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터키, 한국 방문기 (2)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아테네에서 크레타 (Crete) 섬으로
10월 25일에는 크레타 (Crete) 섬에서 베네치아 성채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크노소스 궁전과 고고학 박물관, 이라클리오 일대, 디도기념교회 등을 방문 후, 이어 다시 야간 페리를 이용해 아테네로 돌아와 고린도로 이동한다.
아테네 피레우스항에서 출발해 하룻밤을 페리로 이동해 유럽 최초의 문명발상지 크레타 (Crete) 섬에 도착했다. 이용한 페리 ANEK LINES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여객 운송 회사 중 하나로 1967년 크레타의 주민이었던 수많은 주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주로 피레우스 크레타 (Piraeus-Crete) 및 아드리아 해 (Adriatic Sea) 노선의 여객 페리를 운행한다.
밤새 오면서 페리 침대칸에서 바라다 보이는 해안경치가 좋았고, 크레타 섬에서의 아침 식사도 훌륭했다.

크레타 섬 개관
크레타 (Κρήτη)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오늘날까지 역사, 신화, 음악, 방언 등 다방면에 있어 고유한 문화적 전통이 이 섬에 전해 내려왔다. 고대사에서 크레타는 유럽 문명이 시작한 장소로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미노아 시대 크노소스 궁전과 페스토스 유적, 고르틴 유적, 말리아 유적 등 여러 고대 유적이 남아 있다. 또한 크레타에는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 레팀노의 올드타운, 프랑고카스텔로 등 베네치아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문화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며,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매년 3~5백만 명의 외국 관광객이 크레타섬에 방문한다고 한다.
크레타섬의 경제는 오랫동안 농업과 목축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1970년대부터 관광업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크레타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농업/목축업과 관광/서비스업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보완적이다. 이 섬의 1인당 소득은 그리스 평균치에 근접하나 실업률은 4% 정도로 국가 전체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리스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농업이 크레타의 중요한 산업이다. 그리스 전체 면적의 약 4분의 1 가량을 올리브 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크레타섬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인데, 동에서 서까지 260km에 이르지만 남북으로 그 폭은 60km 정도이며, 폭이 12km에 불과한 레라페트라처럼 좁은 지역도 있다. 크레타의 면적은 8,303km2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1,046km로, 북쪽에는 크레타 해, 남쪽에는 리비아 해, 서쪽으로는 미르토아 해, 동쪽에는 카르파티온 해가 있다. 그리스 본토에서 남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크레타주에 속하는 가브도스 섬은 유럽 최남단에 위치한다.
크레타에는 산지가 매우 많으며, 동에서 서로 높은 산맥이 이어져 있으며 큰 산맥 세 곳을 이룬다 (레프카오리 산맥 : 화이트 마운틴, 2,452m, 이디 산맥 : 프실로리티스 산, 2,456m, 딕티 산맥). 오말로스 고원, 니다 고원 등 비옥한 고원이 있으며, 사마리아 협곡, 임브로스 협곡, 쿠탈리아티코 협곡, 아라데나 협곡, 아이아 이리니 협곡 등 많은 협곡이 있다. 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긴 협곡 중 하나로, 그 길이가 16km에 이른다. 크레타섬은 엘라포니시 해변, 발로스 해변, 프레벨리 해변, 마탈라 비치, 팔라사나 해변, 등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마리아 협곡은 크레타 야생 염소 키리-키리의 서식지이며, 크레타 산지와 협곡은 멸종위기종인 수염수리의 은신처이다.
크레타는 그리스의 행정 구역상 크레타 주에 해당한다. 하니아 현, 이라클리오 현, 라시티 현, 레팀노 현이 크레타 주에 속해 있다.
현재 크레타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중심 도시는 이라클리오이지만, 1971년까지 크레타섬의 중심 도시는 하니아였다.
크레타섬의 주요 도시는 이라클리오 (인구 173,993명), 하니아 (인구 108,642명), 레팀노 (인구 34,300명) 이다.

