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 사망해 장미 전쟁 (Wars of the Roses, 1455 ~ 1485) 종료하고 헨리 7세가 영국 국왕 즉위
보즈워스 전투를 마지막으로 장미 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다.
장미 전쟁 (Wars of the Roses, 1455년 ~ 1485년)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어졌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발병을 틈타 1453년 호민관 겸 방위관이 되어 랭커스터가의 중심세력인 서머셋 공작과 싸워, 장미전쟁을 일으켜 그를 멸하였다. 1460년에 리처드는 왕위를 요구하여 헨리 6세의 사후 왕위 계승이 승인되었으나, 랭커스터파의 반대로 리처드는 전사하였다.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는 1461년 랭커스터가를 격파하고 왕위를 획득하여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이윽고 요크가 내부에 불화가 일어나,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사후,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이 에드워드 4세의 적자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 리처드가 리처드 3세로서 즉위하였다.
이에 어머니 계통으로 왕실에 연결된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인 헨리 튜더가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장미 전쟁은 끝나고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많은 제후와 기사가 몰락하고 튜더 왕조 헨리 7세에 의해 잉글랜드의 절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장미전쟁의 구귀족 중에서도 왕권에 대하여 반항적인 부분이 거의 모두 괴멸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헨리 7세의 국가 재건사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 장미 전쟁 (Wars of the Roses)
.날짜: 1455 ~ 1485년
.장소: 잉글랜드, 웨일스, 칼레 전역
.원인: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 갈등 재점화
.결과: 요크가 리처드 3세의 사망, 랭커스터 왕가 승리, 헨리 7세 즉위로 튜더 왕조 창건
.교전국: 잉크가; 지원 세력 – 부르고뉴 공국 / 랭커스터가, 튜더가, 지원국 – 스코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지휘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 / 헨리 6세, 웨일스 대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헨리 7세, 마르그리트 당주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중세 잉글랜드 왕국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내전. 중세 잉글랜드의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 벌어진, 왕위계승권 획득을 위한 내전이다. 30년짜리지만 사실상 본격 내전은 1455년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를 든 때부터 1461년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할 때까지와, 1469년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1471년 다시 복위되기까지, 그리고 1483년 리처드 3세의 찬탈 이후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하기까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해당 기간의 사이에는 에드워드 4세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이 내전으로 귀족들의 권력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는데, 헨리 7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절대 왕정인 튜더 왕조를 건설한다.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에서 프랑스한테 패배한 후 내전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 내전이 바로 이 전쟁이다.

○ 이름의 유래
이 내전이 장미 전쟁이라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가문 모두 상징이 장미, 즉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백장미이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용어가 아니라 아이반호의 저자인 19세기의 소설가 월터 스콧이 만들어낸 것으로 1829년에 그가 집필한 글에 처음 나온다.
스콧이 이런 용어를 쓴 모티브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서 나온다고 한다.
즉, 요크 가문의 문장은 백장미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색 장미이긴 한데 둘 다 흔히 생각하는 겹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겹꽃 장미는 그 당시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겹꽃 장미는 훗날 18세기에 중국에서 월계화 품종과 저 위의 분홍색 장미를 교배시키면서 나온 것이다.
참고로 저 문장은 현재도 요크셔 주와 랭커셔 주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어이없는 상황을 거듭하는 영주들의 찬탈극 같지만 사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전대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이다.
요크와 랭커스터 가문 모두 14세기 중반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이 플랜태저넷 가문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개창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갈라져 나온 지 100년도 안 되는 셈이니 왕위를 두고 다툰 사람들의 촌수는 대부분 8촌 이내였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왕가의 집안 싸움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튜더 왕가 이전에는 모두 한 왕조로 일컫는다.
