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이사야 6장 1-8절
오늘의 제목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 Who will be our Messenger? (Good News Bible)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장 1-8절)
오늘은 이사야에게 던지신 주님의 두 번째 질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질문과 이사야의 대답은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가 소명을 받는 스토리이인데 먼저 이사야라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는 구약의 문서 선지자 중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며 예레미야, 에스겔과 함께 구약의 3대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이사야서는 66장에 이르는 긴 예언서 입니다. 신약에서는 이사야서가 시편 다음으로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구원”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이사야는 남유다에서 영향력이 큰 귀족 가문 출신으로 왕과 왕궁의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모스”라고 되어 있는데 물론 선지자 아모스와는 동명이인 입니다. 어머니나 아내의 이름은 나와있지 않은데 맏아들 이름은 “스알 야숩”이고 둘째의 이름은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내와 가까이 하니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하시니,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가게 되었도다” 본서 8장 3-4절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본서 첫머리에 나오는 대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후 남왕국 유다의 웃시야로 부터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기원 전 742년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부르심을 받은 후 기원전 701년 까지 약 40여년에 걸쳐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사야서는 1장 부터 66장 까지 모두 이사야라는 한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현대 구약학자들 중에는 1장 부터 39장, 40장 부터 55장, 그리고 56장 부터 마지막 66장 까지는 그 예언의 내용이나 문체 등이 제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서 이사야 외에 다른 사람들이 추가적으로 기록하여 한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학자들은 40장 부터 55장 까지는 제 2 이사야서, 55장 부터 66장 까지는 제 3 이사야서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그 근거로 이사야서 8장 16절에는 이사야에게 제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들 제자들이 훗날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 까지 다 보고 난 다음 추가적으로 40장 이후를 보완기록한 다음 그들의 스승인 이사야의 이름으로 이 책을 남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구약학자들은 이들 이사야의 제자들을 <이사야 학파, School of Isiah> 라고 부릅니다.
학문적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기로 하고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던지신 질문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물음의 배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웃시야왕이 죽던 해, BC 742년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그는 성전에서 환상 중에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 지성소에는 법궤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법궤와 함께, 혹은 법궤안에 계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주께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은 직접 부를수가 없어서 <아도나이>라고 부른 데서 나온 호칭입니다. 주님은 법궤가 있는 보좌 곁에 앉아 계시고 그의 주변에는 스랍들이 모시고 계셨습니다. “스랍”이란 “불꽃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보좌하고 하나님께 시중을 드는 거룩한 존재를 말합니다. 이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지니고 있었는데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는 펼쳐서 날아 다닐수 있었습니다. 스랍들의 찬양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때 성전안 문지방의 터는 흔들거렸고 연기로 가득채워졌습니다. 두려움에 어쩔줄을 모르던 이사야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합니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를 뵈었음이로다> 그 때 스랍 중 하나가 빨갛게 달구어진 숫불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면서 말했습니다. <보아라.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 너의 모든 악은 사라졌다. 너는 정결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요>
이사야가 경험했던 이 환상적 스토리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려는 주제가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불러서 쓰시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 하시는 기준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을 주의 종이요, 사환이요, 심부름꾼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선지자요, 제자요, 사도라고 부르든, 혹은 설교자요, 교사요, 선교사라고 부르든, 하여튼 하나님이 불러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할까? 오늘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사 기준과 인사의 기본원칙을 생각해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도 삶의 현실 속에서 필요에 따라 여러 사람들을 불러서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정부와 기업, 기관과 단체로 부터 작은 가게의 업주에 이르기 까지 한 조직의 윗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는 자기 아랫 사람들을 임명하고 채용할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사권이라고 말합니다. 대통령, 장관, 도지사, 시장, 기업체의 회장, 학교의 총장, 이시장, 교장들은, 그 자리에 따라서 막강한 인사권을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는 비공식적인 영향력은 빼고 순수하게 법적으로 만도 약 6000명 정도의 사람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는 국무총리, 장관, 검찰총장, 경찰총장, 감사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 4성장군, 주요 공공기관장 등을 자기 뜻대로 임명하거나 파면할 수 있는 인사권이 있습니다. 한국같은 나라도 그러한데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큰 나라들의 권력자들에게는 얼마나 크고 막강한 인사권이 주어져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묻게 되는 것은 그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쓰고, 임명하는 것일까요? 실력, 자격, 인품, 성품, 외모, 지연, 학연, 인맥 등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상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권세 잡은 자들은 언제나 겉으로는 공평인사니, 능력인사니, 탕평인사니, 실사구시니, 삼고초려니 등등 듣기 좋은 말들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질 않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 정실인사요, 파벌인사요, 낙하산인사요, 보은인사요, 회전문인사요, 코드인사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인간이란 탐욕적 존재요, 이기적 DNA를 극복하기가 어려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일 하실 때 두 가지 방식으로 하십니다. 하나는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겁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 부터 시작하여 자연계를 운영하시고 통치하시는 등 수 많은 역사를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는 등 하나님은 친히 역사의 주관자로 일해오셨고 앞으로도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은 인간들을 통하여, 사람을 그의 도구로 사용 하시어, 역사를 일으키시고 일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아무나 불러서 그냥 일을 시키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부르셔서 그를 하나님의 종이요, 도구로 쓰시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시키시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우리는 흔히 <소명>, <부르심>, 영어로는 calling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즉 소명이 확실한 사람만이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종은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야만 될수 있는 자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나타나셔서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낼수 있었습니다.(출 3:4)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부터 불렀느니라> (렘 1:4) 에스겔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불러 세우노라. 