크레타섬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두 기후 지역에 속하는데, 주로 전자에 속한다. 그래서 크레타의 기후는 무척 온화하다.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에도 꽤 따뜻하다. 11월에서 5월 사이 산에는 눈이 흔하지만, 특히 해안 등 낮은 지역에는 드물며 몇 분, 몇 시간만 지나도 땅에 금방 눈이 사라진다. 크레타의 여름은 평균 기온이 섭씨 20도 후반에서 30도 초반 정도이며, 가장 더울 때는 섭씨 30도 후반에서 40도 정도이다. 크레타 남부는 대추야자가 열매를 맺으며, 제비가 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일 년 내내 이 섬에 남아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올리브 나무가 크레타섬에 있다.
크레타 섬에 최초로 사람이 산 것은 도기 이전 (aceramic)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들은 소, 양, 염소, 개를 키웠고, 곡물과 콩을 재배했다. 고대 크노소스는 신석기(나중에는 미노아 문명) 유적지의 한 곳이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초기 크레타의 역사는 미노스 왕, 테세우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같은 전설이 서려 있으며,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크레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휘말려 기원전 71년에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의 침공을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뒤이어 삼개 군단을 이끌고 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3년간 악명 높은 전쟁을 벌이다 결국 기원전 69년에 로마에 정복되었다. 그리하여 메텔루스는 “크레티쿠스” (Creticus)란 칭호를 얻었다. 고르틴은 이 섬의 수도가 되었으며, 키레나이카와 더불어 크레타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크레타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남았다. 그러나 이베리아 무슬림 아부 합스 우마르 알 발로티가 826년 이 곳을 점령하여 크레타에 해적 토후국을 세웠다. 960년 비잔티움의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다시 섬을 수복하여 1204년까지 비잔티움 영토로 남았다. 그러다가 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는다. 베네치아는 이 섬을 4백여년간 지배했으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예술 작품이 많이 나왔다. 크레타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로는 화가 엘 그레코와 작가 비첸초스 콜나로스가 있다.
베네치아 시대 칸디아 시는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유명했다. 1492년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이 곳으로 와서 살았다. 1627년 칸디아 시에는 800여명의 유대인이 살았으며 도시 인구의 7%를 차지했다.
1669년 오스만 제국이 21년간의 칸디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크레타를 정복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대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모스크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와 권리는 계속 보장되었다. 17세기에 이 도시는 높은 성벽과 능보로 둘러싸여 서쪽과 남쪽까지 뻗어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은 북동쪽 지역으로, 이곳에 모든 상류층이 모여 살았다. 오스만 제국이 칸디아에 편 도시 정책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 재산이었다. 이를 통해 오스만의 지도층은 파괴된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구를 늘리고 도시 재산을 팔아 도시 수입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몰리 그린(Molly Greene, 2001)에 따르면, 오스만 지배하에서 많은 부동산 계약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파괴된 도시에서 소수자들도 재산을 구매하는 권리를 얻어,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인들도 부동산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었다.
아랍인의 대정복 때부터 크레타에 이미 무슬림들이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슬림이 더 늘어났다. 대부분의 크레타인 무슬림들은 크레타 그리스어를 쓰던 지역 그리스 개종자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크레타의 정치 상황에서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들을 터키인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리스 독립전쟁 직전에 크레타 섬 인구의 45%가 무슬림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크레타 그리스도 교도 출신이었다. 나중에 터키, 로도스, 시리아 등지의 사회 불안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섬을 떠나자 남은 자들은 다시 그리스도교로 돌아오게 된다. 1900년에 섬 인구의 11%만이 무슬림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1924년 터키-그리스 인구 교환때 섬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크레타는 1830년 런던 의정서로 근대 그리스 국가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얼마 안되어 이집트의 술탄이 섬을 침략하여 지배를 받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1840년 6월 3일 런던 회의로 오스만 제국 영토로 돌아온다.
1833년에서 1897년까지 그리스도교도의 반란이 몇몇 일어났다. 1898년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 밑의 자치령으로 있었다. 결국 크레타는 1913년 12월 1일에 그리스 영토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이 섬은 유명한 크레타 전투의 무대였다. 이 전투는 1941년 독일 낙하산 부대가 7,0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지역 주민과 버나드 프레이버그 장군이 지휘하는 영연방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당초 대규모 공수 작전을 포기한다.
한편 크레타섬 출신 인물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제우스 : 그리스 신화 속 등장 인물로, 올림포스 신들의 왕이다. 크레타섬 동굴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등이 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지명되었다.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시인으로, 그리스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7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나 무스쿠리 : 크레타섬 하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의 가수로, 당대 최고의 세계적인 스타였다. 여러 언어로 200개 이상의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고, 약 3억 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갖고 있다.
.엘 그레코 :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화가이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비잔틴 양식을 익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거쳐 이후 스페인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했다.
.아이네시데모스 : 크레타섬 크노소스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 유명하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혁명가이며, 20세기 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수 차례 그리스 국무 총리직에 선출되었다.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 크레타 하니아 출신으로, 그리스 총리를 역임했다.


