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7월 13일, 반나치 비폭력 저항단체 하얀 장미 (백장미단)의 조직원 쿠르트 후버 (Kurt Huber, 1893 ~ 1943) 별세
쿠르트 후버 (Kurt Huber, 1893년 10월 24일, 스위스 쿠어 ~ 1943년 7월 13일, 독일 뮌헨)는 독일 대학 교수이자 반나치 단체인 백장단 (White Rose)의 저항 운동가였다. 그는 저항으로 투옥되고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 쿠르트 후버 (Kurt Huber)
.출생: 1893년 10월 24일, 스위스 쿠어
.사망: 1943년 7월 13일, 독일 뮌헨
.국적: 독일
.직업: 교수
.소속: 독일 뮌헨대, 나치저항조직 백장미단
.배우자: 클라라 슐리켄리더 (1929 ~ 1943)
.자녀: 볼프강 후버, 비르기트 후버
백장미 운동은 1940년초 나치체제의 잔혹상과 유대인 학살 등을 독일 사회에 고발하며 저항을 촉발한 단체다.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그리고 쿠르트 후버 철학교수 등 6명이 주축이다. 1942년 여름 의대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바이쎄 로제 인 뮌헨’ (화이트 로즈 인 뮌헨)이라는 이름으로 첫번째 리플렛을 발행하면서 ‘백장미’로 불렸다.
이들은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태인 학살에 대해 ‘인간 존엄에 반하는 테러’라 규정하고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거짓말쟁이들을 따라 폐허를 향할 뿐입니다”라며 동참을 호소했다.
‘프리덤’ 단어를 공공 건물에 쓰는 등 비밀 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은 1943년 2월 ‘살인자 정부에 저항할 것’을 독려하는 후버 교수의 전단지를 뮌헨대에서 뿌렸다.
하지만 경비원 야코프 슈미트의 밀고로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되면서 백장미의 전단은 여섯 번째에서 막을 내렸다.
숄 남매와 프롭스트 등 3명은 체포된 지 나흘 만인 1943년 2월22일 단두대에서 전격 처형됐다. 그해 7월 13일에 후버 교수 등 3명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활
쿠르트 후버 (Kurt Huber)는 1893년 10월 24일, 스위스 쿠어에서 독일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자랐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뮌헨에서 자랐다. 그는 어렸을 때 급성 디프테리아를 앓았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후두를 절단했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심하게 절뚝거리며 걸었고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철학, 심리학과 같은 과목에 적성을 보인 후버는 1926년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의 심리학 및 음악 교수가 되었다.
후버는 결코 자신의 장애가 그를 멈추게 두지 않았다. 가르치는 동안 그는 나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않는 수업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여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 저항
후버는 나치당의 부상에 경악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정부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의에 참석한 일부 학생인 Hans Scholl과 Alexander Schmorell을 통해 White Rose와 접촉했다.
1943년 1월 Huber는 다섯 번째 White Rose 전단지 편집을 도왔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의 종식을 촉구하는 화이트 로즈의 여섯 번째 전단지를 썼다. 이것은 출판된 마지막 전단지였다 (Christoph Probst는 미발표된 일곱 번째 전단지를 썼다).
여섯 번째 전단지는 독일 공군을 찬양하는 단락을 제외하고 전체가 출판되었다.
Schmorell과 Scholl은 나치 독일의 군대를 지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을 그었다.
이에 후버는 회의장에서 나갔다. 그가 Hans Scholl을 본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 체포
Huber의 정치 활동은 게슈타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1943년 2월 27일에 체포되었다.
우연히 작곡가 Carl Orff가 다음날 방문했다.
정신을 잃은 후버의 아내 Clara (née Schlickenrieder, 1908 ~ 1998)는 Orff가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남편을 돕기를 바랐지만 그는 두려워했다.
Clara Huber는 나중에 Orff를 다시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추가로 접촉했다는 기록 증거가 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오르프에게 남편을 위한 추모 책에 기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Huber에게 직접 쓴 감동적인 편지를 기고했다.
오르프가 1946년에 완성한 프로젝트이자 후버가 처형되기 전에 후버와 논의한 프로젝트인 베르나우에린 (Die Bernauerin)은 후버를 추모하는 데 헌정되었다.
- 재판 및 처형
후버는 4월 19일 인민법원에 회부되었다. 간단한 쇼 재판에서 Roland Freisler 대법원장은 Huber에게 굴욕적인 언어 공격을 가했다. 후버는 반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7월 13일, 그는 알렉산더 슈모렐과 자신이 그날 늦게 단두대에서 처형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원래는 오후 5시에 사형집행이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후버가 준비를 하던 중 사형집행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각 사람이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처형을 관찰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러 SS 장교가 Stadelheim에 나타났다. 그런 다음 SS 장교들은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의 고통을 단축하거나 연장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을 상사에게 보고해야 했다. 경찰관들은 교수형이 아닌 단두대로 처형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연기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단두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SS 장교가 떠날 때까지 처형이 지연되었다. 오후 5시쯤 경비원들이 알렉산더 슈모렐을 찾아왔다. 몇 분 후 경비원이 Kurt Huber를 찾아 왔다.
