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3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 ~ 1821)와 파리 사교계 여왕 조세핀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 ~ 1814) 결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파리 사교계 여왕 조세핀은 1796년 3월 9일 결혼한다.
나폴레옹 1세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코르시카 소귀족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전례 없는 승리들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정치적 지지 세력을 규합한 그는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 나아가 종신통령에 취임한다.
그 사이 1796년 3월 9일 파리 사교계의 여왕 조세핀과 결혼한다.

– 나폴레옹의 결혼과 자녀
나폴레옹은 1793년에 코르시카를 떠나 마르세유에 정착하면서 그곳에 유복한 상인 집안인 클라리 가와 친해진다. 형 조제프는 1794년 8월에 클라리 가의 마리 줄리와 결혼하였고, 나폴레옹은 마리 줄리의 여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연인 사이가 되어 95년 4월에 약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데지레와 파혼하고, 귀족의 미망인으로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한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1796년 3월 9일에 결혼한다.
황제에 즉위한 이후 항후 조제핀이 세습을 위한 2세를 낳지 못하자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는 이듬해인 1811년에 로마왕 나폴레옹 2세을 낳게 된다. 하지만 장인 프란츠 1세는 사위인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망국의 군주로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나폴레옹의 약혼녀였던 데지레는 1798년 8월 장 베르나도트와 결혼하였다. 이듬해 아들을 낳은 그녀는 나폴레옹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 줄것과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했다. 나폴레옹은 아이를 위해 ‘오스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의 남편인 장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 대해 비협조적이었기에 나폴레옹은 그와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장 베르나도트는 1810년에 스웨덴 왕국의 섭정이 되어 스웨덴을 통치하면서부터 점진적으로 반-나폴레옹 정책을 펼쳤고 끝내 나폴레옹의 몰락에 앞장서는 인물이 되었다.
– 경매에 나온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혼인서약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 그의 첫 부인 조세핀의 혼인서약서가 경매에 나왔다.
프랑스 경매업체 오세나트가 2014년 9월21일 프랑스 파리 서부 외곽에서 열리는 경매에서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결혼서약서가 출품된 바 있다.
결혼서약서에는 1796년 3월 8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서명이 적혀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서약서 작성 다음날 진행됐으며 서약서는 3월18일 파리에 제출됐다.
역사 속에서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을 한 연인으로 기록돼 있지만 서약서에서는 꽤 실용적인 모습이 보인다. 문서에는 “상대방의 부채와 담보에 대해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두 사람의 공동 재산은 없다”고 적혀있다.
열정적인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결혼은 부부가 아이를 갖는 데 실패하면서 1810년 무효가 됐다.
○ 나폴레옹 1세의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 ~ 1814)
조제핀 드 보아르네 (프: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년 6월 23일 – 1814년 5월 29일)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내로, 프랑스 제국의 황후면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한때 형수이자 장모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외할머니이다.

– 조제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휘: Marie Josèphe Rose Tascher de La Pagerie
.출생: 1763년 6월 23일, 프랑스 왕국 마르티니크
.사망: 1814년 5월 29일 (50세), 프랑스 제1제국 뤼에유말메종
.매장지: 프랑스 뤼에유말메종 생피에르 교회
.가문: 보아르네 가문
.배우자: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 프랑스 황후
.재위: 1804년 5월 18일 ~ 1810년 1월 10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 후임: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 이탈리아 왕비
.재위: 1805년 5월 26일 ~ 1810년 1월 10일
.후임: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 생애 및 활동
조제핀은 1763년 6월 23일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인 마르티니크 섬의 트루아질레 태생으로 라 파제리의 기사이자 영주인 조제프 가스파르 타셰 드 라 파제리와 마리 클레르 데 베르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 라 파제리 (Marie Josèphe Rose Tascher de la Pagerie)였다. 유복한 귀족 집안의 딸로 조각 같은 미모를 소유했지만 낭비가 대단히 심했다.
1779년 12월 13일에 프랑스군 장교였던 자작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결혼해 그와의 사이에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여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를 낳았지만 결혼 초반부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아 1783년에 끝내 이혼했다.