베네치아 성채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
섬의 첫 방문지는 베네치아 성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방문했다.
크레타 출신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zantzakis, 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하의 기독교인 박해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으며, 나중에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소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시적인 문체의 난해한 작품을 남겼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터키의 지배하에서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상적 특이성을 체감하고 이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과 연결시킨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영향을 고루 받았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 호메로스에 뿌리를 둔 그는 1902년 아테네의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났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업적은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는다.
1908년 파리로 건너간 카잔자키스는, 경화된 메카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려 한 앙리 베르그송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초인’으로서 완성될 것을 주장한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자는 불교의 사상은 그의 3단계 투쟁 중 마지막 단계를 성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다른 작품들로는 ‘오뒷세이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성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동족 상잔’ 등이 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것은 여행과 꿈들이었다”라고 할 만큼 카잔자키스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그리스 전역은 물론 세계 각지를 여행했고 다수의 기행문을 출간했다. 또한 1917년, 여행 중에 만난 요르기오스 조르바스와 함께 갈탄광 개발 사업을 하다 실패했으나, 이때의 경험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1946)로 남아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생전에 미리 써놓은 묘비명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우리 일행은 그의 무덤 앞에서 생을 말하고 죽음을 말했다. 그리고 다함께 사진을 찍으며 우리가 읽었던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에 대해 생각했다.





크노소스 궁전과 미노스 문명
니코스 카잔자키스 무덤 방문후 우리 일행은 크로소스 궁전으로 향했다.
크노소스 (Κνωσός)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있는 현존하는 것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청동기 시대 유적지로, 유럽 최고 (最古)의 도시라 불린다.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크노소스라는 이름은 크레타의 주요 도시를 기록한 고대 그리스 문서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그 내력이 유구하며, 그 존재는 청동기 시대부터 전승 기록과 초기 발굴 장소 근처와 케팔라 언덕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로마 동전에 그려진 미노타우로스와 라비린투스, 미노스의 묘사로 확인할 수 있으며, 크노시온 (Knosion) · 크노스 (Kno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로마인들은 크노소스를 식민지로 삼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미노스 문명
미노스 문명 (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년경 ~ 기원전 1170년경), 미노아 문명 또는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있었던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고대 문명이다.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1500년경 동안 번성했다. 그 후로는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미노스 문명은 20세기 초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의 발굴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며, 1939년 윌 듀런트는 미노스 문명을 “연속된 유럽의 첫 고리”라고 하였다.
미노스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칭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노스의”를 뜻하는 “미노안 (Minoan)”이라는 낱말은 아서 에반스가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인 미노스(Minos)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미노스는 그리스 신화의 미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데, 아서 에반스는 그 곳이 크노소스라고 비정했다. 혹자는 시리아 마리 (Mari) 문서고에 나오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 “케프티우” (Keftiu, kaftāw)와 셈어 “카프토르” (“Kaftor” 혹은 “Caphtor”) 그리고 “카프타라” (Kaptara)가 크레테 섬을 이르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지 수 백년 뒤에 나온 오디세이아에는 크레테 원주민을 “에테오크레테 사람” (Eteocretans, “진짜 크레테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아마도 미노스인의 후손일 것이다.

