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터키, 한국 방문기 (10)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이스탄불에서
11월 1일, 오늘은 호텔 조식 후 보스프레스해협 유람선 승선, 이집시안바자르, 톱카프궁, 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방문. 중식 후 이스탄불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일정이다.



보스포러스해협 유람선
이스탄불에 도착해 1박 후 첫 일정은 보스포러스해협의 전세유람선 승선이었다.
보스포러스는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30km이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m이다. 깊이는 36~120m 사이이다.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져 왔고, 18세기 이후에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해협의 항행권(航行權)을 둘러싼 ‘해협문제’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해협 양쪽으로 이스탄불 시가 자리잡고 있다. 해협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의 옛 수도이자, 현재는 터키 제1의 도시이다. 터키의 유럽 영토와 아시아 영토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로 나뉜다. 1973년에 완성된 해협 횡단의 보스포루스 교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해협을 횡단하는 3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며, 2013년 해저 터널을 통과해 이 해협 아래를 지나는 마르마라이 철도가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야르(yalı)라고 하는 물가를 바로 마주한 맨션이 약 620채 정도 있다. 이것은 주로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졌다. 보스포루스 해협 주변에는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등의 오스만 제국의 궁전이 들어서있다. 또한, 해협 주변으로 아야 소피아, 갈라타 탑, 셀리미예 병영 등의 주요 관광지가 즐비하다.
이스탄불의 에미뇌뉘와 흑해의 입구에 위치한 아나돌루 카바으까지 운항하는 페리가 있으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페리가 많다.



이집시안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
어느 나라를 가든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볼거리가 넘치고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시안 바자르는 원래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운반되어 온 향신료를 파는 시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집시안 바자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는 지붕이 설치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통시장으로 상점들이 마치 미로 같은 거리로 즐비하게 열결되어 갖가지 향신료와 수공예품을 볼 수 있었다.
바예지드 회교 사원과 누루오스마니예 회교 사원 사이에 있는 그랜드 바자 (카팔리 차르시)는 면적이 굉장히 넓었다. 입구가 무려 21개나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가 둘러보니 이곳이 세계 최대 규모의 전통상점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끝없이 연결된 시장지붕 아래에서 다양한 수공예품과 향식료 뿐만 아니라 타일, 도자기, 유기, 가죽 액세서리, 밸리 댄스 의상, 파이프 및 재떨이, 고서적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랜드 바자의 역사는 메메트 2세 (Mehmet II) 술탄이 섬유 거래를 전담할 특별한 장소를 건설하라는 명을 내린 14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이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체바비르 (Cevavir)에서 전형적인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모든 거리에서 특정한 유형의 수공예품을 제작해서 아직도 시장 이름에 반영되어 있지만, 더는 이 같은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거대한 시장은 마치 미로와 같아서 길을 잃을 것만 같아 왔던 곳들을 계속 확인해야만 했다.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고 인파로 굉장히 북적대므로 시간 조절이 필요했다.
양탄자나 전통공예품 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격은 정찰가가 아니므로 흥정이 필요했다. 꼭 무언가를 구입하지 않아도 대표적인 터키 시장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으므로 방문해 볼 만하다. 물론 인파가 북적대서 소매치기와 가방 날치기꾼이 시장을 활보하니 조심하면서 말이다.
톱카프 궁전 (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톱카프궁전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궁전에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 (외정)과 엔데룬 (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1중정: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은 메흐메트 2세 이후의 군주들이 손을 많이 대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많이 변형되었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여 별칭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 건축 재료와 구조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을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문은 대형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이며, 황제의 문에 연결된 중정 안쪽에는 톱카프 궁전 관람을 위한 매표소가 있다.
