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7월 8일, 이탈리아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 ~ 1652 / 1656) 출생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년 7월 8일 ~ 1652 / 1656년 사이)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이다.
카라바조 화풍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젠틸레스키 시대에 여성 화가는 화가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하였고 후원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분위기에도 젠틸레스키는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구매자가 나섰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출생: 1593년 7월 8일, 로마
.사망: 1652년 – 1656년 사이, 나폴리
.직업: 화가
.스승: Orazio Gentileschi
.장르: 초상, 종교화, 역사화, 신화화
.분야: 회화
.사조: Caravaggisti
.부모: Orazio Gentileschi (부), Prudenzia di Ottaviano Montoni (모)
.배우자: Pierantonio Stiattesi
.형제: Francesco Gentileschi
.주요 작품: Judith Slaying Holofernes, Adoration of the Magi, Judith and her Maidservant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신화나 성서에 등장하는 강력하고 고통받는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다니엘서의 수산나가 두 장로에게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수산나와 두 장로》를 여러 점 그렸는데 특히 독일의 포머스펠덴에 있는 1610년 그림이 유명하다.
또한 1614-20년 작으로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디트로이트 미술 협회에 있는 1625년작 《유디트와 하녀》 역시 대표작으로 꼽힌다.
누드이건 성장을 한 모습이건 여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을 들었고 색의 표현, 구성의 짜임과 건물의 깊이감 표현 역히 특출하였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7살이 되던 해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의 지인이자 스스로가 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성폭력 피해와 법정 공방은 젠틸레스키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간의 호기심은 오랫동안 그녀를 향했다. 오늘날에는 당대의 가장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여성 화가로 평가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종종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_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서

○ 생애 및 활동
- 수업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가 등기소인 아르치비오 디 스타토 (Archivio di Stato)에서 발급한 출생증명서에는 159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토스카나 출신의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이었고 어머니는 프루텐치아 디 오타비아노 몬토니로 아르테미시아는 둘 사이의 맏이였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화실에서 처음으로 회화를 접했으며 그녀의 남동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삼년 동안 드로잉과 유화 기법, 색의 혼합을 가르친 뒤 1612년 19세가 된 아르테미시아에게 전문 화가로서 손색이 없다며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노라고 하였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풍으로 작업하였고 아르테미시아 역시 이런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소재를 보다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아르테미시아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더 선호하였다. 이 무렵 아르테미시아는 그녀의 재능에 대한 시기와 여성에 대해 전통적인 성역할을 주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획득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아르테미시아의 가장 오래된 작품은 17세였던 1610년에 그린 《수산나와 두 장로》이다. 이 작품은 중세 귀족이었던 쇠보른 가가 수장하고 있다가 현재 포머스펠덴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린 나이의 여성이 그렸다는 점이 편견을 가져와 그녀의 아버지가 도왔을 것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카라바조의 영향 외에도 당시 볼로냐에서 활동하던 안니발레 카라치의 화풍 역시 영향을 주었다. 아르테미시아의 1610년 《수산나와 두 장로》는 희롱당하는 수산나를 소재로 한 그림 가운데 피해자인 여성의 트라우마가 반영된 몇 안되는 작품이다.
- 타시의 성폭력
1611년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아고스티노 타시와 로마의 궁전인 팔라초 팔라비시니-로스피글리오시에 속한 카지노 델레 뮤즈 (Casino delle Muse, 뮤즈의 장원)의 천장화 작업을 함께 하였다. 이를 계기로 오라치오는 타시를 자신의 딸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강사로 고용하였다. 그림을 교습하면서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하였다. 이 강간에는 코시모 쿠오리라는 다른 남자도 가담하였다.
강간을 당한 뒤 아르테미시아는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손상된 명예를 덮고자 타시와 결혼하여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몇 차례의 성관계를 이어갔다. 9 개월 뒤 타시는 아르테미시아와 결혼할 뜻이 없음을 밝혔고, 아버지 오라치오는 타시를 고발하였다. 또한 오라치오는 타시가 집에 보관중이던 《유디트》 한 점도 훔쳤다고 함께 고발하였다. 타시가 아르테미시아의 “순결”을 빼앗았느냐는 것이 재판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만일 아르테미시아가 강간을 당하기 전에 이미 성경험이 있었다면 오라치오는 더 이상 고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7개월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타시가 처제와 간통을 하고 부인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 밝혀졌고 훔친 그림뿐만 아니라 오라치오의 그림들 더 훔쳐내려 했던 것도 드러났다. 재판 결과 타시는 로마로부터 추방령을 선고받았지만 선고가 실행되지는 않았다. 재판부는 아르테미시아의 증언을 검증한다는 이유로 엄지손가락을 죄는 고문 도구를 사용하여 고문하였다.