미노스 문명의 궁전들은 이 섬에서 발굴된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거대한 장서고를 통해 이 곳이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발굴된 각 궁전은 제각각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건물들과 분리되어 있다. 궁전은 내외부 계단, 작은 우물, 육중한 기둥, 창고와 정원을 갖춘 다층 건물도 있다.
미노스 사람들은 미케네 그리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가령 초기 그리스의 문자인 선문자 B는 미노스 문명의 선문자 A를 받아들인 것이다.
참고로 미노스 (Μίνως)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로,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이자 크레타의 왕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 (Μίνως)는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로, 그의 형제 라다만튀스와 사르페돈들과 크레테의 아스테리온 왕에 의해 길러졌다. 그리스 최초로 함대를 만들어 에게 해 대부분을 통제하고, 퀴클라데스 군도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섬에 식민지를 세웠다. 미노스가 이름인지 왕이라는 크레타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미노스와 고대 이집트의 왕 메네스, 독일의 마누스, 인도의 마누 등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미노스가 다스리고 있었던 크레타에는, 괴물 미노타우루스가 미궁에 갇혀 살고 있었는데,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로 와서 미노타우루스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돕고자 다이달로스를 찾아갔으며,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 뭉치 하나를 주고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과 칼을 주었다. 이윽고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뒤 아리아드네와 함께 달아나자 분노한 미노스는 그들을 도와준 다이달로스를 이카로스와 함께 가뒀는데 두 사람이 탈출하자 또다시 분노하여 다이달로스를 잡을 꾀를 냈다. 미노스는 고둥 껍데기를 실로 꿰면 상을 준다는 사실을 모든 나라에 알렸다. 그리하여 다이달로스가 은신하고 있던 시칠리아 카미코스의 왕 코칼로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이달로스는 실을 꿰어 주었다. 그리고 코칼로스는 실이 꿰어진 고둥을 코칼로스로부터 받고 카미코스로 가서 다이달로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단 코칼로스는 미노스를 다이달로스가 만든 목욕탕으로 들여보내고 다이달로스에게 방법을 강구했다. 다이달로스는 끓는 뜨거운 물을 욕조로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미노스는 결국 목욕을 하던 도중 뜨거운 끓는 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그만 화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사후에 그는 그리스의 지하세계인 하데스의 판관이 되었다. 미노스 문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는데 그의 아내 파시파에와의 사이에서 아리아드네, 안드로게오스, 데우칼리온, 패드라, 글라우코스, 카트레우스, 아카칼리스 등을 낳았다.

.미노스의 이카루스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와 간음하여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를 낳자, 파시파에가 소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나무로 소 모형을 만든 것이 다이달로스였음을 알게 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대책으로 이 괴물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미궁 (迷宮)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하였다.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둔 미노스는 아테네로부터 해마다 7명의 소년 소녀를 제물로 받아 미노타우로스에게 던져줬는데,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이 제물의 틈에 끼여 미궁 속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였다. 이때 테세우스를 연모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청하자, 실타래를 주면서 입구에 실을 묶고서 다녀오면 된다고 탈출 방법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와 함께 야반도주하자 화가 폭발한 미노스는 모든 것이 다이달로스 때문이라며 빈 미궁에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붙잡아 가두었다. 제아무리 미로를 만든 당사자인 다이달로스라도 실 없이는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주변을 날아다니던 새들로부터 떨어진 깃털과 미궁 곳곳에 맺힌 벌집에서 얻은 밀랍으로 사람이 날 수 있을 정도로 큰 날개를 만들어 몸에 붙이고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라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이 때 다이달로스는 태양열에 날개가 녹지 않도록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고 바닷물에 날개가 젖지 않도록 바다 가까이 너무 내려가지도 말라고 경고했는데, 이카로스는 새처럼 나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나머지 그만 부친의 당부도 무시하고 너무 드높이 날아오르는 욕심을 내버리는 바람에 결국 태양열로 인해 날개를 붙인 밀랍이 다 녹아 망가졌고 이로 인해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서 익사한다. 지상에 착륙한 다이달로스는 아들의 시신을 건져 올리고는 크게 슬퍼하며 섬에 묻었는데, 나중에 이 섬은 이카로스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아 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비롯된 ‘이카로스의 날개’는 미지의 세계 (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동경 그리고 동시에 한계를 상징한다.