.2중정: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방추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 (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디완 건물은 중정의 왼쪽에, 주방 건물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디완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디완 건물을 ‘쿱베알트’라고 부른다. 콥베는 ‘돔’이라는 뜻이고, 알트는 ‘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톱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디완 회의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디완 회의는 총리대신이 주재하게 되었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3중정: ‘바쉬스 싸데’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하렘: 제3중정에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4중정: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꾸르안,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정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
.바그다드 쾨쉬퀴
바그다드 쾨쉬퀴는 테라스 중앙에 위치한 분수 오른쪽에 위치해있다. 이 정자는 1638년 무라트4세가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를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정자는 예레반 쾨쉬퀴와 매우 유사하다. 베란다의 세개의 문은 소파와 소파 사이에 있다. 외벽은 대리석, 반암, 휘록암으로 덮여있다. 포르티코 대리석 판넬은 케이렌 맘루크 스타일이다.

아야 소피아 / 하기아 소피아 (Ayasofya) 성당
하기아 소피아 (Ayasofya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537년에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됐다.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약 30여년 후,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했으나 화재로 유실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재건했으나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와 아야 이레네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에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나스가 축성을 집전한 가운데 약 5년 10개월 만에 아야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하였다. 다만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지라, 내부의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 소피아성당의 역사 개관
.비잔티움 제국 시대
콘스탄티누스 2세의 건립 :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약 30여년 후,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즉 위대한 교회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다른 성당에 비해 훨씬 그 크기가 컸기 때문이었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2월 15일에 처음으로 착공되어, 제국의 황궁 바로 옆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다 완공되기 전까지는 그 옆에 있었던 아야 이레네 성당이 대신 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성당으로 쓰였다. 이후 아야 소피아가 완공된 후에는, 이 두 성당이 나뉘어 제국의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아엘리아 에우도키아 황후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크리소스토무스는 수도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나 그가 쫓겨나며 함께 일어난 군중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야 소피아가 완전히 불타게 된다. 이 때문에 현재는 첫 번째로 건립된 성당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재건 : 아야 소피아는 소실한 지 약 11년 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 415년 10월 10일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은 건축가 루피누스가 지은 목조 돔을 가진 거대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대성당도 532년 1월 13-14일에 일어났던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와 아야 이레네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 아예 남아 내려오는 것이 없는 첫 성당과는 달리, 두 번째 성당 건물은 아직까지 남아 내려오는 것이 존재한다.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12명의 염소가 새겨져 있는 석재, 그리스식 기둥, 십자가가 새겨진 기둥 등 몇몇 석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1935년에 서쪽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발굴된 석재들은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건 : 532년 2월 23일, 두 번째 성당이 소실된 지 몇 주 정도 지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전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밀레투스의 건축가 이시도로스와 트랄리스의 수학자 안시미오스에게 새 성당의 설계를 맡겼다. 다만 안시미오스는 이 작업에 착수한 지 1년이 채 못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제국의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들이 공출되었으며, 심지어는 지중해를 건너오기까지 하였다. 이 때 로마나 에페수스 같은 고대 도시에서 워낙 많은 양의 기둥들을 빼왔기 때문에, 현재 아야 소피아를 이루는 기둥들은 건축을 위해 따로 다듬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각각 다른 크기와 색을 가지고 있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무려 10,000명이 넘는 인력들이 동원되었으며, 아야 소피아의 건축은 당대 최고의 건축학적 업적으로 여겨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에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나스가 축성을 집전한 가운데 약 5년 10개월 만에 아야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하였다. 다만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지라, 내부의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소재지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즉위식, 결혼식과 같은 제국의 중대 행사들이 이 곳에서 열렸다. 또한 이 곳은 절대적인 성소로 치부되어, 범죄자들이 이 곳 안으로 들어오면 아무리 군대라고 할지라도 그를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노아의 방주에 쓰였던 목재로 만들어진 문,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탁자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는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는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다. 이로 인해 중앙 돔과 동쪽의 반형 돔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 문제가 심화되어 558년 5월 7일에는 중앙 돔이 결국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돔의 엄청난 무게와 지나치게 낮았던 돔의 곡률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곡률이 너무 완만하여 돔의 하중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기둥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즉각 복구를 명령했고, 이시도로스의 조카였던 이시도로스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이시도로스는 더 가벼운 소재를 이용하여 돔을 만들었고, 돔의 높이를 30m정도 더 높여 하중을 최대한 아래쪽을 보낼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돔에 40개의 리브를 설치하고, 직경이 32.7m에서 33.5m에 달하는 4개의 펜던티브를 설치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하였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8개의 거대한 코린토스식 기둥들이 레바논 등에서 공수되어 560년 경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온다. 아야 소피아는 이후 562년 12월 23일에 복구가 완료된 채로 총대주교 유티키우스가 집전한 가운데 다시 축성되었다.