○ 배경
백년전쟁 (1337 ~ 1453년) 중 약 1370년쯤에 잉글랜드를 잘 다스리던 군주인 에드워드 3세는 나이가 들어서 국정을 운영하기가 버거워지자 살아남은 아들 중 3남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실질적으로 섭정을 맡긴다. 곤트의 존이 후계자였다면 괜찮은 계승으로 이어졌겠지만, 문제는 후계자는 따로 있었다. 후계자는 바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으로 보였고, 유력한 차기 후력자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였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굉장히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곤트의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고 슬슬 정전협정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지휘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섭정활동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흑태자가 먼저 사망하였고, 에드워드 3세마저 사망하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곤트의 존은 정식 섭정으로 임명된다. 곤트의 존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두세를 부과했고, 가난한 평민들에게는 상당히 높은 금액이 부과되자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와트 타일러의 난). 어찌어찌해서 농민봉기는 진압했지만, 잉글랜드에서 ‘곤트의 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그리고 존은 얼마 뒤에 아내의 친정인 스페인 카스티야 왕가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지자 그곳에서 왕을 해보겠다고 잉글랜드를 비운다.
섭정인 숙부도 없어졌고, 머리도 굵어진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리처드 2세조차 숙부로부터 반면교사를 못 했던 것인지 리처드 2세의 첫 번째 친정은 최악이었다. 존의 섭정시절보다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하였고, 결국 내전이 작게나마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청원파가 득세한 의회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에서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이 둘을 중재시키고 내전을 종결시킨다. 이 일로 다시 존의 위세가 높아졌고 결국 잉글랜드 국왕 자리보다 더 노른자위 작위라고 불리는 아키텐 공국까지 하사받는다. 하지만 존은 전쟁 중인 와중에 더이상 아키텐의 가치가 예전같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무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용히 충성파들의 세력을 단결시킨 리처드가 청원파들을 숙청시키기 시작했으며 곤트의 존도 왕국의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일단 자신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목숨이 저당잡힌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반하지 않고 조용히 섭정으로 지낸다. 심지어 리처드 2세가 자신의 막내 남동생인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살해하는 것도 지켜본다. 숙부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확인한 리처드 2세는 살아남은 청원파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고, 존이 사망하자 헨리의 영지 상속을 막기 위해 랭커스터 영지마저 몰수했다.
이로써 리처드 2세가 숙부와 그의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왕권을 찾았으나 왕권은 아직 불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곤트의 존이 부재했을 때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불만과 의심이 많았으며 숙청당한 청원파 잔당들은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 등지에서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왕권이 이렇게 불안한데도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 사이에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되레 반란군을 조직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급하게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를 사로잡아버렸다. 그리하여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고 랭커스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 (1399년).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잔존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헨리 4세는 이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게 왕위계승의 법칙에서 상당히 의미가 큰 사건이다. 원래 리처드 2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는 당시에 7살짜리 어린이였던 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였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차남인 클래런스의 공작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친손자다. 리처드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면,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후손이 멸절되었으니, 차남인 라이오넬의 후손으로 왕위가 넘어갈 차례였다.
그런데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이도 어리고 자신에 비하면 한참 만만한 집안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왕이 되는 게 꼴보기 싫었는지,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 위해 더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을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왕위는 군주의 아들이 군주의 남자 형제보다 우선이며,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상속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아들인 리처드 2세가 아들 없이 죽으면, 에드워드 왕자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왕위 계승자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라이오넬의 바로 아랫 동생인 곤트의 존이 후계이며, 곤트의 존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즉 여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아예 부정해버린다.
이 왕위 계승의 법칙은 동양에서라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서양에서는 꽤 생소했다. 물론 실권자인 볼링브로크의 헨리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불만이 크게 없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한다.
이를 정리한 후 헨리 4세는 죽고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1413년). 과감한 성격이었던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자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캐바른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헨리 5세의 자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왕조의 전성기를 연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후 2년 만인 1422년 8월에 전염병으로 급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였다.
하지만 헨리 6세는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했는지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 등 먼치킨들이 등장한 프랑스에 점점 캐발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1453년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마지막 보루였던 보르도가 함락당하면서 백년전쟁이 끝났다.
그렇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자 헨리 6세의 귄위는 땅에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섭정을 맡던 요크 가문과 헨리 6세의 중신, 왕비 간에 갈등의 골까지 깊어지자 요크 가문은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뒤집고 랭커스터 왕조를 연 것처럼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랭커스터 가문과 전쟁을 시작했다. 카스티용 전투로 백년전쟁이 끝난 지 고작 2년 뒤였다.
