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그리스-터키-한국의 인문유적지를 방문하는 ‘2019 인문학여행’을 가졌다.
이번 인문학여행을 주관한 시드니인문학교실은 7개월 전부터 모집을 완료하고 매달 그룹 강의 및 개별 발제와 토론, 현지 문화와 음식 시식체험, 개인체력단련 및 공동체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지의 이해를 높여 갔다. 방문지인 그리스(그리스신화, 고대 그리스철학, 크레타섬과 문명, 고린도 문명과 운하, 델포이, 아테네, 그리스 수도원과 마테레오,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양식, 지중해 등), 터키(갈리폴리 전투, 셀축과 에베소,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소아시아 7교회, 밀레투스, 캅파도키아, 이스탄불 등), 한국(강진 다산초당과 인문학자 다산을 찾아서, 안동 도산서원과 퇴계이황) 방문지 연구발제의 시간을 갖은 바 있다.



10월 22일 시드니에서 출발한 인문학여행단은 아테네를 첫 행선지로 근대올림픽 경기장,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 감옥터 등을 방문 후, 야간 페리로 유럽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으로 이동했다.
크레타에서는 베네치아 성채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크로소스궁전과 고고학 박물관, 이라클리오 일대, 디도기념교회 등을 방문 후, 이어 다시 야간 페리로 고린도로 이동해 고린도운하,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 유적지(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등을 방문했다.
이어 올림피아로 이동해 최초의 올림픽을 시작한 곳, 성화채화 터, 김나시오, 올림픽 대경기장과 신전터 등을 둘러 보았다.
일정 5일차에는 델피로 이동해 아라호바 마을, 델피박물관, 옴파로스, 델피 유적지를 살핀후 메테오라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에서 수녀원공동체를 한곳 방문 후 인근 호텔에서 일박, 다음날 새벽부터 메테오라 수도원공동체를 순례했다.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공중에 달려있는 듯 했다.

6일차 일정을 마치고 인문학여행단은 그리스 국경을 넘어 터키로 입국했다.
차낙칼레 해협을 페리로 넘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안작연합군이 큰 희생을 입은 갈리폴리 전투지 해안을 볼 수 있었다. 이어 ‘트로이’로 유명한 아이발릭에 도착해 터키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7일차에는 에베소를 찾았다.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극찬 받았던 버가모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에베소에서는 유적입구에 누가의 무덤, 에베소 거리,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 원형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아카디아거리, 마리아의 집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에베소에 이어 밀레토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흔적, 대 원형경기장, 대규모의 아폴론 신전 등을 볼 수 있었다. 일행은 파묵칼레로 이동해 일박했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란 이름답게 환했고, 히에라폴리스는 온천요양으로 유명세가 날만큼 충분히 온천수가 샘솟았다. 히에라폴리스에는 고대 주거지역과 원형경기자, 필립 순교지 등의 유적이 있었다. 파묵칼레에서 장거리를 달려 다음행선지인 카파도키아에 도착해 일박했다.
카파도키아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아 숨어 지내던 땅속 도시 데린쿠유, 기암괴석의 괴레메 골짜기,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은 우치사르 등을 방문 후 카이세리공항에서 비행기로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이스탄불 보스프러스 전세선으로 보스프로스 해협을 유람 후 이집시안바자르,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등을 관람 후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식당에서 생일을 맞은 일행 축하와 회고의 시간을 갖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전세버스에 올라 다산의 유배지 강진으로 향했다. 강진에 도착에 일박 후 곧바로 만덕산과 백련사,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사의재, 영란문학관, 강진 갈대축제 등을 관람했다. 이어 다음 행선지인 안동으로 향했다.
간밤에 안동에 도착한 일행은 호텔에서 조식 후 곧바로 도선서원으로 향했다.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병산서원까지 둘러본 일행은 모든 순례 일정을 마치고 상경, 11월 11일 인천공항에서 모여 호주로 귀국했다.
그리스와 터키 방문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지형, 사건들을 접하고 정리해야 할 숙제거리가 참 많이 생겼다. 인생에 아련한 추억이 될만한 사진도 남겼다. 이에 일정중의 단상들을 나누어본다.