726년에 레오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며 아야 소피아는 또다시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모든 성화와 성물들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파괴하라 명했으며,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기독교 예술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아야 소피아에 있던 종교적인 인물상과 성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후 이리니 황후의 비호 아래 성상론자들이 다시 복귀하기 시작하는데, 테오필루스 황제 때에는 그의 이름의 모노그램을 새긴 청동 문을 성당의 남쪽 입구에 만들어 달 정도였다.
성당은 자연재해로도 큰 피해를 입는데, 첫 번째는 859년의 대화재, 둘째는 869년 1월에 있던 대지진으로도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반형 돔들 중 하나가 무너졌고, 바실리오스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인해 서쪽 돔 아치가 무너져 내렸고,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트르닷에게 재건 작업을 요청했고, 그는 서쪽 돔을 다시 세운 후 15개의 리브를 새로 만들어 이를 보강했다. 이 공사는 약 6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994년 5월 13일에 재개관하였다. 이 공사 때 펜던티브에 4명의 케루빔 형상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돔의 천장에 예수의 모습이 덧붙여졌고, 후진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아치들에는 예언자들과 교회의 주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야 소피아는 4차 십자군 원정 때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아야 소피아를 포함한 모든 건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고, 이때 성당 내부에 붙어있던 황금 모자이크, 보석, 성유물들이 유럽으로 대거 반출되었다. 또한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아야 소피아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보두앵 6세는 이 곳에서 1204년 5월 16일에 비잔티움 제국의 즉위 양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여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하도록 명령한 베네치아의 총독 엔리코 단돌로는 상부 갤러리의 동쪽 면에 무덤이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를 실제 무덤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진짜 무덤은 오스만 군대가 아야 소피아를 점령한 직후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복원한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1261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였지만 성당은 여전히 황폐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1317년에는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자신의 아내가 유산으로 남기고 간 재산으로 성당의 동쪽과 북쪽에 버트레스를 세웠다. 1344년 10월에 지진이 난 이후로 끊임없이 균열들이 발생했고, 1346년 5월에는 몇몇 구조물들이 붕괴하거나 떨어져 내리기도 하였다. 1354년까지는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 기간동안에는 간헐적으로만 성당을 열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병사들이 3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3일 동안의 대약탈이 끝난 이후, 술탄은 약탈이 끝나고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소유로 선포하였다. 당시 아야 소피아도 약탈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이 아야 소피아 속에 가장 값비싼 보물들이 쌓여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병사들은 성벽이 무너지자마자 아야 소피아로 곧바로 향했다. 당시 아야 소피아 내에는 기도를 드리던 사람들, 부상을 입어 싸움에 참여하지 못했던 병사들, 노약자, 여자들이 모여 일종의 피난처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병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후, 노인들과 병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젊은 남성, 소년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특히 여성들은 강간당하거나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아야 소피아 건물 자체도 무자비한 약탈에 시달렸고, 한때 성당을 가득 채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보물들이 이 때 대거 쓸려나갔다. 당시 성당 내부에 있던 정교 성직자들은 병사들이 쳐들어와 그들을 죽이기 직전까지도 신에게 미사를 올리는 등 기도를 드렸고, 전설에 의하면 이들이 살아남아, 나중에 아야 소피아가 다시 성당으로 되돌아갔을 때에 돌아와 미사를 끝낼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편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렸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행했던 한 이슬람 율법 학자가 성당의 강대 위로 올라가 샤하다(하나님 외의 다른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이시다.’를 외쳤고, 이는 아야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탈바꿈시키는 선언이었다.
