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터키, 한국 방문기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그리스-터키-한국의 인문유적지를 방문하는 ‘2019 인문학여행’을 가졌다.
이번 인문학여행을 주관한 시드니인문학교실은 7개월 전부터 모집을 완료하고 매달 그룹 강의 및 개별 발제와 토론, 현지 문화와 음식 시식체험, 개인체력단련 및 공동체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지의 이해를 높여 갔다. 방문지인 그리스(그리스신화, 고대 그리스철학, 크레타섬과 문명, 고린도 문명과 운하, 델포이, 아테네, 그리스 수도원과 마테레오,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양식, 지중해 등), 터키(갈리폴리 전투, 셀축과 에베소,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소아시아 7교회, 밀레투스, 캅파도키아, 이스탄불 등), 한국(강진 다산초당과 인문학자 다산을 찾아서, 안동 도산서원과 퇴계이황) 방문지 연구발제의 시간을 갖은 바 있다.



10월 22일 시드니에서 출발한 인문학여행단은 아테네를 첫 행선지로 근대올림픽 경기장,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 감옥터 등을 방문 후, 야간 페리로 유럽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으로 이동했다.
크레타에서는 베네치아 성채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크로소스궁전과 고고학 박물관, 이라클리오 일대, 디도기념교회 등을 방문 후, 이어 다시 야간 페리로 고린도로 이동해 고린도운하,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 유적지(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등을 방문했다.
이어 올림피아로 이동해 최초의 올림픽을 시작한 곳, 성화채화 터, 김나시오, 올림픽 대경기장과 신전터 등을 둘러 보았다.
일정 5일차에는 델피로 이동해 아라호바 마을, 델피박물관, 옴파로스, 델피 유적지를 살핀후 메테오라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에서 수녀원공동체를 한곳 방문 후 인근 호텔에서 일박, 다음날 새벽부터 메테오라 수도원공동체를 순례했다.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공중에 달려있는 듯 했다.

6일차 일정을 마치고 인문학여행단은 그리스 국경을 넘어 터키로 입국했다.
차낙칼레 해협을 페리로 넘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안작연합군이 큰 희생을 입은 갈리폴리 전투지 해안을 볼 수 있었다. 이어 ‘트로이’로 유명한 아이발릭에 도착해 터키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7일차에는 에베소를 찾았다.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극찬 받았던 버가모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에베소에서는 유적입구에 누가의 무덤, 에베소 거리,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 원형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아카디아거리, 마리아의 집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에베소에 이어 밀레토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흔적, 대 원형경기장, 대규모의 아폴론 신전 등을 볼 수 있었다. 일행은 파묵칼레로 이동해 일박했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란 이름답게 환했고, 히에라폴리스는 온천요양으로 유명세가 날만큼 충분히 온천수가 샘솟았다. 히에라폴리스에는 고대 주거지역과 원형경기자, 필립 순교지 등의 유적이 있었다. 파묵칼레에서 장거리를 달려 다음행선지인 카파도키아에 도착해 일박했다.
카파도키아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아 숨어 지내던 땅속 도시 데린쿠유, 기암괴석의 괴레메 골짜기,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은 우치사르 등을 방문 후 카이세리공항에서 비행기로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이스탄불 보스프러스 전세선으로 보스프로스 해협을 유람 후 이집시안바자르,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등을 관람 후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식당에서 생일을 맞은 일행 축하와 회고의 시간을 갖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전세버스에 올라 다산의 유배지 강진으로 향했다. 강진에 도착에 일박 후 곧바로 만덕산과 백련사,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사의재, 영란문학관, 강진 갈대축제 등을 관람했다. 이어 다음 행선지인 안동으로 향했다.
간밤에 안동에 도착한 일행은 호텔에서 조식 후 곧바로 도선서원으로 향했다.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병산서원까지 둘러본 일행은 모든 순례 일정을 마치고 상경, 11월 11일 인천공항에서 모여 호주로 귀국했다.
그리스와 터키 방문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지형, 사건들을 접하고 정리해야 할 숙제거리가 참 많이 생겼다. 인생에 아련한 추억이 될만한 사진도 남겼다. 이에 일정중의 단상들을 나누어본다.
시드니에서 한국, 터키를 경유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
10월 22일 시드니 출발해 한국에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 모두 26명의 ‘2019 시드니인문학여행단’이 22일 오후 1시 40분 대한항공 (KE955) 편으로 인천에서 출발해 23일 터키를 경유해 24일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해 일정을 시작했다.
무사히 아테네 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가이드분이 친절하게 맞아주며 환영했다.
10월 24일 첫날 일정은 근대올림픽 경기장 방문을 시작으로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 감옥터 등을 방문 후, 야간 페리로 유럽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근대올림픽 경기장
10월 24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첫 행선지는 근대올림픽 경기장이다. 경기장은 아크로폴리스 동쪽으로 약 1.6km 거리에 위치애 있었다. 약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1896년 첫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다. 아테네 판아테나이코스 올림픽 경기장 (Panathenaikos Stadiumaic Stadium)으로 기원전 3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후 경기장을 재건해 1896년 제 1회 올림픽이 열린 역사적인 곳이다.
기원전 4세기부터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파라테나이아 제전이 열렸던 곳이다. 실제 이름은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이다. 1896년 최초 근대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이름을 따서 ‘스피로스 루이스 스타디움’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BC490년 2만 아테네 시민군이 10만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km를 달려온 병사의 죽음을 기리는 뜻깊은 경기장이기도 하다.
프랑스 쿠베르탕 남작의 제창으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던 장소이다. 원래 고대엔 관람석이 없었다고 한다. 로마시대 헤르데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을 기증했으나 소실되었다. 그는 공헌을 인정받아 입구 좌측 언덕에 묻혔다.
최초의 근대 올림픽은 1896년 하계 올림픽 (1896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I Olympiad)이다. 1896년 하계 올림픽은 393년을 마지막으로 끝난 고대 올림픽 대회 이후 열린 첫 근대 올림픽 대회다. 1896년 4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고대 그리스가 올림픽의 발상지여서 첫 근대 올림픽이 열리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아테네는 1894년 6월 23일에 파리에서,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쿠베르탱이 주관한 올림픽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개최지 자격을 얻었다. 또한 하계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가 조직되었다. 여러 어려움을 이겨낸 1회 올림픽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시의 국제 경기 중에서는 이 대회가 가장 많은 국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19세기 때 유일한 올림픽 경기장으로 쓰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경기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대회가 끝난 후 IOC는 이후의 올림픽을 계속 그리스에서 개최할 것인가를 놓고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과 그리스 임금인 요르요스 1세, 몇몇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으나 1900년 대회가 이미 파리에서 열리기로 결정된 상태였고, 이후 올림픽은 세계를 순환하면서 개최하게 된다. 1906년 중간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는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할 때까지 108년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했다.

그리스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산타그마 광장 (Syntagma Square)
우리 일행은 근대올림픽 경기장 관람 후 그리스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신타그마 광장 (Syntagma Square)으로 향했다.
신타그마 광장 (Syntagma Square, 그: Πλατεία Συντάγματος)은 그리스 아테네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다. 1844년 그리스 왕국의 헌법이 여기서 반포되었다고 한다. 신타그마는 그리스어로 헌법을 의미한다. 그리스 고궁이 광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으며, 이 건물은 1934년부터 그리스 국회로 사용되고 있다. 이 광장의 동쪽에는 ‘무명 용사의 비’가 있다. 그 밖에도 광장 주변에는 각종 관공서가 위치해있고, 광장 서쪽으로 아테네 최대의 번화가인 에르무 거리가 있다.
신타그마 광장은 19세기 초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인 오톤 왕이 1834년 수도를 나플리오에서 아테네로 천도하면서 건설됐다고 한다. 산타그마는 현대적인 아테네의 정치와 쇼핑, 교통, 휴식등 사회 활동 전반의 중심지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를 듣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 학술관 (Platonic Academy)
산타그마 광장을 방문한 후 우리 일행은 버스편으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Platonic Academy)을 찾았다.
플라톤 (Plato, 기원전 428년 5월 7일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기원전 387년 이곳에 학원을 지으면서 지명인 ‘아카데메이아’를 그대로 학원의 이름으로 가져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도 같다).
플라톤은 산술, 기하학, 천문학 등을 가르치고, 일정한 예비훈련을 거쳐 이상적인 통치자가 받아야 할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기하학은 감각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앎을 가르치는데 필수적이라는 판단으로, 학원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마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학과와 문답법 (변증법, 디아렉티케)이 오로지 배움의 필요성과 이들이 ‘철인왕 (哲人王)’, ‘밤의 회의’라는 국제법을 보전하고 그 목적 (선함 · 덕)을 달성할 수 있도록, 국가를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육이었던 이유는 ‘국가’나 ‘법률’ 등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 (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 · 음악 · 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 · 기하 · 천문 · 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 (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 · 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 (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 · 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기원전 348년에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의 교장은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이어받았으며 (기원전 348년~기원전 339년), 크세노크라테스 (기원전 339년~기원전 314년), 프레몬 (기원전 314년~기원전 270년), 크라테스 (기원전 270년~기원전 265년), 알케시라오스 (기원전 265년~기원전 241년), 칼네아데스, 시리아누스, 프로크로스, 마리노스, 다마스키오스가 맡았다.
시기에 따라 학설에 차이를 보였는데, 고 (古) 아카데메이아 학파와 중기 아카데메이아 학파, 신 (新) 아카데메이아 학파 등 몇 기로 나눌 수 있다. 스페우시포스의 시기에는 수학 교육에 편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말기 아카데메이아 학파는 회의론을 주류로 하는 스토아 학파와 대립, 당시의 아카데메이아 학파는 회의론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전후 약 1,000년간 존속하는데, 특히 플라톤으로부터 크란토르까지를 ‘고아카데미아’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기원전 347년에 죽고 조카인 스페우시포스가 2대째 학두 (學頭)가 되었다. 그는 시칠리아의 디온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도 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만년의 사상에는 영향을 받았다. 1과 다 (多)로써 이루어지는 수학적인 것만을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과 이성이나 영 (靈)이나 감각적인 여러 물체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것에서, 말하자면 삽화적 (揷話的)으로 이어져 맞춘 그의 자연관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맹렬하게 비평하였다. 그리하여 수학화한 아카데미아에 만족하지 않은 채 그 곳을 떠났다. 노쇠한 스페우시포스는 8년 후에 학두 자리를 칼케돈 출신인 크세노크라테스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람도 피타고라스파, 특히 필로라오스에게 관심을 보여 수학을 철학의 예비로 삼았다. 철학을 자연학 · 윤리학 · 논리학으로 3분하였고 수학적인 것을 이데아와 동일시하였다. 불멸의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수 (數)여서 우주를 위에서 아래까지 꿰뚫는다고 하였다. 약 20년간 학두 자리에 있었던 그의 고결하고 자주적인 성격을 필리포스 2세도 크게 존경하였다. 아카데미아에는 벌써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도 참가하여 플라톤을 위시하여 학료(學僚)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학자·천문학자·의사·법제가 (法制家)를 겸하고 있던 그는 이데아의 초월성을 비판하고 내재성을 설파하여 쾌락을 최고선 (最高善)이라 하였다. 이 시기의 수학과 천문학과 종교적 감정을 결부시킨 경향은 <에피노미스>의 저자라 하는 오프스의 필리포스 (플라톤의 제자)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 기 (期) 학원의 경향은 윤리학으로 옮겨갔다. 크세노크라테스에 의하여 철학에 들어서게 된 4대째의 학두 폴레몬 (BC 314 ~ BC 276)은 방종한 생활을 벗어버리고 감정에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되어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을 윤리 원칙으로 하였다. 폴레몬에 이어 학두가 된 크라테스에 관한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두 사람의 우정은 같은 묘에 합장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동료인 크란톨 (BC 340 ~ BC 290)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주석 (註釋)을 처음으로 써서 세계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슬픔에 대하여’는 후세에 많은 ‘위안 (慰安)의 서’의 본이 되었다.

