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복음이란 무엇인가? (롬 1:16-17)
복음은 그리스어로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에서 유래하며,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황제의 탄생 같은 기쁜 소식을 알릴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혹시 오후 성경공부는 없다는 소식, 자식이 취직된 소식,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 건강 진단을 받고 결과가 좋다는 소식,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는 소식 등.
10월 10일 밤 8시경 한강작가는 평상시 다름없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식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수상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한강 작가는 아시아 최초 여성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의 작품을,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며 선정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한강은 한국인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이후에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이유는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가 전쟁과 파괴에 사용되는 것을 보고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화학자이자 발명가로서 많은 혁신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큰 재산을 모았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는 건설과 채굴 같은 평화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전쟁 무기로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888년, 노벨의 형이 사망했을 때 프랑스 신문에 실수로 “죽음의 상인, 노벨이 사망하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본 노벨은 자신이 죽은 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의 도구를 발명한 사람으로만 기억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재산을 평화와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로 1895년에 유언장을 작성하여 자신의 재산을 기초로 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노벨상을 제정했습니다. 노벨은 자신이 남긴 유산이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사용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음으로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 출신 지역이나 학교는 물론이고 국격 또한 높아졌습니다. 한국 언론에서 한강 작가에게 연락이 되지 않자, 동아일보 기자가 아버지 한승원작가에게 연락했는데, 한승원 작가는 “가짜 뉴스 아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한국작가 중에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었지만 번역 미숙으로 세계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번역은 칼라를 흑백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행히 한강 작가에게는 좋은 번역자가 있어서 이번 상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통역도 그렇고 번역도 그렇고, 언어적인 문제를 넘어서 문화와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시대를 초월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신약성경은 4 복음서는 4명의 저자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을 통해 인류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1. 복음은 성육신의 소식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육신(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으로 가서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양치는 목동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요한은 좀더 철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베들레헴의 별이 14각인 이유는 마태복음의 족보에 나타난 예수님의 계보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에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부터 그리스도까지 각각 14대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14라는 숫자는 히브리어에서 “다윗”이라는 이름의 자모 수를 더한 값과 동일합니다. 다윗의 히브리어 철자는 ד(4), ו(6), ד(4)이며, 이를 합하면 14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입니다.
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자력종교가 아니라 타력종교입니다. 자력종교는 개인의 노력과 수행을 통해 구원이나 깨달음을 얻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자력 종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수행과 깨우침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타력종교는 기독교가 대표적인 예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가지고 있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력종교의 사람들이 더 열심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해탈을 할 수 있고, 열반의 세계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열심이겠습니까!
부처님을 믿던 어떤 사람이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비롯한 모든 공예배를 빠지지 않고,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분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불교보다 쉽습니다”.
2. 복음은 십자가의 소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셨으나,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이 희생을 통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동시에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예수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의 용서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을 찾을 때마다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물에 안수를 할 때 드리는 자와 동일시가 되고, 제물은 드리는 자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됩니다. 피흘림의 속죄함은 계속되었지만,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3. 복음은 부활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이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은 단지 예수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며, 이는 복음의 궁극적인 완성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7대 절기가 있습니다. 이중 봄절기로 유월절이 있고, 다음날부터 7주일간 무교절이고, 무교절 중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이 초실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셨고, 무교절에 무덤에 머물렀으며, 초실절에 부활의 첫 열매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러분 모두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평화 전하며 복된 소식을 외치네 주다스리시네 주다스리시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눅 17:20-21)
2주전 설교 제목은 ‘감사란 무엇인가’, 지난 주 설교 제목은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의 설교 제목은’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연수만큼 교회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신앙이 좋다고 착각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 연속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라고 했습니다.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국가의 중요한 대소사를 의논하기 위하여 각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이들은 다시 자기가 온곳으로 돌아갑니다. 모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모여서 사명을 받고 흩어지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입니다. 모이는 교회를 에클레시아, 흩어지는 교회를 디아스포라고 합니다. 이들은 흩어져서 사명대로 자기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며 살아갑니다. 이를 임하는 공동체인 ‘바실레이아’라고 합니다. ‘바실레이아’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주기도문에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나라가 ‘바실레이아’입니다. 이 단어는 ‘왕국’ 또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바실레이아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핵심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하신 첫 번째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 대신 ‘천국’으로 썼습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주로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염두하고 쓴 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 경건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선교는 서로 깊이 연결된 신학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행전 1: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이란 말은 성령이 선교의 주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실패하며 좌절할 것이고 성공하며 교만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쓴 ‘Who cares’ 글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죄악의 바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즐거움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합니다. 우리가 먼저 구원받은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기 위함입니다(Saved to save).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조선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구조대원입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자들에게 구명튜브를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 완전하게 이루어질 미래의 왕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었으며, 현재 성령을 통해 확장되고 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말세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뜻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Basileia tou Theou)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지를 묻는 질문에 나온 답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물리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적인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영적 현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 것이고, 중심이 이동된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고, 성령이 온전하게 나를 지배하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질서와 세계를 의미합니다. 처음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죄와 사망이 없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거주할 거룩한 성을 상징합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완전한 거처를 나타냅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는 없습니다. 하지만 재림에 대한 징조는 나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장으로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난무하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기근과 지진이 있고, 배신과 불법이 성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질 때 종말이 온다고 했습니다(마 24:14).