대학은 체포 당시 Huber의 직위와 박사 학위를 박탈했다. Huber의 미망인 Clara를 위한 추심금을 가져가려는 시도는 결국 Hans Leipelt의 체포 및 처형으로 이어졌다.
- 유산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본관 맞은편 광장은 그의 기억 속에 후버 플라츠로 명명되었다.
후버는 감옥에 있는 동안 완성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전기를 썼고 그의 아내와 제자가 편집한 후 1951년에 출판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친구와 동료들의 공헌을 담은 기념책이 출판됐다.

○ 백장미단의 행적
백장미 운동은 1940년초 나치체제의 잔혹상과 유대인 학살 등을 독일 사회에 고발하며 저항을 촉발한 단체다.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그리고 쿠르트 후버 철학교수 등 6명이 주축이다.
1942년 여름 의대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바이쎄 로제 인 뮌헨’ (화이트 로즈 인 뮌헨)이라는 이름으로 첫번째 리플렛을 발행하면서 ‘백장미’로 불렸다.
이들은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태인 학살에 대해 ‘인간 존엄에 반하는 테러’라 규정하고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거짓말쟁이들을 따라 폐허를 향할 뿐입니다”라며 동참을 호소했다.
‘프리덤’ 단어를 공공 건물에 쓰는 등 비밀 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은 1943년 2월 ‘살인자 정부에 저항할 것’을 독려하는 후버 교수의 전단지를 뮌헨대에서 뿌렸다.

하지만 경비원 야코프 슈미트의 밀고로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되면서 백장미의 전단은 여섯 번째에서 막을 내렸다.
숄 남매와 프롭스트 등 3명은 체포된 지 나흘 만인 1943년 2월22일 단두대에서 전격 처형됐다. 그해 7월 13일에 후버 교수 등 3명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무렵 히틀러가 단두대 처형을 부활시킨 까닭에 5천 명가량이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이들의 목을 친 사람은 전설적인 사형집행인 요한 라이히하트였는데 그는 수많은 목을 쳤으나 미군정에 의해 사면된 후에는 나치 전범들의 목을 쳤다. 라이히하트는 대대로 내려오는 사형집행인 가문의 자손으로, 죽는 날까지 이들의 목을 친 것에는 아무 감정도 없고 자기 할 일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백장미단의 활동은 쿠르트 후버 교수의 친구인 작곡가 칼 오르프에 의해서 알려졌다. 칼 오르프는 종전 직후 연합군에 전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자신이 하얀 장미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고 쿠르트 후버 교수와 친구였다고 주장해 무죄로 석방되었다.
백장미의 활동 기간은 1년도 채 안됐지만, 나치의 선전·선동과 독재정치,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잇따른 승전보에 속아 비판의식을 잃은 독일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독일 자유주의 정신의 상징으로 남았다.
특히 뮌헨대에는 전단지를 비롯, 발각되고 재판받고 처형되기까지 백장미 운동의 기록과 전 세계 여러나라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 등을 전시해놓은 기념홀을 비롯해 숄 남매와 후버 교수 등의 이름을 딴 장소가 곳곳에 남아 있고 뮌헨 시내에도 다양한 기념 표식이 있다. 특히 뮌헨 남부 그래펠핑에는 쿠르트 후버 거리가 있다.
한편 쿠르트 후버 교수가 생전 교류했던 인물 중에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인 이미륵도 있다.
하얀 장미 사건 이후 이미륵과 그의 가족은 나치 당국의 한층 엄혹해진 감시 하에서 전시 배급도 후순위로 밀리며 어렵게 살아가다가 2차대전 종전을 맞았다.
이로써 이미륵은 얄궃게도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체제를 모두 겪었으며 양측으로부터 모두 탄압받았고 거기에 저항한 흔치 않은 이력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이미륵과 후버 교수, 그리고 언어학자인 프란츠 티어펠더 교수 셋은 자주 모여서 나치를 비판하면서 의논하곤 했다.
이미륵 본인과 주변인, 티어펠더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미륵은 후버 교수의 깊은 이해자였으면서도 그의 활동을 상당히 우려스럽게 바라본 모양이다.
결국 그가 처형당하자 이미륵은 이 시대의 가장 고귀한 사람을 잃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사건 이후 후버 교수의 가족들은 연좌제와 감시에 시달리면서 전시 배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었고 알던 지인들은 연루될까 두려워 이들과 연락을 끊었다.
이때 이미륵은 자기가 배급받은 물건을 그들에게도 나눠 주며 전쟁 끝까지 별 탈이 없도록 돌봐 주었다.
이렇듯 이미륵은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양쪽의 지배를 모두 겪으면서도 그에 모두 반대했던 몇 없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2019년 뮌헨에 후버 교수의 이름을 딴 쿠르트 후버 거리에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새겨졌으며 바로 옆에는 후버 교수의 동판이 자리한다.
동판에는 이미륵이 생전에 자주 하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백장미 이야기는 영화 <백장미> (1982)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2005)로도 나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스의 누나이자 소피의 언니인 맏이 잉게 숄이 쓴 소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도 출간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