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8월 30일, 일본의 문호 구니키다 돗포 (国木田独歩, 1871 ~ 1908) 출생
구니키다 돗포 (国木田独歩, 1871년 8월 30일 ∼ 1908년 6월 23일)는 메이지시대에 활동한 일본 소설, 낭만시 저자이며 일본 자연주의의 발명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 쿠니키다 돗포 (国木田独歩, Doppo Kunikida)
.출생: 1871년 8월 30일, 일본 지바현 조시시
.사망: 1908년 6월 23일, 일본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
.배우자: Haruko Enomoto (1898 ~ 1908년), Nobuko Sasaki (1895 ~ 1896년)
.자녀: Torao Kunikida
.학력: 와세다 대학
.저서: Selected Stories of Doppo Kunikida, River Mist and Other Stories, 무사시노 외, Musashino
돗포의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잔잔하면서도 인간의 심부를 해부하는 예리함, 내면의 자신과 직면하게 만드는 강한 흡입력, 스토리의 전개에 따른 의외성과 진실의 보편성을 아우르는 문학적 균형 감각을 갖추고 인생의 해답을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 생애 및 활동
1871년 치바 (千葉) 현에서 태어났다. 이때 아명은 가메키치. 이후 테츠오로 개명했다.
하지만 돗포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이미 가정을 꾸린 사람이었고 1874년에 조모의 사망으로 잠시 가족을 두고 효고현으로 갔다가, 초시에 있던 돗포와 돗포의 어머니를 불러 함께 생활하였다.
학력은 도쿄전문학교 [東京專門學校, 현 와세다 (早稻田)대학] 영어정치과를 중퇴했다.
‘돗포 (独歩)’는 필명으로, 혼자서 걷기를 좋아했던 고독한 성향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후 1876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돗포의 어머니를 본처로 삼았으나 돗포는 13세때 적자로 올라가기 전까진 호적 상엔 양자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다 부친이 행정관의 관료가 되어 야마구치 현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근무지 이동에 따라 지방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5년에 야마구치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제 개혁으로 중퇴하였고 도쿄로 상경해 법관 학교를 다니던 중, 1889년에 도쿄전문학교에 영어보통학과에 입학했다.
1년 뒤 1890년에 영어정치학과로 전과. 하지만 1891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야마구치 현으로 내려와 사숙을 하며 영어 및 작문, 수학을 가르쳤다.
1년 뒤 일가가 야나이로 이주하는 바람에 사숙은 폐쇄됐다. 익년에 돗포는 자유사에 입사했으나 2개월만에 그만둬야했다.
그후 오이타 현의 사이키의 쓰루야 학관에서 교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894년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기사를 냈고, 1년 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종군기자 만찬회에 들렸다가 만난 여성인 사사키 노부코에게 호감을 품게 된다.
둘은 주변의 반대를 부릅쓰고 결혼하였으나 가난한 생활을 못 견디던 노부코의 가출로 반년 만에 이혼했다.
그러나 돗포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는데 바로 1897년에 노부코는 돗포의 딸을 낳았고 그 딸은 다른 집에 입양됐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걸 전혀 몰랐다가 그 일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1897년부터 ‘겐 노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898년에 무사시노를 발표하였고 이듬해 8월 1년간 교제하던 에노모토 하루코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집필로는 돈을 벌수 없었기에 호치신문사에 입사했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히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죽음’, ‘두 소녀’, ‘사슴사냥’, ‘강 안개’등의 단편 소설들을 발표했다.
1901년, 민세이신문사에 편집장으로 입사하고 단편집 무사시노를 간행했으나 주목은 받지 못했다.
게다가 하필 신문사주였던 정치인이 피살되는 바람에 담당하던 신문이 폐간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신문이 폐간한 뒤에 1902년 처가에 아이와 아내를 맡겨놓은 채 가마쿠라에 홀로 칩거하며 집필에 집중하였는데, 이 시기에 돗포는 ‘순사’, ‘도미오카 선생’, ‘그림의 슬픔’, ‘소년의 비애’, ‘가마쿠라 부인, ‘주중일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2월에 도쿄로 다시 올라와 동양화보에 창간 편집을 하고나서 뒤를 이어, 돗포사를 설립했는데 돗포사는 1906년 파산하고 만다.
게다가 또다른 불행이 찾아왔는데 1906년에 폐결핵 징후가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1908년, 병의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바로 그 해 6월 23일에 37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70여 편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시 (詩), 고백론,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썼다.
일본 근대문학사에서는 ‘천부적인 단편 작가’로 불린다.
유일한 장편소설인 ≪폭풍 (暴風)≫을 연재하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병이 악화되어 1908년 짧은 인생의 막을 내렸다.

- 작품 활동
작가 다야마 가타이 (田山花袋), 야나기다 구니오 (柳田國男) 등과 친교를 맺었고, 데뷔작은 청일 전쟁 종군기인 『애제통신 (愛弟通信)』(1894)이다. 대표 작품으로 자연 친화적인 시 「돗포 읊다(獨步吟)」(1897) 등과 사상 소설 「잊을 수 없는 사람들 (忘れ得ぬ人人)」(1898), 「쇠고기와 감자 (牛肉と馬鈴薯)」(1901), 자연을 재발견한 명문 「무사시노 (武藏野)」(1898) 등을 발표하고, 후기에 「봄 새 (春の鳥)」(1904), 「대나무 쪽문 (竹の木戶)」(1908)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맡는다.
