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년 6월 24일 또는 12월 경, 중국 후한 말의 무장 관우 (關羽, 160/165? ~ 219) 별세
관우 (關羽, 간: 关羽, 160/165년? ~ 219년 6월 24일 또는 12월 경)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운장 (雲長, 간: 云长)이다. 의제 장비 (張飛)와 더불어 유비 (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장으로 손꼽힌다. 한대 이후로 남송의 악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 (史書)에 등장하는 후세 사람들은 ‘용맹한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 장비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 관우 (關羽) / 장무후 (壯繆侯)
.휘: 관우 (關羽)
.별호: 미염공
.자: 운장 (雲長)
.제호: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
.시호: 장목후 (壯繆侯)
.신호: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 (三界伏魔大帝神位願天尊關聖帝君)
.출생: 160년 / 165년 (추정), 후한 사례 하동군 해현 (現 산서성 윈청시 옌후구 하이저우진)
.사망: 219년 6월 24일 / 12월경, 후한 형주 남군 임저현 (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능묘: 관릉 (關陵)
.가문: 관씨 (關氏)
.부모: 관의, 성충왕부인 (成忠王夫人)
.배우자: 영황후 (英皇后)
.자녀: 관평, 관흥, 관색
.종교: 유교
*한수정후
.재위기간: 199년 ~ 219년 6월 / 12월
.후임: 관흥
의리의 화신 (化身)으로 중국의 민담이나 민간전승과 전설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 (關帝廟)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명나라 시기 협천호국충의대제 (協天護國忠義大帝)로서 황제에 추존되었고, 청나라 시기 신 (神)의 시호인 관성제군 (關聖帝君)으로 추존되었다. 최종적으론 황제의 시호인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로 추존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고종이 황제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 (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반
사례 하동군 해현 (解縣) 사람이다. 관우가 고향을 떠나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관우가 현상수배당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보호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책임지여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장비와 같이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천신만고를 불사하였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의 상 (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 백마 전투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 (郭圖)와 순우경 (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 (황제)에게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 (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 (蕩寇將軍)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 (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이 때 감녕은 단지 300여명의 병력만 가지고 있었는데 노숙이 추가로 증원해준 천여명의 병력을 더하여 강을 사이로 관우와 대치하였다. 이에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였고,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 (關羽瀨)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 (美髯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며 마량과 바둑을 두는 중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 (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이 사건으로 우금이 조조에게 비난을 듣는다. (“그대는 누구시오? 40년 동안 날 따른 사람은 아니겠지? 난 방덕은 아오만 그대는 모른다네, 어찌 목숨이 아까워 주인을 버린단 말이냐?”)그 사이 손권은 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내고, 여몽이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때 관우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우금을 생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금과 그 부하들이 먹는 식량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우금의 부하들이 먹어치우는 군량 때문에 관우의 군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관우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손권의 영토인 상관 (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 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목후 (壯繆侯)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 (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 (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 (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

○ 평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 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될 만큼 오랫동안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유명한 위인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전한 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관공’이라고 높히며 매우 존경한다. 사후 약 2천 년인 오늘날에도 관우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국가를 따지지 않고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 등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작품 곳곳에서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평생에 걸쳐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천하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믿었던 아군과 동맹에게 배신당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만 관우의 이름은 오히려 이천 년이 넘도록 생생히 살아남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추앙은 높아져 후대에는 공 (公)에서 왕 (王)을 넘어 주군 유비와 동급인 황제 (帝)까지 추존되었고 급기야 신으로 모셔지기까지 했다. 보통 추존은 군주가 자신의 직계 조상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가문이 왕가가 아님에도 이렇게 후대에 격상된 경우는 굉장히 예외적이었다. 이는 단지 충 (忠)을 강요하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 때문은 아니었다.
애당초 관우는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었다. 출생년도와 출신성분부터가 불명확했고, 전장에서는 종종 패배하는 한편 적에게 항복하기도 했었고, 협잡에 가까운 기만책도 썼었다.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는 화목하지 못했고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것이 빌미가 되어 끝내 패망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결점을 뛰어넘을 영웅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주군 유비에 대한 그 끝 모를 의리와 이미 손아귀에 넣은 부귀영화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내던지고 적수공권인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의 모습은 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비가 모든 인재와 병력을 뽑아간 이후에도 얼마 안 되는 남은 병력만으로 사력을 다해 형주를 지켜내는 모습은 실로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었으며, 신념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였다.
관우는 결코 백전불패의 완벽한 명장이 아니었다. 때로는 패배했고, 때로는 실책도 저질렀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천하에 이름을 날리던 그도 일개 패장 (敗將)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이나 소시민들이 이상 (理想)으로 생각한 삶의 태도를 그는 현실 세계에서 끝까지 지켜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다. 강자에게는 도도했지만 약자에게는 너그러웠다. 하여 그의 비극적인 삶이 마침내 종막을 고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관우는 영원불멸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 가족 관계
– 정사에 기록된 인물
광소왕 – 관우의 증조부.
관심 – 관우의 조부.
관의 – 관우의 부친.
영황후 – 관우의 황후.
관평 – 관우의 장남.
관흥 – 관우의 차남.
관우의 딸 – 실존인물이나 민간 전승에서는 관은병, 관삼소저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관통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적자.
관이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서자.
– 야사나 민간전승에 기록된 인물
관색 –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삼남.
관승 – 수호전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후손.
호금정 – 화관색전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아내.
조씨 – 강릉현지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며느리, 관평의 아내, 조운의 딸.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