아르테미시아는 12세에 어머니를 여읜 후 남성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17세였던 1610년 아버지 오라치오가 윗층을 여성 세입자 투치아에게 세를 준 뒤로 그녀는 투치아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투치아는 타시와 쿠오리와 죽이 맞아 이 둘이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 차례 도왔다. 강간이 있던 날 아르테미시아는 투치아에게 도와달라 소리쳤으나 투치아는 못들은 척 하였고 이후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노라고 진술하였다. 아르테미시아는 투치아가 매춘부로 일하면서 이 둘과 공모하였다고 생각하였고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타시의 성폭력이 있은 뒤 2년이 지난 1612년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어머니와 아이》에는 그녀를 강간한 타시로 해석되는 아이가 낸 상처로 깊은 고통에 휩쌓인 그녀 자신을 상징하는 여성이 그려져 있다.

- 피렌체 시기
재판이 끝난 지 한 달 뒤, 아버지 오라치오는 피렌체의 검박한 화가였던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와 딸을 혼인시켰다. 피렌체로 옮겨간 아르테미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카사 부오나로티의 작업을 의뢰받게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궁정 화가가 된 그녀는 메디치 가와 찰스 1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612년에는 《성처녀와 아이》를 그렸고, 1618년에는 딸 팔미라가 태어났다. 피에란토니오와 아르테미시아 사이에는 둘 이상의 자녀가 있었으나 남겨진 기록은 없다.[25] 둘째 딸의 이름은 아르테미시아가 열두살이었을 때 죽은 어머니 푸르덴티아의 이름을 이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아르테미시아는 피렌체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고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와 같은 당대 영향력 있는 화가와 교분을 쌓아 아카데미 내에서 존중되었고, 피렌체의 사실상 지배자였던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의 후원과 함께 토스카나 대공국의 여공 크리스티나 데 로렌의 후원도 받았다. 1635년 아르테미시아가 과학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녀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언급한다.
아르테미시아에게 처음 의뢰를 준 카사 부오나로티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가문으로 당대에는 그의 조카였던 소 미켈란젤로가 가장으로 있었다. 소 미켈란젤로는 아르테미시아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며 피렌체의 여러 영향력 있는 가문에 그녀를 소개하였다. 아르테미시아는 카사 부오나로티에 《알레고리아 델린클리나치오네》 (Allegoria dell’Inclinazione, 성향에 대한 알레고리)를 그렸다.
2011년 프란체스코 솔리나스는 1616년에서 1620년 사이 아르테미시아가 쓴 편지 36 통을 발견하고 당시 그녀의 피렌체 생활과 재정 상태를 분석하였다. 편지에서 그녀는 피렌체의 귀족 프란체스코 마리아 마링기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남편 피에란토니오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편은 그저 묵인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마링기가 당대의 영향력있는 명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1620년 피렌체에서는 둘의 관계에 대한 풍문이 돌기 시작하였고 법정 문제로 비화하기 시작하자 부부는 로마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가 있다. 이 그림에서도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남성을 제압하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강조한다.
- 로마 귀환과 베네치아 시기
아르테미시아가 로마로 돌아온 1621년 아버지 오라치오는 제노아로 떠났다. 한물 가고는 있었지만 당시 로마의 화가들 사이에선 여전히 카라바조의 화풍이 대세였고 1620년까지 로마에 머물다 베네치아로 돌아간 카를로 사라체니나 바르톨메오 만프레디, 프랑스의 화가 시몽 브웨와 같은 바로크 화가들은 카라바조의 영향아래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역시 이들과 교류하면서 카라바조의 화풍을 이었다. 그러나 볼로냐를 중심으로 피에르 다 코르토나와 같은 또 다른 바로크 화풍도 선호되기 시작하였고 아르테미시아 역시 새로운 화풍을 익혔다.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의 미술 아카데미에서도 회원으로 인정받았고 이를 기념하여 자화상을 그렸다. 인문학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카시아노 달 포초가 그녀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의 화가 커뮤니티와 원만하게 지냈으나 자신의 화풍과 맞지 않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1622년 두번째 《수산나와 두 장로》를 그렸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베네치아에서 후원자가 나타나자 아르테미시아는 그리로 향했다.