종말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종말은 심판의 날이며,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며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이고, 종말은 알고 있지만 현실에 매몰되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종말의 삶을 현실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종말론적 삶이란 그곳의 삶을 이곳에서 사는 것이고, 그 날의 삶을 지금 여기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나라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평강’은 마음의 평화를, ‘희락’은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가치에 집중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세워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무슨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의 이름으로 구한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먼저란 우선순위에서 먼저란 의미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내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현재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임재하여 통치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 읽은 고전 3:16절의 너희는 복수로, 교회에게 한 말이고, 고전 6:19절은 단수로, 개인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성전이고, 교회가 성전인 것은 성령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떠나면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예배당입니다. 교회는 성령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마태복음 16장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Ekklesia)는 ‘밖으로’를 의미하는 ‘에크’(ek)와 ‘부르다’를 의미하는 ‘칼레오’(kaleo)의 합성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아테네 시민의 총회를 가리키는 말로, 특정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부름 받은 시민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신자들의 공동체이고, 둘째는 교회는 모이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흩어지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배를 미사(Mass)라고 합니다. 미사는 ‘보냄’이라는 뜻입니다. 모이는 교회에는 4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1. 예배 (Worship, Latreia)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행위로, 교회의 중심 활동입니다. 예배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맺게 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To meet God and to meet with God).
교회에는 예배를 중심으로 세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예배를 보는 사람과 예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중심이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고, 사람 중심이면 예배를 보는 사람이고, 자기중심이면 예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 교육 (Education, Didache)
교회는 ‘교육 공동체’입니다. 교육은 성경 공부와 신앙 교육을 통해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신앙 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교육의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신앙 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며, 신앙적으로 성숙해집니다. 에클레시아를 敎會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교자는 가르칠 교이고 회는 모일 회입니다.
교육을 통한 발달은 ‘환경과 유전’ ‘사이’에서 이루어 진다. 교육(Education)이란 단어는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바울이 안수할 때 디모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3. 교제 (Fellowship, Koinonia)
교회는 교제 공동체입니다. 교제는 성도들 간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를 돌보는 활동입니다. 교제를 통해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신앙 공동체로서의 유대를 강화하게 됩니다. 교제의 목적은 성도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신앙 공동체로서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지체의식을 가져야 한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다른 지체도 영광을 받고, 한 지체가 아파하면 다른 지체도 아파야 한다. 세상의 조직은 Organization이고, 교회는 Organism이다. Organization은 조직체이지만, Organism은 생명체이다.
어느 전철에서 별다른 일도 아닌데 사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언성이 점점 커지자 보다 못한 옆에 사람이 한마디를 했다. “그만 좀 싸워요,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요” 조욱정 부교
4. 봉사 (Service, Diakonia)
헬라어 ‘디아코니아’에서 영어 Deacon이 나왔습니다. Deacon은 ‘집사’이고, 섬기는 자입니다. 한자어로 잡을 집에 일사자입니다. 집사는 일을 잡아서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직분은 섬김을 받으려는 아니라 섬기는 직분입니다. 봉사를 통해 성도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교회가 지역 사회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봉사의 목적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교회가 지역 사회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교회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선교이고, 세상이 교회를 바꾸는 것은 세속화입니다.