잡지 『부인화화보 (婦人畵報)』(현존)의 창간자, 편집자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작가 후반기에 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등이 돗포 작품을 높이 평가했고,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 이광수는 1900년대 초 도쿄 유학 시절 돗포의 단편을 애독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893년부터 일기 『거짓 없는 기록(欺かざるの記)』을 쓰기 시작해 사후에 출판된다.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 (德富蘇峰)의 지인이자 개화기 작가인 야노 류케이 (矢野龍溪)에게 소개받아 오이타 현(大分縣) 사이키(佐伯) 소재 쓰루야학관(鶴谷學館)의 영어 및 수학 교사로 부임(1893. 10), 이듬해 8개월 만에 퇴직한다.
1894년, 『청년문학 (靑年文學)』에 참가, 출판사 민우사 (民友社)에 입사해 도쿠토미 소호 (德富蘇峰)가 1890년에 창간한 『국민신문(國民新聞)』의 기자가 된다.
1894년 청일 전쟁 해군 종군 기자로 참가해, 남동생에게 부치는 서간체 형식으로 전쟁 르포 『애제통신 (愛弟通信)』을 연재해 ‘국민신문 기자 구니키다 테쓰오 (國木田哲夫)’로서 일약 유명해진다.
귀국 후 1895년 11월, 기독교인 집안의 사사키 노부코 (佐佐城信子)와 만나 열애 끝에 도쿠토미 소호의 주례로 결혼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곤궁한 생활 때문에 귀향해 부모와 동거하게 되는데 이듬해 노부코 (信子)가 실종되어 협의 이혼하고, 그 충격으로 실의에 빠진다. 나중에 이를 소재로 시라카바 (白樺)파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 (有島武郞)는 소설 『어떤 여자 (或女る)』(1919)를 발표했다.
1905년 건강이 악화된다. 제2소설집 『돗포집 (獨步集)』(1905)을 간행하고, 단편 「호외」(1906)를 발표, 폐결핵으로 요양 생활 중, 「궁사 (窮死)」 「절조 (節操)」(1907) 등을 발표하고 37세에 작고한다. 자연주의 작가 다야마 가타이는 조사에서, 돗포의 인생은 한마디로 ‘궁(窮)’이라고 했다. 제3소설집 『운명 (運命)』(1906)이 높게 평가받았고, 돗포는 자연주의 운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돗포의 문학과 사상은 명리 (名利) 부정과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노장 (老壯) 사상,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자연 계절 묘사, 영국의 전원시인 워즈워스의 낭만성, 기독교의 박애 (博愛) 정신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 외에도 무사시노 (武?野)의 자연미를 시적인 요소로 함축한 『무사시노』, 사교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통해 돗포의 사상을 말하는 『쇠고기와 감자 (牛肉と馬鈴薯)』,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임을 모르고 결혼한 남성의 고뇌를 다룬 『운명론자 (運命論者)』 등이 있다.

○ 평가
돗포 문학은 일본의 근대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문예평론가 나카지마 겐조는 존재의 자각을 일깨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히라노 겐은 작품을 읽으면 잊고 있었던 원초적인 무엇인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육욕 소설의 선조’, ‘메이지 시대의 진정한 작가’라는 평도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돗포를 스트린드베리, 니체, 톨스토이 등과 견주었다. 돗포를 흔히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돗포 스스로는 자신을 자연주의에 묶으려 하지 않았으며 돗포는 돗포라고 주장함으로써,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문학관에 근거해 작품을 쓰고 있었다.
○ 작품
돗포의 대표적 작품으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무사시노의 자연미를 시정이 가득한 필치로 그려 낸 <무사시노>가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의 배경이 된 지역이며,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돗포의 ≪무사시노≫를 읽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무사시노>가 일본 근대문학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 이유는 이전과는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무사시노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돗포 스스로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적 정취’가 무사시노에 어울린다고 말했듯이, 추상적 개념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무사시노를 직접 경험하고 받은 감동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돗포의 열망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외에 스스로 동맥을 끊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죽음의 문제를 돌아보는 <죽음 (死)>, 저회취미 (低徊趣味)라는 관점에서 한 인간을 가장 잘 드러낸 완벽에 가까운 사생문이라고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순사 (巡査)>, 시대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운명의 톱니바퀴에 끼여 세상과 불협화음을 내며 살아간 한 인간을 그린 <도미오카 선생님 (富岡先生)>, 나약하기에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남자의 비극을 그린 <취중일기>, 교육의 본질이 삶의 지혜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 주면서 돗포가 추구하는 교육자와 영웅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소설 <해돋이> 등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 우리말 번역
김영식 옮김, 《무사시노 외》, 을유문화사, 2011년 8월 10일
이 책에 실린 작품: 겐 노인, 무사시노,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쇠고기와 감자, 소년의 비애, 그림의 슬픔, 가마쿠라 부인, 비범한 범인, 운명론자, 정직자, 여난, 봄 새, 궁사, 대나무 쪽문, 거짓 없는 기록
- 주요 작품 목록
겐 노인(1897)
무사시노(1898)
잊을 수 없는 사람들(1898)
교외, 소춘, 두고 온 선물(1900)
쇠고기와 감자(1901)
가마쿠라 부인(1902)
운명론자, 여난(1903)
봄새(1904)
궁사(1907)
폭풍- 유일한 장편 소설이자 미완성 유고작.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