- 나폴리와 영국 시기
1630년 아르테미시아는 나폴리로 거처를 옮겼다. 아마도 나폴리의 알칼라 공작 페르난도 엔리케츠 아판데리베라가 초청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이미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세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여러 화가들이 방문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나폴리에서 얼마간 지내던 아르테미시아는 1638년 런던으로 옮겼다. 아버지 오란치오가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되자 그녀를 부른 것이다.
1639년 오란치오가 갑작스레 사망한 뒤로도 아르테미시아는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궁정에 남았다가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생한 뒤 어느 시점에 나폴리로 돌아갔다. 1650년까지도 아르테미시아는 나폴리에서 편지를 발송하였으나 그 뒤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혹자는 1651년 사망하였다고 하고 대개는 1652년에서 1653년 사이 사망하였다고 추정한다. 사망 시점을 1656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미술사적 위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명이며 특히 강인한 여성을 표현한 화가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전체 작품 가운데 94%에 여성을 등장시켰고 언제나 남성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주된 인물로서 시선을 끌도록 배치하였다.
이때문에 19세기 여권 운동은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이탈리아의 평론가 로베르토 롱기는 아르테미스의 유디트에 대해 “누가 이처럼 잔혹한 여인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라며 “두 방울의 물감만으로 폭력에 얼룩진 피와 불꽃의 열기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칼자루를 쥐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여성주의는 다시 아르테미시아를 주목하였다.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 화가는 없는가?》에서 여성의 재능 부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하면서 아르테미시아의 사례를 들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페미니즘 분야에서도 유명한 인물로 꼽힌다. 이 분야에서의 평론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들에서 여성들은 “보이기 위한 몸” 으로서가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라바조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그가 보여준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조나 풍부한 색감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영향에도 불구하고, 남성 화가와 차별되는 섬세한 묘사로 유명했다.
특히 인물의 치밀한 감정묘사가 매우 뛰어났다.

○ 젠틸레스키는 왜 ‘유디트’를 잔인하게 묘사했을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 ~ 1620)는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화가로, 당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여성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오늘날에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세대 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신화와 성경 속에 등장하는 강인하거나 혹은 고통받는 여성 (예를 들어 희생자, 자살, 전사 등)을 많이 그렸고, 특히 유디트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그렸습니다.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 (Apocrypha) 중 유딧서 (Book of Judith)에 등장하는 인물로, 전쟁에서 패배할 위기에 놓인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아시리아 군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그의 목을 벤 여성입니다. 16세기부터 이탈리아를 비롯해 북유럽에서까지 상당한 인기를 끌던 주제로, 조르조네 (Giorgione),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등을 비롯한 다수의 화가들이 이와 관련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는 끔찍한 분투와 유혈이 낭자한 장면의 묘사를 보여줍니다. 그는 카라바조 (Le Caravage))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보고 이 그림에 영향을 받아 그렸는데요. 같은 주제를 다뤘지만 젠틸레스키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강인한 여성 주인공을 등장시켜 주인공이 행동하고 있는 장면을 더욱 강렬하게 연출했습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주제인 유디트 이야기부터 알아볼까요? 유디트 (Judith)는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 베툴리아 (Bethulia) 지방의 과부였습니다.
당시 베툴리아 지방은 아시리아의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의해 점령됐습니다. 유디트는 사절로 위장하고 적진에 접근했는데, 홀로페르네스가 그의 아름다움으로 매료됐습니다.
축제 중 홀로페르네스가 천막으로 들어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을 때, 유디트와 그의 시녀 아브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홀로페르네스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유디트는 홀로 페르네스의 목을 몰래 고향으로 가져갔고, 그의 죽음으로 아시리아 군은 퇴각했습니다. 베툴리아는 다시 평화를 찾게 됐죠.
