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 5월 17일, 고려 34대 국왕 ‘마지막 고려 국왕’ 공양왕 (恭讓王, 1345 ~ 1394) 타계
공양왕 (恭讓王, 1345년 3월 9일 / 음력 2월 5일) ~ 1394년 5월 17일 / 음력 4월 17일, 재위: 1389년 음력 11월 15일 ~ 1392년 음력 7월 12일)은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 공양왕 (恭讓王)
.휘: 왕요 (王瑤)
.이칭: 간성왕 (杆城王)
.별호: 정창군 (定昌君), 공양군 (恭讓君)
.시호: 공양 (恭讓)
.출생: 1345년 2월 5일 (음력)
.사망: 1394년 4월 17일 (음력, 49세), 조선 강원도 삼척현
.능묘: 고양 – 공양왕릉 (고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6 / 삼척 – 공양왕릉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번지
.부노: 부) 정원부원군 왕균, 모) 국대비 왕씨
.배우자: 순비 노씨
.자녀: 2남 3녀 – 정성군, 숙녕궁주, 정신궁주, 경화궁주
* 고려의 제34대 국왕
.재위: 1389년 11월 15일 ~ 1392년 7월 12일 (음력)
.전임: 창왕 / 후임: 고려의 마지막 국왕
.휘: 왕요 (王瑤)
.이칭: 간성왕 (杆城王)
.별호: 정창군 (定昌君), 공양군 (恭讓君)
.시호: 공양 (恭讓)
고려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조선 태종이 올린 공양왕 (恭讓王). 휘는 요 (瑤).
창왕이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에 의해 고려의 국왕으로 옹립됐다. 바보짓도 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별짓을 다했지만 이성계 일파는 그를 무혈 선위의 도구로 사용했으며, 본색을 드러내면서 정몽주와 함께 마지막으로 반전을 노렸지만 무위로 그친 끝에 폐위되어 유배당한 뒤 사형된다.
간성으로 유배돼 간성왕으로 부르기도 한다.
○ 개요
본관은 개성, 성은 왕 (王)이고 휘는 요 (瑤)이며, 즉위전 작호는 정창군 (定昌君), 정창부원군 (定昌府院君)이다. 폐위돈 이후 공양군 (恭讓君)으로 칭해졌으며, 조선 태종이 왕으로 추증하면서 공양왕 (恭讓王)으로 일컬어졌다.

○ 생애 및 활동
– 가계
공양왕은 고려의 제20대 국왕인 신종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과 충렬왕의 서장자인 강양공 왕자 (王滋)의 손녀인 국대비 왕씨의 차남이다.
– 즉위
정원부원군 균 (鈞)과 그 부인 국대비 왕씨의 둘째 아들로서,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고려의 왕실이었으며, 외가로는 충렬왕의 4대손에 해당된다. 왕후는 교하 (交河) 사람인 창성부원군 (昌城府院君) 노진의 여식인 순비 노씨이다. 어려서 정창군 (定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폐가립진 (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써 왕위 계승자로 천거되었다.
폐가입진 (廢假立眞)은 1389년 고려의 수문하시중이자 섭정이었던 이성계가 창왕을 보위에서 내쫓아 몰아 내고 공양왕을 보위에 추대하여 옹립한 사건이다. 1389년 11월 수문하시중 이성계가 우왕의 아들 창왕을 보위에서 내쫓아 방축시키고, 종실 왕요 (공양왕)를 진짜 왕씨라 하여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공양왕 즉위 1개월 후 1389년 12월 31일 우왕과 창왕 두 폐주를 모두 신돈의 핏줄이자 가짜 왕씨 군주라 주장하여 끝내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폐가입진 (廢假立眞) 사건에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 즉, 이른바 비왕설 (非王說)은 단지 이성계 일파가 정치적 명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실상 날조된 모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친명파 신진 사대부인 이성계와 정몽주 등은 1389년 (왕창 1년)에 왕창을 폐위시킨 직후에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온건 개혁파였던 정몽주 등의 신하들은 공양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정도전 등은 역성 혁명을 꾀하고 있었고 정몽주가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 (李芳遠, 훗날의 조선 태종)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온건 개혁파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392년 (공양왕 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가 양위되어,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7월 11일에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 (恭讓君)으로 강등돼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났다.
“금왕(今王)은 멍청하고 어두워 군도(君道)는 사라졌고 인심(人心)은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사직 및 생령의 주(社稷生靈主)가 될 수 없으니, 부디 폐(廢)하여 주십시오.” _ 고려사 공양왕 세가 中. 왕대비 안씨에게 올린 배극렴의 상서
– 폐위 후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에 머무르다가 1394년 (태조 3년) 3월 14일에 강원도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4월 17일 궁촌리 마을입구 고갯길에 있는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세자 왕석과 함께 시해되었다. 1416년 태종은 공양왕 (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 능묘
공양왕의 능으로 전하는 묘소는 두 개가 있다. 공양왕의 능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 (順妃 盧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즉위 3년만인 1394년에 고릉 (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신민(臣民)들이 밀어붙여 날[予] 군(君)으로 만드니, 참으로 천수(天數)였다.
영(令)하여 군(君)을 관동(關東)에 머물게 하고 다른 동성(同姓)들은 알아서 편한 곳으로 가 생업(生業)을 하게 했다.
지금 동래 현령(東萊 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等)이 불순한 짓을 도모하여 군과 친속(親屬)의 운명을 맹인(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치게 했다.
일이 발각되어 죄를 물었다. 군은 비록 모르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대간법관(臺諫法官)들이 계속 장(章)을 올려 주청함이 12번을 넘기니, 매일마다 다투었다.
대소신료들까지 또 상서하여 다투니 난[予] 어쩔 수 없이 청을 물릴 수가 없어 따라야 한다. 군은 이를 알라!” _ 태조실록 3년 4월 17일 기록. 공양군을 교살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