내가 너를 이 패역하고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돌과 같이 굳은 백성들에게 보내노라> (에스겔 1-3장) 예수님께서도 갈릴리호수에서 고기잡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친히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시어>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 4:21)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기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공언했습니다. (로마 1:1) 고대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은 이미 <땅끝에서 부터 부르심을 받은 민족>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사야 41:9) 초대교회 성도들도 자신들은 <하늘로 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히 3:1) 하나님께로 부터 분명하고 확실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이나 부르심이 없는 공동체는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나 하나님의 종이 될수가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 잘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 하나님이 쓰시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기준, 즉 하나님의 인간 선택의 원칙, 하나님의 인사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인사기준 역시, 당연히 인간들의 기준 – 대통령이나 수상이나 사장이나 보통 우리들의 인사 기준과는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스토리를 읽다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의 인사 제 1원칙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보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처럼 인간의 외모, 외형, 생김새, 형식, 능력, 자질, 고향, 학벌, 경험 같은 것들은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직 사람의 마음, 인간성, 인간의 바탕, 인간의 됨됨이를 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아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나 여호와는 사람의 심장을 살피고 그 패부를 시험하느니라, 렘 17:10> <너희는 알아라. 나는 사람의 마음과 그 뜻을 살피느니라, 계 2:23> 인간의 마음을 보고 살피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 그의 믿음, 그의 진실성을 보시고 그를 부르시어 예언자나 제자나 사도나 목사나 선교사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 인간들은 절대로 사람의 속마음이나 그 심성을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를 세울 때, 담임목사를 청빙 할 때, 감독이나 총회장을 선출 할 때, 기껏해야 겉으로 들어난 이력서를 흩어보고 설교나 연설 한두번 들어보고 인터뷰 한번 해 보고 그를 담임목사나 총회장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인간의 마음 중심을 알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간사하고 속임수에 능하고 위선적이고 거짓된 존재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수 있으리요, 렘 17:9> 인간의 마음은 쓰레기 보다 더 부패하고 똥 보다 더 지독합니다. 슬프기는 하지만 저는 죽을 때 까지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고 여러분 역시도 죽었다 깨어나도 홍길복이라는 인간의 심성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혼하여 부부로 50년 이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이란 영원히 알 수 없는 존재> 입니다. 그런데 여기 참 신비하고 이해가 잘 않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잖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부패한 존재요 악한 존재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라는 것을 처음부터 뻔히 알고 계셨을텐데 어쩌자고 저 같은 인간, 우리 같은 인간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써주셨을까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정말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가 않되는 선택이요, 결정입니다. 오직 은혜, 은혜, 은혜라는 말 밖에는 그 어떤 다른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나됨>이요, <우리됨> 이라고 봅니다.
이사야는 과연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보여졌기에 부르심을 받고 또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가 되었을까요?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이사야 역시 그 마음을 알 수 없고 그 심령이란 부패한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은 존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소명에 응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쓰신 이유, 뒤집어서 말한다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된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해석해 봅니다.
그 첫째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사람입니다. 이사야라고 해서 어디 완전한 사람이었겠습니까? 그 역시도 부족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부패하게 살아왔었고 마음을 들여다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보통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제의 해결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고 똑똑하게 알고 있었기에 성전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복하였습니다. 때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영광과 쇠퇴가 함께 몰려오면서 국제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왕좌왕 할 때 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이럴 때,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물어 보고, 누구에게서 답을 얻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다> <성전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그는 본문에 쓰여져 있는대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높이 들린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을 뵙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가 명하시는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물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보내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민족적 격동의 시기에 하나님을 찾아 그에게로 나아간 것은 <모든 문제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이며 본질적인 해결은 오직 하나님에게 만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부르시고, 이런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타래 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국제문제와 전쟁, 정치와 경제, 부패와 타락, 개인적 아픔과 갈등 – 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대통령들도 가끔 무슨 절기 때 대형교회를 찾아가 정치적 쇼를 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한 10분 만이라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도 SNS에 예수님 사진 올려놓고 정치적 장난 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생기면 이사야 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가 정직하게 부복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모든 문제 – 정치문제, 국제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등 모든 문제의 종국적 해결자이기 때문입니다. Key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는 사람은 이사야 처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똑똑히 아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땅에서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부정한 인간>임을 알았고 이를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훗날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고백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로 이사야나 베드로는 모두 다 죄인이요 불의하고 불결하고 더러운 땅에서 더럽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쓰시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하게 알고 고백하고 모든 일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깨에서 힘부터 빼야 합니다. 우리는 목사, 선교사, 교수이기 전에 먼저 죄인입니다. 주님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솔직하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엎드리는 사람을 그의 도구로 삼고 종으로 쓰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오늘도 나를 찾아와 더럽고 추한 내 마음을 들여다 보시며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주여, 나는 죄인이로 소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보내어 주소서> 겸손히 엎드리는 아침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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