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콜롬비아 (Colombia)의 노예해방 기념일
콜롬비아 (Colombia)라는 이름은 아메리카 대륙의 항로를 처음으로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에: Cristóbal Colón)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지은 것이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던 이 명칭은 나중에 1819년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건국된 옛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영토 (현재의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에 건국한 그란콜롬비아에서 채택되었다.

1830년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떨어져나가고 쿤디나마르카 지역만 남으면서 새 나라를 신 그라나다로 지었다. 1858년 신 그라나다가 공식 국호를 그라나다 연합으로 개칭했다가 1863년 콜롬비아 합중국으로 바꿨고, 그 뒤 1886년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바꿔서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한편 콜롬비아의 노예 제도는 16세기 초부터 1851 년까지 역사적인 기간이었다. 이 과정은 스페인과 영국 상인들의 첫 번째 유럽 이주민들에 의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인신 매매로 구성되었다.
노예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왔으며 거대한 선박으로 운송되어 불안정한 조건에서 대서양 항해를 했다.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 드 인디애스 해안은 미국에 도착한 노예들의 주요 항구였다.
본토에 일단 노예들은 분리되었다. 그들은 야외에서 상품으로 매매되었고 거대 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폭파하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전 세계에 걸쳐 일련의 자유 지상 주의적 투쟁을 촉발시켰고,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독립 투쟁은 이 사건으로 인해 노예 제도 폐지의 방아쇠가 되었다. 콜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1810년 카르타헤나 (Cartagena) 주가 창설됨에 따라 콜롬비아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존중되지 않았으며 상인들은 사유 재산으로 여겨 노예 무역과 무역을 계속했다.
베네수엘라 군대와 콜롬비아의 주요 해방 요원인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는 자신의 독립 투쟁에 동참한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풀어 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유를 쟁취하도록 지도한 최초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들 유입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 (Rodrigo de Bastidas)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가들이 1499년 카리브해 연안을 처음으로 탐험하였다.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는 1502년에 카리브해 지역을 항해하였다. 1508년, 바스코 누녜즈 데 발보아 (Vasco Nuñez de Balboa)는 우라바 지역을 통해 이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1513년 그는 태평양 (그는 이것을 남쪽의 바다 [Mar del Sur]라 명명하였다.)을 처음 발견한 유럽사람이었다. 이 발견으로 스페인 사람들이 페루와 칠레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지역의 인구 구성원들은 칩찬 (Chibchan)과 카리브 (Carib)의 수백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현재는 캐리비안 사람들로 알려진 부족들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을 전쟁과 동맹을 통하여 정복하였다. 이 와중에, 천연두 같은 질병도 함께 들어왔다. 정복과 인종 청소는 원주민들의 인구 감소를 가져왔다.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들을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흑인은 노예로 끌려와서 대부분이 해안 저지에 살고 있으며, 이들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계속 유입되었다. 오늘날 큰 아프리카-콜롬비아인 집단이 카리브와 태평양 해안에 분포하고 있다. 콜롬비아 태평양 해안의 북부에 자리잡은 초코 주에서는 인구의 80% 이상이 흑인이다.
○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1783 ~1830)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란코 (스: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 ~ 1830년 12월 17일)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리베르타도레스, Libertadores)로 불린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출생: 1783년 7월 24일,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사망: 1830년 12월 17일 (47세), 그란콜롬비아 산타마르타
.국적: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 그란콜롬비아
.부모: 부) 후안 비센테 데 볼리바르 이 폰테, 모)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데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
.배우자: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스 델 토로 이 알라이사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 그란콜롬비아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819년 12월 17일 ~ 1825년 5월 4일
.전임: 초대 / 후임: 도밍고 카이세도 (제2대)
– 생애
.성장기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에 스페인령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 (Juan Vicente de Bolívar y Ponte)와 마리아 콘셉시온 (Maria de la Concepción de Palacios y Blanco) 사이에서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바스크 태생의 에스파냐 출신 가문으로 그의 5대조 할아버지 돈 시몬은 베네수엘라 총독의 비서로 근무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로마 가톨릭 사제를 오게 해서 유아세례를 받도록 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남편이 별세한 뒤 건강이 더 안좋아져서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몬은 흑인 여종인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는데, 이러한 성장환경은 시몬이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하였다. 1792년 어머니가 별세한 뒤, 고아가 된 이들 남매들은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당시 시몬은 외할아버지댁에서 살다가 외삼촌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환경과 엄격한 성격의 외삼촌과의 갈등은 시몬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여 반항아가 되게 하였다.