.에번스의 발굴
에게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의 하나로 테라라고 하는 섬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고 추측되는 오랜 옛날, 큰 분화가 일어났다.
그때 매몰된 도시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며, 용암 속에서 장식 무늬가 있는 도자기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2년 후, 후기 청동기 시대 (이른바 미케네 시대)의 분묘가 로도스섬의 이말리수스에서 새로 발견되어, 특색 있는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어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 후인 1876년에 미케네의 발굴을 시도하여, 이름 높은 사자문 (獅子門)의 남쪽에 있는 왕족의 분묘에서 대량의 금은과 기타 세공품을 발견했다.
슐리만의 발굴로 그리스 태고문화 탐구가 점차 활기를 띠고 진행되어, 1900년, 영국인 아서 에번스는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유적 발굴에 손을 댔다.
에번스는 그리스 본토 및 그 밖의 여러 섬들의 소위 ‘미케네 문명’보다도 더 오랜, 한층 세련된 문화를 거기서 발견하였고, 이것이 에게 세계의 구명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출토의 유품, 특히 항아리의 형태나 장식 양식의 변화에서 크레타 청동기 시대의 연대 구분법을 안출 (案出)하고, 또 크레타 문명에 ‘미노스 문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아서 에번스 (Arthur John Evans, 1851년 7월 8일 ~ 1941년 7월 11일)는 고고학자 조지 에번스의 아들로, 옥스퍼드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으며 1884년부터 1908년까지 모교 옥스퍼드 대학교의 애슈몰린 박물관 관장 (Keeper)으로 재직했다.

1898년 크노소스 왕궁을 발굴하기 시작한 에번스는 이후 35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왕궁과 그곳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복원했다. 19세기 중엽만해도 전설 속에 묻혀있던 에게 문명을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아로 지목되는 곳을 비롯하여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했다.
이에 1900년부터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 섬 북부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으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트로이아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 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 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반스는 크레타 섬 발굴에서 선형 문자 (線上 文字)가 기록된 여러 점토판 문서 (土版 文書)를 발견하였다. 고고학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기사작위 (Knight Bachelor)를 받았다.