시드니에서 한국, 터키를 경유해 그리스 아테네로
10월 22일 시드니 출발해 한국에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 모두 26명의 ‘2019 시드니인문학여행단’이 22일 오후 1시 40분 대한항공 (KE955) 편으로 인천에서 출발해 23일 터키를 경유해 24일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해 일정을 시작했다.
무사히 아테네 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가이드분이 친절하게 맞아주며 환영했다.
10월 24일 첫날 일정은 근대올림픽 경기장 방문을 시작으로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 감옥터 등을 방문 후, 야간 페리로 유럽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근대올림픽 경기장
10월 24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첫 행선지는 근대올림픽 경기장이다. 경기장은 아크로폴리스 동쪽으로 약 1.6km 거리에 위치애 있었다. 약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1896년 첫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다. 아테네 판아테나이코스 올림픽 경기장 (Panathenaikos Stadiumaic Stadium)으로 기원전 3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후 경기장을 재건해 1896년 제 1회 올림픽이 열린 역사적인 곳이다.
기원전 4세기부터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파라테나이아 제전이 열렸던 곳이다. 실제 이름은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이다. 1896년 최초 근대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이름을 따서 ‘스피로스 루이스 스타디움’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BC490년 2만 아테네 시민군이 10만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km를 달려온 병사의 죽음을 기리는 뜻깊은 경기장이기도 하다.
프랑스 쿠베르탕 남작의 제창으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던 장소이다. 원래 고대엔 관람석이 없었다고 한다. 로마시대 헤르데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을 기증했으나 소실되었다. 그는 공헌을 인정받아 입구 좌측 언덕에 묻혔다.
최초의 근대 올림픽은 1896년 하계 올림픽 (1896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I Olympiad)이다. 1896년 하계 올림픽은 393년을 마지막으로 끝난 고대 올림픽 대회 이후 열린 첫 근대 올림픽 대회다. 1896년 4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고대 그리스가 올림픽의 발상지여서 첫 근대 올림픽이 열리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아테네는 1894년 6월 23일에 파리에서,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쿠베르탱이 주관한 올림픽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개최지 자격을 얻었다. 또한 하계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가 조직되었다. 여러 어려움을 이겨낸 1회 올림픽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시의 국제 경기 중에서는 이 대회가 가장 많은 국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19세기 때 유일한 올림픽 경기장으로 쓰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경기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대회가 끝난 후 IOC는 이후의 올림픽을 계속 그리스에서 개최할 것인가를 놓고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과 그리스 임금인 요르요스 1세, 몇몇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으나 1900년 대회가 이미 파리에서 열리기로 결정된 상태였고, 이후 올림픽은 세계를 순환하면서 개최하게 된다. 1906년 중간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는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할 때까지 108년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했다.

그리스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산타그마 광장 (Syntagma Square)
우리 일행은 근대올림픽 경기장 관람 후 그리스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신타그마 광장 (Syntagma Square)으로 향했다.
신타그마 광장 (Syntagma Square, 그: Πλατεία Συντάγματος)은 그리스 아테네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다. 1844년 그리스 왕국의 헌법이 여기서 반포되었다고 한다. 신타그마는 그리스어로 헌법을 의미한다. 그리스 고궁이 광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으며, 이 건물은 1934년부터 그리스 국회로 사용되고 있다. 이 광장의 동쪽에는 ‘무명 용사의 비’가 있다. 그 밖에도 광장 주변에는 각종 관공서가 위치해있고, 광장 서쪽으로 아테네 최대의 번화가인 에르무 거리가 있다.
신타그마 광장은 19세기 초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인 오톤 왕이 1834년 수도를 나플리오에서 아테네로 천도하면서 건설됐다고 한다. 산타그마는 현대적인 아테네의 정치와 쇼핑, 교통, 휴식등 사회 활동 전반의 중심지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를 듣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 학술관 (Platonic Academy)
산타그마 광장을 방문한 후 우리 일행은 버스편으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Platonic Academy)을 찾았다.
플라톤 (Plato, 기원전 428년 5월 7일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기원전 387년 이곳에 학원을 지으면서 지명인 ‘아카데메이아’를 그대로 학원의 이름으로 가져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도 같다).