당대의 아야 소피아를 방문했던 많은 여행자들의 기록과 같이, 비잔티움 제국 말기의 아야 소피아는 전체적으로 퇴락해가고 있었다. 성당의 문이 떼어졌거나, 타일이나 모자이크 등이 낡아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메흐메드 2세는 아야 소피아를 새롭게 보수하는 한편,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할 수 있게 일부 개조하고,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를 새롭게 설치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1453년 6월 1일에 아야 소피아에서 열린 첫 금요일 예배에 참석했고,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서 이름이 바뀜)의 첫 황실 소유 모스크가 되었다. 이 때 이와 함께 도시 내부에 남아있던 상당수의 건물들과 부지, 재산들이 아야 소피아의 소유로 기증되었고, 1478년 경에는 2,360개의 가게들, 4개의 여관, 30개의 주점, 23개의 양 가게가 아야 소피아의 자신들의 수입을 헌납하였다. 1520년과 1547년에는 제국 헌장에 따라 그랜드 바자르에 있는 상점들의 일부가 추가적으로 더 기증되었다.
1481년에 조그만 미나레트 하나가 건물의 남서쪽 모서리에 세워졌고, 후대의 술탄인 바예지드 2세가 아야 소피아의 북동쪽 모서리에 추가적으로 미나렛 하나를 더 건축하였다. 이 두 미나렛 가운데에 하나는 1509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졌고, 16세기 중반에는 미나렛 2개가 동쪽에 1개, 서쪽에 1개가 세워져 서로를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또한 이 때 쉴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정복하면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거대한 청동 촛대 2개를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 옆에 세워놓았다. 그는 아야 소피아 내부 문과 천장, 벽 등에 장식되어 있던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모두 흰 벽토와 회칠로 덮어버리게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 회칠은 1930년대에 터키 공화국의 감독 아래 다시 벗겨졌다.
셀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야 소피아는 눈에 띄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보강 작업에 들어갔다. 미마르 시난은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지어진 골조를 보강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나레트를 건물에 서쪽 벽면에 2개 더 추가하였다. 또한 그 작업과 동시에 술탄의 별장과 영묘를 1577년에 아야 소피아의 남동쪽 귀퉁이에 아름답게 지어놓았다. 참고로 이 영묘에는 나중에 43명의 오스만 왕자들의 무덤이 새로 설치되었다. 새로운 별장의 건축을 위해 아야 소피아의 남쪽 귀퉁이에 있던 건물들 일부가 해체되었고, 주변 24m 내에 있는 모든 주거용 집, 시장 건물, 구조물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또한 황금 초승달이 아야 소피아의 중앙 돔 맨 위에 세워졌다. 무라트 3세는 페르가몬에서 2개의 헬레니즘 시대 항아리를 갖고 와 모스크 본당 내에 설치해놓았다. 1594년에는 무라트3세의 영묘가 설치되어 그와 그의 아내, 황자들이 그 곳에 묻혔다. 1608년에는 무라드 3세의 후계자인 메흐메드 3세의 팔각형 모양 영묘가 만들어졌다. 이후 무스타파 1세는 부속 예배당을 자신의 영묘로 용도를 변환하여 사용하였다.
1717년에는 아흐메트 3세의 명령 하에 부스러져 떨어지는 회칠을 다시 칠했는데,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비잔티움 제국 시절의 모자이크들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당시에는 공사 인부들이 아야 소피아를 보수하며 간간히 나오는 옛 모자이크 조각들을 주워 부적으로 파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처럼 굳어져 왔었는데, 회칠을 다시 칠하며 인부들이 모자이크들을 훼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흐무트 1세는 1739년에 아야 소피아 내부를 새롭게 단장할 것을 명했고, 꾸란의 율법을 가르치는 이슬람 학교를 그 안에 세웠다. 현재 이 학교는 박물관의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 빈자를 구제하기 위한 식당, 도서관, 제례용 분수대 등을 세워 완전한 공공장소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이 때 새로운 술탄들의 영묘와 미흐라브를 새롭게 단장하여 꾸몄다.