.미노스문명의 문화 예술
크노소스의 궁전은 낮고 가파르지 않은 언덕 위에 있다. 궁전의 가운데에 장방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거실이나 침실·목욕탕 내지는 신전 (神殿) 등, 여러 종류의 방들이 둘러싸고 있다. 방의 배치가 아주 불규칙하여 전체적으로 긴밀한 통일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통풍이나 채광을 위한 고려 (考慮)를 비롯하여 완전한 하수 (下水)장치 등 위생시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그리고 저장실 (貯藏室)에는 술·기름·곡물류를 넣는 커다란 항아리가 길게 열을 지어 있어, 크레타 왕족의 부유함을 말해 주고 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현재로는 옛날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부분적으로 복원 (復元)되어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옥좌 (玉座)가 놓인 방의 건축에 있어서, 크레타인은 석재 (石材)뿐 아니라 목재도 사용했다. 흥미있는 것은 낮은 주춧돌 위에 고정시켜 세운 나무기둥이, 상부 (上部)에서 하부 (下部)를 향해 차차 가늘게 되어 있는 점이다.
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 (彫像)은 만들지 않았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좌가 놓인 방의 벽화에서는 기복 (起伏) 있는 땅 위에 백합 비슷한 꽃이 피어 있고, 옥좌의 양측에 우아한 형체를 가진 신화·전설상의 동물이 가로누워 있다. 또한 크레타의 벽화에는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나 남녀의 행렬 등을 그린 것도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 크노소스의 궁중 여관 (宮中女官)을 그린 벽화에서는, 여자들이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값비싼 장신구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도 크레타 문명의 세련된 일면과 동시에 여자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이 엿보인다.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The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
크노소스 궁전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이어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중간에 나눈 해변가에서의 점심은 달았다.
이라클리오 (Ηράκλειο)는 그리스 크레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크레타주의 주도이다. 또한 그리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이름은 헤라클레이온 (Ἡράκλειον)이라 쓰기도 하는데, 고대 그리스어와 카타레부사의 표기이다. 수 백년 동안 이 도시는 칸디아 (Candia)로 불렸는데, 이전 그리스어 명칭인 ‘칸닥스’ (Χάνδαξ) 또는 ‘칸다카스’ (Χάνδακας)에서 차용한 베네치아어 표기이며, 또 이 말은 아랍어 rabḍ al-ḫandaq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칸디아의 영어식 표기인 ‘캔디’ (Candy)는 프랑스어에서 온 말로, 도시 칸디아나 크레타 섬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 도시는 ‘칸디예’ (Kandiye)로 불렸으며, 현지에서는 ‘카스트로’ (Κάστρο, “성”)으로 쓰고 이 곳 주민을 ‘카스트리노이’ (Καστρινοί, “성에 사는 사람”)라고 쓰기도 하였다. 이라클리오는 이라클리오 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딴 이라클리오 국제공항이 있다. 근처에 아서 에반스가 발굴하여 복원한 크노소스 유적지가 있는 것이다.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The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의 첫 번째 시설은 1904년 ~ 1912년 사이에 크레타 고고학자 조셉 카치다키스와 스테페노스 잔토우디디스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설립되었다. 이어 두 번째 시설은 1937년부터 현대적인 건물로 스피리돈 마리나토스에 의해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유물의 전시 및 정리는 1950년대에 니콜라오스 플라톤과 스탈리아노스 알렉시오우에 의해 주도되었다. 주로 크레타의 중부아 동부에서 발굴된 것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다. 이어 2014년에 재수리하여 현재의 박물관 형태를 갖추었다.
이 박물관에는 크레타 섬동부와 서부뿐 아니라 부근 섬에서 나온 크레타 문명의 기념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1, 2층에 걸쳐 모두 20여개의 전시실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실은 시대별로 구분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미노아 문명의 형성과정이나 시디귿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석기시대는 원석기 시대,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 시대로 구분했다. 크레타 섬에서는 아주 초기의 구석기시대 즉 150,000년 전에 사람이 살았으며, 제대로 된 주거가 형성된 것은 구석기 시대 말기 또는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로 설명한다.
신석기 시대에 동 종류의 금속이 개발되며 사람들의 정착이 가속되고 기원전 3000년전부터 크레타섬에서는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 청동기의 발달로 수확도 늘고 삶의 질도 높아졌으며 마을들도 번영하게 되었다. 미토스나 바실리키에서 발견된 것으로 유추해보면 대개 마을들은 중앙에 광장을 두고 작은 집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또한 해상교역이 발전되자 더욱 부가 쌓이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크노소스 언덕 아래의 미노아 궁전 유적 밑에는 크레타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있다. 초기의 작은 오두막으로 된 주거지는 후일 여러개의 방이 있는 사각형의 건물로 이어졌다. 신석기 말기에는 주거지가 확장되었고, 집들이 더욱 견고한 토대위에 지어졌으며 벽과 벽난로 등 가구가 배치되었다. 이렇게 공간이 변형되었다는 것은 지역사회가 재구성되고 구성원간의 새로운 사회적 경계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굴된 지층별로 시대별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 BC 8000년 경에는 사냥도구나 여신상, 돌로 만든 병들, 점토조각, 무덤 부장품 등이 주로 출토되었다. BC 4000년 경에는 희귀보석과 준보석들 (자수정, 수정, 홍옥수, 유리 등으로 만든 목걸이와 펜단트) 등이 출토되었다.
BC 3000년 경에는 금과 크리스탈로 만든 부착물들과 의복이나 관 (머리에 쓰는) 등이 출토되었다. 미노아 시대의 유물로는 도기류, 유약 칠한 도기와 장식물들 등이 독창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BC 2000-1700년 경에는 단단한 흑요석을 이용해 부드러운 돌을 갈아 그릇류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으나 이 시기에는 더 단단한 돌들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금속제품들은 특화된 청동공예공방에서 만들어졌다.
BC 1500년 경에는 청동기 유적으로 필기형태의 도구들과 연장, 청동상 등이 나타나며 특히 화려한 모양의 도자기들과 석재 그릇류들이 출토되었다.

