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7월 23일, 미국의 군인•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1822 ~ 1885) 타계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1822년 4월 27일 ~ 1885년 7월 23일)는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1869년 ~ 1877년)이었다.

– 율리시스 S. 그랜트 (Ulysses S. Grant)
.출생: 1822년 4월 27일, 미국 오하이오주 포인트플레전트
.사망: 1885년 7월 23일(63세), 미국 뉴욕주 마운트맥그래거
.학력: 미국 육군사관학교
.정당: 공화당
.배우자: 줄리아 덴트 그랜트
.자녀: 4
.종교: 감리교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임기: 1869년 3월 4일~1877년 3월 4일
전임: 앤드루 존슨(제17대) / 후임: 러더퍼드 B. 헤이스(제19대)
*군사 경력
.복무: 미군
.복무기간: 1839~1854년; 1861~1869년
.소속: 미국 육군
.최종계급: 육군원수 (General of the Army)
.지휘: 제4보병연대 F 중대, 제21일리노이 보병연대, 남동미주리 군관구, 카이로 군관구, 테네시 군, 미시시피 사단, 미국 육군
.참전: 멕시코-미국 전쟁, 미국 남북 전쟁
그랜트는 군사 역사가 J. F. C. 풀러에 의하여 “그의 나이의 거대한 장군이자 아무 나이에 거대한 전략가들 중의 하나”로 묘사되어 왔다. 그는 빅스버그와 실로를 포함한 서부 전선에서 많은 전투들을 이겼고, 감소 운동을 통하여 맹방을 꺾으면서 명예를 얻었다. 적과 함께 그의 무자비한 교전의 전략은 북부의 뛰어난 전쟁 능력에게 장점을 준 엄청난 손실들로 이끌었으며 아직 그랜트는 전쟁의 인적 비용으로 엄하게 비판을 받았다.

