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1년 9월 10일, 가와나카지마 전투 제4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이 우에스기 겐신 격퇴
가와나카지마 전투 (일: 川中島の戦い)는 일본 센고쿠 시대 가이노쿠니 (甲斐国)의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과 에치고노쿠니 (越後国)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 (上杉謙信) 사이에서 북시나노 (北信濃)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지쿠마가와 (千曲川)와 사이가와 (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평지인 가와나카지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불리고 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총 5차례, 약 12년에 걸쳐 벌어졌다.
협의적 의미로의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최대 격전이 벌어진 제4차 전투 [에이로쿠 (永禄) 4년 9월 9일 (1561년 10월 17일)부터 9월 10일 (1561년 10월 18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본 전투는 양군 다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며 결국 신겐은 가장 가까운 곡창지대인 시나노 점령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말 그대로 상처 뿐인 전투가 되고 말았다.

.제1차 전투:덴분(天文) 22년 (1553년)
.제2차 전투:덴분 24년 (1555년)
.제3차 전투:고지(弘治) 3년 (1557년)
.제4차 전투:에이로쿠 4년 (1561년)
.제5차 전투:에이로쿠 7년 (1564년)
전투는 우에스기 군이 북 시나노의 탈환과 에치고 방어를 위해, 다케다군은 그에 대한 저지와 에치고 침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후 다케다 신겐이 북 시나노 지배가 계속되어 시나노 지배가 반석에 올랐기 때문에 다케다 신겐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우에스기군은 북시나노을 거의 빼앗지 못했지만, 우에스기 겐신도 에치고는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위 ‘5회 전투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견도 존재한다.
특히 다나카 요시나리 (田中義成)씨의 ‘2회 전투설’은 위 제2차 와 제4차의 전투만을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부르고 있다.

이 2차례 전투는 직접 양군이 교전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고, 다른 전투는 교전을 피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2회 전투설’을 주장하는 연구자의 의견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는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 제4차 전투는 에이로쿠 4년 (1561년)에 벌어져 ‘하치만바라 전투’ (八幡原の戦い)라고도 불린다.
간토 (關東) 출병을 준비하던 우에스기 마사토라 (上杉政虎; 겐신의 다른 이름)는 배후의 다케다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다.
제1차부터 제5차에 걸쳐 벌어진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561년 음력 9월 10일, 다케다 신겐 군 2만과 우에스기 마사토라 (上杉政虎; 우에스기 겐신) 군 만3천이 4번째 가와나카지마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지금까지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 중 최대 규모의 전투이다. 양군 합쳐 6천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 모로즈미 도라사다 (諸角虎定), 야마모토 간스케, 사에구사 모리나오 (三枝守直) 등 유력 무장을 다수 잃었다고 전해진다.

유명한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대해선, 전투의 구체적인 경과를 서술한 사료는 고요군칸 (甲陽軍鑑) 등의 군기물 이야기 (軍記物語)밖에는 없다.
그 때문에 본 내용은 사료적인 신빙성이 떨어지는 고요군칸 등 에도시대의 군기물을 소재로 항간에 알려진 전투의 경과를 서술하게 되었다.
확실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전투의 구체적 실상은 현재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중에도 묘법사기 (妙法寺記)나 다케다씨, 우에스기씨의 간죠 (感狀) 등 이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을 전해주는 신빙성이 높은 사료는 남아있어 그해 이 땅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의 작가들은 이 전투에 대해서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으나, 이것도 사료에 의거하지 않은 상상하는 부분이 많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