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대한민국의 시인 김남조 (金南祚, 1927 ~ 2023)의 시 모음

- 편 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평행선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저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 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로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생 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설일 (雪日)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정념의 기(旗)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모양 걸려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펄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 서시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6월의 시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 네 생각 그 하나에
너를 재우고 돌아서던 손시린 돌무덤에
이제 나도 영원히 쉬려고 찾아온 거다
별이란 그저
잠잠히 순명하는 광망(光芒)이더구나
새삼 무에랴 우리를 일께워
섧게 만드리
인식할 것으로 믿자
너를 불러 네 옆에 이처럼
나 돌아왔음은
진실로 하늘이 짚어준 길이었거니
무서리 내 가슴에 잠기고
흰 눈깨비 성성히 덮혀오는
경루 한밤에도
오직 네 생각 그 하나에
나는 살았더니다
- 고 백
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 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 대한민국의 시인 김남조 (金南祚, 1927 ~ 2023)
192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 (金海)이다.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생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해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계관시인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후쿠오카 [福岡] 규슈여고 [九州女高]를 졸업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예과를 수료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초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거쳐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1993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1984~),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1986~),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90~), 방송문화진흥회 이사(2000~) 등로 활동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 (星宿)》 《잔상 (殘像)》 등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 1953년 첫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사랑의 그리움을 노래한 첫시집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참신한 정열의 표출이 조화를 잘 이룬 초기 대표시집으로 평가된다. 이후의 시집 《나아드의 향유》 (1955) 《나무와 바람》 (1958) 《정념의 기》 (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 뜨거운 정열의 표출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갈망이 더욱 심화되어 절제와 인내가 내면화된 가운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감어린 세계를 그려낸 시집 《겨울 바다》 (1967)를 비롯해 《설일 (雪日)》 (1971), 《사랑초서》 (1974), 《동행》 (1980) 《빛과 고요》 (1983) 등 후기 시집으로 가면서 더욱 심화되어감을 알 수 있다. 특히 제8시집 《사랑초서》는 전편이 ‘사랑’을 주제로 다룬 연작시로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가의 면모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는 사랑의 원초적인 힘을 종교적 시각에서 승화시켜 노래한 작가는 1950년대 등단 이후 별새때까지 의욕적인 작품활동으로 30여 권이 넘는 시집을 발간했다. 삶의 근원이자 원동력인 ‘사랑’에 관한 지속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천착을 통해 생의 존재론적 탐구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노천명 (盧天命), 모윤숙 (毛允淑) 등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회 자유문인협회상 (1958), 제2회 오월문예상 (1963), 제7회 시인협회상 (1974), 서울특별시문화상 (1985),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8), 대한민국예술원상 (1996)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1993)과 은관문화훈장 (1998) 등을 받았다.
저서에 시집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1963) 《겨울 바다》 《설일》 《사랑초서》 《동행》 《빛과 고요》 《바람세례》(1988) 《평안을 위하여》(1995) 《희망학습》(1998) 등이 있고,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3) 《시간의 은모래》(1965) 《달과 해 사이》(1967) 《그래도 못다한 말》(1968) 《여럿이서 혼자서》(1971)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1975) 《사랑의 말》(1985)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등이 있다. 이 밖에 꽁트집 《아름다운 사람들》과 일역시집 및 다수의 시선집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