플라톤은 산술, 기하학, 천문학 등을 가르치고, 일정한 예비훈련을 거쳐 이상적인 통치자가 받아야 할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기하학은 감각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앎을 가르치는데 필수적이라는 판단으로, 학원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마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학과와 문답법 (변증법, 디아렉티케)이 오로지 배움의 필요성과 이들이 ‘철인왕 (哲人王)’, ‘밤의 회의’라는 국제법을 보전하고 그 목적 (선함 · 덕)을 달성할 수 있도록, 국가를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육이었던 이유는 ‘국가’나 ‘법률’ 등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 (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 · 음악 · 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 · 기하 · 천문 · 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 (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 · 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 (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 · 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기원전 348년에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의 교장은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이어받았으며 (기원전 348년~기원전 339년), 크세노크라테스 (기원전 339년~기원전 314년), 프레몬 (기원전 314년~기원전 270년), 크라테스 (기원전 270년~기원전 265년), 알케시라오스 (기원전 265년~기원전 241년), 칼네아데스, 시리아누스, 프로크로스, 마리노스, 다마스키오스가 맡았다.
시기에 따라 학설에 차이를 보였는데, 고 (古) 아카데메이아 학파와 중기 아카데메이아 학파, 신 (新) 아카데메이아 학파 등 몇 기로 나눌 수 있다. 스페우시포스의 시기에는 수학 교육에 편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말기 아카데메이아 학파는 회의론을 주류로 하는 스토아 학파와 대립, 당시의 아카데메이아 학파는 회의론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전후 약 1,000년간 존속하는데, 특히 플라톤으로부터 크란토르까지를 ‘고아카데미아’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기원전 347년에 죽고 조카인 스페우시포스가 2대째 학두 (學頭)가 되었다. 그는 시칠리아의 디온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도 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만년의 사상에는 영향을 받았다. 1과 다 (多)로써 이루어지는 수학적인 것만을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과 이성이나 영 (靈)이나 감각적인 여러 물체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것에서, 말하자면 삽화적 (揷話的)으로 이어져 맞춘 그의 자연관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맹렬하게 비평하였다. 그리하여 수학화한 아카데미아에 만족하지 않은 채 그 곳을 떠났다. 노쇠한 스페우시포스는 8년 후에 학두 자리를 칼케돈 출신인 크세노크라테스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람도 피타고라스파, 특히 필로라오스에게 관심을 보여 수학을 철학의 예비로 삼았다. 철학을 자연학 · 윤리학 · 논리학으로 3분하였고 수학적인 것을 이데아와 동일시하였다. 불멸의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수 (數)여서 우주를 위에서 아래까지 꿰뚫는다고 하였다. 약 20년간 학두 자리에 있었던 그의 고결하고 자주적인 성격을 필리포스 2세도 크게 존경하였다. 아카데미아에는 벌써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도 참가하여 플라톤을 위시하여 학료(學僚)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학자·천문학자·의사·법제가 (法制家)를 겸하고 있던 그는 이데아의 초월성을 비판하고 내재성을 설파하여 쾌락을 최고선 (最高善)이라 하였다. 이 시기의 수학과 천문학과 종교적 감정을 결부시킨 경향은 <에피노미스>의 저자라 하는 오프스의 필리포스 (플라톤의 제자)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 기 (期) 학원의 경향은 윤리학으로 옮겨갔다. 크세노크라테스에 의하여 철학에 들어서게 된 4대째의 학두 폴레몬 (BC 314 ~ BC 276)은 방종한 생활을 벗어버리고 감정에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되어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을 윤리 원칙으로 하였다. 폴레몬에 이어 학두가 된 크라테스에 관한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두 사람의 우정은 같은 묘에 합장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동료인 크란톨 (BC 340 ~ BC 290)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주석 (註釋)을 처음으로 써서 세계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슬픔에 대하여’는 후세에 많은 ‘위안 (慰安)의 서’의 본이 되었다.

중기 아카데미아의 카르네아데스 이후 플라톤 학파는 ‘신아카데미아’로 재차 독단적 방향을 걷는다.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져 절충주의로의 길을 한층 추구하게 되었다. 대표자는 라리사의 필론과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이다. 라리사의 필론 (BC 160 ~ BC 80)은 로마에서 강의하였다. 키케로는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필론은 카르네아데스와 스토아파를 조정하여 안전의 명백한 지식을 주장하였다.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 (BC 68 사망)는 회의사상은 자기모순이라 하여 방기 (放棄)하였다. 그리고 진리는 모든 진정한 철학자가 일치하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가장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덕 (德) 만으로는 불충분하나, 어떤 종류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충분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필론은 제4차 아카데미아를 수립하여, 그 이후를 신아카데미아라고 하였다. 제5차 아카데미아의 학두는 안티오코스이다.