이 논리에도 나름 명분은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면 된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자녀가 없이 죽었고, 남자 형제가 없었다. 즉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하면, 에드먼드 모티머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형제 또는 그 장남이 왕위 계승자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큰누나인 앤 모티머는 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어머니였다. 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제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4남인 랭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다. 따라서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4세와 그의 후손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자신이 앤 모티머의 아들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요크공 리처드는 백년전쟁이 끝나기 직전 시기에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의 사령관이었는데, 전쟁의 패배 원인을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한 헨리 6세의 측근들에게 돌렸다. 그는 헨리 6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도 했고, 1453년 헨리 6세가 정신병으로 통치 불가 상태가 되었을 때는 호국경을 맡아 헨리 6세 및 왕비 마가렛의 측근들 (대표적으로 서머셋 공작 뷰포트 가문)을 내치기도 했다. 하지만 1455년 1월 헨리 6세는 정신을 차리고 요크 공작의 결정을 모두 되돌리고 요크 공작을 호국경에서 파면, 서머셋 공작을 복귀시킨다. 요크 공작에게서 위협을 느낀 마가렛은 요크 가문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을 결집했고, 요크 공작은 이에 자극받아 군사를 일으켰다.
○ 전개
– 요크 공 리처드의 죽음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 공작은 서머셋 공작을 죽이고 국왕 헨리 6세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전투 직후 헨리 6세는 두 번째 광증에 시달리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요크 공작은 다시 호국경에 취임, 처가인 네빌 가문과 함께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다. 하지만 1456년 헨리 6세는 두 번째로 회복했고 요크 공작을 다시 해임하는 한편, 요크 공작 세력과 마가렛이 이끄는 요크 반대파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요크 공작이 마가렛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려 하는 이상 화해는 불가능했다.
1459년 무력 투쟁이 재개되었고, 러드포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파가 패하면서 요크 공작과 네빌 가문 등은 해외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고, 조정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했다. 하지만 1460년에는 요크파가 장악한 칼레로부터 네빌 부자와 마치의 에드워드 (훗날의 에드워드 4세)가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런던을 장악, 노스햄튼 전투에서 랭커스터파에 승리하여 다시 헨리 6세를 생포, 정권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있던 요크 공작을 불러왔다. 하지만 여기서 요크 공작은 악수를 두는데, 귀족들 앞에서 옥좌에 직접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아무리 헨리 6세가 결점이 있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을 물러나게 할 생각은 없었고,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마가렛 왕비는 북부 웨일스의 랭커스터파 병력을 소집하고 스코틀랜드로부터 지원군을 받는 등 요크파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요크 공작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1460년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대패했고 요크 공작과 그의 둘째아들 에드먼드,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까지 전사했다. 마가렛 왕비는 요크 공작의 잘린 목을 요크 성문 위에 내걸고 ‘요크 공작은 요크 성이나 다스려야 한다’고 조롱했다고 한다.

– 에드워드 4세의 즉위
요크 공작의 왕위 요구는 그의 맏아들 마치 백작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고, 에드워드는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랭커스터파 웨일스 병력을 상대로 승리한 후 런던에 입성하여 에드워드 4세를 자칭했다. 런던으로부터 북진한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요크파 군대는 랭커스터파의 주력을 타우튼 전투에서 격파, 자신의 왕위를 굳힌다. 단, 헨리 6세와 마가렛 왕비,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이후 전쟁의 불씨가 된다.