.1847년의 보수 공사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1847년부터 약 2년 동안 800여 명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아야 소피아를 새롭게 보수 공사하였다. 이 때 스위스-이탈리아인 건축가인 포사티 형제들이 감독 하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 기둥과 벽들을 다시 똑바르게 세웠고, 돔과 천장의 균열을 메운 후, 아야 소피아 내부와 외부를 새롭게 칠하고 장식하였다. 또한 공사 도중 상부 갤러리에 남아있던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들이 노출되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인해 다시 회칠로 칠해졌다. 본당에 걸려있던 샹들리에들이 교체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캘리그라피 원판들이 새로 걸렸다. 이 원판에는 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4명의 정통 칼리파,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알리의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1850년에 포사티 형제들이 비잔틴 복고양식으로 모스크 뒤 황실 정원에 새로운 술탄용 개인 별장을 지었다. 그들은 미흐라브도 보수하였고, 미나레트 4개도 공사를 거쳐, 완전히 같은 높이가 되도록 맞추었다. 새로운 이슬람 율법 학교도 생겼으며, 이와 같은 복구 작업이 끝난 다음 1849년 7월 13일에 성대한 의식과 함께 다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

.터키 공화국
1935년에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새롭게 터키를 세운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도 치웠고, 이로 인해 바닥에 장식되어 있던 대리석 옴팔리온도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오스만 제국 시대의 회칠도 다시 벗겨내 옛 모자이크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아야 소피아 건물이 다시 약화되기 시작하자, 세계 기념물 기금은 아야 소피아를 관찰 대상으로 선정하고, 철저한 관리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 1988년에 박물관의 구리 돔에 균열이 갔고, 이 균열로 빗물이 새 점차 건물에 습기가 차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위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지반 아래에서도 습기가 올라왔는데, 지하수 상승으로 인해 박물관 내부의 습도가 더더욱 올라갔고, 건물의 석재와 페인트칠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세계 기념물 기금은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후원을 통해 돔을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터키 문화부의 감독 아래, 돔의 균열을 메운 후 안정시켰으며, 돔 안쪽에 칠해져 있던 내부 장식들을 복원하였다. 이 작업은 2006년에 끝났으나, 아야 소피아는 여전히 보수할 곳이 많아 추가적인 보강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추측된다. 아야 소피아는 2014년 기준 사람들이 터키에서 2번째로 많이 찾는 박물관이며, 매년 33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박물관 건물을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나, 2006년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 내의 작은 방을 기도실로 지정하고 아야 소피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2013년부터는 박물관의 미나레트에서 하루에 두 번씩 오후에 무에진들이 아잔 시간을 알린다. 2007년에 그리스계 미국 정치인 크리스 스피로우가 ‘자유 아야 소피아 위원회’를 결성하고 아야 소피아를 다시 성당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2010년대 초반부터는 뵐렌트 아른츠와 같은 전임 총리,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바꾸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2018년 7월 1일에는 85년만에 처음으로 아야 소피아에서 이슬람 의식이 행해졌다. 2017년 5월 13일에는 ‘아나톨리아 청년 연합'(AGD)가 주도한 대규모의 군중들이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한 대규모 기도회를 올렸다. 2018년 3월 31일에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우리의 선조들, 특히 이스탄불의 점령자”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며 꾸란의 첫 절을 낭송하였다. 이로 인해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바꾸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이 강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모스크
2019년 3월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 ‘아주 큰 실수’라고 하며 아야 소피아를 아예 다시 모스크로 되돌릴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다만 아야 소피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에, 아야 소피아를 실제로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유네스코의 허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터키 최고행정법원은 7월 2일부터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환원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법률 검토에 들어갔고, 이같은 움직임에 각국 정계와 국제기구, 종교단체들이 큰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정교회의 최고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박물관으로서 아야 소피아는 민족과 문화의 평화로운 공존과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간 상호이해와 연대를 의미하는 상징이자 장소”였음을 강조하며, 모스크로 전환될 경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이 이슬람에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고행정법원은 7월 10일에 오스만 재국의 황실 재산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한 1934년의 내각 결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으며,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곧바로 서명하였다. 이같은 조치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정교회 등 기독교계의 큰 우려를 샀으며, 그외에도 미국과 EU 등에서도 유감을 표시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공식적으로 모스크로 용도 전환됨에 따라 모스크 내부에 있던 동로마 제국 시대의 성화들과 유적들은 커튼이나 융단으로 가려졌다. 터키 정부 측에서는 모자이크나 유적들을 기도 시간에 가리기는 하겠으나, 훼손을 하지는 절대로 않겠다고 밝혔다.