아카데미아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비 (非) 기독교적인 학교에 대한 폐쇄 정책에 따라 아카데메이아는 529년에 폐쇄되었다.
아카데메이아의 이름은 이후 유럽의 신플라톤주의 융성과 함께 고도의 연구나 교육을 맡은 기관을 부르는 아카데미 (academy), 아카데미카 (Accademica) 등의 유래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는 메디치 가문과 인문주의자들의 사적 모임으로, ‘아카데미’라는 말이 쓰이는 실마리가 된 것은 프랑스 루이 13세 치하에서의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등이 저명하다.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플라톤 아카데미아 방문후 우리 일행은 그리스식 식당에서 오찬을 나눴다. 점심식사를 하며 이어질 파르체논 신전 방문에 양간 흥분도 되었다. 점심식사후 가이드분은 우리일행을 파르테논 신전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카페로 안내했다. 카페에서 보이는 파르테논의 모습은 참으로 웅장했다.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그: Παρθενών)은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이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은 “처녀 여신의 신전”을 뜻하며, 아테나 파르테노스 숭배 의식이 이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전의 이름은 처녀들 (‘파르테노이’)를 암시하는데, 처녀들의 최고위 희생 의식은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신전 건축물군 전체를 분명히 일컫는 첫 사례는 기원전 4세기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말에서 나온다. 5세기에 건축 기록에서 이 건축물은 그저 ‘호 나오스'(“신전”)으로 불렀다. 건축가 므네시클레스와 칼리크라테스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아테나이 건축에 대해 이들이 쓴 기록에서 이 건물을 ‘헤카톰페도스'(“100피트의 키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4세기와 나중에도 ‘파르테논’이란 이름 뿐 아니라 ‘헤카톰페도스’ 또는 ‘헤카톰페돈’으로 불렸으며, 기원후 1세기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이 건물을 ‘헤카톰페돈 파르테논’이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되었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도리스식 기둥 양식 발전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신전의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의 민주정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신전으로 역사가들은 이를 옛 파르테논 신전 (Pre-Parthenon)이라 칭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여타 그리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도 국가 금고로 쓰였으며, 특히 이곳은 한때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쓰였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에 1460년대 초에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의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나 여신을 모시기 위해 건축됨.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아테네를 모시는 신전들이 파괴됨.
.6세기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가톨릭 성당으로 바뀜.
.1687년 터키-베네치아 전쟁 때 탄약 폭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음.
.1806년 영국인 엘긴이 신전의 남은 조각품들은 빼내어 영국으로 보냄.
.1822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터키군의 포격으로 크게 파괴됨.
.1967년 그리스 군사 쿠데타로 인해 일부가 파괴됨.
고대 아테네인들은 파르테논의 벽에 신과 인간의 역사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신들이 벌인 전쟁, 전설의 여전사 아마조네스와 켄타로우스의 전쟁, 아테네 사람들과 아마조네스의 전쟁, 트로이 전쟁 등을 새겼다. 부조물을 찾았지만 볼 수 없었다. 대리석 기둥 위에는 말 조각상 등만 남아있다. 중요한 유물은 영국인들이 대영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겼다. 영국인들은 기둥까지 뽑아 가버렸다. 남아있는 조각품도 대단하다. 2500년 전에 어느 장수가 타고다녔을 것 같은 백마상은 지금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하다. 돌을 다루는 아테네인들의 솜씨에 경외심이 일어날 정도다.
한편 아크로폴리스 기슭 파르테논 신전을 향하다 진입로 아래 위치한 야외극장 디오니소스 극장을 둘러보았다. 고대 반원형 극장은 훌륭한 문화의 공간인 동시에 정치 선동, 홍보 등의 장이였다.