중기 아카데미아의 카르네아데스 이후 플라톤 학파는 ‘신아카데미아’로 재차 독단적 방향을 걷는다.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져 절충주의로의 길을 한층 추구하게 되었다. 대표자는 라리사의 필론과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이다. 라리사의 필론 (BC 160 ~ BC 80)은 로마에서 강의하였다. 키케로는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필론은 카르네아데스와 스토아파를 조정하여 안전의 명백한 지식을 주장하였다.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 (BC 68 사망)는 회의사상은 자기모순이라 하여 방기 (放棄)하였다. 그리고 진리는 모든 진정한 철학자가 일치하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가장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덕 (德) 만으로는 불충분하나, 어떤 종류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충분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필론은 제4차 아카데미아를 수립하여, 그 이후를 신아카데미아라고 하였다. 제5차 아카데미아의 학두는 안티오코스이다.
아카데미아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비 (非) 기독교적인 학교에 대한 폐쇄 정책에 따라 아카데메이아는 529년에 폐쇄되었다.
아카데메이아의 이름은 이후 유럽의 신플라톤주의 융성과 함께 고도의 연구나 교육을 맡은 기관을 부르는 아카데미 (academy), 아카데미카 (Accademica) 등의 유래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는 메디치 가문과 인문주의자들의 사적 모임으로, ‘아카데미’라는 말이 쓰이는 실마리가 된 것은 프랑스 루이 13세 치하에서의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등이 저명하다.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플라톤 아카데미아 방문후 우리 일행은 그리스식 식당에서 오찬을 나눴다. 점심식사를 하며 이어질 파르체논 신전 방문에 양간 흥분도 되었다. 점심식사후 가이드분은 우리일행을 파르테논 신전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카페로 안내했다. 카페에서 보이는 파르테논의 모습은 참으로 웅장했다.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그: Παρθενών)은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이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은 “처녀 여신의 신전”을 뜻하며, 아테나 파르테노스 숭배 의식이 이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전의 이름은 처녀들 (‘파르테노이’)를 암시하는데, 처녀들의 최고위 희생 의식은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신전 건축물군 전체를 분명히 일컫는 첫 사례는 기원전 4세기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말에서 나온다. 5세기에 건축 기록에서 이 건축물은 그저 ‘호 나오스'(“신전”)으로 불렀다. 건축가 므네시클레스와 칼리크라테스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아테나이 건축에 대해 이들이 쓴 기록에서 이 건물을 ‘헤카톰페도스'(“100피트의 키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4세기와 나중에도 ‘파르테논’이란 이름 뿐 아니라 ‘헤카톰페도스’ 또는 ‘헤카톰페돈’으로 불렸으며, 기원후 1세기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이 건물을 ‘헤카톰페돈 파르테논’이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되었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도리스식 기둥 양식 발전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신전의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의 민주정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신전으로 역사가들은 이를 옛 파르테논 신전 (Pre-Parthenon)이라 칭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여타 그리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도 국가 금고로 쓰였으며, 특히 이곳은 한때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쓰였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에 1460년대 초에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의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나 여신을 모시기 위해 건축됨.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아테네를 모시는 신전들이 파괴됨.
.6세기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가톨릭 성당으로 바뀜.
.1687년 터키-베네치아 전쟁 때 탄약 폭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음.
.1806년 영국인 엘긴이 신전의 남은 조각품들은 빼내어 영국으로 보냄.
.1822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터키군의 포격으로 크게 파괴됨.
.1967년 그리스 군사 쿠데타로 인해 일부가 파괴됨.
고대 아테네인들은 파르테논의 벽에 신과 인간의 역사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신들이 벌인 전쟁, 전설의 여전사 아마조네스와 켄타로우스의 전쟁, 아테네 사람들과 아마조네스의 전쟁, 트로이 전쟁 등을 새겼다. 부조물을 찾았지만 볼 수 없었다. 대리석 기둥 위에는 말 조각상 등만 남아있다. 중요한 유물은 영국인들이 대영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겼다. 영국인들은 기둥까지 뽑아 가버렸다. 남아있는 조각품도 대단하다. 2500년 전에 어느 장수가 타고다녔을 것 같은 백마상은 지금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하다. 돌을 다루는 아테네인들의 솜씨에 경외심이 일어날 정도다.
한편 아크로폴리스 기슭 파르테논 신전을 향하다 진입로 아래 위치한 야외극장 디오니소스 극장을 둘러보았다. 고대 반원형 극장은 훌륭한 문화의 공간인 동시에 정치 선동, 홍보 등의 장이였다.
디오니소스 극장 (그: Θέατρο του Διονύσου)는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세워져 있던 대형 야외 극장으로, 디오니소스제의 개최지였다. 건축 음향학을 활용한 예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여전히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하니 놀랍기만 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 (Areopagus Hill)
파르테논 신전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아레오파고스 언덕 (Areopagus Hill)을 올랐다. 아레오파고스 (Άρειος Πάγος)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 기구이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Ἄρειος Πάγος)라는 말은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의도적 살인에 대한 재판 법정으로서의 기능도 했다. 아레스는 이곳에서 포세이돈의 아들인 핼리로티오스를 살해한 혐의로 신들에게 재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성경에는 바울이 전도한 곳으로 ‘아레오바고’로 기록하고 있다.
아레스 신에게는 알키페 (Alkippe)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포세이돈의 아들인 핼리로티오스 (Halirrothios)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샘 근처에서 알키페를 납치하려 했다. 아레스는 자신의 딸을 납치하려 했던 핼리로티오스를 살해했다. 포세이돈은 아들을 살해한 아레스를 신들의 법정에 고발했다. 이에 신들은 후에 ‘아레스의 언덕’이라 불리는 아레오파고스 (Areopagos, 또는 아레이오스 파고스)에 모였다고 한다.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법정이었다. 여기서 살인이나 살인할 의도로 입힌 상해, 방화, 독살 등과 관련된 재판이 이루어졌다.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는 대부분은 사형이 언도되고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재산 몰수나 유배가 선고되었다. 또한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의 중요한 정치제도들 중의 하나인 아레오파고스회가 유래되었다. 아테네는 임기 1년의 아르콘 (행정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서북면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아레스 신의 언덕’이다. 여기에 귀족들의 회의장 (평의소)이 있었기 때문에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 등과 같이)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이 위치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 기구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 기구의 의원은 최고직인 아르콘직 경험자 중에서 선출되었고, 그 지위는 종신이었다. 귀족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정 수립을 위한 큰 방해가 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462년에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많은 권한이 박탈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에 많은 권한이 민회에 맡겨지게 되었고, 민주정이 확립되었다.