7월 24일 아야 소피아는 예정대로 모스크로 개방되었으며, 86년만에 이루어지는 첫 금요 기도를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모스크 환원 정책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에 에르도안 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푸아트 옥타이 (Fuat Oktay) 부통령과 무스타파 쉔톱 (Mustafa Şentop) 국회의장 등 고위 공직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첫 금요 기도에서 대표로 쿠란 1장 파티하 (Fâtiha)와 2장 바카라 (Bakara)를 암송했다. 이날 에르도안 대통령은 파티흐 모스크에 소재한 오스만 황제 메흐메트 2세의 묘소를 참배한 후 “아야 소피아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였다가 재차 모스크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모스크 환원 결정에 대해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 이후 제2의 정복이 이루어졌다고 비유했다.

– 소피아성당 건축이야기와 구조
아야 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손 꼽히는 동로마 제국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 내부는 모자이크와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다.” (Νενίκηκά σε Σολομών)라는 유명한 말로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하에 완공되었을 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성당이었고, 스페인에 세비야 대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약 1,000여년 간 이 명예를 갖고 있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고대 후기의 건축 양식과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걸작이었다. 당대에 워낙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수많은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이슬람 사원들이 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아야 소피아는 그 거대한 크기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당의 신랑은 거대한 돔으로 덮여 있는데, 이 돔은 바닥에서 무려 55.6m나 되는 높이에 놓여져 있고, 또한 40개의 아치형 창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케이드 위에 올라가 있다. 성당이 지어질 당시에는 이 돔이 완벽한 원형으로 설계되었으나, 나중에 보수 공사를 거치며 돔은 약간 타원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때문에 돔의 직경은 최대 31.24m에서 최소 30.86m까지 그 길이를 달리한다.
성당의 서쪽 입구 부분과 동쪽 전례 부분에는 튀어나온 반원형의 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 거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이 부분 또한 별도의 반원형 모양의 추가적 돔으로 덮여 있다. 성당의 내부는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녹색과 백색, 자주색 반암들과 황금 모자이크들로 덮여 있다. 또한 현재의 성당의 외관은 붉은색과 노란색의 치장용 벽토로 덮여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복원하며 새롭게 칠해진 것이다.

.상부 갤러리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장구한 세월 동안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반달리즘과 같은 종교적, 사회적 테러 행위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대성당의 외관에는 이와 같은 피해 흔적들이 남아있어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혹시라도 성당의 내부 구조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성당의 상부 갤러리에 레이더 등을 이용한 검사를 실시했다. 연구팀은 이 검사를 통해 상부 갤러리의 구조에 약간의 결함이 생겼음을 발견하였으며, 돔의 곡률이 원래 지어졌을 때보다 약간 어긋나 비례를 이루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상부 갤러리는 성당의 후진 부분이 있는 동쪽 면을 제외한 성당의 3면을 둘러싼 말굽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부 갤러리에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몇몇 모자이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부분은 본디 황후와 그녀의 궁정 인사들이 미사에 참석하거나 회의를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으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모자이크 장식들은 남쪽 면에 있다.
