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년 5월 30일, 얀 후스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의 철학자 · 신학자 · 종교개혁자인 프라하의 제롬 (Jerome of Prague, 1379 ~ 1416)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재판 통해 화형
프라하의 제롬 (Jerome of Prague, 체: Jeroným Pražský, 1379년 ~ 1416년 5월 30일) 또는 예로님 프라즈스끼는 체코의 철학자, 신학자, 종교개혁가, 그리고 교수였다.

– 프라하의 제롬 (Jerome of Prague)
.출생: 1379년, 체코 프라하
.사망: 1416년 5월 30일 (화형), 독일 콘스탄츠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
.학력: 옥스포드 대학, 프라하 카렐 대학교
프라하의 제롬 (Jerome of Prague, 1379 ~ 1416)은 15세기 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은 체코 출신의 기독교 선구적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 철학자다.
그는 얀 후스(Jan Hus)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이자 친구였으며, 마틴 루터보다 1세기 앞서 성경 중심의 개혁 운동(보헤미아 개혁)을 이끌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으로 순교했다.
제롬은 얀 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후스를 따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후스파였다.
1416년 5월 30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황제 지기스문트의 지지를 받은 대립 교황 요한 23세가 제롬 (Jerome of Prague)을 이단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했다.
그는 종종 그의 이름의 라틴어 형태인 ‘히에로니무스’로 불린다.

○ 생애 및 활동
제롬은 1379년 보헤미아 왕국 (지금은 체코 공화국)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의 카렐 대학교을 졸업하고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깊게 알게 되었다.
그는 철학자, 신학자, 종교개혁가로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고, 잘못된 교회의 부패와 교리를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속적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나오는 삶을 살았다.
1412년 고향에서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저항에 참여했고 1415년 봄에는 얀 후스를 돕기 위한 종교재판에서 그를 위해 증언하였다.
그러다가 그 역시 투옥되었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오랜 감옥생활과 긴 심문으로 한때 후스의 주장을 포기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후스가 진리의 증인임을 선언하였고 결국 1416년 5월 30일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했다.
제롬은 동료 순교자 후스에게 내려졌던 것과 동일한 형을 선고받았다.
그 결과 그는 교황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시민들의 손에 넘겨졌으나, 그 자신이 평신도였기 때문에 강등 의식은 치를 필요가 없었다.

준비된 붉은 마귀가 그려진 종이 모자가 머리에 씌워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참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실 때 그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이 모자를 쓸 것이다.”
그가 믿음을 부인하리라는 희망 하에 이틀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고, 이 기간 동안 플로렌스 (Florence) 추기경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있는 노력 없는 노력을 다 쏟아 부었으나, 제롬은 자신의 피로 그 교리에 인장을 찍기로 마음을 굳히고서 너무도 담대하게 죽음을 맞아들였다.
제롬은 형장으로 가는 길에 찬송가를 몇 곡 불렀다.
후스가 불탔었고 자신도 그렇게 처형될 바로 그 지점에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화형대를 부둥켜안았다.
그들이 나뭇단에 불을 붙이려고 등 뒤로 다가오자 이렇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내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그것을 두려워했다면 난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불이 붙었다. 제롬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처럼 삼켜 들어오는 불길의 고통에 찬송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불길 속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외침이 들려 왔다.
“불길에 휩싸인 내 혼을 그리스도께 바치나이다!”

– 제롬 순교 500주년 기념현판
체코 프라하의 제즈니츠까 거리에 우 모드레호 르바 라는 저택이 있는데 이 곳에 제롬의 기념현판이 붙어 있다.
제롬 순교 500주년인 1916년에 콘스탄츠연합 프라하 지부에서 만든 기념현판을 이 건물에 만들어 붙였는데 이 현판에는 콘스탄츠에서 화염에 싸인 장작더미 가운데 대학 가운을 입고 가슴에는 성경이 그려진 제롬을 묘사하고 있다.
이 현판에는 “제로님 선생 1416년 5월 30일 타오르는 말뚝의 화염속으로 사라지다.”라고 써있고 동판의 가장자리에는 “후스에게는 믿음의 동역자, 진리의 수호자, 예수의 증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 주요 생애와 업적
– 생애와 사상적 배경
옥스퍼드 유학과 위클리프 사상 도입: 프라하에서 태어나 카를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영국의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신학 논문들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 문서들을 직접 필사해 프라하로 가져왔다.
얀 후스와의 동역: 제롬이 가져온 위클리프의 사상은 얀 후스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제롬은 후스보다 학문적 깊이와 지적 웅변술이 뛰어난 달변가였으며, 후스는 신중하고 확고한 성품을 지녀 두 사람은 완벽한 개혁의 파트너로 활약했다.
유럽 전역에서의 개혁 전파: 그는 파리, 하이델베르크, 쾰른 등 유럽의 명문 대학들을 유랑하며 강의하고 개혁 교리를 전파했다. 대중 앞에서의 탁월한 선동력과 웅변으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성물 숭배를 격렬히 비판했다.
– 체포와 체코 민족주의 운동
쿠트나호라 칙령(1409년): 당시 독일인 교직원들이 장악하고 있던 프라하 대학교 내에서 체코인들의 표결권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여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에 섰다.
도피와 망명 생활: 급진적인 교황청 비판으로 인해 빈에서 이단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등, 유럽 각지에서 박해와 추방을 당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 콘스탄츠 공의회와 화형
후스를 향한 의리: 1414년 동역자 얀 후스가 안전 보장 증서를 받고 독일 콘스탄츠 공의회로 소환되어 구금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후스를 돕기 위해 콘스탄츠로 비밀리에 잠입했다.
체포와 고문, 그리고 철회: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프라하로 돌아가던 중 체포되어 콘스탄츠로 압송되었다. 약 1년간 악취와 쇠사슬로 가득 찬 혹독한 감옥 생활과 고문을 겪으면서, 육체적 한계에 부딪혀 결국 후스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일시적으로 철회(철회서 서명)하기도 했다.
신념의 회복과 순교: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여 석방하지 않았고, 제롬은 다시 열린 공의회 재판에서 “죽음이 두려워 동역자 후스와 진리를 부인했던 것이 내 인생 가장 큰 죄”라며 자신의 철회 선언을 당당히 취소했다. 결국 1416년 5월 30일, 얀 후스가 화형당한 바로 그 장소에서 불길에 휩싸여 숨을 거두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