철인의 언덕 (아카데메이아)
파르테논 신전과 아레오바고 언덕을 둘러본 우리 일행을 가이드는 소크라테스의 감옥터로 가는 중간에 ‘철인의 언덕’으로 인도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에서 온급한 것처럼 ‘아카데메이아’ 또는 ‘아카데미아’ (Ἀκαδημ(ε)ια, Akadēm(e)íā, Academia)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서북쪽 교외에 위치한 고대의 영웅 아카데메스의 성스러운 숲에서 기원한 신역 (神域)으로, 리케이온, 키노사르게스 등과 함께 대표적인 김나시온 소재지이기도 했다.
청년 교육에 열심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자주 이곳 아카데메이아나 리케이온의 김나시온의 청년들을 둘러보았다고, 플라톤의 대화편 ‘뤼시스’ 등에 그려져 있다.
보통 파르테논을 돌아본 뒤 디오니소스 극장, 헤로데이온극장,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감옥으로 안내되는데 아테네를 이야기할 때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한다. 사람이 지은 위대한 건축물은 세월이 흘러 부서져 가지만 위대한 철인들의 사상은 시대가 지난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소크라테스 (Socrates)의 감옥터
철인의 언덕을 지난 소크라테스의 감옥터로 갔다.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의 감옥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형 집행 날을 코앞에 두고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탈옥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크리톤은 세 가지 이유를 들며 소크라테스를 설득한다. 첫째, 소크라테스를 살릴 수 있는데도 살리지 않으면 친구들이 욕을 먹게 된다는 것, 둘째,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다면 그를 고발한 적들을 돕는 셈이 된다는 것, 셋째, 죽게 되면 자식들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이성과 논증을 바탕으로 탈옥이 정의롭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아테네에 산 것은 이미 법에 복종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탈옥을 하면 그 합의를 깨뜨린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구, 그리고 국가에게 해악을 입히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수치스럽게 살아남아 자신이 추구하던 참된 진리를 더럽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정의를 지키는 길이라 말한다.
아테네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나눈 후 우리 일행은 야간페리를 이용해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아테네에 도착해 첫날 일정을 마치고 페리안 침실에 누워 드는 생각은, 파르테논 신전을 본 후 느낀 것은 그동안 내 자신이 인지•인식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아니 압도적으로 그리스 신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철저히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학당이나 특히 소크라테스의 감옥터에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자세를 보았다.
한편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외쳤던 바울의 담대함을 더 연구하고 묵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테네에서 크레타 (Crete) 섬으로
10월 25일에는 크레타 (Crete) 섬에서 베네치아 성채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크노소스 궁전과 고고학 박물관, 이라클리오 일대, 디도기념교회 등을 방문 후, 이어 다시 야간 페리를 이용해 아테네로 돌아와 고린도로 이동한다.
아테네 피레우스항에서 출발해 하룻밤을 페리로 이동해 유럽 최초의 문명발상지 크레타 (Crete) 섬에 도착했다. 이용한 페리 ANEK LINES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여객 운송 회사 중 하나로 1967년 크레타의 주민이었던 수많은 주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주로 피레우스 크레타 (Piraeus-Crete) 및 아드리아 해 (Adriatic Sea) 노선의 여객 페리를 운행한다.
밤새 오면서 페리 침대칸에서 바라다 보이는 해안경치가 좋았고, 크레타 섬에서의 아침 식사도 훌륭했다.

크레타 섬 개관
크레타 (Κρήτη)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오늘날까지 역사, 신화, 음악, 방언 등 다방면에 있어 고유한 문화적 전통이 이 섬에 전해 내려왔다. 고대사에서 크레타는 유럽 문명이 시작한 장소로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미노아 시대 크노소스 궁전과 페스토스 유적, 고르틴 유적, 말리아 유적 등 여러 고대 유적이 남아 있다. 또한 크레타에는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 레팀노의 올드타운, 프랑고카스텔로 등 베네치아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문화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며,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매년 3~5백만 명의 외국 관광객이 크레타섬에 방문한다고 한다.
크레타섬의 경제는 오랫동안 농업과 목축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1970년대부터 관광업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크레타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농업/목축업과 관광/서비스업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보완적이다. 이 섬의 1인당 소득은 그리스 평균치에 근접하나 실업률은 4% 정도로 국가 전체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리스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농업이 크레타의 중요한 산업이다. 그리스 전체 면적의 약 4분의 1 가량을 올리브 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크레타섬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인데, 동에서 서까지 260km에 이르지만 남북으로 그 폭은 60km 정도이며, 폭이 12km에 불과한 레라페트라처럼 좁은 지역도 있다. 크레타의 면적은 8,303km2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1,046km로, 북쪽에는 크레타 해, 남쪽에는 리비아 해, 서쪽으로는 미르토아 해, 동쪽에는 카르파티온 해가 있다. 그리스 본토에서 남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크레타주에 속하는 가브도스 섬은 유럽 최남단에 위치한다.
크레타에는 산지가 매우 많으며, 동에서 서로 높은 산맥이 이어져 있으며 큰 산맥 세 곳을 이룬다 (레프카오리 산맥 : 화이트 마운틴, 2,452m, 이디 산맥 : 프실로리티스 산, 2,456m, 딕티 산맥). 오말로스 고원, 니다 고원 등 비옥한 고원이 있으며, 사마리아 협곡, 임브로스 협곡, 쿠탈리아티코 협곡, 아라데나 협곡, 아이아 이리니 협곡 등 많은 협곡이 있다. 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긴 협곡 중 하나로, 그 길이가 16km에 이른다. 크레타섬은 엘라포니시 해변, 발로스 해변, 프레벨리 해변, 마탈라 비치, 팔라사나 해변, 등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마리아 협곡은 크레타 야생 염소 키리-키리의 서식지이며, 크레타 산지와 협곡은 멸종위기종인 수염수리의 은신처이다.
크레타는 그리스의 행정 구역상 크레타 주에 해당한다. 하니아 현, 이라클리오 현, 라시티 현, 레팀노 현이 크레타 주에 속해 있다.
현재 크레타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중심 도시는 이라클리오이지만, 1971년까지 크레타섬의 중심 도시는 하니아였다.
크레타섬의 주요 도시는 이라클리오 (인구 173,993명), 하니아 (인구 108,642명), 레팀노 (인구 34,300명) 이다.

크레타섬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두 기후 지역에 속하는데, 주로 전자에 속한다. 그래서 크레타의 기후는 무척 온화하다.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에도 꽤 따뜻하다. 11월에서 5월 사이 산에는 눈이 흔하지만, 특히 해안 등 낮은 지역에는 드물며 몇 분, 몇 시간만 지나도 땅에 금방 눈이 사라진다. 크레타의 여름은 평균 기온이 섭씨 20도 후반에서 30도 초반 정도이며, 가장 더울 때는 섭씨 30도 후반에서 40도 정도이다. 크레타 남부는 대추야자가 열매를 맺으며, 제비가 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일 년 내내 이 섬에 남아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올리브 나무가 크레타섬에 있다.
크레타 섬에 최초로 사람이 산 것은 도기 이전 (aceramic)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들은 소, 양, 염소, 개를 키웠고, 곡물과 콩을 재배했다. 고대 크노소스는 신석기(나중에는 미노아 문명) 유적지의 한 곳이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초기 크레타의 역사는 미노스 왕, 테세우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같은 전설이 서려 있으며,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크레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휘말려 기원전 71년에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의 침공을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뒤이어 삼개 군단을 이끌고 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3년간 악명 높은 전쟁을 벌이다 결국 기원전 69년에 로마에 정복되었다. 그리하여 메텔루스는 “크레티쿠스” (Creticus)란 칭호를 얻었다. 고르틴은 이 섬의 수도가 되었으며, 키레나이카와 더불어 크레타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크레타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남았다. 그러나 이베리아 무슬림 아부 합스 우마르 알 발로티가 826년 이 곳을 점령하여 크레타에 해적 토후국을 세웠다. 960년 비잔티움의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다시 섬을 수복하여 1204년까지 비잔티움 영토로 남았다. 그러다가 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는다. 베네치아는 이 섬을 4백여년간 지배했으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예술 작품이 많이 나왔다. 크레타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로는 화가 엘 그레코와 작가 비첸초스 콜나로스가 있다.
베네치아 시대 칸디아 시는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유명했다. 1492년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이 곳으로 와서 살았다. 1627년 칸디아 시에는 800여명의 유대인이 살았으며 도시 인구의 7%를 차지했다.
1669년 오스만 제국이 21년간의 칸디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크레타를 정복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대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모스크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와 권리는 계속 보장되었다. 17세기에 이 도시는 높은 성벽과 능보로 둘러싸여 서쪽과 남쪽까지 뻗어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은 북동쪽 지역으로, 이곳에 모든 상류층이 모여 살았다. 오스만 제국이 칸디아에 편 도시 정책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 재산이었다. 이를 통해 오스만의 지도층은 파괴된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구를 늘리고 도시 재산을 팔아 도시 수입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몰리 그린(Molly Greene, 2001)에 따르면, 오스만 지배하에서 많은 부동산 계약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파괴된 도시에서 소수자들도 재산을 구매하는 권리를 얻어,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인들도 부동산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었다.
아랍인의 대정복 때부터 크레타에 이미 무슬림들이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슬림이 더 늘어났다. 대부분의 크레타인 무슬림들은 크레타 그리스어를 쓰던 지역 그리스 개종자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크레타의 정치 상황에서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들을 터키인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리스 독립전쟁 직전에 크레타 섬 인구의 45%가 무슬림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크레타 그리스도 교도 출신이었다. 나중에 터키, 로도스, 시리아 등지의 사회 불안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섬을 떠나자 남은 자들은 다시 그리스도교로 돌아오게 된다. 1900년에 섬 인구의 11%만이 무슬림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1924년 터키-그리스 인구 교환때 섬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크레타는 1830년 런던 의정서로 근대 그리스 국가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얼마 안되어 이집트의 술탄이 섬을 침략하여 지배를 받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1840년 6월 3일 런던 회의로 오스만 제국 영토로 돌아온다.
1833년에서 1897년까지 그리스도교도의 반란이 몇몇 일어났다. 1898년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 밑의 자치령으로 있었다. 결국 크레타는 1913년 12월 1일에 그리스 영토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이 섬은 유명한 크레타 전투의 무대였다. 이 전투는 1941년 독일 낙하산 부대가 7,0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지역 주민과 버나드 프레이버그 장군이 지휘하는 영연방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당초 대규모 공수 작전을 포기한다.
한편 크레타섬 출신 인물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제우스 : 그리스 신화 속 등장 인물로, 올림포스 신들의 왕이다. 크레타섬 동굴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등이 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지명되었다.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시인으로, 그리스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7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나 무스쿠리 : 크레타섬 하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의 가수로, 당대 최고의 세계적인 스타였다. 여러 언어로 200개 이상의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고, 약 3억 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갖고 있다.
.엘 그레코 :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화가이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비잔틴 양식을 익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거쳐 이후 스페인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했다.
.아이네시데모스 : 크레타섬 크노소스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 유명하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혁명가이며, 20세기 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수 차례 그리스 국무 총리직에 선출되었다.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 크레타 하니아 출신으로, 그리스 총리를 역임했다.