.돔
아야 소피아 성당의 돔은 그 혁신적인 건축 방식과 모습으로 인해 수많은 건축가들과 미술가, 설계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돔은 4개의 삼각 궁륭이 받치고 있다. 이 궁륭들은 성당 바닥의 정사각형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기둥들로부터 솟아올라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며 휘어져 돔의 거대한 하중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돔의 무게가 측면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고, 하중이 아래로 곧바로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었다. 이 돔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펜던트형 돔이었으며, 이와 비슷한 양식을 지닌 다른 돔들과 비해 확연히 낮은 높이의 돔이었다.
돔의 지름은 107피트에 달하지만, 그 두께는 오직 2피트 밖에 되지 않는다. 성당의 주 재료는 벽돌과 모르타르인데, 돔의 벽돌 골재는 당시 설계자들이 돔을 짓는 것을 더욱 쉽게 하였고, 입방 피트마다 150파운드 밖에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무게는 당시의 석조 건축이 지탱할 수 있었던 평균적인 무게이기도 하였다. 본디 설계도에는 순수 석재를 이용하여 돔을 지으려 했으나, 벽돌 재질이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된 것이기도 하였다.
돔의 하중을 지탱하는 일은 아야 소피아의 건축가들이 가장 고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성당의 큐폴라는 558년의 지진으로 인해 이미 한 번 완전히 무너진 바 있는데, 이 돔은 563년에 이시도로스가 다시 복구하였다. 새로 복구된 돔은 40개의 리브를 가지고 있었으며, 20피트 정도 더 높게 지어져 하중을 더욱 많이 벽 쪽으로 분산하여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이 돔도 또 붕괴하거나 균열이 가며 문제가 생기는 등 복원, 복구 작업을 거쳐야만 했고, 지금까지 563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북쪽과 남쪽 부분 뿐이다. 참고로 563년에 지어진 40개의 리브 가운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남쪽에 6개, 북쪽에 8개 정도만이 남아있다.
사실 원래 이러한 구조와 설계들은 돔과 이를 떠받치는 벽과 아치들을 모두 효율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구조였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였다. 당대의 벽돌공들은 벽돌들을 서로 굳게 하기 위해 모르타르를 사용하였는데,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지을 때부터 워낙 건축 속도와 완공 시기를 빠르게 하여 짓기 위해 모르타르가 채 굳기도 전에 다음 층의 벽돌들을 끊임없이 올려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돔이 만들어졌을 때는 이미 그 벽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건축가 이시도로스가 성당을 복구할 때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이 벽의 내부를 다시 쌓아 기울어진 벽을 다시 수직으로 만드는 일이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새로운 돔의 높이를 20피트 정도 더 높여 최대한 하중이 옆으로 새지 않고 곧바로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에는 수많은 빛줄기들이 들어와 서로 부딪히는 효과를 내는데, 이 때문에 마치 내부 공간이 위에 떠있는듯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효과는 성당 중간중간에 나있는 수많은 창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창문들이 많으면 심미적 효과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도 있었다.
.미나레트
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총 4개의 미나레트들이 세워져 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후에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며 따로 세워진 것이다. 미나레트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인데, 공식적인 행사 개최나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메흐메드 2세는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직후 사원의 반원형 돔 위에 목재로 된 미나레트를 하나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 미나레트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나렛들 중 동남쪽에 있는 미나레트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바예지드 2세 때 만들어진 것이다. 나머지 3개는 백색 석회암과 사암으로 지어졌는데, 이 중 북동쪽 미나레트는 셀림 2세의 재위기간 동안에 바예지드 2세의 명에 의해 완공된 것이며, 서쪽에 있는 2개의 거대한 두 미나레트는 그 높이가 약 60m에 달하는데, 이는 셀림 2세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 두 미나레트는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수많은 복구, 추가 작업들을 거치며 미나레트들은 15세기, 16세기, 19세기의 건축 양식들을 복합적으로 지니게 되어 뛰어난 예술사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버트레스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수많은 버트레스들이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특히 건물 서쪽 부분에 있는 버트레스들은 원래 십자군 전쟁 시절 십자군 기술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후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이때 이미 버트레스의 건축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 건물의 붕괴나 균열 등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버트레스들이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감독 하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총 24개에 달하는 버트레스들이 만들어져 건물의 벽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다.