.축출과 복위
에드워드 4세는 구 랭커스터파 정적들에게 관대한 편이었기에 치세 초기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인 워릭 백작 몰래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우드빌 집안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우드빌 가문원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네빌 가문과의 관계가 흔들리게 된다. 이에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끌어들여 에드워드를 납치하지만 국왕이 없는 상태의 국정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에드워드를 풀어주게 된다. 에드워드는 관대하게 두 사람을 용서하지만 이들이 다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사주했음이 밝혀지자 이들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두 사람은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에드워드 4세를 견제하고자 했고, 자신의 궁정에 있던 마가렛 왕비가 워릭 백작과 화해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이 사주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1470년 가을 워릭이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런던을 점령, 헨리 6세가 복위되었고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려 에드워드 4세는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훗날의 리처드 3세)와 함께 부르고뉴로 망명하는 처지가 된다.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처음에는 에드워드 4세를 지원하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으나, 루이 11세가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부르고뉴 침공을 계획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 병력을 지원한다. 에드워드 4세의 상륙 이후 랭커스터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진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 4세에게 합류하는 등 요크 지지파가 에드워드에게 집결하자, 에드워드 4세는 런던을 점령하고 다시 헨리 6세를 확보한 후 바넷 전투에서 네빌 형제를, 투크스버리 전투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전사시키며 승리했다. 전투 승리 직후 헨리 6세는 런던탑에서 의문사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위협받지 않았다.

– 리처드 3세의 찬탈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서 평화롭던 요크 왕가에 그의 형제인 스카 필나는 꼽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온갖 악당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인 리처드 3세의 이야기다. 희곡도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함께 시작한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숱한 위기마다 그를 충실히 보좌한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신뢰했고, 죽기 직전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자 호국경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어린 왕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는 왕의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을 호국경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하고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 리처드를 런던탑에 감금했다. 곧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정당한 결혼이 아니므로 에드워드 5세 형제는 사생아이며 글로스터 공작이 정당한 왕이라고 선포되었고, 에드워드 5세 형제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리처드 3세의 찬탈은 기존 요크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리처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의 생존자들 및 우드빌 가문 등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 상당수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후계자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와 연합하여 리처드 3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처드 3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요크 왕조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조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한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는데 리처드의 지지층 이탈만 가속시킬 뿐이었고, 헨리 튜더는 자신이 즉위하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을 포용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 리처드 3세의 사망과 헨리 7세의 튜더 왕조 창건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한 헨리 튜더의 반란군은 보스워스에서 리처드 3세의 진압군과 결전을 펼쳤다. 전투 도중 후방에 물러나 있던 헨리 튜더를 발견한 리처드 3세는 그를 죽이고 전투를 빨리 끝내기 위해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돌진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반란군에 포위당한 리처드 3세는 낙마한 끝에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왕관을 헨리 튜더가 쓴 순간을 잉글랜드에서의 중세의 끝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헨리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헨리 7세로서 튜더 왕조를 세운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 헨리 7세의 즉위
헨리 7세 (Henry VII, 1457년 1월 28일 ~ 1509년 4월 21일)는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첫 번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다 (재위 1485년 8월 22일 ~ 1509년 4월 21일).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랭커스터 가계의 마거릿 보퍼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 헨리 7세 (Henry VII)
.휘: 헨리 튜더 (Henry Tudor)
.출생: 1457년 1월 28일, 웨일스 펨브룩 성
.사망: 1509년 4월 21일, 잉글랜드 서리 리치먼드궁
.매장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문: 튜더
.부모: 부) 에드먼드 튜더, 모) 마거릿 보퍼트
.배우자: 요크의 엘리자베스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재위: 1483년 4월 9일 ~ 1483년 6월 26일
.대관식: 1485년 10월 30일
.전임: 리처드 3세 / 후임: 헨리 8세
*리치먼드 백작
.재위: 1478 ~ 1485
.전임: 에드먼드 튜더 / 후임: 폐지 (잉글랜드 왕위에 통합)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로부터 귀국하여 리처드 3세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즉위하였고,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랭커스터가 대립한 장미 전쟁을 종결지었다.
요크파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여 왕령지를 확대하였고, 의복하사 (a gift from one’s clothes), 소송방조 (aiding and abetting a suit)를 금지하여 봉건귀족의 세력을 억압하였으며, 성실 재판소를 정비하여 사회질서의 회복과 왕권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상공업을 보호 장려하였으며, 왕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등 잉글랜드의 절대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유명한 헨리 8세의 부왕이다. 원래 신분과 본명은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이다. 섭정이었던 요크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를 폐하고 스스로 리처드 3세가 되자, 리치먼드 백작이 2년 만에 반정에 성공하고 선대 왕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튜더 왕조를 개창한다.