베네치아 성채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
섬의 첫 방문지는 베네치아 성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방문했다.
크레타 출신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zantzakis, 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하의 기독교인 박해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으며, 나중에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소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시적인 문체의 난해한 작품을 남겼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터키의 지배하에서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상적 특이성을 체감하고 이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과 연결시킨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영향을 고루 받았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 호메로스에 뿌리를 둔 그는 1902년 아테네의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났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업적은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는다.
1908년 파리로 건너간 카잔자키스는, 경화된 메카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려 한 앙리 베르그송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초인’으로서 완성될 것을 주장한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자는 불교의 사상은 그의 3단계 투쟁 중 마지막 단계를 성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다른 작품들로는 ‘오뒷세이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성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동족 상잔’ 등이 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것은 여행과 꿈들이었다”라고 할 만큼 카잔자키스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그리스 전역은 물론 세계 각지를 여행했고 다수의 기행문을 출간했다. 또한 1917년, 여행 중에 만난 요르기오스 조르바스와 함께 갈탄광 개발 사업을 하다 실패했으나, 이때의 경험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1946)로 남아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생전에 미리 써놓은 묘비명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우리 일행은 그의 무덤 앞에서 생을 말하고 죽음을 말했다. 그리고 다함께 사진을 찍으며 우리가 읽었던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에 대해 생각했다.





크노소스 궁전과 미노스 문명
니코스 카잔자키스 무덤 방문후 우리 일행은 크로소스 궁전으로 향했다.
크노소스 (Κνωσός)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있는 현존하는 것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청동기 시대 유적지로, 유럽 최고 (最古)의 도시라 불린다.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크노소스라는 이름은 크레타의 주요 도시를 기록한 고대 그리스 문서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그 내력이 유구하며, 그 존재는 청동기 시대부터 전승 기록과 초기 발굴 장소 근처와 케팔라 언덕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로마 동전에 그려진 미노타우로스와 라비린투스, 미노스의 묘사로 확인할 수 있으며, 크노시온 (Knosion) · 크노스 (Kno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로마인들은 크노소스를 식민지로 삼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미노스 문명
미노스 문명 (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년경 ~ 기원전 1170년경), 미노아 문명 또는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있었던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고대 문명이다.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1500년경 동안 번성했다. 그 후로는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미노스 문명은 20세기 초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의 발굴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며, 1939년 윌 듀런트는 미노스 문명을 “연속된 유럽의 첫 고리”라고 하였다.
미노스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칭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노스의”를 뜻하는 “미노안 (Minoan)”이라는 낱말은 아서 에반스가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인 미노스(Minos)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미노스는 그리스 신화의 미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데, 아서 에반스는 그 곳이 크노소스라고 비정했다. 혹자는 시리아 마리 (Mari) 문서고에 나오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 “케프티우” (Keftiu, kaftāw)와 셈어 “카프토르” (“Kaftor” 혹은 “Caphtor”) 그리고 “카프타라” (Kaptara)가 크레테 섬을 이르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지 수 백년 뒤에 나온 오디세이아에는 크레테 원주민을 “에테오크레테 사람” (Eteocretans, “진짜 크레테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아마도 미노스인의 후손일 것이다.

미노스 문명의 궁전들은 이 섬에서 발굴된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거대한 장서고를 통해 이 곳이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발굴된 각 궁전은 제각각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건물들과 분리되어 있다. 궁전은 내외부 계단, 작은 우물, 육중한 기둥, 창고와 정원을 갖춘 다층 건물도 있다.
미노스 사람들은 미케네 그리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가령 초기 그리스의 문자인 선문자 B는 미노스 문명의 선문자 A를 받아들인 것이다.
참고로 미노스 (Μίνως)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로,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이자 크레타의 왕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 (Μίνως)는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로, 그의 형제 라다만튀스와 사르페돈들과 크레테의 아스테리온 왕에 의해 길러졌다. 그리스 최초로 함대를 만들어 에게 해 대부분을 통제하고, 퀴클라데스 군도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섬에 식민지를 세웠다. 미노스가 이름인지 왕이라는 크레타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미노스와 고대 이집트의 왕 메네스, 독일의 마누스, 인도의 마누 등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미노스가 다스리고 있었던 크레타에는, 괴물 미노타우루스가 미궁에 갇혀 살고 있었는데,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로 와서 미노타우루스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돕고자 다이달로스를 찾아갔으며,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 뭉치 하나를 주고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과 칼을 주었다. 이윽고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뒤 아리아드네와 함께 달아나자 분노한 미노스는 그들을 도와준 다이달로스를 이카로스와 함께 가뒀는데 두 사람이 탈출하자 또다시 분노하여 다이달로스를 잡을 꾀를 냈다. 미노스는 고둥 껍데기를 실로 꿰면 상을 준다는 사실을 모든 나라에 알렸다. 그리하여 다이달로스가 은신하고 있던 시칠리아 카미코스의 왕 코칼로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이달로스는 실을 꿰어 주었다. 그리고 코칼로스는 실이 꿰어진 고둥을 코칼로스로부터 받고 카미코스로 가서 다이달로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단 코칼로스는 미노스를 다이달로스가 만든 목욕탕으로 들여보내고 다이달로스에게 방법을 강구했다. 다이달로스는 끓는 뜨거운 물을 욕조로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미노스는 결국 목욕을 하던 도중 뜨거운 끓는 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그만 화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사후에 그는 그리스의 지하세계인 하데스의 판관이 되었다. 미노스 문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는데 그의 아내 파시파에와의 사이에서 아리아드네, 안드로게오스, 데우칼리온, 패드라, 글라우코스, 카트레우스, 아카칼리스 등을 낳았다.

.미노스의 이카루스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와 간음하여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를 낳자, 파시파에가 소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나무로 소 모형을 만든 것이 다이달로스였음을 알게 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대책으로 이 괴물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미궁 (迷宮)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하였다.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둔 미노스는 아테네로부터 해마다 7명의 소년 소녀를 제물로 받아 미노타우로스에게 던져줬는데,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이 제물의 틈에 끼여 미궁 속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였다. 이때 테세우스를 연모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청하자, 실타래를 주면서 입구에 실을 묶고서 다녀오면 된다고 탈출 방법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와 함께 야반도주하자 화가 폭발한 미노스는 모든 것이 다이달로스 때문이라며 빈 미궁에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붙잡아 가두었다. 제아무리 미로를 만든 당사자인 다이달로스라도 실 없이는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주변을 날아다니던 새들로부터 떨어진 깃털과 미궁 곳곳에 맺힌 벌집에서 얻은 밀랍으로 사람이 날 수 있을 정도로 큰 날개를 만들어 몸에 붙이고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라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이 때 다이달로스는 태양열에 날개가 녹지 않도록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고 바닷물에 날개가 젖지 않도록 바다 가까이 너무 내려가지도 말라고 경고했는데, 이카로스는 새처럼 나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나머지 그만 부친의 당부도 무시하고 너무 드높이 날아오르는 욕심을 내버리는 바람에 결국 태양열로 인해 날개를 붙인 밀랍이 다 녹아 망가졌고 이로 인해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서 익사한다. 지상에 착륙한 다이달로스는 아들의 시신을 건져 올리고는 크게 슬퍼하며 섬에 묻었는데, 나중에 이 섬은 이카로스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아 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비롯된 ‘이카로스의 날개’는 미지의 세계 (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동경 그리고 동시에 한계를 상징한다.

.에번스의 발굴
에게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의 하나로 테라라고 하는 섬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고 추측되는 오랜 옛날, 큰 분화가 일어났다.
그때 매몰된 도시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며, 용암 속에서 장식 무늬가 있는 도자기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2년 후, 후기 청동기 시대 (이른바 미케네 시대)의 분묘가 로도스섬의 이말리수스에서 새로 발견되어, 특색 있는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어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 후인 1876년에 미케네의 발굴을 시도하여, 이름 높은 사자문 (獅子門)의 남쪽에 있는 왕족의 분묘에서 대량의 금은과 기타 세공품을 발견했다.
슐리만의 발굴로 그리스 태고문화 탐구가 점차 활기를 띠고 진행되어, 1900년, 영국인 아서 에번스는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유적 발굴에 손을 댔다.
에번스는 그리스 본토 및 그 밖의 여러 섬들의 소위 ‘미케네 문명’보다도 더 오랜, 한층 세련된 문화를 거기서 발견하였고, 이것이 에게 세계의 구명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출토의 유품, 특히 항아리의 형태나 장식 양식의 변화에서 크레타 청동기 시대의 연대 구분법을 안출 (案出)하고, 또 크레타 문명에 ‘미노스 문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아서 에번스 (Arthur John Evans, 1851년 7월 8일 ~ 1941년 7월 11일)는 고고학자 조지 에번스의 아들로, 옥스퍼드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으며 1884년부터 1908년까지 모교 옥스퍼드 대학교의 애슈몰린 박물관 관장 (Keeper)으로 재직했다.

1898년 크노소스 왕궁을 발굴하기 시작한 에번스는 이후 35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왕궁과 그곳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복원했다. 19세기 중엽만해도 전설 속에 묻혀있던 에게 문명을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아로 지목되는 곳을 비롯하여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했다.
이에 1900년부터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 섬 북부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으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트로이아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 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 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반스는 크레타 섬 발굴에서 선형 문자 (線上 文字)가 기록된 여러 점토판 문서 (土版 文書)를 발견하였다. 고고학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기사작위 (Knight Bachelor)를 받았다.