이 네 가지 기능은 교회의 본질적 역할을 나타내며,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교회는 이 기능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천국환송예배 :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롬 14:7-8)
오늘은 한국의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날입니다. 우리는 하늘이 열린 날 하늘로 이사 가신 박조향 부교님의 ‘천국환송예배’로 함께 모였습니다. 부교님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하며,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교님과 함께 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웃음, 따뜻한 말들, 삶 속에서 함께 나눈 기쁨과 어려움들이 우리의 추억 속에 아로새겨 있습니다.
부교님은 소천하시기 얼마 전, 하늘로 오르는 새 그림과 함께 마지막 글을 남겼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작고 조그만 침대 위에 웅크리고 꾸겨져 있는 라일락 빛 담요 두개가 엉켜,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네.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를 닮았네. 이 구석 저 구석에 영롱한 너도 숨어 있었네. 참 열심이 살았다. 참 고마웠다. 따뜻하게 덮어주고 품어주고 너무 고맙다. 당신들의 관심과 기도와 정성스러운 보살핌 덕분에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 죽음을 계획하고 온갖 방법을 떠올렸지만 실패였다. 투석센타 한국인 Lee 간호사가 우리가 선생님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는데 자꾸 죽고 싶다 하시면 힘 빠진다고 슬퍼한다. 8년을 넘게 매일밤 투석해주느라 밤을 지새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끝내고 싶다. 한국에서 딸가족이 다녀가고, 둘째 아들이 와서, 사관님의 마지막 예배 중 나는 고백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부교님은 Woy Woy에 살았습니다. 그 먼 곳에서도 아프기 전까지는 주일예배를 한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어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구세군 벨모아 교회를 다니실 때는 특별한 날에 카드를 그려 교인들에게 선물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부교님의 아름다움 추억은 우리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부교님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줄 믿습니다.
부교님은 화가이자 작가이셨습니다. 서울 미대를 졸업했고, 국선에도 입선한 경력이 있습니다. 2013년, ‘라일락 향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발간했습니다. 부교님은 이민 오기 전 11년 동안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공예과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라일락 향기’에는 바쁜 이민 생활 가운데 제자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기억하며 썼던 편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교님을 추억하며, 책을 읽다가 경희라는 분에게 쓴 편지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경희씨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잠시 책의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보고싶은 경희야,
하늘나라에도 계절이 있니?
아직 어디에서도 하늘나라의 계절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값비싼 보석들이 하늘나라에서는 여기 저기 건축자재나 길바닥에 깔려 있다고 성경에서 본 기억이 난다. 경희 너 그 보석들 가지고 실력 발휘 하느라고 바쁜 거 아니니?
어쩜 그렇게 꿈에서도 볼수가 없니? 생전에 내가 편지 답장 빨리 못 해줘서 화난거야?
아니지? 마냥 상냥하고 착하던 경희가 그럴 리야 없겠지. 나는 너의 어떤 귀한 성품보다 꿈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모습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단다.
멋진 보석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세상 보석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그렇게 서둘러 하늘나라로 가 버린 거니? 그런데 보석 같은 네 딸 생각은 안한건지, 그 애를 생각하면 네가 한없이 야속하기만 하다. 경희 네가 하늘나라에서 진작부터 그 애에게 남보석, 홍보석, 호마노로 조각한 별빛을 보내주어서인지 반듯하고 아름답게 성장했더구나. 정성스런 편지 답장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단다. 제 엄마가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 보람차게 살아왔는지를 체험으로 아는 그 애는 아마 너보다 더 당차게 살아가리라 확신한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계속해서 벽옥과 녹보석 별빛을 보내어 그 애의 앞길을 비추어 주면 될 거야. 하늘에 별이 있어 아름답고, 땅에는 꽃이 피어 아름답지만, 사람에겐 사랑이 있어 아름답다.”는 괴테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 경희야! 너에게 못다한 사랑, 이제 네 딸에게 베풀고 싶다. 한국 다녀와서 다시 편지 쓸게. 동방박사에게 나타났던 별처럼 날 좀 인도해 주려무나.시드니엔 봄이 오려고 하는데 서울은 가을향기에 젖어 있을 것 같다. 안녕.”
