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7월 5일, 명나라의 12대 황제 목종 융경제 (穆宗 隆慶帝, 1537 ~ 1572) 타계
명 목종 융경제 (明 穆宗 隆慶帝, 1537년 3월 4일 / 음력 1월 23일 ~ 1572년 7월 5일 / 음력 5월 26일)는 명나라의 제12대 황제 (재위 : 1567년 ~ 1572년). 휘는 재기 (載坖)이며, 이칭은 재후 (載垕)이다. 묘호는 목종 (穆宗)이며, 시호는 계천융도연의관인현문광무순덕홍효장황제 (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光武純德弘孝莊皇帝)이다. 가정제의 셋째 아들이며 만력제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강비 두씨 (康妃 杜氏)이다.
아버지, 아들과 달리 명나라 말기의 몇 안 되는 명군이다.

– 목종 융경제 (穆宗 隆慶帝) / 장황제 (穆宗 莊皇帝)
출생: 1537년 3월 4일
사망: 1572년 7월 5일 (향년 36세)
능묘: 소릉(昭陵)
*제12대 황제
재위: 1567년 2월 4일 ~ 1572년 7월 5일 (5년 152일)
*명 유왕
재위: 1539년 2월 19일 ~ 1567년 2월 4일 (약 28년)
명 목종 융경제 (明 穆宗 隆慶帝)는 1537년 3월 4일 / 음력 1월 23일, 가정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539년(가정 18년)에 유왕 (裕王)으로 봉해졌다. 가정제의 만년기, 명나라는 내정의 혼란뿐 아니라 「남왜북로 (南倭北虜)」라 불리던 왜구와 타타르의 침공에 노출되어 있었다. 융경제는 즉위 후 가정제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가정제 시대에 간언을 하여 죄인이 되어 있던 서계, 해서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그때까지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던 도사들을 일소했다. 또 피폐한 국고를 재정비하기 위해 해외 무역을 개방하면서 왜구, 타타르 오랑캐족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무역을 인정하는 유연책으로 대외적으로도 안정되었던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융경제 자신은 그저 평범한 황제로, 재위 5년간 친정을 하다가 재위 말년에 결국 1572년 2월 29일을 기하여 재상 겸 집정대신 장거정 공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등 정무는 대학사에 의해 처리되고 있었다. 또 주색에 빠지고 향락을 추구하는 바람에 1572년 7월 5일을 기하여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 생애 및 활동
명 목종 융경제 (明 穆宗 隆慶帝)는 1537년 3월 4일 / 음력 1월 23일, 가정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539년(가정 18년)에 유왕 (裕王)으로 봉해졌다.
융경제가 즉위할 당시에는 융경제의 두 형 주재기, 주재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장자로 간주되어 자연스럽게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경제는 가정제 생전에 태자로 책봉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가정제가 도사 도중문의 주장인 이룡불상견 (二龍不相見)을 맹신했기 때문이다. 가정제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차남인 태자 주재예가 죽자 이룡불상견을 맹신했다. 대례의 의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가정제로서는 후사를 두는 것이 중요했으며, 태자를 다시 세우면 그 또한 요절할까봐 아예 태자를 책봉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융경제는 태자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즉위하게 되었다.