동족상잔으로 귀족들의 반이 사라진 상태여서, 잉글랜드 어느 역대 왕조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잉글랜드는 그의 아들 헨리 8세와 손주 엘리자베스 1세 대에 제 1의 전성기를 열고 대영 제국의 토대를 놓게 된다.
당대에는 음험하고 인색한 성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고를 충실히 한 왕으로 재평가된다.
-등극 배경
튜더 가문은 원래 웨일스의 최고 귀족 출신으로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이후에도 영지와 특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전체로 치면 하급 귀족에 불과했는데 헨리 7세의 조부인 오언 튜더가 헨리 5세의 미망인 카트린 드 발루아과 결혼하면서 가문의 격이 올라갔다. 카트린의 전 남편 헨리 5세는 헨리 6세만 남기고 1421년 프랑스 원정에서 전사한다. 따라서 오언과 카트린의 장남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이 된다.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보퍼트 가문의 마거릿과 결혼해 헨리 튜더를 낳았다. 부계로는 전혀 왕실과 관계가 없지만 할머니의 혈통을 거슬러가면 까마득하게 헨리 3세와[계보] 모계로는 에드워드 3세까지 거슬러가야 왕의 혈통과 닿는다. 그러니 혈통으로만 치면 왕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장미전쟁 이후 왕족들의 골육상잔으로 인해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차례로 몰락하면서 끊어진 랭커스터 가문을 대신해 어머니의 가문인 보퍼트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요크 가문이 번성할 때는 부각되지 않은 채 브르타뉴나 프랑스 궁정을 떠돌면서 살았으나, 리처드 3세가 즉위해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살해하며 요크 가문이 분열되고 왕의 신망이 추락하면서 기회를 포착,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리처드가 신망을 잃은 것을 이용해 망설이던 주요 대귀족들의 방관과 자세력 규합을 이루어냈고 결국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를 전사시켰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리처드 3세는 자신의 형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을 무효화 시켜 두 사람의 자식들, 즉 리처드 3세 본인의 조카들마저 사생아로 선언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요크 가문 내부에서도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조카를 폐위시킨 것만으로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급기야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와 그의 아우 리처드 왕자 (에드워드 4세의 차남)를 런던탑에 감금해 무참히 살해해버리자 기존의 지지자들도 실망을 내비치고 권력기반이 분열되었다. 헨리는 리처드 3세에게 동생을 잃고 서출로 격하된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분열된 요크 가문의 지지세력을 얻어냈다. 에드워드 4세는 신분이 떨어지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여 반발을 부르긴 했지만 명군으로 불릴만큼 통치는 잘 했기 때문.
정통성이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랭커스터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혼인을 통해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결합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핏줄을 모두 이어받은 셈이라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장미 전쟁 동안 귀족들이 수없이 죽고 다치면서 아예 단절된 가문도 많았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29명밖에 남지 않았다 (튜더 왕조가 종결된 제임스 1세 때에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 가문이 30개의 오등작의 가장 아래인 남작 가문을 포함해 50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는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150년 가까이 튜더 왕조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강한 전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치세
.초기
초기에는 혈통으로 정통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치세 내내 반란시도에 시달려야 했다. 구체적으로 요크가의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링컨 백작 존 드라폴 (de la Pole),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링컨 백작은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은 안되지만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헨리에게 잠재적인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즉위 후에 정통성을 강화하고 반대파인 요크 지지자들을 누그려뜨리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또한 에드워드 5세를 죽여서 민심을 잃은 리처드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죽이지 않고 런던탑에 감금했다. 결혼하고 다음 해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적장자 아서가 태어나자 권력기반은 탄탄해졌다.
