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3월 17일, 일본 카쿠레키리시탄의 ‘신도 발견’ (信徒発見)
‘신도 발견’ (信徒発見)은 1865년 3월 17일,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에서 250여 년간 숨어 지내던 잠복 기리시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처음으로 드러낸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 사건의 배경 및 전개
.일시 및 장소: 1865년 3월 17일 낮 12시경, 일본 나가사키시 오우라 천주당.
.주요 인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티장 (Petitjean) 신부와 우라카미 마을의 잠복 신자들.
.상황: 당시 일본은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진 상태였으나, 개항 후 외국인을 위해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에 마을 주민 10여 명이 찾아와 신부에게 “우리들의 마음은 당신의 마음과 같습니다”라며 자신들이 신자임을 고백했다.
– 역사적 의미
.기적의 사건: 로마 교황청은 이 사건을 ‘동방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워했다. 선교사도 없이 7대에 걸쳐 약 250년 동안 박해를 견디며 신앙을 유지해 온 사례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계유산 등재: 이 사건의 무대가 된 오우라 천주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개관
1858년 개항 조약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8]의 베르나르 프티장 (Bernard-Thadée Petitjean.1829 ~ 1884) 주임신부는 일부러 성당 근처에서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열심히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서양에서는 일본인 기독교인들은 박해로 소멸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딱히 카쿠레키리시탄의 주목을 이끌어내려고 이런 것은 아니였고 순수하게 일본인 신도를 새로이 모집하려고 한 것이였지만, 이미 기독교 박해는 공문화된 법으로 그 당시에도 유효한 상태였고 전술한대로 외국인에 한해 허용된 것이기 때문에 순수 일본인 신도들은 기독교에 귀의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성당에 구경왔던 마을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교회에 있는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산타마리아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로부터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이 “일곱 세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가 보낸 콘페소르 (컨페서/고해사제)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 (컨페션)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초 (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고 예언하였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에 전설 속의 그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이러한 예언 행위는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카쿠레키리시탄이 일본 토속적인 면 또한 강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고립된 교리만을 알고 있던 카쿠레키리시탄이 그런 것을 알 리는 없었으니…

1865년 4월 12일 (元治 2년 음 3월 17일) 금요일, 산파 이사벨라 유리가 가족과 동네 사람 13 ~ 15명 (모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 삼아 성당에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장 신부에게 “산타마리아를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를 차례로 물었고, 이에 프티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사제는 결혼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사벨라 유리는 세 번째 질문으로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전례력을 지키냐는 의미의 질문으로, 신부는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세 가지 질문이 ‘조상의 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로 카쿠레키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어 왔기에 이사벨라는 이 질문들을 신부에게 건넨 것이다.
이사벨라 유리는 신부의 세 가지 대답을 듣고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마지막 질문으로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산타마리아의 성상은 어디에?)”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 신부가 성모상으로 안내해 주자, 이사벨라 유리를 비롯하여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성모상 앞에 몰려들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조상들이 ‘일곱 세대가 지나면 다시 오리라’고 믿었던 ‘콘페소르’가 프랑스에서 온 그들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들은 신부의 답을 듣고 성모상을 보고서야 비로소 감격하여 꽁꽁 감추어 두었던 그들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1865년 4월 12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으로, ‘신도 발견 (信徒発見)’이라고 부른다. 프티장 신부는 이를 당시 요코하마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일본 외부에서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은 진작에 절멸되었으리라고 보았고, 이런 신도들이 일본에 남아있으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 사건을 전해듣고 감격에 겨워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867년 (慶應 3년) 카쿠레키리시탄들의 집단 거주지인 우라카미 (浦上) 지역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함으로써 그 존재가 막부에게까지 드러났다. 카쿠레키리시탄 대표로 봉행소에 불려간 다카기 센에몬 (高木仙右衛門) 등은 분명하게 신앙을 표명했지만 나가사키 봉행은 막부에 보고는 하되 당장은 이들을 마을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막부의 명령을 받은 밀정이 우라카미의 신도 조직을 조사한 뒤에야 박해가 시작되어 7월 14일 (음 6월 13일) 심야 비밀 교회당을 관리가 급습한 것을 시작으로 다카기 등 신도 68명이 일제히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는 제4차 우라카미 키리시탄 적발 사건이 벌어진다. 이러한 처사에 당연히 서양 공사들은 항의했다.

에도 막부의 뒤를 이은 메이지 신정부 또한 키리시탄 박해를 철폐하지 않아서, 1868년 3월 나가사키에 부임한 사와 노부요시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우라카미의 신도들을 불러내 배교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처음에는 중심 인물들의 처형까지 고려했지만 외국 공사들이 강하게 항의하여 쓰와노 (津和野), 하기 (萩), 후쿠야마 (福山)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 도착한 그들은 노골적인 고문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도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넣어주었고, 더운 지역에서는 굴비 엮듯 엮어 좁은 방 안에 밀어넣고 추운 곳에서는 추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식으로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배자 3394명 중 무려 662명이 순교했다.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 ‘그리스도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도 없다.’ 하며 메이지 신정부를 압박했다. 이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실질적으로 키리시탄 박해였음을 에둘러 시인했다.
메이지 정부 내 존황양이파 인사 가운데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주지 않을 거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해 온 세월이 길고 집요했다보니 민중들 사이에서도 사교 (邪敎) 취급을 받는 바람에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한편 오랫동안 일본 민중들 사이에 신앙해오던 불교에 대한 강제적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 신사에 대한 강제 통폐합 정책으로 인한 불교계나 기존 신토계의 반발에 직면했던 메이지 정부가 마침 ‘공공의 적’ 취급을 받던 키리시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그들의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과 교류하기를 희망하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 안 해준다고 나오니… 결국 1873년 2월 24일 키리시탄들이 풀려났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고 제국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였고, 대다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 또한 가톨릭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믿던 그 신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제도권 가톨릭 교회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박해를 피해 숨어서 성직자도 변변한 경전도 없이 오로지 세대를 거쳐 구술로 신앙이 전달된 세월이 워낙 길어서인지 카쿠레키리시탄의 전승도 많이 변해서 “조상님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원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 교회로의 원복을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남는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 (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은 일본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급이고, 인류학에서도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꼽힌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카쿠레키리시탄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공동체의 원로가 구전으로 전수받은 세례성사의 라틴어 경문을 낭송하며 세례를 베풀어 왔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세례성사는 받는 이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만 충족된다면 무조건 유효한데, 세례를 줄 때 필요한 라틴어 경문이 구전 과정에서 변해버렸으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천주교 기준으로 유효한 세례라고 인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체적으로 받은 세례가 교회법적으로 유효하다면, 세례성사는 평생 한 번만 받아야 하기에 다시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도 심하던 곳에선 간혹 갓난아기가 세례를 2번 받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유효한 세례는 평생 한 번이라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확고하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 성직자들은 카쿠레키리시탄들의 세례 경문을 확인하여 라틴어 발음이 정말 심각하게 변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받은 세례를 인정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참고 = 나무위키,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