.교육
결국 열두살때 외삼촌 집에서 나와버린 후, 결혼한 큰 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같이 살면서 시몬 볼리바르가 살던 시대에는 진보적 가치였던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인 시몬 로드리게스 (Simón Rodríguez, 1769 ~ 1854년)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심어주면서 시몬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남아메리카에서는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들인 크리오요 (Criollo)들을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에스파냐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크리오요들은 농장을 경영할 정도로 뛰어난 경제력과 높은 교육수준을 갖고 있는데도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젊은 크리오요들은 자유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자신들을 차별하는 에스파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열정적인 투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드리게스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 시몬도 자연스럽게 많은 학식과 자유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가 투쟁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누나 내외의 소개로 인문학자이자 교육가인 안드레스 베요 (스: Andrés Bello, 1781 ~ 1865년)의 지도를 받게 된다. 교육, 문학, 법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던 베요는 시몬에게 에스파냐어와 웅변술을 가르쳤으며, 시몬이 14세가 되자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하였다. 후에 그는 칠레에 국립대학교를 설립하여 남아메리카 교육사업 발전에 공헌하였다.
.유럽생활
1년 뒤인 1798년 준위가 된 시몬은 이듬해인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멕시코와 유럽을 여행하였다. 멕시코여행은 같은 크리오요들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였으며, 유럽 (에스파냐와 프랑스) 여행은 남아메리카에서만 살던 청년 시몬에게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에스파냐의 지식인 우스타리스 후작과의 만남은 그 자신이 “우스타리스는 나의 지식의 후견인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시몬을 풍부한 학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시켰다. 마드리드에서 살던 외삼촌 페드로의 딸 마리아 테레사 (María Teresa Rodríguez del Toroy Alaysa)와 1802년 결혼하여 잠시 고향에서 살았으나 1803년 아내가 황열병으로 죽은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서 사는 동안 시몬은 1805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망명생활하던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1807년 고향으로 돌아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전 시몬은 미국에 들르는데, 미국에서의 짧은 생활은 그에게 남아메리카가 독립할 경우 미국처럼 합중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게하였다.

.독립운동 지도
고향에 돌아온 시몬은 1809년 안드레스 베요, 런던 빈민가에서 빈한한 삶을 살던 독립운동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1750 ~ 1816년)가 합류한 독립운동을 이끌어 1811년 베네수엘라를 베네수엘라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가진 국가로 해방시킨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독립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실패하였고, 시몬은 검거를 피해 네덜란드령 퀴라소 섬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망명에 필요한 서류와 여권은 시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에스파냐 사람 이투르베가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손길이 미치자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로 피신하는데, 이때 카르타헤나 선언으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베네수엘라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독립전쟁을 지도하였다. 당시 시몬 볼리바르의 군대에는 에스파냐의 학정에 반감을 갖고 있던 청년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은 연전연승하였고, 결국 1814년 8월 4일 카라카스에 입성하였다. 당시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시몬에게 해방자라는 이름을 줄 정도로 그는 큰 영광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에스파냐군은 카라카스를 다시 침공하는데 시몬의 부대는 전쟁에서 계속 지게 된다. 당시 복수심에 불탄 시몬은 포로들을 모두 총살하였다고 한다.
독립의회에서는 사병들이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이었고 무기도 열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결국 전쟁에 패하여 아이티 공화국으로 망명하여야 했다. 당시 아이티 대통령 알렉산드르 페숑 (프: Alexandre Sabès Pétion, 1770 ~ 1848년)은 남아메리카 독립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조건으로 4개 대대 약 1200명의 군대를 지원했으나,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 부대로는 잘 훈련된 사병과 최신형 대포를 가진 에스파냐군을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다. 1816년, 1817년 전쟁에서도 진 시몬은 대평원지대의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 (Jose Antonio Paez)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전술로 에스파냐군과 전쟁을 벌여 1818년 2월 12일 승리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군의 재공격으로 그해 3월 26일 시몬은 베네수엘라에서의 전쟁을 당분간 포기해야했다.
1819년 시몬은 2,5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5일간의 피스바 산 산행을 거쳐 콜롬비아로 건너간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시몬의 부대는 5,000여명의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의 병력지원과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1819년 8월 7일 콜롬비아를 해방시켰으며, 그해 12월 17일 미국의 연방정부를 본뜬 그란콜롬비아를 선언하였다. 베네수엘라를 당시 공략한 시몬은 에스파냐군 총사령관과의 휴전을 협정한 뒤, 군인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 했다. 결국 시몬은 파에스와 함께 1821년 11월 16일 카라보보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그해 11월 21일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였으며,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 (1777 ~ 1850년)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해방에 자극받아 에콰도르를 해방시켰다. 산 마르틴이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유럽에 망명하자 부하 수크레를 보내 1824년 12월 9일 페루 내 왕당파들을 제거하였고, 페루 왕당파들과의 전쟁을 마지막으로 남아메리카는 에스파냐로부터 해방되었다.
