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지상중계(11)
산상수훈과 하나님나라 윤리
정미연 박사(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을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는 이를 단지 이상적인 목표를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이상적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야할 명령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님을 통하여만 가능하다.
산상수훈과 복의 개념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첫머리(마 5:1~12)부터 말씀하시는 “복”은 영적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이는 세속적인 도덕적 관념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심령이 가난하거나 (누가의 경우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신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인정받기 어렵다. 오히려 가난과 애통함, 핍박, 박해 등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신으로 부터 버림받은 저주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어 특별히 누릴 수 있는 복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공생애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시고 이루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 실천해야 할 삶의 표본이다.
산상수훈과 예수의 성품
좀 더 구체적으로, 산상수훈의 앞부분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를 담당하심을 통해 보여주실 성품을 부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중 몇 구절을 설명하고자 한다. 심령이 가난함 혹은 가난함은 (눅 6:20)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분을 스스로를 낮추시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겸손함을 가리키신다.
따라서 이 사실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관점에서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인간은 자신의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령의 가난함, 곧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이, 초라함과 빈곤함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이나 겸손은 구원을 받기 위한 또 다른 도덕적 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던 교만한 율법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도 하지만, 이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하박국 2:4).
산상수훈의 역설
역사상 이 세상에서 온유함으로 땅을 정복한자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땅을 정복한 인간은 전쟁의 폭력, 착취, 잔인함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위 신약시대의 배경인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로마의 평화)는 무력으로 쟁취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평케 하는 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여기서 온유함은 원어로 나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절제된 그리고 정제된 힘’을 의미한다. 곧 온유란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구원의 능력을 십자가상의 상처, 고통, 희생으로 나타내심을 통해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심은 무력을 통해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십자가에서 악을 포용(embrace) 하심으로 이루신 것이다.
생명 자체이시며 시간에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삼위일체의 제 2위(Second Person of the Trinity)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음의 영역(Hades)에 들어가셨을 때(행 2:31), 육으로는 숨이 끊어지고 진정 죽음을 맛보셨으나, 성령님의 역사로(롬 8:1)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이 바로 죽음이 죽은 날이된 것이다, ‘사망이 사망한 날’이다(the day when death died, 1Cor 15:55).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예수님을 유대와 로마 권력의 피해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을 통해 입증된 사실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을 사랑과 희생으로 이기신 승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온유는 무력을 이긴다. 화평은 무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만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화평은 이 세상에 그 어떤 화평과도 비교할 수 없다(요 14:27).
하나님의 의
예수님께서“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하심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긴바 되어 하나님의 뜻를 행하는 모든 이는 세상이 대적 할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어떤 윤리나 도덕적 행위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성령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되심을 믿고 순종해야만 실천 가능한 의이다. 그래서 이를 전하는 이들은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윤리와 구별 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사에서 볼 수 있는 중세기 때 행해졌던 십자군 전쟁이나 식민정책을 통해 기독교화 하려던 노력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율법의 완성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의 완성에 관해 가르치신다. 이 역시 인간의 노력으로 실천하기는 너무 어렵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선한 의도는 배제한 채 율법의 형식만을 강조한 율법주의의 잘못됨을 지적하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율법의 의로운 정신을 상기시키신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구약의 계명을 극대화시킴으로 율법을 지키는 행동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중심을 다루신다.
가령, ‘간음하지 말라’가 ‘나로 하여금 죄를 금하게 하는 법’이라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여성을 비인격적으로 보는 자체를 책망하신다. 이로써 마음의 순결성과 동기의 순수성을 말씀하시며 여성을 인격체로 대해야 하는 매우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메시지를 주신다. 산상수훈은 단순한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셨고, 우리가 날마다의 삶에서 실천해야할 하나님의 통치의 실상이다.
용서, 회복, 사랑
이제 5장 38~48절을 보자. 일반적으로 선이든 악이든 “받은 만큼 돌려준다”가 사회윤리의 관례이다. 그러므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함무라비의 법전은 많은 민족의 관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세기 유대 문화는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체면문화 때문에라도 자신의 가난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가난 때문에 이웃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 천원의 돈이 필요하다면 통상적으로 500원만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 예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밀접한 공동체 문화 속에서 이웃의 숟가락 숫자까지도 알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중동 지방의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매우 쌀쌀하거나 춥기에 외투가 매우 중요한데, 대부분은 외투를 한 벌만 소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겉옷은 개인의 재산과 같았다. 바로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상식이나 관례를 초월한 선을 행하는 능동적이고 우월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특별한 윤리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이 급진적인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웃이 달라고 하는 만큼만 주지 말고 그들이 실제로 필요한 것을 충분히 주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웃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힘들거나 내키지 않아도 의무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은혜로 변화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회복시키는 능력을 맛본 그의 제자는 자신을 모욕하는 자에게 복수하는 대신 “다른 뺨을 돌려 대줌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화평과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로 양자로 삼아 평생 사랑하시고 한센병 환자를 섬기신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결국은 원수와 버려진 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정미연 박사 (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국 이민 1.5세 출신의 차세대 신학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몰링 칼리지 전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기간 동안에는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지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역한다. 세계침례교연맹, 아태침례교연맹, 로잔회의 세계선교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