가정제 말기에 파면된 해서와 같은 신하를 다시 부르고, 양정화 등 가정제에 대항하다가 관직이 삭탈된 사람들의 관직을 복구시켜 주었다. 또한 융경제 시기에 유명한 신하들이 많은데 서계, 고공, 장거정 등이 재상으로 있었고, 유명한 장수로는 담륜, 척계광이나 이성량 등이 있었다.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문제점을 파악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왜구를 강력하게 진압함과 동시에 융경원년 복건순무어사 도택민이 바다의 신 마조의 고향, 미주도를 동서 해양 무역의 요충지로 삼아 개방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했다. 목종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어 조종이 제정한 법률을 과감하게 고쳐 국외 무역을 허가하였다. 국외 무역을 허가함과 동시에 명의 무역량은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당시 포르투갈 상인과 같은 외국 상인들이 중국에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한 연구에 따르면 융경제가 국외 무역을 개방한 이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입된 은의 양이 3억냥을 넘는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1/3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한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몽골의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당시 몽골의 실력자 알탄 칸은 조공무역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는 몽골족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조공을 통해 얻고자 했다. 가정 33년 백련교의 지역 교주 조전이 명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몽골로 집단 망명했다. 그는 명나라 침략을 수시로 종용했으며 침략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몽골군의 무기 개량에 큰 공적을 세워 알탄 칸이 변방을 침입할 때는 사전에 조전의 거처로 찾아가 조언을 구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조전은 아예 알탄 칸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다. 명나라에서 도망오거나 포로로 잡아온 한족을 활용하여 문자는 아는 자는 군사와 행정업무를 맡기고 그렇지 않은 자는 토지를 주고 농사를 짓게했다. 또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다판승성 (지금의 내몽고 후허하오터)을 건설했다. 그 동안 유목 생활을 하며 지냈던 알탄 칸은 이곳에 정주하며 자못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시작했다.
알탄 칸의 손자 바간나기가 명나라에 투항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알탄 칸은 황제로 등극하여 명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전을 희대의 매국노이자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조부 알탄 칸과의 갈등으로 명나라로 망명을 선택한 바간나기는 일족을 거느리고 대동 패호보에서 투항을 윈했다. 대동총병 왕숭고와 순무 방봉시는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즉시 조정에 보고 했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은 바간나기를 죽여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목종은 우리 대명국을 흠모하여 왔으므로 거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몽골에서는 알탄 칸의 아내가 명나라 조정에서 자기 손자를 죽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날마다 알탄 칸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손자를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탄 칸도 자기때문에 손자가 명나라로 달아난 것을 후회했다. 무력으로 명나라 변방을 공격하면 명나라 조정에서 손자를 풀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동으로 진격했다. 왕숭고는 몽골 기병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알탄 칸을 설득하는 게 유리하다 판단하여 백호 포숭덕을 알탄 칸 진영으로 보내 바간나기를 죽이지않고 예우해 주고 있다고 알렸다. 알탄 칸은 왕숭고의 호의에 감동하여 조전 등 그 동안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한족 출신 관리들을 명나라로 압송했다. 왕숭고도 바간나기를 돌려보내서 알탄 칸의 성의를 화답했다. 조전은 북경으로 끌려가 능지처참 당했다.
융경 5년 목종은 알탄 칸을 순의왕으로 책봉했다. 알탄 칸은 명나라 황제에게 신하국의 예의를 갖춤으로서 몽골족의 생존과 안정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있는 실리를 챙겼다. 목종은 황제로서 위엄을 갖추고 북방을 안정시키는 통치력을 발휘했다.
왜구 문제가 잠잠해진 뒤 남쪽에서 활약하던 척계광을 북쪽으로 불러들여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그 결과, 명나라의 서쪽과 북쪽 국경에서 쏠쏠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그 덕분에 타타르와의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대체로 유능한 신하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했다는 점, 근검절약하고 비교적 부지런한 편에 속했다는 점에서 좋은 황제의 자질이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황제가 늘 그렇듯이 취약점이 있었다. 지나치게 여색을 밝혀 수명을 단축한 호색한이었다.
결국 36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재위 기간은 6년이다.
황후 셋, 후궁 열일곱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4남 7녀를 뒀지만, 장남, 차남, 장녀, 차녀, 막내가 요절. 후대는 셋째인 주익균이 이었다.