.남아메리카 해방후의 삶
하지만 전쟁에 지친 시몬은 1825년 2월 10일 종신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그란콜롬비아 의회에 반납했으며 거액의 연금지불제안도 거부하였다. 하지만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권력 투쟁과 그의 흑인 노예 해방 의지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의 반발이 원인이 된 암살미수사건 (시몬은 자신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실패하자, 주모자 국외추방 및 관련자 석방이라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에 휘말렸다. 또한 그가 선언한 그란콜롬비아도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의 독립으로 와해되자, 시몬 볼리바르는 1830년 그란콜롬비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의미로 콜롬비아 보고타를 떠나 그에게 호의가 있는 호아킨 미에르가 제공한 별장에서 살았다. 지병인 폐결핵과 동료 수크레의 암살로 인한 상심으로 건강이 최악에 다달은 시몬 볼리바르는 요양을 하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병자성사를 받은 뒤, 1830년 12월 17일 (47세) 별세하였다.

○ 여전히 빈곤에 고통받는 노예의 땅, 초코주
흑인 노예 후손들의 땅, 초코주는 여전히 빈곤과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다. 콜롬비아 인구 대다수는 백인과 메스티소지만 서북부 초코주는 흑인 인구가 80% 이상이다. 흑인들과 함께 소외받아온 원주민 인구도 10%가 넘는다. 그런 초코주는 콜롬비아에서 오랜 세월 ‘버려진 땅’으로 남았다. 주민은 가난하고, 무장조직 간 세력싸움은 계속됐다. FARC가 무기를 내려놓은 뒤 ELN과 우파민병대, 마약카르텔 등의 충돌은 오히려 더 격화했다.
서쪽으로 태평양과 연한 초코주는 멕시코 등지로 향하는 마약운반선의 중간보급지 역할을 한다. 무장조직들은 초코주 남부 산후안강을 따라 대규모 코카인 농장을 조성했다. 마약보다 더 수익성이 높다는 불법 금광 채굴도 성행하고 있다. 마약과 금광 채굴을 둘러싼 조직 간 다툼이 격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초코주는 열악한 교통 때문에 정부 통제력이 제대로 닿지 않는다. 주도 퀴비도가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하나밖에 없다. 시내의 많은 도로는 차량 접근이 불가능하다. 주 곳곳이 정글이다. 퀴비도와 이웃주 도시를 잇는 도로 포장 공사가 30년 전에 시작됐지만 부패 때문에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무장조직들은 초코주의 빈곤을 양분으로 삼았다. 제대로 된 인프라가 없는 탓에 무장조직 활동이 가장 큰 경제 활동이 됐다. 2014년 7월 나온 국가보고서에 따르면 초코주 인구 50만명 중 78.5%가 빈곤선 아래 생활을 하며 48.7%는 극빈곤층으로 분류된다. 식수나 초등교육 같은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인구는 81%에 달한다. 콜롬비아 평균 (37%)의 2배가 넘는다. 먹고살 길 없는 지역 주민들은 무장조직의 코카인 재배와 금광 채굴에 가담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콜롬비아의 ‘흑인과 노예’ 기록물 (Negros y Esclavos Archives)
콜롬비아 국립기록보관소의 기록유산인 ‘흑인과 노예 (Negros y Esclavos)’라는 명칭의 기록물에는 과거 ‘누에바그라나다(Nueva Granada, Neogranadino, 콜롬비아의 옛 이름)’ 영토에서 있었던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을 증언하는 중요한 정보가 있다. 이 컬렉션은 콜롬비아의 역사뿐만 아니라 에콰도르·파나마·베네수엘라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 거의 55,000장에 이르는 55개의 파일에 담겨 있다.
이 기록유산에는 흑인들이 카르타헤나(Cartagena) 항구에서 남아메리카의 여러 에스파냐 식민지로 수송된 사실과 그곳에서 흑인 노예를 어떻게 취급하였는지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다. 애석하게도 16세기~18세기에 카르타헤나에서 작성된 대부분의 문서들은 분실되었지만 콜롬비아 국립기록보관소에는 에스파냐 세비야의 서인도기록보관소(Archivo General de Indias de Sevilla)에 있는 기록과 함께 ‘흑인과 노예’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 ‘흑인과 노예’ 기록물
.국가: 콜롬비아 (Colombia)
.등재연도: 2005년
.외국어 표기: Negros y Esclavos Archives
.소장 및 관리기관: 콜롬비아 국가일반기록보관소
–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이와 같은 기록은 서인도기록보관소와 브라질 국립기록보관소 등과 같은 기관에도 남아 있지만, 콜롬비아에서도 이 기록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한 의미이다. 이 기록은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가 흑인 노예라는 문화적 충격으로 인한 영향에 대해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에바그라나다와 서인도 제도의 여러 에스파냐 영토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노예 문제를 논하는 많은 연구자들은 카르타헤나가 주요 노예무역 항구였으며 이곳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으로 노예가 이송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국립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문서들을 참조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세계는 16세기~19세기의 아프리카 노예무역 전개 과정을 정확하게 밝혀내고자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 기록유산에 대한 관심은 콜롬비아라는 지리적,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