.미노스문명의 문화 예술
크노소스의 궁전은 낮고 가파르지 않은 언덕 위에 있다. 궁전의 가운데에 장방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거실이나 침실·목욕탕 내지는 신전 (神殿) 등, 여러 종류의 방들이 둘러싸고 있다. 방의 배치가 아주 불규칙하여 전체적으로 긴밀한 통일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통풍이나 채광을 위한 고려 (考慮)를 비롯하여 완전한 하수 (下水)장치 등 위생시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그리고 저장실 (貯藏室)에는 술·기름·곡물류를 넣는 커다란 항아리가 길게 열을 지어 있어, 크레타 왕족의 부유함을 말해 주고 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현재로는 옛날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부분적으로 복원 (復元)되어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옥좌 (玉座)가 놓인 방의 건축에 있어서, 크레타인은 석재 (石材)뿐 아니라 목재도 사용했다. 흥미있는 것은 낮은 주춧돌 위에 고정시켜 세운 나무기둥이, 상부 (上部)에서 하부 (下部)를 향해 차차 가늘게 되어 있는 점이다.
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 (彫像)은 만들지 않았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좌가 놓인 방의 벽화에서는 기복 (起伏) 있는 땅 위에 백합 비슷한 꽃이 피어 있고, 옥좌의 양측에 우아한 형체를 가진 신화·전설상의 동물이 가로누워 있다. 또한 크레타의 벽화에는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나 남녀의 행렬 등을 그린 것도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 크노소스의 궁중 여관 (宮中女官)을 그린 벽화에서는, 여자들이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값비싼 장신구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도 크레타 문명의 세련된 일면과 동시에 여자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이 엿보인다.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The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
크노소스 궁전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이어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중간에 나눈 해변가에서의 점심은 달았다.
이라클리오 (Ηράκλειο)는 그리스 크레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크레타주의 주도이다. 또한 그리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이름은 헤라클레이온 (Ἡράκλειον)이라 쓰기도 하는데, 고대 그리스어와 카타레부사의 표기이다. 수 백년 동안 이 도시는 칸디아 (Candia)로 불렸는데, 이전 그리스어 명칭인 ‘칸닥스’ (Χάνδαξ) 또는 ‘칸다카스’ (Χάνδακας)에서 차용한 베네치아어 표기이며, 또 이 말은 아랍어 rabḍ al-ḫandaq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칸디아의 영어식 표기인 ‘캔디’ (Candy)는 프랑스어에서 온 말로, 도시 칸디아나 크레타 섬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 도시는 ‘칸디예’ (Kandiye)로 불렸으며, 현지에서는 ‘카스트로’ (Κάστρο, “성”)으로 쓰고 이 곳 주민을 ‘카스트리노이’ (Καστρινοί, “성에 사는 사람”)라고 쓰기도 하였다. 이라클리오는 이라클리오 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딴 이라클리오 국제공항이 있다. 근처에 아서 에반스가 발굴하여 복원한 크노소스 유적지가 있는 것이다.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The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의 첫 번째 시설은 1904년 ~ 1912년 사이에 크레타 고고학자 조셉 카치다키스와 스테페노스 잔토우디디스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설립되었다. 이어 두 번째 시설은 1937년부터 현대적인 건물로 스피리돈 마리나토스에 의해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유물의 전시 및 정리는 1950년대에 니콜라오스 플라톤과 스탈리아노스 알렉시오우에 의해 주도되었다. 주로 크레타의 중부아 동부에서 발굴된 것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다. 이어 2014년에 재수리하여 현재의 박물관 형태를 갖추었다.
이 박물관에는 크레타 섬동부와 서부뿐 아니라 부근 섬에서 나온 크레타 문명의 기념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1, 2층에 걸쳐 모두 20여개의 전시실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실은 시대별로 구분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미노아 문명의 형성과정이나 시디귿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석기시대는 원석기 시대,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 시대로 구분했다. 크레타 섬에서는 아주 초기의 구석기시대 즉 150,000년 전에 사람이 살았으며, 제대로 된 주거가 형성된 것은 구석기 시대 말기 또는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로 설명한다.
신석기 시대에 동 종류의 금속이 개발되며 사람들의 정착이 가속되고 기원전 3000년전부터 크레타섬에서는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 청동기의 발달로 수확도 늘고 삶의 질도 높아졌으며 마을들도 번영하게 되었다. 미토스나 바실리키에서 발견된 것으로 유추해보면 대개 마을들은 중앙에 광장을 두고 작은 집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또한 해상교역이 발전되자 더욱 부가 쌓이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크노소스 언덕 아래의 미노아 궁전 유적 밑에는 크레타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있다. 초기의 작은 오두막으로 된 주거지는 후일 여러개의 방이 있는 사각형의 건물로 이어졌다. 신석기 말기에는 주거지가 확장되었고, 집들이 더욱 견고한 토대위에 지어졌으며 벽과 벽난로 등 가구가 배치되었다. 이렇게 공간이 변형되었다는 것은 지역사회가 재구성되고 구성원간의 새로운 사회적 경계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굴된 지층별로 시대별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 BC 8000년 경에는 사냥도구나 여신상, 돌로 만든 병들, 점토조각, 무덤 부장품 등이 주로 출토되었다. BC 4000년 경에는 희귀보석과 준보석들 (자수정, 수정, 홍옥수, 유리 등으로 만든 목걸이와 펜단트) 등이 출토되었다.
BC 3000년 경에는 금과 크리스탈로 만든 부착물들과 의복이나 관 (머리에 쓰는) 등이 출토되었다. 미노아 시대의 유물로는 도기류, 유약 칠한 도기와 장식물들 등이 독창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BC 2000-1700년 경에는 단단한 흑요석을 이용해 부드러운 돌을 갈아 그릇류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으나 이 시기에는 더 단단한 돌들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금속제품들은 특화된 청동공예공방에서 만들어졌다.
BC 1500년 경에는 청동기 유적으로 필기형태의 도구들과 연장, 청동상 등이 나타나며 특히 화려한 모양의 도자기들과 석재 그릇류들이 출토되었다.

한편 후기 청동기 시대에 미노아 건축은 그 설계와 건축기술에 있으서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크노소스의 미로같은 궁전과 시가지 구성은 이러한 것의 축소판이다. 이시기에 미노아 도자기는 그 정점에 도달하여 우아한 형태네 다양한 주제와 다채로운 색을 사용한다. 또한 벽화에도 화려한 채색을 입힌다. 이 시기 상아로 만든 하프나 다양한 악기 연주 그림과 춤추는 토기상도 나온다. 이집트 수입품으로 주동이와 손잡이 있는 그릇들도 있다.
BC 1300년 경 궁전후기 시대 크노소스 궁 근처의 무덤에서는 청동 무기류나 집기류는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파이스토스 주변 무덤에서는 청동 집기류들, 연장들과 무기들, 준보석류와 황금보석류, 화려하게 장식된 그릇들이 출토된다. 이시기 커다란 이집트산 아라베스터 병도 나타난다. 미노아인들의 후세에 대한 관념과 믿음은 관의 그림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노아 벽화미술 수준도 이때 더욱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프레스코 벽화는 궁전의 벽과 바닥, 천장을 장식한다.

BC 11~1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석조건물들은 선사시대의 건축전통을 따랐다.
BC 9~4세기의 도시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않지만 어던 도시들은 방어 성벽도 있었고, 공동묘지와 신전도 있었다. 또한 도시의 중심에는 아고라라는 사회적 정치적 공중화합장소도 있었다.
BC 3~2세기에는 철기 유물이 나타난다. 청동은 흔한 소재가 되어 청동 월계관이나 청동상, 솥단지, 생활 장신구 등으로 만들어 지고, 철기는 귀한 재료로 당시로서는 아주 귀했을 철기제품가 보석류, 그 밖의 집기류가 출토되었다. 처음에는 청독기와 철기 제품이 섞어져서 나오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기만 출토된 것으로 보아 튼튼한 철기가 생활 속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BC 67년 크레타는 로마에 정복되었고, 고르티나는 수도가 되어 로마의 다른 속주의 대도시들과 같은 면적과 규모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기간동안 크레타에는 신전이나 아고라, 분수와 수로, 극장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런 크레타의 번영은 다른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근동이나 소아시아 등과의 교역에 힘입은 것이다. 이 시기 동전 화폐도 출토된다. 로마시대 총동상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로 신을 만들던 이전과 달리 보통 사람들, 동물들 등 다양한 주제가 나타난다.

크레타 섬의 디도기념교회
디도스 / 디도 (공동번역, 개신교) / 티토 (가톨릭, 그: Τίτος)는 초기 기독교의 선교사이자 교회 지도자로, 디도서 등의 바울 서신에서 언급되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다.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전승에 의하면 그는 크레타의 감독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바울에게서 받아 전달한다. 이후에 크레타에서 디도는 죽을 때까지 크레타 섬의 모든 도시에 장로를 임명했고, 칸디아 (현재의 이라클리오) 주변에 있는 도시인 고르티나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성물은 지금은 두개골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터키 점령기때 베네치아로 이송되었다가 1966년에 반환되어 지금까지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의 디도기념교회에 있다. 제단 앞 편에 화려하게 치장한 유리 돔 안에 디도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크레타 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나눈후 페리를 타고 다시 밤새 아테네로 향했다. 아테네에 도착하면 바로 고린도로 이동할 예정이다.

크레타를 빠져나오는 페리의 침실에서 크레타에서 보낸 하루를 돌아봤다.
유럽 최초의 문명발상지 크레타. 섬의 첫 방문지 베네치아 성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방문하며 자유를 생각했다.
에반스의 노고로 발굴된 크노소스궁전에서는 역사가 된 신화, 신화가 된 역사 등을 생각했다.
디도기념교회에서는 삶의 이유를 묵상하며 기도했다.
크레타섬을 떠나며 아프리카 특히 이집트나 중동, 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유럽에 어떻게 반영되었나 궁금해지면서 앞으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려한다.
고린도와 올림피아, 그리고 파트라스
10월 26일, 아침이 되어 눈뜨니 페리는 밤새 달려 고린도에 와 있었다. 짐들을 챙겨 하선하고 우리 일행은 아침식사를 나눴다.
오늘은 고린도와 올림피아 일대를 둘러본다. 고린도에서는 고린도운하,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 유적지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등을 방문하고, 이어 올림피아로 이동해 최초의 올림픽을 시작한 곳, 성화채화 터, 김나시오, 올림픽 대경기장과 신전터 등을 둘러본다. 그리고 파트라스 인근에서 1박한다.