나중에 자작 보아르네는 프랑스혁명기인 1794년 7월 23일에 처형됐다. 이혼한 후 마르티니크 섬의 친가로 돌아왔던 조제핀도 섬에서의 일어날 듯한 폭동을 염려하여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체포되어 투옥되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 8월 3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 조제핀은 파리 사교계에서 미모 덕분에 명성을 날려 총재정부의 주역이었던 폴 프랑수아 바라스를 포함한 몇몇 정치인의 애인으로 지내던 중 자신보다 6살 어린 나폴레옹의 구혼을 받아들여 1796년 3월 9일 결혼하였다. 이 결혼을 두고 외젠은 반대하였고 오르탕스는 찬성했으나 그녀는 나폴레옹을 풍류를 모르는 시시한 남자라고 보았기에 애인을 몰래 만들어 불륜을 반복해 저질렀으므로, 나폴레옹의 가족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집트를 원정하던 중에, 조제핀과 기병 대위 이폴리트 샤를 간의 불륜을 눈치 챈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귀국한 후 조제핀과 이혼하기로 결심했으나 그녀와 전 남편의 소생인 외젠과 오르탕스의 눈물 어린 탄원과 조제핀을 향한 자신의 열정 있는 사랑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제핀은 나폴레옹을 진지하게 사랑하게 되어 가지만, 나폴레옹의 조제핀을 향한 열렬한 애정은 차갑게 식어가면서 다른 여성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다.
덧붙여 이 직후 그의 쿠데타를 목전한 요인 대책에는 조제핀도 한 역할을 한 듯하다. 1804년 12월 2일 조제핀은 남편에 의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프랑스의 황후 자리에 올랐으나 나폴레옹의 친가 식구들은 그녀를 여전히 좋아하지 않았기에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조제핀이 전 남편인 자작 보아르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외젠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 되어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의 딸 아우구스테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로 조모와 동명인 조제핀은 스웨덴 왕 칼 1세의 왕비가 되었으며, 딸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의 남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결혼하여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었고 나폴레옹 3세가 되는 루이 나폴레옹 등 아들 3명을 낳아서 그녀는 현재 벨기에·스웨덴·덴마크·그리스·노르웨이·룩셈부르크·리히텐슈타인·모나코 왕실의 직계 조상이 된다.
황후로 즉위한 조제핀의 사치는 황후가 되기 전보다 훨씬 심해졌는데 그녀가 사용한 드레스는 900여벌, 장갑은 1000켤레, 구두는 500켤레가 넘었다. 한해에 장갑 985개와 신발 520개를 주문하기도 했는데 그 비용을 충당하려고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는 비밀로 자식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치 덕에 파리의 의상실과 보석상은 떼돈을 벌었으며, 프랑스의 웅장하고 화려한 궁정은 타국보다 활기를 띠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사치를 좋아하는 경박한 여자라는 악평을 듣게 되었지만 본인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조제핀은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는데 나폴레옹의 애인들은 자녀를 여럿 낳았기에 그녀의 입지는 계속 위축되었다. 결국 1810년 1월 10일에 적자가 낳지 못한다는 실사를 이유로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한다. 이때 조제핀은 크게 충격받아 오열을 터뜨리며 실신하였다. 그 후, 그녀는 파리 근교의 궁전 말메종 (Malmaison)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죽을 때까지 황제의 아내로서 황후라는 칭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장미를 무척 좋아했던 그녀는 250 종류의 장미를 궁전 말메종의 뜰에 심었다. 또 스스로 장미를 채집하러 돌아다닐 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을 배려해 자신이 모은 장미를 식물 화가 르두테 (Pierre Joseph Reduote, 1759-1840)에게 그리게 하여 기록에 남겨 놓았다. 1814년 5월 29일, 폐렴으로 죽었다. 그녀가 죽기 전 유언은 “보나파르트, 로마왕, 엘바섬”이었다 — 그 나폴레옹이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1821년 5월 5일 죽기 전 유언은 “프랑스, 육군, 육군 총수, 조세핀‥”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사흘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방에만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성당 생 피에르-생 폴 (Saint Pierre-Saint Paul)에 안치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