○ 생애 및 활동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는 1822년 4월 27일, 미국 오하이오주 포인트플레전트에서 출생했다.
1823년의 가을에 가족은 브라운군에 있는 조지타운 빌리지로 이주하여 그랜트는 자신이 17세 때까지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거기서 보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사관학교 입학을 위해 추천서를 받은 지역 연방 상원의원이 추천서에 이름을 율리시스 심슨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기재된 이름을 고치려면 굉장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그랜트는 할 수 없이 잘못 적힌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랜트는 근본적으로 전쟁이나 군대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관학교를 자퇴할 생각까지 했지만 나중에는 적응했던 모양이다. 본인도 나중에 자서전에서 “싫은 것도 많았지만, 좋은 것은 더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싫어했던 것은 행진과 같은 군사활동, 좋아했던 것은 독서. 책도 군사관련 서적보다는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다만 승마술만은 대단히 뛰어나서, 그가 말을 타고 세운 점프 기록은 이후 25년간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의외로 친구도 사귀었는데, 1명은 나중에 그의 처남이 되었고, 다른 1명은 나중에 적장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제임스 롱스트리트이다. 입학한 후 4년 후인 1843년에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그랜트의 인생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은, 자신은 전쟁을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한 곳은 전쟁터였고 평상시에는 그 재능을 보일 기회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는 이 전쟁이 ‘부도덕한 전쟁’이라 비판했지만, 재커리 테일러가 지휘하는 원정부대에 선발되었고, 여기서 대단한 지휘능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대위로 승진했다. 사관학교 시절 동료들을 놀라게 한 승마술은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여, 서부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옆에 매달려 몸을 숨기는 기술을 실전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그랜트는 성향상 군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개인적인 성향과는 정반대로 군인으로서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남북전쟁시 전략적인 면에서 빛을 발했는데, 인내심과 뚝심이 매우 강하고 끈질겨서,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에게 참패해도 겁을 먹거나 패닉에 빠져 후퇴하지 않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버티고 또 버텼다.
전쟁에서 그랜트의 인성은 승리에서 그의 신중과 아량에 의하여 배합되었다.
1863년 빅스버그에서 자신의 화려한 캠페인 후에 북군들의 명령을 가정하는 데 워싱턴 D. C.를 부른 그랜트는 영웅으로서 환영을 받고, 1864년 선거에서 대통령직을 위하여 나가는 데 몰아졌다. 그러나 그랜트는 이 항소들을 기각하였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리더십과 군사 목표들로 자신의 약속을 확인하였다.
부적절한 일련과 하급 장군들을 통하여 고통을 겪은 링컨에 의하여 신임된 그랜트는 대통령의 노예제에 관한 증오, 합중국을 보존하는 자신의 결심과 중요하게 동족 살해의 전쟁 이후에 징계 조치 없이 북부와 남부를 화해시키는 위임을 나누었다.
영원히 귀족주의의 남군의 장군 로버트 E. 리와 영원히 대조되고, 슬로베니아 옷을 입고 엽궐련을 씹는 그랜트는 1865년 4월 버지니아주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에서 리 장군의 항복에서 자신의 강한 상대에게 관대한 용어를 마련하였다.
전쟁 영웅으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1869년 제18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랜트는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취임과 1961년 존 F. 케네디의 당선으로 기록이 깨질 때까지 역대 최연소 대통령(취임 당시 만 46세)이었다.
당선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단 전쟁 영웅, 그것도 연방 붕괴를 막은 영웅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도 당선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은 분명했고, 그렇게 그랜트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이때 그의 이름을 이니셜화한 U.S. 그랜트가 미국 (U.S.)의 이니셜과 맞아떨어진 덕분에 이걸 이용한 광고 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서 많은 역사가들은 그를 적게 성공적으로 숙고하는 데 그랜트가 개인적으로 부패 혐의에 더럽혀지지 않았어도 그는 스캔들에 의하여 괴롭혀진 행정부를 지도하였다. 그랜트가 아직 논쟁적인 남부의 재건의 기간을 다르리면서 재건을 보존하는 데 애를 쓰고, 법적과 전 노예들의 투표권의 인기없는 입장을 택하였다.
그랜트는 북부와 남부 양쪽에서 자신의 일생 동안 존경을 받았고, 그는 세계적으로 넓은 명성을 얻었다. 역사가들은 대통령으로서 그랜트의 리더십이 무효화되었어도 그렇지 않으면 도발과 반란의 경로했을 것 같은 행로에 연방 정부를 이끌었다고 동의한다. 말기 질환이 있는 동안과 재정적 필요성 아래에 작문된 그랜트의 회고록들은 군사 지도자의 가장 감명적이고 조명 글 중으로 여겨졌다.

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4번째로 가장 뚱뚱한 편으로 알려졌다.
그랜트는 자신이 유일하게 적합했던 것을 위하여 역사상 중앙적 역할을 하는 데 모호함에서 나왔다. 남북 전쟁의 장군으로서 그랜트는 동족을 상대로 지치는 캠페인에서 독단 의지의 드문 조합, 전략적인 전망과 북군을 명령하는 데 겸손을 점유하였다.
그랜트는 군 최고통수권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군사적 목적들을 나누었으나 더욱 중요하게 노예제의 불명예로부터 해방되고 국가의 이상을 찾는 것에 기초를 둔 하나의 국민으로서 통합한 링컨의 국가의 도덕적 전망을 나누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대함 중의 하나인 링컨과 그랜트 사이에 신임과 존중의 관계는 국민이 화해한 목적과 함께 평화에서 전쟁을 가차없이 기소할 수 있게 되었다. 애포매톡스에서 그랜트의 관대한 평화 조건과 북부인과 남부인들은 적이 아닌 친구들로 전부의 미국인을 함께 결합한 링컨의 “추억의 신비적인 감정”의 웅변 알림은 남부의 재건의 시기의 설립물이었다.
감사한 국가는 2번이나 그랜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그의 군사적 실력들은 부족하게 시민들의 리더십에 적합하였다. 그랜트의 평판은 그가 개인적으로 휩쓸어지지 않았어도 그의 행정부에서 스캔들의 결과로서 고통을 겪었다.
미국의 영웅으로서 환영을 받은 그랜트는 세계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받아질 때 말없고, 엽궐련을 피우고 구실 없이 남아있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