고린도
밤새 페리로 달려 크레타섬에서 나와 그리스 남쪽 고린도에 이르렀다.
.고린도 (코린토스) 개관
고린도 / 코린토스 (Κόρινθος)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이자 현대의 도시이다.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로부터 78킬로미터 남서쪽이고 사로니코스 만과 코린토스만을 가르는 코린토스 지협에 있다. 고대에는 이 지협의 해안을 따라 험준한 암초를 피해 선박이 돌아갔으나 지금은 코린토스 운하가 놓여있다.
한글 성서에서는 코린트를 고린토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 고린도 (개역한글성서/대한성서공회), 코린토 (천주교 ‘성경’/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로 음역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의 활동 무대로 유명하다. 문화인류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이희수 한양대교수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코린트로 이주한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으며, 전도 기간 동안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작성하였다. 사도 바울은 2년간의 연금 생활을 마치고 로마, 고린토, 테살로니카 등에 세운 그의 교회들을 돌아본 것으로 추정된다.

.고린도 운하
고린도 입구에서 길이 6.34Km의 고린도운하를 만났다. 고린도만과 살로닉만을 연결하는 운하로 줄리어스 시저, 칼리큘라 황제 등이 계획을 세웠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네로 황제도 공사를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한다. 운하가 완성되기 전에는 배를 통나무에 끌어올려 육지위로 이동하는 육지운하 (디올코스) 방식이었다.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박물관의 유적들은 매우 역사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문명은 그리스의 것인데 유물은 로마 때의 것이 많아 보였다. 고린도박물관은 4개의 방과 회랑, 앞마당으로 나뉜다. 1전시실은 선사기대 유적들, 2전시실은 아르카이크 시대와 고전의 중요유물 전시, 3전시실은 로마, 비잔틴, 프랑크시대의 동상들과 모자이크 등 전시, 4실은 회당으로 AD 2세기경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앞마당은 로마시대 목없는 동상들이 전시되어있다.

.고린도 유적
고린도는 고대 고린도 (Old Corinth)와 현대 고린도 (New Corinth)로 구분된다. 옛 고린도는 주후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폐허로 유적만 남아 있다. 옛 고린도에서 북서쪽 5.6km지점 고린트만 기슭에 새로운 고린도를 건설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코린트 (Corinth)라고 부른다.
성경의 기록에는 옛 고린도에 관련된 내용이다.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약 80km지점,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길목에 자리하여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국제적 상업의 중심지였다.
고린도는 호메로스시대 부터 항구도시가 아니면서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두 바다를 연결 짓는 서항 (西港)의 레기움과 동항 (東港)의 겐그리아의 두 항구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국제 무역의 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다.
고린도 유적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남은 유적만으로도 그 화려함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고린도 유적지 중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일대를 둘러보았다.

.고린도 언덕
일찍이 헬라문화에서 로마문화로 이어진 혼합된 문화의 도시였다.
주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 (Mummius) 장군은 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후 주민들을 추방했다. 그리하여 소수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후 100년 동안 재건되지 못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주전 44년 쥴리어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는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상업적인 중요성을 인식하여 고린도를 재건하고자 자유민으로 구성된 식민이민단 (Colony)을 끌어 들였다. 이때 상인들인 그리스인, 로마 제국의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고린도는 부흥, 발전하면서 과거와 다름없는 번영된 도시가 되였다.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2차에 걸쳐 일시적으로 추방하는 칙령 (주전 41년과 19년)에 의해 고린도에 들어와 유대인이 증가되어 공동체를 이루었다.
주전 27년 고린도는 로마속령 아가야 (Achaia)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Claudius)때 갈리오 (Gallio, 주후 51-52년)가 주후 51년 7월 아가야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후 고린도에 주재하여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혼자서 고린도를 방문했으며 마케도니아에서 온 실라, 디모데와 얼마후에 합류했다 (행 18:5).
이 지역에 해발 600m의 아크로코린투스 (Acrocorinthus, 고린도언덕)라고 부르는 바위산이 평지에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그 정상에는 어느정도 커다란 도시가 세워지기에 족한 넓이의 분지로 형성된 곳에 고린도가 위치했었다.
고린도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 아테네를 압도했으며 호화스러운 도시였다. 고린도의 아크로코린투스에 비너스 (Venus, 아프로디테) 신전이 세워져 그곳에서 매춘이 이루어졌으며 산성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되고 부도덕한 행위가 성행하여 “고린도인”이라고 하면 곧 음행과 방탕의 대명사가 되었다.
코린토스 고대 유적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곳은 시지프스의 신화가 깃들어 있는 산이다.
시지프스가 지하의 신 하데스의 말을 안듣고 살아났으나 결국 형벌을 받았다.
이 산의 꼭대기로 바위를 끌어 올리고 그것이 내려가면 다시 올리고, 지금도 반복을 하고 있다는 전설이 어린 산이다.
알베르 까뮈는 이 신화에 착안하여 시지프스신화에 대한 단편을 썼다.

올림피아
고린도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고린도 유적지를 나오며 단체사진을 찍고 유적지 인근에 위치한 그리스 식당에서 점심을 나눴다. 점심식사 후 우리 일행은 올림피아로 향했다.
.올림피아 개관
올림피아 (Ὀλυμπία)는 그리스 서그리스 주 엘리스 현 아르혜아 올림비아 (Αρχαία Ολυμπία)에 있는 유적지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776년 이래 기원후 349년 폐지되기까지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있었던 제우스 신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으며, 고대 올림픽 자체가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사의 일환이었다. 올림픽의 발상지였으므로 근대 올림픽의 성화 (聖火)도 바로 이 곳에서 채화된다.
올림피아 (Ολυμπία)는 엘리스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성소로, 고전기에 델포이의 피티아 경기에 비견되던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두 경기는 4년마다 한번씩 열렸으며, 올림피아 경기의 기원은 기원전 77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후 349년, 1170년 만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올림피아 경기를 이교의 잔재로 여겨 폐지를 명하였다.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
그리스 문명의 산실인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올림피아는 무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랜 세월임에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스 내에선 최대 규모의 유적일 것이다.
올림피아는 원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신중의 신’인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그의 부인인 헤라신전도 있다.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신전으로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 중 가장 오래되었다.
지금 올림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헤라신전일 것이다. 헤라 신전 앞 광장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4년마다 한번씩 채화한다.
그래도 올림피아의 중심은 단연 제우스 신전이다. 올림픽 자체가 원래는 제우스신을 숭배하는 올림피아 사람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벌였던 행사였다.
비록 지금은 수많은 돌덩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지만 제우스 신전의 원래 크기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능가할 정도였다 하니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올림피아 경기장
처음에 올림픽은 달리기만 있었다. 192.3m를 빨리 달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리스의 폴리스 대부분이 올림픽에 참가했기 때문에 올림피아엔 선수들의 숙박시설도 대폭 건설되었다.
고대 올림픽의 특징은 지금의 개막식, 폐막식이라 할 수 있는 제우스 신에 대한 기념제, 감사제를 올린 뒤에 5개의 종목을 3일에 걸쳐서 실시된다. 개최 기간은 제우스 신에 대한 기념제, 감사제를 포함한 5일 간이다.

시간이 지나며 종목수도 늘고 보상금도 늘어났다.
각 종목별 우승자에게는 월계수로 만든 관이 수여되며 보상금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승자에 대한 지나친 보상으로 인해, 올림픽은 세월이 흐를수록 타락해갔다.
특히 고대 올림픽 후반에는 선수, 심지어 국왕마저도 뇌물과 반칙을 주로 할 정도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의 하나로서 참가가 허용되었지만, 후에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한 후에도 올림픽은 계속되었다.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서기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식 선포하면서, 이교도의 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경기를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고대 올림픽도 금지되었다.
마지막 293회 고대 올림픽은 다음해인 393년에 개최되었다.
이후 로마의 이교도 신전 파괴령에 의해 고대 올림픽 경기장을 파괴하였고, 기록을 지워버렸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고대 올림픽은 369년에 열린 287회 고대 올림픽으로, 그 해의 우승자만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올림피아는 벽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 일행은 고대 올림픽 경기장을 뛰며 고대 올림픽 참가자들의 모습을 재현해 보았다.



파트라스
고린도와 올림피아를 돌아보고 뛰다보니 어수룩한 밤이 되었고 우리 일행은 파트라스 근처의 호텔로 이동해 저녁을 나누고 1박했다.

.파트라이 개관
파트라이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북쪽 기슭의 이오니아해 (海)와 코리트만 (灣)을 연결해 주는 파트라스만 (灣)에 접해 있는 항만도시이다. 그리스 최대 도시 중 하나이며, 상업·제조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식품가공·조선·섬유·벽돌·타일 등의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주요 수출품은 커런트 (건포도의 일종), 담배, 올리브, 올리브유, 무화과과, 감귤류, 포도주, 브랜디, 양가죽 등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기원전 3세기 제2 아카이아동맹의 12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파트라이는 악티움해전 (BC 31) 이후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상업 활동이 활발한 항구로 발전했다. 15세기에는 단기간 동안 베네치아인 이 점령했으며, 베네치아인 들과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우다가, 후에 투르크인들이 통치하게 되었다. 베네치아인의 2차 점령기간인 1687∼1715년을 제하고는 그리스독립전쟁 말인 1828년까지 투르크인들이 통치하였다. 독립전쟁 때 도시는 투르크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그 후 직사각형 구획의 현대도시로 재건되었다.
철도로 코린토스 (코린트), 아테네, 칼라마이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와 이탈리아 동부 해안 사이를 오가는 카페리가 통과한다. 파트라이대학교 (1964)가 이곳에 있다.