요크 가문의 공주 사이에서 적장자가 태어나긴 했지만 헨리 7세는 이후에도 10여년간 리처드 3세의 잔당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들은 런던탑에 갇힌 워릭 백작을 가짜라 주장하고 램버트 심넬이라는 야심가 소년을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왕으로 선언한다. 이후 리처드 3세의 누이 부르고뉴 공작의 미망인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아일랜드에서 6천명의 병력을 구하고 2천명의 독일용병을 잉글랜드에 상륙시키기까지 했다. 헨리 7세는 이 반란을 막기 위해 직접 런던탑에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인증(?)까지 여러번 하는 헤프닝까지 벌였다. 어쨌든 당시의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지쳐있는데다가 워릭 백작의 정체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호응이 적었고 요크셔 부근 스토크에서 가볍게 격파하며 수괴(?) 램버트 심넬까지 사로 잡았다. 심넬은 가짜 워릭 백작임을 인증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궁전의 부엌데기로 삼았다고한다. 링컨 백작 존 드라폴은 전투중에 사망했다.
이후에도 계속 또 다른 반역 시도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리처드 3세에게 형 에드워드 5세와 같이 살해당한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공이 살아있다며 플랑드르 출신 퍼킨 워백이라는 야심가를 내세웠다. 이 사람이 죽은 요크 공작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반란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컸다. 이번에는 앞서 가짜 워릭 백작을 지원한 부르고뉴 공작부인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가 시끄러울수록 매우 즐거워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와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지원까지 같이 받아냈기 때문이다.
가짜 요크 공작의 무리는 세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모두 격퇴당했다. 하지만 가짜 요크공은 도주하여 아일랜드를 거쳐서 스코틀랜드로까지 도망쳐서 제임스 4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호시탐탐 헨리 7세의 왕위를 탐냈다.
1497년에는 콘월 지방에서 가혹한 징세에 항의하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중앙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1만 5천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진격했으나 오합지졸이라 진압당했다. 그 와중에 가짜 요크공 워벡은 이를 기회로 여겨 3~4000명의 병력을 콘월에 상륙시키고 스스로를 리처드 4세로 선포하지만, 소식이 늦게 갔는지 이미 오합지졸 병력들이 진압당한 지 세 달이 넘어서였다. 이번에 워백은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처형 당한다.
이 이후로는 소소한 음모들은 있었어도 직접적인 무력 반란은 잦아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헨리는 귀족과 군대를 통솔하며 통치력을 인정받았고 반대파들에겐 가혹한 진압보다는 관대한 회유책을 쓰면서 귀족들에게 환심을 샀다. 덕분에 얼마 못 갈 것 같던 왕위는 점차 탄탄해졌다.
-노랭이 왕
사실 헨리 7세는 무력으로 왕관을 얻고, 즉위 후 10여년간 반란에 시달렸지만 군인이라기 보단 장사꾼 기질이 농후했다. 알려졌듯이 아들 헨리 8세와 대비되게 극도로 절약을 했으며 재정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정도, 치적이라면 당시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보르도 지방 포도주 수입을 하는 선박을 잉글랜드 국적 선박으로만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장사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재정도 확보하고 민심도 얻는 꿩먹고 알먹고 계책 알다시피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상인들에게 환심을 샀기에 신하들은 의회에서 통치의 기반이 되는 턴세와 파운드세를 치세내내 국왕이 마음대로 걷을수 있도록 보장해주기 이른다. 이는 스튜어트 왕조 시대까지 국왕의 주 수입원이 된다.
왕이라고 치기엔 매우 얍삽한 짓도 했는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고서 돈이 아까워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크 지지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가 결국엔 대관식을 치뤘다. 또한 장남 아서와 약혼한 아라곤의 캐서린은 장남이 죽고서도 20만 크라운이나 되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싫어서 잡아두었고, 나중엔 캐서린을 차남인 헨리와 결혼시키려고 사돈인 페르난도 2세에게 지참금을 새로 요구했지만 그가 주지 않는 바람에 결혼을 계속 미루며 캐서린을 가난하게 살 정도로 푸대접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페르난도 2세로부터 지참금을 받아 차남 헨리가 형수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장남 아서가 죽은지 2년후에 장남의 기사 서임세를 때리기도 하고, 과거 사문화된 선박세를 해군 재건 명목으로 부활시켰으며, 의회에서 가결한 전쟁을 위해 세금을 때리고 자기가 먹어버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거듭(?)… 이미 없어진지 오래된 여러 봉건의무를 세금으로 발굴(?)하고 징세관들을 임명하여 강제적으로 과세를 때리자 귀족들과 백성들로부터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나. 어쨌든 이런 행위는 오랜 내전으로 재정여력이 없던 잉글랜드 왕실을 지탱하게 했고 후임자들이 잘 써먹었다.
