다음, 355년에는 갈루스의 동생이었던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갈리아를 담당하게 한다. 이후 악조건에서도 율리아누스가 활약하는 동안, 도나우 강 일대와 동방을 담당하면서 정제로서 통치했다.
359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재침공으로 제국 동방 방위선에 있던 아미다가 점령당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반격에 나설 채비를 했고, 이 일환으로 부제 율리아누스의 주력 부대를 보내올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반발한 부제의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옹립하여 다시 내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율리아누스 측이 먼저 움직임으로써 도나우 방위선의 병력까지 접수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던 와중에 중병이 들었고, 그 상태에서 세례를 받고, 쳐들어오는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 다음 향년 만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 아미다와 니시비스의 후일담
세베루스 황제 이후로 확고히 로마의 영토로 확립되었던 니시비스는 오히려 율리아누스의 원정 실패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넘어간 후론 영영 로마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반면 아미다는 이후에 제국이 도로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아오게 되며, 아랍에게 빼앗긴 후에도 9~10세기의 반격기에 수복하여 적어도 바실리우스 2세 치하까진 제국의 수중에 있게 된다.
○ 참조 : 니케아 회의 · 콘스탄티노플 회의 · 칼케톤 공의회
1. 니케아 회의 (The CoonCil of Nicaea)
초대교회는 오랜 갈등과 시련 그리고 고난과 박해이후 313년 동방의 리카리우스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이에 맺어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회에는 새로운 활력과 최대의 자유가 찾아왔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기독교를 자유화 한 뒤 몰수된 기독교의 재산을 반환하고 교직자에게는 국비를 보조하고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하여 선포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와 혼합한 제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는 내분과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의 힘을 빌어 공존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내분을 막아야만 했는데 당시 교회 내에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약 300년 동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로 믿는 분명한 삼위일체 교리가 제정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시련과 핍박 때문에 교리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이러한 교회내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광대한 나라를 통치하려면 교회의 지지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급기야 325년 5월 20일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공회의를 니케아에서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고 그 회의는 2개월이 지난 7월 25일 까지 진행되었다. 니케아는 소아시아의 작은 동네의 보스포러스(Bosporus) 해안에 있으며 콘스탄티노플로부터는 약 45마일거리에 있다.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라는 이름은 당시 모임을 가졌던 니케아라는 지역의 지명 이름을 따라 니케아 회의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교회의 내분과 갈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감독 대표들을 소집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감독들이 회의에 참석하게하려 하였다. 그래서아프리카 시리아 폐르시아, 소아시야,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멀리는 스페인까지 총 318명의 대표들이 참가했는데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의 주교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소집통고를 받은 감독들은 장로 2명 수행원 3명 정도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 수는 약 1,500여 명이 넘는 숫자이나 그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와 체제비는 국고에서 부담을 하였다. 4세기 초엽 교회안에는 교리적인 체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아 일어난 갈등과 내분이란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아다나시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완전히 “동질”이라고 주장을 하고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이질” 이라고 주장하는 논쟁이 벌어진 결과 이 회의에서 에우세비우스의 제안대로 “동질” 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니케아 신조”가 성립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사망한 뒤에도 아리우스파는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다르다고 주장을 계속 하고 아다나시우스파는 성자와 성부는 본질이 같다고 주장을 하면서 교회내의 갈등이 그치지 않았는데 니케아 정통파 황제인 데오도시우스1세 (379-395)가 공동 신앙령을 380년 반포하고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같다는 니케아주의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며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완전히 이단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니케아 총회직후 제국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모든 이교의 제전을 금하고 올림픽 경기도 신의 제전이라는 이유로 393년 금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제 1회 올림픽이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되기 까지 1500년 동안 경기가 중단되었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97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 황제로 활약하였으나 그가 정말 기독교 황제이었는가는 의문시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가지의 분쟁은 부활주일의 문제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이 지키는 유월절과 같은날 즉 닛산월 14일에 지키고 서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요일날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춘분 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주일의 날자 문제는 오랫동안 일치된 해결을 보지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니케아 회의에서 서방교회의 손을 들어 정하였는데 “부활주일은 춘분후 만월후의 첫 일요일에 지키기로 정하였다” 이것도 교회의 통일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다.
1) 네케아 신조의 내용
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사물들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성부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부의 본질로서 비롯된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중의 빛이시오 진정한 하나님중에 하나님이시니 그는 창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일 본질로서 잉태되셨으니 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이 당에 내려 오셔서 성육신 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제3일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니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잉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무에서 그가 비롯되었다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본질 혹은 정수라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그가 창조 되었다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 교회는 저주하는 바이다. 아멘
2) 사도신경
사도 신경은 신약성경의 편집과 때를 같이하여 정해졌다. 사도 신경이란 사도들이 지은 신경이란 뜻이 아니고 사도들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 신경은 사도들이 떠난 뒤 오랜후에 정해 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전설이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
교회의 조직법과 행정규례는 시대가 변함에 다라 변천해 왔지만 사도신경만은 그 때의 신앙 고백을 지금까지 지속하여 오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 것이기에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한 사도 신경은 당대에 쌓은 영원한 금자탑이라 할수있다. 신경이란 (크리드, Creed) 란 말로 라틴어 크레도 (Credo)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다. 또한 신경이란 신앙적 조건의 설명이다. 당시 영지주의자와 교회와의 투쟁 때문에 사도 신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에 총체라고 할수있다.
사도 신경은 200년경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면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신앙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이 점차 발전하여 360년에 아리안 고백에서 처음으로 “음부로 내려가사”가 첨부되었고 750년경에 정식으로 삽입이 되었다. 또한 “성도의 교제”란 말은 650년 이후에 삽입되었으며 “영원히 사는 것”이란 말은 어거스틴이 사용한 신경에서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은 니케아시대에서 부터 일반적으로 믿어 오던 것을 좀 더 보충하여 세례문답 뿐만 아니라 그노시스 (영지주의) 이단을 위시한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를 구별하기 위한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점차 사용하게 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회의 (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는 환정지었으나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381년에 제2 기독교 총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또한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항목이 되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다만 위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계획하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신분이시며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일을 하신다.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온전히 정립되었다.
3. 칼케톤 공의회 (The Council of Chalcadon)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핵심은 삼위일체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성자와 성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을 통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바로 규명한 서방의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인정하여 정통교리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제 2격인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떻게 그의 인성과 관계될 수 있는가? 진실로 하나님이신 그가 어떻게 동시에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또한 그가 어떻게 인간적 조건하에 살 수 있으며 사람의 형체로 나타났는가?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의 문제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451년 제 3차로 세계적 종교회가 니케아 근처의 칼케톤에서 약 60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칼케톤의회에서 논의된 사항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의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성을 가진 참 사람으로 교회는 신앙할 것을 결의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은 그리스도 자신의 관계에 관하여 혼돈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는 두 성품을 가지셨지만 한인격이시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근본주의로 흐르기 쉽고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신신학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과 그 인격의 생활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는 분명이 하나님이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주의적 전통 신앙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