○ 가족
- 조부모와 부모
조부 : 예종 헌황제(睿宗 獻皇帝) 주우원(朱祐杬)
조모 : 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 장씨(蔣氏)
부친 : 세종 가정숙황제(世宗 嘉靖肅皇帝) 주후총(朱厚熜)
모친 : 효각황태후(孝恪皇太后) 두씨(杜氏)
- 황후 <봉호, 시호, 이름(성씨),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 (장인/장모), 별칭, 비고>
.유왕비(裕王妃) 효의장황후 (孝懿莊皇后) 이씨(李氏) (추존) ? ~ 1558년 덕평백(德平伯), 이명(李銘) 덕평백부인(德平伯夫人)
.황후(皇后) 효안황후 (孝安皇后) 진씨(陳氏) 1566년 ~ 1572년 1536년 ~ 1596년 고안백(固安伯) 진경행(陳景行) 고안백부인(固安伯夫人)
.귀비(貴妃) 효정황후 (孝定皇后) 이씨(李氏) (추존) 1546년 ~ 1614년 안국장간공(安國莊簡公)
이위(李偉) 안국부인(安國夫人) 왕씨(王氏)
- 후궁 <봉호, 시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국구(장인/장모), 별칭, 비고>
.숙비(淑妃) 단정숙비(端靜淑妃) 진씨(秦氏) 진봉(秦奉)
.영비(榮妃) 장희영비(莊僖榮妃) 왕씨(王氏) ~ 1580년 왕택(王澤)
.덕비(德妃) 이씨(李氏) ? ~ 1632년 이내(李柰)
.장비(莊妃) 공혜장비(恭惠莊妃) 유씨(劉氏) ? ~ 1582년 유현(劉賢)
.단비(端妃) 동씨(董氏)
.혜비(惠妃) 단각혜비(端恪惠妃) 마씨(馬氏)
.화비(和妃) 공정화비(恭靜和妃) 조씨(趙氏)
.안비(安妃) 양씨(楊氏)
.용비(容妃) 한씨(韓氏)
.경비(敬妃) 장씨(莊氏)
.공비(恭妃) 소영공비(昭榮恭妃) 이씨(李氏)
.의비(懿妃) 우씨(于氏)
.기비(奇妃) 엽씨(葉氏)
.현비(賢妃) 정화현비(靜和賢妃) 강씨(江氏)
.공비(恭妃) 오씨(吳氏)
.경비(敬妃) 소정경비(昭靜敬妃) 제씨(齊氏)
.영비(榮妃) 소순영비(昭順英妃) 허씨(許氏)
.안비(安妃) 영도안비(榮悼安妃) 전씨(錢氏)
- 황자 <봉호, 시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자식, 별칭, 비고>
.장남 황태자(皇太子) 헌회(憲懷) 주익익(朱翊釴) 1555년 ~ 1559년 효의장황후 이씨, 요절함.
.차남 정왕(靖王) 도(悼) 주익령(朱翊鈴) 1556년 ~ 1558년 효의장황후 이씨 요절함.
.3남 황태자(皇太子) 주익균(朱翊鈞) 1563년 ~ 1620년 효정황후 이씨 8남 10녀 제13대 황제 만력제 (萬曆帝).
.4남 노왕(潞王) 간(簡) 주익류(朱翊鏐) 1568년 ~ 1614년 강목의공혜비 오씨 4남 4녀
- 황녀 <봉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부마, 별칭, 비고>
.장녀 봉래공주(蓬萊公主) 1557년 효의장황후 이씨 요절함.
.차녀 태화공주(太和公主) ? ~ 1560년 효안황후 진씨 요절함.
.3녀 수양공주(壽陽公主) 주요아(朱堯娥) 1565년 ~ 1590년 효정황후 이씨 영강백(榮康伯)
후공진(侯拱辰) 장공주(長公主)
.4녀 영녕공주(永寧公主) 주요영(朱堯媖) 1567년 ~ 1594년 효정황후 이씨 양방서(梁邦瑞) 장공주(長公主)
.5녀 서안공주(瑞安公主) 주요원(朱堯媛) 1570년 ~ 1629년 효정황후 이씨 만휘(萬煒) 대장공주(大長公主)
.6녀 연경공주(延慶公主) 주요희(朱堯姬) ? ~ 1610년 왕병(王昺) 장공주(長公主)
.7녀 서하공주(棲霞公主) 주요루(朱堯㜢) 1571년 ~ 1572년 단정숙비 진씨, 요절함.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