왼쪽 작품에서 유디트는 그녀의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적군의 장수를 살해하고 있는 중대한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젠틸레스키는 당시 유럽에서 기대했던 여성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유디트를 폭력을 행하기로 마음먹은 강인하고 영웅적인 여성으로 그려냈습니다. 특히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인데, 전체적으로 피가 흥건한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또한, 인물들과 그들의 팔이 만들어내는 삼각형 구도가 인상적입니다.
유디트의 자세는 카라바조의 작품과 다소 비슷하지만, 젠틸레스키의 그림은 감정을 완화시킨 카라바조의 묘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특유의 드라마, 빛의 효과, 색의 혼합은 젠틸레스키의 솜씨를 증명하는 동시에 바로크 미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젠틸레스키는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가 극적인 효과도 매우 강하게 나타내곤 했습니다. 어둡고 평평한 배경을 뒤로한 채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고 있는 유디트의 위로, 왼쪽에서 내려오는 작위적인 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는 긴장감을 최고조에 달하게 하며 압도감을 줍니다. 또한, 붉은 침대 보와 새하얀 시트의 대비 역시 장면 속의 공포와 잔혹함을 부각시킵니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능동적으로 강한 확신과 의지를 갖고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고 있는데요. 이 작품에서 유디트는 자신의 행동이 위계에 어긋나거나 부도덕한 일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 결연한 표정을 한 유디트는 머뭇거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임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유디트가 장면을 지배하는 히로인으로 등장함으로써, 젠틸레스키는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의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습니다.
유디트가 젠틸레스키의 영혼이 투영된 자화상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는 젠틸레스키의 개인적 인생에서 비롯되는데요. 젠틸레스키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Orazio Gentileschi)는 당시 존경받던 화가로, 카라바조의 화풍을 따랐습니다. 젠틸레스키는 단독으로 주문을 받기 전까지 아버지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내 딸은 견줄 만한 화가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나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17살이 되던 해에 젠틸레스키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1612년 아버지의 조수인 피렌체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 (Agostino Tassi)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요.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 대한 강간 혐의와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젠틸레스키는 당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입증해야 했고, 이로 인해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타시는 제기된 모든 의혹을 부인했고, 과거에 성범죄기록이 두 번이나 있었으나 고작 8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고 가벼운 유죄판결로 풀려났습니다.
젠틸레스키는 스스로도 경험했던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에 격앙됐고, 이 시기 이후 페미니즘적인 주제를 많이 그리게 됐습니다. 젠틸레스키는 유디트를 자신에게, 홀로페르네스를 타시에게 빗대어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처벌하는 장면을 그리게 된 것이죠. 작품에 나타나는 구성은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정의를 표출할 수 있다는 그의 세상에 대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를 통해 젠틸레스키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배출했고, 여성이 경험하는 부정의에 대해 강렬하게 호소했습니다. 모든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에 이 작품은 그 자체로 다른 여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최근의 문학과 영화에서 이 작품을 젠틸레스키의 일대기와 연결했습니다. 생전에 동료 화가들과 후원자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젠틸레스키가 죽자 일부 출판물에서는 그의 재능보다는 악명에 주목했습니다. 최근에야 그녀는 비로소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화가로 복위됐습니다.
선구적인 화가 젠틸레스키의 죽음은 삶만큼이나 극적이었습니다. 작품 주문에 대한 기록들이 소실됐고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폴리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젠틸레스키의 운명이 어떻든 그의 개척 정신과 작품은 후대의 화가들 특히 여성 화가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_ 올댓아트 김도연

○ 잊혀진 여성들 – 미투 운동의 시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07.08 ~ 1653)
잊혀진 여성들 첫 뉴스레터는 미투 운동의 시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입니다. 바로크 시대를 평정한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보세요.
여성들이 미술을 공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초기 바로크 시대에 태어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23세의 나이로 권위 있는 미술 기관인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최초 여성 회원으로 임명받을 만큼 재능 있는 천재 예술가였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1593년 7월 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르테미시아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의 부친은 드로잉과 유화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카라바조풍의 강렬한 명암법과 색감을 전수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그의 부친은 자신과 벽화작품을 함께하던 아고스티노 타시 (Agostino Tassi)에게 아르테미시아의 원근법 교습을 맡겼습니다.