사실 헨리 7세의 재정은 장미전쟁으로 플랜태저넷 혈통 대귀족들이 알아서 죽어줘서 랭커스터 영지를 차지했고, 전쟁중에 요크 가문 영지도 꿀꺽한데다가 그 밑의 귀족들도 전쟁에서 죽거나 헨리 7세에게 추방, 몰수되면서 왕실 토지가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풍족했다.
-말년의 악재
1501년 장남 아서를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시켰지만 이듬해 아서가 죽고, 그 이듬해인 1503년에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8번째 아이인 캐서린을 낳다가 캐서린과 같이 죽는 악재가 겹쳤다. 이후 새장가를 가고 싶어했으나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왕비에겐 퇴짜 맞았고, 죽은 맏아들의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의 언니인 카스티야의 후아나에게 청혼해서 큰 웃음을 끌었다. 후아나는 심각한 정신병으로 유폐된 상태였고, 근친혼이 잦은 당시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 되는 개족보에다가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기에 상대에서 거부.
1509년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말년까지 세금 징수를 잘해서 총애받은 두 신하, 에드먼드 더들리[20]와 리처드 엠프슨은 백성들에게 증오받았는데, 이들은 헨리 7세가 죽자마자 민심 안정과 정의 구현을 구실로 아들 헨리 8세에게 처형당한다.
– 가계도
곤트의 존은 헨리 7세에게도 선조가 되는데, 장미전쟁을 종식시키면서 튜터왕조의 헨리 7세로 즉위하는 헨리 튜더가 바로 그의 증손녀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이었다. 즉 곤트의 존은 헨리 7세의 외고조 할아버지가 된다. 자세한것은 밑에 첨부한 헨리 튜터의 가계도를 참조하기 바란다.
헨리 5세가 1422년에 갑자기 죽자 그의 왕비였던 프랑스의 캐서린은 그녀의 총신이었던 오언 튜더와 재혼한다. 이들 사이에서는 에드먼드 튜더가 태어난다.
헨리 튜터는 마거릿 뷰포트와 리치먼드 백작인 에드먼드 튜터 사이에서 1457년에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 에드먼드는 사망하였고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어린 헨리 튜터를 두고 재혼해버리는 바람에 사생아가 되고 만다.
아버지 : 에드먼드 튜더, 1430년 6월 11일 ~ 1456년 11월 3일, 헨리 7세는 유복자이다.
어머니 : 마거릿 보퍼트, 1441년 / 1443년 ~ 1509년 6월 29일
장인 : 에드워드 4세, 1442년 4월 28일 ~ 1483년 4월 9일
장모 : 엘리자베스 우드빌, 1437년 ~ 1492년 6월 8일
처남 : 에드워드 5세, 1470년 11월 4일 ~ 1483년경
처남 : 리처드, 1473년 8월 17일 ~ 1483년경
– 자녀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아서 / 1486년 9월 20일 ~ 1502년 4월 2일 (15세) / 웨일스 공, 아라곤의 캐서린과 약혼했으나 곧 사망.