.파트라스와 예수의 처음 제자 안드레
파트라스 인근에는 예수의 처음제자 안드레의 순교지도 있다.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의 영향력으로 인해 안드레는 로마 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이남 지역인 아카이아 (오늘날 그리스 전역)의 주파트라스 시에서 체포되어 에게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X자형의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로 부르게 되었다.
파트라스에는 안드레 순교성당 (Saint Andrew Church)이 있다.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프스 (Josephos, Flavius 37/38 ~ 100)에 의하면 안드레는 에베소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런데 가롯 유다 대신 제자로 뽑힌 맛디아가 식인종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를 구하려고 항해를 하여 흑해 연안 코가스 산맥이 있는 스구디아 (南 러시아)에 도착한다. 기적으로 맛디아를 구출하고, 식인종도 거의 다 교화 시킨다. 그래서 스구디아와 비잔틴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그 후에 그의 전도 공헌은 위경인 ‘안드레 행전’에 의해 알게 된다. 멕 버니의 기록에 의하면 “거룩한 전승에 안드레가 코카서스 산 속 (러시아 조지아)에 가까운 스구디아족에게 전도하며 흑해 북편까지 갔다가 비잔티움 (이스탄불)에 돌아와 스라키스 감독에게 안수했다. 시노페에서는 식인종들이 잡아먹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안드레는 사도의 직분을 계속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제들과 감독들에게 안수했다. 비잔티움에서 그는 중요한 전도지인 그리스, 가드레이스, 마케도니아, 고린도만을 지나 파트라스에 이르렀다. 안드레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후로 전했다. 파트라스 총독이 안드레의 전도에 격노해서 기독교 신앙을 말살하고자 안드레를 체포하고 법정에 세웠다. 그가 법정에서 그 부당성을 항의하자 총독을 안드레에게 십자가형을 명했다.
파트라스에는 안드레의 순교지, 파트라스 안드레아대성당 등이 있으며 안드레아스대성당에는 사도 안드레의 순교화가 있다. 안드레가 아가야 지방 파트라스에서 전도할 때에 치유의 기적이 많았다. 총독 에제아테스의 아내 막시밀라가 중병에 걸려 죽을 것을 안수 기도로 고쳐 주었다. 이로 그녀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또한 에제아테스의 형제 스트라토클레스의 하인이 중병에 걸리자 하인의 병도 고쳐주었다. 이 기적으로 스트라토클레스의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본래 기독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에제아테스는 식구들이 기독교인이 되자 분통을 터트려 안드레를 옥에 가두고 십자가형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안드레에게 감동을 받은 이들이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안드레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순교 하였다. 안드레는 네로황제 재위 60년 11월 30일에 순교하였다. 안드레 순교화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파트라스 인근 호텔에 묵으면서 침대에서 빡빡한 일정속에 보낸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고린도는 나름 많이 공부가 된 지역이라 자신했는데 현장에서 유적을 보니 규모가 생각이상이다. 고린도 입구에서 만난 고린도 운하를 통해 고린도 지역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유용한 곳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박물관의 유적들은 매우 역사적이었고, 시대별로 전시해 이해하기가 좋았다. 문명은 그리스의 것인데 유물은 로마 때의 것이 많아 보였다. 앞마당에 누군가의 얼굴상을 붙이려 준비된 로마시대 목없는 동상들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남기려는 욕심은 과거나 현재에도 변함없음을 느꼈다. 고린도 유적을 둘러보니 유적들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남은 유적만으로도 그 화려함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올림피아에서는 현대 스포츠 정신보다는 종교성을 더 느꼈다. 그리스의 수니온곶 끝자락에 위치한 포세이돈 신전은 가지 못해 바이런의 낙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테네에서 에게해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70㎞를 가면 수니온 곶에 이른다. 그 언덕 위에 15개의 도리스식 기둥만이 남아 있는 포세이돈 신전이 있다. 그 무너진 신전 기둥의 하나에 바이런의 낙서가 쓰여 있다고 한다. 그 낙서의 내용은 ‘나는 결코 비겁하게 살지 않는다. 백조같이 살다 죽겠다’는 말이다.

델피와 메테오라
10월 27일에는 델피로 이동해 아라호바 마을, 델피박물관, 옴파로스, 델피 유적지를 살핀 후 메테오라로 이동한다. 메테오라에 도착해 수녀원공동체를 한곳 방문 후 인근 호텔에서 1박한다.
호텔 조식을 마치고 파트라스를 떠나 10여분쯤 달렸을 때 리오 안티리오 다리 (Rion-Antirion Bridge)가 나타났다. 이 다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는 긴 다리다. 리오-안티리오 다리 (Rio-Antirio bridge)는 그리스 파트라 근처 코린토스 만에 있는 사장교로, 그리스 본토의 안티리오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리오를 연결한다. 2004년에 완공되었다. 공식 명칭은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다리 (Γέφυρα Χαρίλαος Τρικούπης)로, 리오와 안티리오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 구상을 제시했던 19세기의 그리스 총리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다리가 완성되면서, 지금까지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하는 교통로밖에 없었던 교통 상황을 개선하게 되었다. 가장자리에는 4개의 지주가 위치하고 있고, 중앙 경간은 560m, 총 거리는 2,252m (연결 다리를 포함한다면 2,882m)이다. 총 거리 면에서 세계 최장의 사장교이다. 폭은 28m로, 2차선 및 비상 차선과 보행자용 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완성 이후 자동차의 통행료는 10.50 유로, 자전거는 1.50 유로를 징수한다고 한다.

그리스의 알프스 아라호바 (Arachova) 마을
우리 일행은 파트라스에서 델피로 이동중 그리스의 알프스 아라호바 (Arachova) 마을을 방문했다.
아라호바는 델피의 관문으로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쉼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스키 리조트와 그 부대시설에서 나오는 관광수입으로 운영하는 마을이다.
한국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아라호반 마을과 파르나소스 산
그리스 신화에 신성한 산으로 나오는 파르나소스 산 해발 2,445m 경사면에 위치한 아라호바마을은 그렇게 신화를 품고 있다.
파르나소스 산 (Παρνασσός)은 그리스 중부 코린트 만 북부의 델포이 중앙에 위치한 석회암 산으로 최정상의 높이는 2,457m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 산은 아폴론 신과 코리시아 님프의 신화 전설에 따라 신성하게 여겨져 왔으며, 뮤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리아인도 이 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파르나소스 산은 코린트만 (灣) 북쪽에 위치하며, 아폴론 신전 (神殿)이 있던 성지 델포이가 자리잡고 있고, 아테네에서 200㎞ 떨어져 있다. 포키스주 · 프티오티스주 · 보이오티아주의 경계선에 접하여 북서∼동남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코린트만의 오포스곶까지 이어진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불모지로, 남쪽 기슭에 카스탈리아샘 [泉]이 있다. 로마 시인들은 이 샘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뮤즈의 거처인 헬리콘산 (山)보다 파르나소스산을 더 숭배하였다. 이 산은 도리스족 및 아폴론과 코리시아 요정신화에서 신성시된 곳으로, 2개의 봉우리 중 하나는 아폴론과 뮤즈에게,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에게 봉헌되었으며, 정상과 델포이 사이에 있는 고원에는 요정들과 목신 (牧神)에게 바쳐진 코리시아 종유석 동굴이 있었다. 예전에는 라르나소스 (Larnassos)라고 하였는데, 방주 (方舟)를 뜻하는 이 말은 그리스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제우스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대홍수를 일으켰을 때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이 아내와 함께 방주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파르나소스 산정이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보크사이트가 산출되어 인근 공장에서 알루미늄으로 가공되고 있으며, 1월∼4월까지 눈이 많이 내려 스키장으로도 유명하다.

.파울 클레의 ‘파르나소소스 산으로’
파울 클레의 ‘파르나소스 산으로’ (Ad Parnassum, 캔버스에 유화, 100 x 126cm, 1932, 스위스 베른 국립미술관)는 제목부터 음악적 감성을 환기한다. 그리스 중부 프티오티다 현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은 신화에서 아폴론과 아홉 뮤즈들이 시와 음악을 관장하던 곳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도 파르나소스 산이 잠깐 언급되는데,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젊은 시절 여기서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파랑, 오렌지, 초록 색면과 색점들 위에 흰색 점들이 촘촘히 중첩된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영롱한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중첩된 색채는 하모니를 이루고 연결된 선들은 멜로디가 된다. 이를 통해 다성음악 (polyphony)과 같은 다층적인 회화가 펼쳐진다. 간결한 검은색 선으로 그려진 세모와 아치는 건축적 구조를 이룬다. 마치 관람자들이 문으로 들어와 뮤즈들의 음악이 흐르는 파르나소스 산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하는 듯하다. 오렌지색 원은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처럼 보인다.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음악에 대한 예찬인 동시에 근심과 걱정이 없는 이상향 (Arcadia)을 표현한 그림이다. 자신만의 상상의 작은 정원을 알뜰살뜰 가꾸듯 주로 작은 그림을 그렸던 클레에게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비교적 큰 그림이다. 바우하우스를 떠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가 된 후 그는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자신의 작업에 좀 더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에는 그런 안정감이 묻어난다. 시인의 심성을 지닌 음악을 사랑한 화가 클레는 마침내 파르나소스 산에 도달한 것이다.
클레에게 예술작품은 현실을 넘어선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1920년에 발표된 논문 ‘창조에 관한 신조’에서 클레는 “예술은 가시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가시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예술은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적 사고를 가시적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렇듯 클레의 작품들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조형요소와 만나 씨실 날실을 직조하듯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몽환과 논리, 시와 수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유아적인 치기와 세련미 같은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존한다. (참고: 박소영, 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델피
아이호반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마을 전체를 바라보고 단체사진을 기념으로 남긴 우리 일행은 드디어 델피로 향했다.

