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진 박사의 특별기고

기억은 현재의 삶을 만든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사람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 단지 지켜보기만 했던 사건을, 시간이 흐른 뒤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기억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기억을 객관적인 사실 그 자체로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정확한가와는 별개로,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는 현재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그것을 ‘힘들었지만 잘 극복했던 경험’으로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사건은 삶의 자산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실제 사건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것을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의 경험으로 기억한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기억에 붙잡혀 살아갈 수 있다. 결국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내 안에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이다.
기억은 크게 외현기억(explicit memory)과 암묵기억(implicit memory)으로 나눌 수 있다. 외현기억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고, 암묵기억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몸과 감정, 행동 속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억이다. 외현기억에는 사실과 지식에 관한 의미기억(semantic memory)과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건에 관한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 있다. 오늘의 날씨가 어떠한지, 몇 시에 약속이 있는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하는 것이 의미기억이라면, 어린 시절 나의 재능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격려해 주었던 선생님을 그때의 따뜻한 분위기와 감사한 마음까지 함께 떠올리는 것은 일화기억이다. 특히 일화기억은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에 현재의 정서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암묵기억이 작동한다. 암묵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몸과 감정이 먼저 기억하고 반응하게 만든다. 그중 감정기억은 현재의 상황이 과거의 어떤 경험과 비슷하다고 판단될 때 당시의 감정을 빠르게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가까운 사람에게 심각한 성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배우자를 만났다고 하자. 머리로는 배우자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친밀한 상황이 되면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를 느끼거나 몸이 굳어버릴 수 있다. 현재의 배우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과거에 형성된 기억이 몸과 감정을 통해 현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절차기억(procedural memory) 역시 암묵기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한 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몸이 그 방법을 기억하는 것처럼, 몸은 반복해서 학습한 행동을 저장한다. 여기에는 운동기술뿐 아니라 위험에 대처하는 생존 반응도 포함된다. 위협을 느낄 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싸움(fight), 도망(flight), 얼어붙음(freeze)과 같은 반응이 대표적이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암묵기억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활성화되기도 한다. 현재는 안전한데 몸과 감정은 마치 과거의 위험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탐색과 성찰을 통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이 현재의 몸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트라우마 연구자인 Peter A. Levine은 『Trauma and Memory』에서 경험과 기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SIBAM이라는 틀을 설명한다. S는 신체감각(Sensation), I는 이미지(Image), B는 행동(Behavior), A는 정서(Affect), M은 의미(Meaning)를 가리킨다.
우리의 기억은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이야기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감각으로, 어떤 기억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으로, 또 어떤 기억은 움츠러드는 몸짓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 나름의 의미(Meaning)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바로 이 ‘의미’가 중요하다.
한 유튜버는 방송을 시작할 때마다 극심한 긴장을 느꼈다고 한다. 처음에는 떨림을 반드시 없애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의 떨림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떨리는 것은 방송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방송과 시청자와의 만남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몸의 반응은 그대로였지만 그 반응에 부여하는 의미가 달라졌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라는 해석이 ‘나는 이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해석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 그는 긴장을 없애려고 싸우기보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훨씬 안정적으로 방송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을 경험한다. 때로는 이유 없이 화가 나고, 누군가의 작은 말에 지나치게 상처받으며, 별것 아닌 상황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 감정을 무조건 없애려고 하기보다 한 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감정은 내 안의 어떤 기억과 연결되어 있을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할 수 있다. ‘나는 그 기억에 지금까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을까?’ 과거에 일어난 사건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을 오늘의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기억에 오랫동안 붙여 놓았던 의미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세상은 위험하다’라는 의미로 살아왔다면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억을 다시 바라보며 ‘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 일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면 기억은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억의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기억에 부여하는 의미다. 같은 기억이라도 새로운 의미를 만날 때 상처는 성장의 자산이 될 수 있고, 두려움은 자신을 지켜 주는 지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가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의미할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서미진 박사
(호주카리스대학 부학장, 호주한인 생명의 전화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