블루모스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t Camii)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대표적인 모스크로, 세계문화유산인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유서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따라 1609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7년이란 공사기간 끝에 1616년에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불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가운데 커다란 돔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은 형태로 구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 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4단을 이루며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른다. 직경 23.5m의 거대한 중앙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모스크의 안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 등 사회 시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퀼리예라고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 이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모스크 양쪽에 쭉 뻗어 세워진 미나렛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이중 모스크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로 이 남쪽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모스크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과 푸른빛의 260개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로 부르기보다는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 하여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은 현재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돔은 네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육중하게 만들어진 이 기둥은 직경이 5m가 넘어 일명 코끼리의 다리라고 불린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민바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설교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여름에는 모스크의 내부를 아름답게 밝혀주는 조명이 켜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의 바로 북쪽 자리에 히포드롬이라 불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경기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히포드롬에는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청동 뱀 기둥, 유스티니아누스 기념탑 등 세 개의 기념물이 독일이 만들어 기증한 분수대와 함께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Dikilitaş)는 터키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광장에 위치한 오벨리스크이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들여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경마장의 트랙 안쪽에 세우게 하였다. 붉은 화강암을 조각한 것으로, 원래는 기원전 1490년 투트모세 3세 시대에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 오벨리스크를 3개로 분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운반했다. 현존하는 것은 상단 부분이며, 대리석 받침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만들게 한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매우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광장의 한 가운데 있는 세 마리의 뱀이 기둥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한 청동기둥 셀펜타인 기둥 (Serpentine Culumn)은 BC 479년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 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녹여 만들어 아폴로신전에 바쳐진 청동 기둥으로 원래 8m 높이에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머리가 떨어져나가 현재는 5.5m 높이로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피 아폴로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다 세웠다고 한다.


발렌스의 수도교와 테오도시우스 성벽
이스탄불 시내를 버스로 이동하며 여러 번 발렌스의 수도교를 목격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발렌스 수도교 (Valens Su Kemeri or Bozdoğan Kemeri)는 로마 제국의 발렌스 황제 시대인 37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20m 높이에 2층짜리 아치가 지탱하도록 석조 수도를 만들었다.
고대 로마를 거쳐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이곳을 통해 많은 저수지의 물이 도시로 배달되었다. 1,700년이 넘은 유적 밑으로 차가 지나다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수도교 위로 올라가는 것이 제한되기 때문에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며, 밤이 되면 다리에 조명이 들어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수도교를 볼 수 있다.
이스탄불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해변가 거리에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끼고 걸어 이동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이 성벽의 높이는 약 12m나 되며 이중 삼중으로 건설되어 방패막 역할을 잘 하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가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가능했다.
이렇게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이스탄불 보스프러스 전세선으로 보스프로스 해협을 유람 후 이집시안바자르,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등을 관람했다. 관람을 마치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따라 이동하며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식당에서 생일을 맞은 일행 축하와 회고의 시간을 갖고 한국행 야간 비행기에 올랐다.
이스탄불에서 한국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는 1만 킬로미터 정도로 비행시간은 약 11시간 정도이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오늘을 돌아본다. 아침에 유람선 일정을 시작으로 소피아성당과 오벨리스크, 발렌스 수도교와 테오도시우스 성벽 등을 둘러보며 느낀 이스탄불의 이미지는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오스만제국 등 동서양이 혼합된 복잡다다한 사람들과 문화들의 용광로와 같다는 것이었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