디오니소스 극장 (그: Θέατρο του Διονύσου)는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세워져 있던 대형 야외 극장으로, 디오니소스제의 개최지였다. 건축 음향학을 활용한 예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여전히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하니 놀랍기만 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 (Areopagus Hill)
파르테논 신전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아레오파고스 언덕 (Areopagus Hill)을 올랐다. 아레오파고스 (Άρειος Πάγος)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 기구이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Ἄρειος Πάγος)라는 말은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의도적 살인에 대한 재판 법정으로서의 기능도 했다. 아레스는 이곳에서 포세이돈의 아들인 핼리로티오스를 살해한 혐의로 신들에게 재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성경에는 바울이 전도한 곳으로 ‘아레오바고’로 기록하고 있다.
아레스 신에게는 알키페 (Alkippe)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포세이돈의 아들인 핼리로티오스 (Halirrothios)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샘 근처에서 알키페를 납치하려 했다. 아레스는 자신의 딸을 납치하려 했던 핼리로티오스를 살해했다. 포세이돈은 아들을 살해한 아레스를 신들의 법정에 고발했다. 이에 신들은 후에 ‘아레스의 언덕’이라 불리는 아레오파고스 (Areopagos, 또는 아레이오스 파고스)에 모였다고 한다.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법정이었다. 여기서 살인이나 살인할 의도로 입힌 상해, 방화, 독살 등과 관련된 재판이 이루어졌다.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는 대부분은 사형이 언도되고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재산 몰수나 유배가 선고되었다. 또한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의 중요한 정치제도들 중의 하나인 아레오파고스회가 유래되었다. 아테네는 임기 1년의 아르콘 (행정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서북면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아레스 신의 언덕’이다. 여기에 귀족들의 회의장 (평의소)이 있었기 때문에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 등과 같이)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이 위치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 기구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 기구의 의원은 최고직인 아르콘직 경험자 중에서 선출되었고, 그 지위는 종신이었다. 귀족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정 수립을 위한 큰 방해가 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462년에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많은 권한이 박탈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에 많은 권한이 민회에 맡겨지게 되었고, 민주정이 확립되었다.




철인의 언덕 (아카데메이아)
파르테논 신전과 아레오바고 언덕을 둘러본 우리 일행을 가이드는 소크라테스의 감옥터로 가는 중간에 ‘철인의 언덕’으로 인도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에서 온급한 것처럼 ‘아카데메이아’ 또는 ‘아카데미아’ (Ἀκαδημ(ε)ια, Akadēm(e)íā, Academia)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서북쪽 교외에 위치한 고대의 영웅 아카데메스의 성스러운 숲에서 기원한 신역 (神域)으로, 리케이온, 키노사르게스 등과 함께 대표적인 김나시온 소재지이기도 했다.
청년 교육에 열심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자주 이곳 아카데메이아나 리케이온의 김나시온의 청년들을 둘러보았다고, 플라톤의 대화편 ‘뤼시스’ 등에 그려져 있다.
보통 파르테논을 돌아본 뒤 디오니소스 극장, 헤로데이온극장,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감옥으로 안내되는데 아테네를 이야기할 때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한다. 사람이 지은 위대한 건축물은 세월이 흘러 부서져 가지만 위대한 철인들의 사상은 시대가 지난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소크라테스 (Socrates)의 감옥터
철인의 언덕을 지난 소크라테스의 감옥터로 갔다.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의 감옥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형 집행 날을 코앞에 두고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탈옥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크리톤은 세 가지 이유를 들며 소크라테스를 설득한다. 첫째, 소크라테스를 살릴 수 있는데도 살리지 않으면 친구들이 욕을 먹게 된다는 것, 둘째,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다면 그를 고발한 적들을 돕는 셈이 된다는 것, 셋째, 죽게 되면 자식들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이성과 논증을 바탕으로 탈옥이 정의롭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아테네에 산 것은 이미 법에 복종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탈옥을 하면 그 합의를 깨뜨린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구, 그리고 국가에게 해악을 입히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수치스럽게 살아남아 자신이 추구하던 참된 진리를 더럽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정의를 지키는 길이라 말한다.
아테네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나눈 후 우리 일행은 야간페리를 이용해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아테네에 도착해 첫날 일정을 마치고 페리안 침실에 누워 드는 생각은, 파르테논 신전을 본 후 느낀 것은 그동안 내 자신이 인지•인식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아니 압도적으로 그리스 신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철저히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학당이나 특히 소크라테스의 감옥터에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자세를 보았다.
한편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외쳤던 바울의 담대함을 더 연구하고 묵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