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너는 가능성이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었다면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현실이다. 결과와 성과로만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사회로 변한지 오래고, 우리 역시 그 속에서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도덕적 불감증이 만연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 속에 공과 과를 묻지도 않고 결과로만 보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과정 속에 부정이 있었다면 분노하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가리는 것이 정상적이다. 신앙인은 결과보다는 과정과 원인을 지향해야 한다. 지난 시간에 복의 원인에 무게를 두고 살펴본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위와 같은 시각에서 오늘날 아직도 유효하다.
‘할 수 있다’와 ‘했다’
신학자 안병무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과 ‘했다’라는 말은 삶과 죽음의 차이 만큼이나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말했다. 그는 ‘할 수 있다’는 젊음이고, ‘했다’는 죽음인데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자각의 중요성이라 강조했다. 가끔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실제로 모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는 그 일을 중단했다는 것이고, 자신의 경험을 절대시하여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어 정당화시킨다. 아울러 그가 해봤던 일에 가능성을 믿으며 꿋꿋이 일들을 일구어 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무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태도를 기회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듣는데, 핑계일 뿐이다. 역사 속에서 나오는 변절자들의 변명도 다르지 않다. 그가 속한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깨닫지 못 한 채, 위기와 장애물 앞에서 미래를 닫는 행위이다. 나이가 젊다 해도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과거 완료형으로 안주하는 사람의 미래는 닫혀 있는 것이고 노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해도 아직도 그의 생각과 행동이 현재 진행형인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후자의 속한 사람으로 성경을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열린 가능성’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요즘에도 점집이나 철학관 등 미래를 알려준다는 곳이 성행한다. 미래를 점쳐준다는 용한 무당이나 점을 보러 찾아가는 행위는 단순히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 안주하는 모습의 연장선이며, 무한한 가능성에 한계를 짓는 행위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나의 미래가 좌우되게 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기에 매력적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너는 가능성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장벽을 넘어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미 인생의 황혼의 시기에 접어든 채 시작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르를 떠날 때 75세였고(창 11:31, 12:4), 노년에는 모험보단 안정을 중시하는 인간의 경향을 감안했을 때, 그는 약속의 땅이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곳이 약속의 땅이라 정당화 하며 편안한 삶을 즐기고 삶을 마무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작 떠나려고 했을 때에도 가족이나 주변에서 ‘나이가 몇인데’, ‘가족이 몇 명인데’하며 만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에 장벽으로 보이는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난다. 아마도 안정에 취해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결핍이 그에게는 보이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현실의 안정이라는 허구성에 대해 조금씩 의문을 던지게 하신다. 진짜 안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생기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내릴 때에 믿음의 조상으로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보이지 않는 약속의 땅을 향해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인(신 26:5-10)’이었던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음을 지켰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결단을 동반한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 12:1).”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따른 데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사연이 있다. ‘네가 살고 있는 땅’, ‘네가 난 곳’, ‘너의 아버지의 집’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에 안정을 제공해준 바탕이며 조건이다. 이미 익숙한 것들이고 언제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며 눈감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보여주는 땅’은 낯선 곳이다. 하나님께는 환히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는 땅이다.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다. ‘네가 살고 있는 땅’이 이미 완결된 세계라면 ‘내가 보여줄 땅’은 열려있는 가능성의 세계다. ‘네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의 이동은 공간적, 지리적 이동일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결단이다. 가능성을 믿고 자신을 확실하게 내던지는 결단이다. 그 한 번의 결단으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다가온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러한 결단을 감행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서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길 떠나는 믿음의 표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믿음의 결단을 본 받는 것이어야 한다. 가능성을 향해 달리는 믿음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놓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아옹다옹하지 않는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보다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희망의 가능성을 믿는 민족
안주와 절망이라는 장애물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약속의 땅을 안개가 자욱한 미지의 땅으로 더욱 멀어지게 한다. 우리 민족은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희망의 가능성을 가지고 믿음의 결단을 내렸을 때,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독재로부터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희망찬 미래일 것이라고 믿는 우리 민족은 불의로부터 단절과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신앙의 목적이 더 이상 나의 안정이라는 개인적인 현실에 머무르게 할 수 없다. 안병무는 신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신앙,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그 안에서 주어지는 가능성을 가지고, 새로운 보장이 없음에도 이 차단된 세계에서 과감히 자기를 탈출시키며 이 탈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좋은 것(Good)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를 향해 위대한(Great) 발걸음을 내딛기를 소망한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