아마 지금쯤 부교님은 경희씨를 만나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다르면 죽음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았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주를 위하여 살다가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바울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무엇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상이란 학교에 등록해서 다양한 과목을 배웁니다. 내가 잘하는 과목도 있고 못하는 과목도 있습니다. 필수과목도 있고 선택과목도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과 같은 좋아하는 과목도 있지만, 슬픔과 불행과 같은 싫어하는 과목도 있습니다. 인생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과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대충대충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졸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게을리했는가를 뒤늦게 깨닫고 후회합니다. 인생수업을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하기 원합니까? 그녀는 말합니다. “그것을 지금 하시죠.”
존경하는 유가족과 조문객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부교님의 아름다운 삶을 기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육신의 헤어짐으로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교님은 주님이 맡긴 사명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죽음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끝에서 시작을 볼 수 있는 명철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땅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박조향 부교님의 아름다운 삶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함께 모여 천국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넓은 품으로 그녀를 안으시고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신의 헤어짐으로 애통하는 유가족과 조문객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여 주소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감사란 무엇인가 (빌 4:6)
지난 화요일 (9월 22일 현재)은 음력 8월 15일 추석이었습니다. 추석을 ‘한가위’라고 합니다. ‘한가위’라는 말은 ‘큰’을 의미하는 ‘한’과 ‘가운데’를 의미하는 ‘가위’가 결합된 단어로,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추석을 ‘중추절’(中秋節)이라고도 합니다. ‘가을의 중간에 있는 명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송편이 대표적인 음식이고, 중국에서는 둥근 달을 연상케 하는 월병(月餠)입니다. 추석은 장막절과 유사합니다. 두 명절 모두 가을에 열리며, 수확과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장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일부터 7일간 지켜집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했던 시기를 기념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6-18)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일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자,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어야 하나님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묻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3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오늘의 본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빌 4:6).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고,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와 간구를 할 때도 감사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감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감사는 인식에서 시작
감사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것들이나, 경험하는 좋은 일들이 종종 익숙함 속에서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가족과의 대화, 또는 자연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익숙해져서 그 가치를 잊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감사가 부족할 때, 그것들이 사라진 후에야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은 사람뿐만 아니라 시간, 건강, 기회, 물질 등 여러 가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었던 사람이 그렇게도 간절하게 살고 싶었던 내일이라는 것을 지나고 나서 깨닫습니다.
Think를 할 수 있는 사람이 Thanks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매일 받는 카톡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소확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로, 일상 속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일상의 익숙함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 가정용 커피머신을 산 후, 아침마다 김 사관이 커피를 내려줬습니다. 처음에는 감탄하다가, 얼마 후 감사하다가, 시간이 지나 익숙하여 지자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목사님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김사관 같은 여자가 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감사모드’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지갑에 있는 부인 사진을 보면서 힘을 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여자와도 33년간 살았는데, 세상에 두려울게 뭐가 있겠어” 옆에 사람과 같이 인사합시다. “있을 때 잘합시다”
2. 감사는 겸손에서 비롯
감사는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감사는 우리가 받은 것들이 우리의 능력이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은혜는 자격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공을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와 은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주병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특별하거나 예쁘다고 생각하며 남들이 마땅히 자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공주병은 심리학 용어로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입니다. 지나친 자기중심성과 타인에 대한 공감 부족을 특징으로 하는 인격 장애를 의미합니다. 남의 호의를 자기의 권리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을 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인생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상은 개인의 노력과 관련이 깊고,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조합니다. 인생을 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했는데 누구에게 감사하겠습니까? 은혜를 상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순복음 교회에서 이양순 권사님의 천국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얼마전 권사님은 100세 생신 잔치를 하셨고, 가족여행도 하셨습니다. 2024년 9월 18일 권사님은 땅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설교 중 목사님은 권사님을 생각하면 ‘겸손’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겸손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3. 감사는 표현해야 축복
감사는 표현해야 축복입니다. 감사는 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행동과 태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의 삶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진정한 감사가 축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음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인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눅 17:11-19). 예수님은 그의 감사하는 태도를 칭찬하며, 그가 받은 은혜가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감사의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현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며, 그 감사가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히 지지 않는 주님의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사는 받은 것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고, 감사는 겸손한 마음에서 비롯되며, 감사는 삶으로 표현할 때 축복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