한편 후기 청동기 시대에 미노아 건축은 그 설계와 건축기술에 있으서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크노소스의 미로같은 궁전과 시가지 구성은 이러한 것의 축소판이다. 이시기에 미노아 도자기는 그 정점에 도달하여 우아한 형태네 다양한 주제와 다채로운 색을 사용한다. 또한 벽화에도 화려한 채색을 입힌다. 이 시기 상아로 만든 하프나 다양한 악기 연주 그림과 춤추는 토기상도 나온다. 이집트 수입품으로 주동이와 손잡이 있는 그릇들도 있다.
BC 1300년 경 궁전후기 시대 크노소스 궁 근처의 무덤에서는 청동 무기류나 집기류는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파이스토스 주변 무덤에서는 청동 집기류들, 연장들과 무기들, 준보석류와 황금보석류, 화려하게 장식된 그릇들이 출토된다. 이시기 커다란 이집트산 아라베스터 병도 나타난다. 미노아인들의 후세에 대한 관념과 믿음은 관의 그림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노아 벽화미술 수준도 이때 더욱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프레스코 벽화는 궁전의 벽과 바닥, 천장을 장식한다.

BC 11~1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석조건물들은 선사시대의 건축전통을 따랐다.
BC 9~4세기의 도시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않지만 어던 도시들은 방어 성벽도 있었고, 공동묘지와 신전도 있었다. 또한 도시의 중심에는 아고라라는 사회적 정치적 공중화합장소도 있었다.
BC 3~2세기에는 철기 유물이 나타난다. 청동은 흔한 소재가 되어 청동 월계관이나 청동상, 솥단지, 생활 장신구 등으로 만들어 지고, 철기는 귀한 재료로 당시로서는 아주 귀했을 철기제품가 보석류, 그 밖의 집기류가 출토되었다. 처음에는 청독기와 철기 제품이 섞어져서 나오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기만 출토된 것으로 보아 튼튼한 철기가 생활 속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BC 67년 크레타는 로마에 정복되었고, 고르티나는 수도가 되어 로마의 다른 속주의 대도시들과 같은 면적과 규모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기간동안 크레타에는 신전이나 아고라, 분수와 수로, 극장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런 크레타의 번영은 다른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근동이나 소아시아 등과의 교역에 힘입은 것이다. 이 시기 동전 화폐도 출토된다. 로마시대 총동상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로 신을 만들던 이전과 달리 보통 사람들, 동물들 등 다양한 주제가 나타난다.

크레타 섬의 디도기념교회
디도스 / 디도 (공동번역, 개신교) / 티토 (가톨릭, 그: Τίτος)는 초기 기독교의 선교사이자 교회 지도자로, 디도서 등의 바울 서신에서 언급되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다.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전승에 의하면 그는 크레타의 감독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바울에게서 받아 전달한다. 이후에 크레타에서 디도는 죽을 때까지 크레타 섬의 모든 도시에 장로를 임명했고, 칸디아 (현재의 이라클리오) 주변에 있는 도시인 고르티나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성물은 지금은 두개골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터키 점령기때 베네치아로 이송되었다가 1966년에 반환되어 지금까지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의 디도기념교회에 있다. 제단 앞 편에 화려하게 치장한 유리 돔 안에 디도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크레타 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나눈후 페리를 타고 다시 밤새 아테네로 향했다. 아테네에 도착하면 바로 고린도로 이동할 예정이다.

크레타를 빠져나오는 페리의 침실에서 크레타에서 보낸 하루를 돌아봤다.
유럽 최초의 문명발상지 크레타. 섬의 첫 방문지 베네치아 성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방문하며 자유를 생각했다.
에반스의 노고로 발굴된 크노소스궁전에서는 역사가 된 신화, 신화가 된 역사 등을 생각했다.
디도기념교회에서는 삶의 이유를 묵상하며 기도했다.
크레타섬을 떠나며 아프리카 특히 이집트나 중동, 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유럽에 어떻게 반영되었나 궁금해지면서 앞으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려한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