.마거릿 / 1489년 11월 28일 ~ 1541년 10월 18일 (51세),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와 결혼, 사별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 이혼
제1대 메스번 영주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
.헨리 / 1491년 6월 28일 ~¤1547년 1월 28일 (55세) / 후임 잉글랜드 국왕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 이혼 앤 불린과 결혼, 처형 제인 시모어와 결혼, 사별 클레페의 앤과 결혼, 이혼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 처형 캐서린 파와 결혼
.엘리자베스 / 1492년 7월 2일 ~ 1495년 9월 14일 (3세) / 요절
.메리 / 1496년 3월 18일 ~ 1533년 6월 25일 (37세), 프랑스 루이 12세 왕비 찰스 브랜던과 재혼
.에드워드 / 1498년경 ~ 1499년 / 요절
.에드먼드 / 1499년 2월 21일 ~ 1500년 6월 19일 / 요절
.캐서린 / 1503년 2월 2일 ~ 1503년 2월 10일 /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사망

○ 결과와 영향
기존의 다른 전쟁들, 흔히 외부의 다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보통 병력을 통솔하며 전장에 나서서 싸우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참전하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참전하는 귀족이 있어서, 전장에 나선 귀족이 전사해도 후방에 있던 귀족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더군다나 설령 그 전장에 나선 귀족이 포로로 잡히면 어지간해서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기 때문에 귀족층의 생환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 이전에 귀족층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질 좋은 장비로 무장하고 있어서 허접한 장비로 무장해서 잘 죽어나가는 부하들과는 달리 사상률 자체도 낮았다.
하지만 장미 전쟁의 경우 영국의 모든 귀족이 직접적으로 참전해야 하는 싸움이다보니 사상자 비율이 높았고, 포로로 잡는것도 살려서 보내면 또 싸워야 하는 적수가 되기 때문에 포로를 잡지 않게 되면서 귀족의 생환률이 상당히 떨어졌다. 이 때문에 장미 전쟁이 종료되어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으로 즉위할 때까지 살아남은 귀족 가문은 전쟁 전의 3할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29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는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된다. 귀족들이 내전으로 엄청나게 약해지자,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권력이 아주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장미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는 잉글랜드에서 유일한 절대왕정인 튜더 왕조를 세운다.
문제는 당시 귀족은 고등교육을 받아서 사회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고급 인력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 감소는 사회 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어졌고 결국 사회 운영에 필요한 귀족 대신 사회를 운영할 인재 수를 메우기 위해 요먼, 젠트리와 같은 평민 출신의 실력자 (제3계급)를 많이 등용하게 된다. 이는 후일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바탕이 되고 영국의 왕가 역시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규모의 혁명을 피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한편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이후로 지금까지 랭커스터 공작 (Duke of Lancaster)이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및 이후 영국 국왕이 보유한 비공식 칭호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명시적으로 랭커스터 공작의 칭호를 국왕에게 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랭커스터 공작령 (Duchy of Lancaster)은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처럼 되어있고, 관행적으로 국왕/여왕을 랭커스터 공작이라고도 부르는 등 관례가 남아있다.
반면 랭커스터 가문의 맞수였던 요크 가문의 요크 공작 (Duke of York) 칭호는 용도가 바뀌어서 주로 잉글랜드·영국 국왕의 둘째 아들에게 부여하는 칭호가 되었다. 이 관행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요크 공작의 칭호를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약 20명의 역대 요크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후손에게 물려 준 사례가 한 번도 없다.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거나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앤드루 왕자 또한 남성 상속인이 없기에 이론적으로 다음 요크 공작은 해리 왕자이다. 하지만 해리 왕자는 왕가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기에 찰스가 즉위해도 요크 공작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추후에 윌리엄이 즉위한 후에 윌리엄의 차남인 루이가 받을 가능성이 높다.
랭커스터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가 정기전을 치루는데, 서로의 특수한 관계성 때문에 장미전쟁의 영향을 받아 정기전 이름은 ‘Roses’라고 부른다.
현존하는 영국 귀족 가문들 중 가장 오래된 가문들은 이 시대와도 관련이 깊다. 영국 귀족 서열 1위인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은 리처드 3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존 하워드가 하사받은 공작위에서 기원하며,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네빌 가문은 리처드의 숙부의 계보인 애버개브니 후작으로, 네빌 가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노섬벌랜드 백작 퍼시 가문은 모계 계승을 거쳐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이어졌다. 랭커스터 왕조의 사생아 분파이자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던 서머셋 공작 보퍼트 가문은 다시 사생아를 통해 가문이 이어져 보퍼트 공작 서머셋 가문이 되었다. 이외에도 헌팅던 백작 헤이스팅스 가문, 데본 백작 코트니 가문, 더비 백작 스탠리 가문, 슈루즈버리 백작 탤벗 가문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