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년 3월 10일, 고려의 문관이자 무신 강감찬 (姜邯贊, 姜邯瓚, 948 ~ 1031)이 거란군 (요나라)을 맞아 구주 대첩 / 귀주 대첩 (龜州大捷)에서 대승
고려의 문관이자 무신인 강감찬 (姜邯贊, 姜邯瓚, 948 ~ 1031)은 1019년 3월 10일, 자주(慈州)와 신은현 (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 (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1019년(현종 10년) 2월에 침략한 10만여 명의 거란군을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이 귀주에서 크게 무찌른다.
구주 대첩 또는 귀주 대첩 (龜州大捷)은 1019년 3월 10일 (음력 2월 1일)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 휘하의 고려군이 요나라군을 귀주(龜州,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고려측 20만 명 이상, 요측 1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이 평야 한복판에서 맞붙은 총력 대회전이다.

– 구주 대첩 / 귀주 대첩 (龜州大捷)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일부
.날짜: 1019년 3월 10일 (음력 2월 1일)
.장소: 귀주(龜州,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결과: 고려의 결정적 승리. 이후 요나라는 성장세가 꺾여 침체기로 접어들고, 다시는 고려를 공격하지 못함
.교전국: 고려 / 요나라 (거란)
.지휘관: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 소배압, 아과달, 작고, 고청명
.병력: 20만 8천여 명 / 10만여 명
.피해 규모: 알 수 없음 / 거의 전멸, 생존자 약 1000명 미만
귀주대첩의 대승에는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의 공이 컸다.
강감찬 (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음력 11월 19일 ~ 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자 무신이다.
본관은 금주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천수현개국남 (天水縣開國男)에 봉해졌다.
1030년(정종 21)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 (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 전쟁의 배경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이 패배한 후, 서희가 담판을 벌여 고려가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갔다.
1018년~1019년 3차 침입에서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이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 경과
이에 고려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원수로, 병마판관에 김종현을 임명,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의 강민첨 대장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승전하였으나(흥화진 전투),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하지만 거란군은 자주에 있는 내구산에서 추격전을 벌인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 1만 4천 명에게 대패하고, 대동강 가의 마탄에서도 시랑 조원에게 대패하면서 1만 명의 군사를 잃게 된다.
결국 수도 개경에서 약 100리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신은현에 도착한 거란군은, 또 한번 고려군의 청야 작전에 당하고 만다. 개경에 정찰병을 보냈지만, 개경의 방어가 왕성하다는 첩보를 들은 소배압은 후퇴를 결심하게 된다.
추격하는 고려군을 막기 위해 약 300명 정도의 기병대를 배치해 두었지만, 이들은 금교역에서 고려군의 습격에 전멸하고 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퇴각하던 거란군은, 연주에서 또다시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에게 대패한다.
며칠 뒤, 거란군은 귀주를 지나게 되었다. 상원수 강감찬은 귀주에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양군은 힘을 다해 싸웠고, 쉽사리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때마침 개경에서 거란군을 추격하며 올라온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가 거란군의 후진을 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연주에서 승리한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 1만 4천 명이 정주 방향에서 귀주에 도착해서 거란의 중심부로 전원 돌격하여 고려본진과 함께 거란군을 완전포위하고 순식간에 섬멸시키니, 거란군은 완전히 참패하고 북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원수 강민첨 대장군과 기병이 반령까지 거란군을 추격, 격퇴하여 살아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 『고려사절요』권4 정종(靖宗) 12년 11월조 원수 강민첨 대장군의 귀주대첩 기록
11월.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에 거란이 들어와 노략질하였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와 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은 선봉에 나아가 힘써 격투를 벌이며 연이은 전투에서 적을 돌파하였지만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집중되어 모두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또한 대중상부 11년(1018) 거란 병사가 난입하였을 적에는 병부상서 지중추원사(兵部尙書知中樞院事)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그 공을 추념한다면 포상을 시행하기에 합당할 것이다. 공신각(功臣閣)에 모습을 그려 이로써 후대를 권면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十一月. 制曰, “大中祥符三年丹兵入寇, 西北面都巡檢使楊規副指揮金叔興等挺身奮擊, 連戰破敵, 矢集如蝟毛, 俱沒陣下. 又於大中祥符十一年丹兵入,兵部尙書知中樞院事姜民瞻爲元帥, 鼓奮擊, 大敗於盤嶺之野, 丹兵奔北, 投戈委甲, 行路隘塞. 民瞻乃斬萬級. 追念其功, 合行褒奬. 可圖形功臣閣, 以勸後來.”
고려 거란 전쟁과 귀주대첩 구국의 영웅, 원수(元帥) 강민첨(姜民瞻) 대장군의 공신 초상은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588호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귀주 대첩에 대하여 《요사 遼史》에서는 다하(茶河)와 타이하(陀二河)의 패전에서 천운과 피실의 이군(二軍)의 익사자가 많았으며, 거란의 최고 명문인 요련장(遼輦帳)의 상온(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 해리(海里) 등과 같은 고위 간부들이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기대에 어긋난 이 패전에 거란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책망하였다고 한다. 이 귀주 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다시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왔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다.

○ 강감찬의 생애 및 활동
강감찬 (姜邯贊, 948 ~ 103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군인으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국가적 영웅이다.
1019년 귀주대첩에서 10만 거란군을 전멸시키며 여요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생애 초
강감찬은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강감찬으로 남았다
5대조인 강여청 (姜餘淸)이 시흥군 (始興郡)으로 이주하여 금주 (衿州)의 호족이 되었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 거란의 1차 침공
993년 요나라(거란)의 성종은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다.
서희(徐熙)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요의 땅도 다 고려 땅이라고 주장,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내쫓고 옛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말에 설득된 소손녕은 물러갔고, 고려는 서희의 담판 결과로써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 거란의 2차 침공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거란의 3차 침공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 전쟁 이후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 (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현종 사후 사망하였다.
고려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가 되었다.
- 사후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향년 84세.
죽은 후 현종의 묘정 (廟庭)에 배향되었다.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1968년 충현사가 건립되었다.
그의 저서로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 주요 생애와 업적
출생과 배경: 현재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인 낙성대 (落星垈)에서 태어났다. 이름의 유래가 된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문관 출신 장군: 무관이 아닌 문과 장원 급제 출신의 정통 문신이었다. 전장에서 활약할 당시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의 문관으로서 총사령관인 상원수직을 수행했다.
귀주대첩 (1019년):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후퇴하던 거란군을 귀주에서 맞받아쳐 불과 수천 명만 살아 돌아가게 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고려는 이후 약 200년간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흥화진 전투 (수공): 귀주대첩에 앞서 흥화진에서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았다가 터뜨려 거란군을 기습하는 전술로 기선을 제압했다

– 설화 및 기념
- 설화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 (上元帥)가 되어 흥화진 (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대첩에서 크게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고 수많은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 관련 문화재
강감찬생가터 – 서울특별시 시도기념물 제3호.
낙성대 삼층석탑 –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 기념
낙성대공원 (낙성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곳으로,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안국사와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 3층 석탑이 있다.
강감찬 전시관: 낙성대공원 내 위치하며, 귀주대첩의 역사적 기록과 장군의 생애를 ‘별의 탄생’ 등 다양한 테마로 소개한다.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 성지): 낙성대 인근 빌라촌 사이에 실제 장군이 태어난 터를 보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 소속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은 강감찬함 (ROKS DDH-979)이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