타시는 18살이었던 아르테미시아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했고,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 일이 커질 것 같으니 결혼을 하자고 밤낮으로 졸라댔습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피해자와 결혼하게 되면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르테미시아는 집안에서 밀어주는 최초의 여성 화가였고,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신예 예술가로서 불명예스러운 일로 유명세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결심하였고 몇 차례의 만남을 이어나갔습니다.
타시와 결혼을 약속한 지 9달이 지나고 있었지만, 타시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보다 못한 아르테미시아의 부친은 타시를 로마 법정에 고발했고, 1612년 3월 16일, 타시는 성폭행이 아닌 ‘처녀성 강탈’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르테미시아가 ‘처녀’가 아니라면 타시는 무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르테미시아는 강간을 당하기 전에 자신이 ‘처녀’였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수치스러운 검사를 여러 번 받고, 손톱 비틀기라는 끔찍한 고문도 당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9달이 넘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던 중, 타시가 아르테미시아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협박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어 마침내 타시의 성폭행 혐의가 유죄로 판결 나게 되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재판 건으로 이래저래 마음이 상했던 아르테미시아가 내놓은 첫 그림으로 그림이 공개되자 로마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습니다.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와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타시와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제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는 건 르네상스 이후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이면서 이처럼 잔인한 역할로 그려진 적은 없었지요.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에 자신을 투영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아르테미시아는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의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습니다. 그림 속 유디트는 적장의 멱을 베는 데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보는 이마다 넋을 잃을 만큼 빼어났다는 성서 속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지혜, 용기, 자신을 의지를 실행하고 관철할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건장한 육체로 해석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그림과 자주 비교되는데요. 다음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1599)와 함께 보죠.
분노 가득하고 강인한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 그리고 연대로 동참하는 하인의 모습은 남류 화가의 작품에서 온순한 여성과 수동적인 노파로 대체됩니다. 게다가 위 그림 속 여성은 근육마저 부자연스럽습니다. 적장의 목을 베더라도 여성은 얌전하고 위태로워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미켈란젤로처럼 해부학에 조예가 깊다는 사람도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여성 모델을 채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수많은 여성 나신들이 이상한 형상을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남류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신체는 물론, 여성 모델들의 신체에도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여성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장점을 활용하고 카라바조 특유의 과장된 분위기를 적절히 곁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탄생시켰고,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풍겨오는 한층 고양된 감성에 감탄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에서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37세에 나탈리로 이주하여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작업실도 가지고, 남성 화가들보다 작품 가격을 더 높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주문했던 한 고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하는데요.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_ 메일러, 2021.12.28

○ 작품
- 대표작
《아이에게 젖을 주는 성처녀》, 1616년–1618년 무렵
《성모 영보》, 1630년, 카포디몬테 박물관
《밧세바》, 1645년–1650년 무렵, 노이어스 팔레, 포츠담
《클리오: 역사의 뮤즈》, 1632년, 팔라초 블루
《다비드와 밧세바》, 1636년–1637년 무렵, 콜럼버스 미술 박물관
《류트를 연주하는 체칠리아》 , 1616년 무렵, 스파다 미술관
《삼손과 데릴라》 , 1630년–1638년 무렵
《 롯과 딸들》 1635년-1638년 무렵, 톨레도 미술박물관
《명예의 알레고리》, 1630년–1635년 무렵
- Paintings by Artemisia Gentileschi
Virgin and Child – 1609
Madonna and Child – c.1609
Woman Playing the Lute – 1609-12
Susanna and the Elders – 1610
Judith Beheading Holofernes (V.I) – 1612-13
Judith and her Maidservant – 1612-13
Judith Slaying Holofernes (V.II) – c.1620
Allegory of Inclination – 1615-16
Self-Portrait with Lute – c.1615–17
The Penitent Magdalen – c.1617-20
Lucretia – c.1621
Portrait of Gonfaloniere / Pietro Gentile – 1622
Judith and Her Maidservant with the Head of Holofernes – c.1625
Self-Portrait – c.1630
St. Cecilia – Date Unknown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