.델피 (델포이) 개관
델피 (Delphi) 혹은 델포이 (Delphoi)는 아테네 북서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2457미터의 파르나소스 산의 남쪽 경사면, 코린토스만을 바라보는 양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화 속에서 이곳은 제우스가 동서 세상의 끝자락에서 반대방향으로 풀어놓은 두 마리의 독수리가 만난 장소로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졌고, 이러한 까닭에 지구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팔로스 (Omphals)’라는 커다란 돌이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동서축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터키의 앙카라까지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를 남북의 축으로 본다면 델피가 실제로 지리적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자리 잡은 파르나소스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신전들의 배경을 이루는 가파른 절벽을 ‘파이드리아데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빛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 절벽은 다시 둘로 나뉘어 서쪽 절벽은 장밋빛 바위라는 뜻의 ‘로디니’, 동쪽절벽은 불타는 바위라는 뜻의 ‘플레부코스’라고 한다. 남쪽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두 절벽에 반사되어 마치 조명처럼 신전을 밝히고 있어서 ‘빛의 신’ 아폴론의 성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하늘과 땅 지하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우주의 축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분노한 제우스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홍수를 보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의인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가 방주를 타고 표류하다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산의 정상이었으니, 이는 곧 하늘로 통하는 길을 의미한다. 또한 플레부코스 절벽의 한 구석에 위치한 ‘카스탈리아 샘은’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카스탈리아 샘의 물은 두 절벽 사이에서 흐르는 계곡수와 합쳐져서 산 아래쪽 계곡으로 이어지는데, 이 물이야말로 지난 수천 년간 델피의 드넓은 올리브 숲을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인 초기 미케네 시대에도 델피는 원시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신성한 땅이었다. 그 무렵 델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는 성역으로서 신탁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후로 테미스, 데메테르, 포세이돈 신을 모시다가 미케네 시대 말엽에 이르러 아폴론이 신탁의 수호자가 되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차츰 명성을 얻으면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고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탁소가 되었다.
델피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성역주변의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탁한 인보동맹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나, 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쇠락의 조짐을 보이다가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성역의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추었으나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여 마을의 서쪽을 재건하고 델피라 명명하였다.
.아폴론과 델피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자 아르테미스와 남매인 아폰론은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올림포스를 떠나 델피로 왔을 때 이 땅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인 거대한 뱀 피톤의 성지였다. 델피가 신탁을 내리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여긴 아폴론은 왕뱀 피톤을 죽인 뒤, 이곳을 차지했는데 그를 모시는 여사제는 피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티아는 피톤이라는 왕뱁에서 얻어진 말이다.
가이아의 아들인 키클로페스 3형제를 죽이는 불경죄를 저지른 아폴론은 테살리아 지방의 템페 강에 가서 몸을 씻고 정죄를 한 뒤에 다시 이곳에 돌아와, 카스탈리아 샘가에 템페 강의 월계수를 옮겨 심었는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델피에 신탁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은 정화의식을 거쳐야 성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땅을 확보한 아폴론은 추종자들을 찾다가 크레타에서 오는 배를 보고 돌고래의 모습으로 그 배에 뛰어 올라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선원들을 신도로 삼아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때부터 그는 ‘델피니오스’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성지 또한 ‘델피’라 명명되었다. 하지만 아폴론의 이런 행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델피의 지명의 유래를 자궁이라는 뜻을 지닌 ‘델피스 delphys’라는 말에서 찾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인정을 받고 있다.

.신성한 길
‘신성한 길’이란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봉헌물과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대부분 야만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승리, 또는 도시국가간의 전쟁 이후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폴론 성역에 봉헌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델피는 신탁 의뢰인들이 가져온 봉헌물들을 팔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시민들은 사치와 풍요를 누렸다. 지금은 황량한 유적 곳곳에는 각 도시국가에서 세운 보물창고와 금은으로 만든 각종 기념비 등이 즐비했고 특히 아폴론 신전의 입구에는 각국의 봉헌물들이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오늘날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 앞에 있는 사두마차 조각상은 원래 로도스에서 델피에 바친 봉헌물이었으며,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청동 기둥도 이곳에 서있던 기념비였다.
신전 벽의 돌과 바위에는 “가장 정확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한계를 지켜라”, “오만함을 증오하라”, “지나침이 없게 하라” 등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아테네의 보물창고와 시빌레 바위
아테네인들이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기 위해 바친 보물창고로서, 수많은 도시국가의 보고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 창고는 기원전 500년경 도리아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2개의 기둥 및 다양한 부조장식물과 더불어 벽에는 갖가지 비문들이 남아있다. 1904-1906년에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델피 성역 중 가장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

.아폴론 신전
델피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아폴론의 신탁이 행해졌던 곳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이곳에 지어진 신전은 건설비를 봉납한 아테네 귀족 가문의 이름을 따서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의 신전이라 명명되었으며, 가로 6개, 세로 15개의 도리아식 기둥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373년 지진으로 파괴되자 기원전 330년 다시 재건되었지만, 이마저 다시 지진으로 무너져 버려 현재 기둥 한두 개와 건물을 지지하는 축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바위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어 쌓은 축대의 표면에는 300여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에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은 문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전의 내부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되는데 동쪽에는 포세이돈을 위한 제단, 제우스 동상, 아폴론 동상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의 제단에서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신탁은 신전의 서쪽 안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발굴당시 파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아폴론신전 벽에는 “너 자신을 알라”, “너무 지나치지 않게”, “서약과 손해는 가까이 있다” 등의 금언이 있다.

.델피의 신탁과정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소 입구의 카스탈리아 샘에서 몸을 씻어 심신을 정화하고 적당한 희생동물을 골라 봉헌물로 바친 뒤 신전으로 올라가 신관에게 신탁을 받으러 온 이유를 말한다. 신탁의 순서는 추첨으로 결정되는데 델피에 봉헌물을 많이 바쳤거나 도움을 준 도시국가의 시민은 우선적으로 신탁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신탁을 받으러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특권이었으며 몇 달씩 델피에 머무르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신탁 의뢰인의 사연을 들은 신관은 신전에서 가장 깊숙한 지하방에 있는 여사제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하게 되는데, 오직 피티아 만이 지하방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관은 방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피티아는 카스탈리아 샘물을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은 뒤 신성한 삼갇대에서 앉아 지하의 갈라진 바위 틈에서 나온 증기를 들이마신다. 그리하여 환각 상태가 된 피티아가 신의 계시를 받아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 신관이 이를 운문의 형태로 받아 적어서 의뢰인에게 전달하였다. 델피 신탁이 애매모호함으로 악명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았던 까닭은 인간이 신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고대인들의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탁은 인간이 해석하기에 따라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유명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듣고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지만, 오히려 그 길이 자신이 태어난 테바이로 향하는 길임을 알지 못했기에 결국 신탁이 예언한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아폴론 신전의 양쪽 대문 기둥 중 하나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을 지닌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이라는 문구는 신탁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우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있다. 다른 기둥에는 ‘아무 것도 지나치지 말아라’는 뜻을 지닌 ‘메덴 아간(meden aga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플라타이아이 삼각 청동 기둥
페르시아 전쟁 중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의 방패를 녹여 기둥으로 만들어 아폴론 신에게 바친 승리의 기념비이다.
‘델피 삼각기둥’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이 기둥은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크게 승리한 플라타이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 무기들을 녹여서 만들어 델포이에 바쳤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약탈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가 히포드롬 광장에 세운 것이다.
즉, 현재 델포이에 있는 청동 기둥은 복제품이다.
원형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꽈리를 틀어서 중앙의 기둥을 이루고 그 위로 세 개의 머리가 황금으로 된 세발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몸체에는 이 전투에 참가했던 31개 도시국가명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델피가 쇠락하자 로도스에서 봉헌한 사두마차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1204년 십자군에 의해 머리 윗부분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 가면 꽈리를 튼 몸체만 남아있는 델피의 청동기둥을 볼 수 있다.
이스탄불에 있는 기둥이나 머리가 없는데, 오스만 제국의 폴란드 대사가 술에 취해 히포드롬을 돌아다니다 이 뱀 기둥을 보고 괴물로 착각해 칼을 뽑아 목을 잘랐다고 한다. 뱀의 머리 일부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를 반영했는지 델포이에 있는 기둥도 머리가 없다

.델피 원형극장과 스타디온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총 35열의 관람석에서 약 5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다. 극장의 정상에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서쪽 출구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나온다. 이는 기원전 5세기에 처음 건설되었으나 지금의 모습은 2세기에 개축된 것으로 기단부만 남아있는 동쪽출입구는 본래 3개의 아치형태로 되어 있었다. 약 7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고대에는 4년마다 이곳에서 피티아 경기가 개최되었다.
.김나시온 (Gymnasion)
아폴론 성역과 아테나 여신의 성역인 마르마리아 사이에 위치한 김나시온은 기원전 4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 로마시대까지 보수가 계속되었다. 델피의 김나시온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층부는 스토아 및 달리기 훈련을 위한 곳이었고, 하층에는 체육관, 수영장, 목욕탕 등이 있었다. 이곳은 특히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비문에 따르면 철학가, 시인, 천문학자와 같은 지식인들도 이곳에 와서 젊은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델피의 김나시온은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한 신체의 단련 뿐 아니라 지적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피티아 경기
아폴론 신을 기리기 위한 경기로 처음에는 각 도시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음악과 시를 놓고 경합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레슬링, 복싱, 달리기, 경마 등의 운동 경기도 추가 되었다. 우승자는 월계관을 받았으며 성역 내에 자신의 상을 세울 권리를 얻었다. 이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수여되었다.
.아테나 프로나이아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성역으로 아폴론의 성역보다 아래쪽 산기슭의 올리브 숲에 둘러 싸여 있다. 이 신전은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라고 불리는데, 프로나이아는 ‘신전 앞에’라는 뜻으로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입구의 정면에는 아테나 여신의 제단이 있고, 2개의 보물창고, 톨로스라고 불리는 원형 신전, 후대에 지어진 아테나 신전 등이 모여 있다. 그 중 톨로스는 직경 13, 5미터의 둥근 대리석 구조로 된 도리아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4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스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진 이 톨로스 신전에는 총 20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현재 3개만 재건되어 있으며 정확한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신전 뒤편에 놓인 커다란 바위들은 페르시아 군이 이 성역을 침범하려 했을 때 스스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져서 병사들을 덮쳤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Delphi Archaeological Museum)
델피 유적지 방문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유적지 옆에 위치한 델피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델피 유적 입구에 있는 델피 고고학 박물관 (Delphi Archaeological Museum)은 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1980년에 완공된 이 박물관에는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의 배꼽을 의미하는 옴팔로스이다. 옴팔로스는 계란형 구체 표면에 탯줄을 감아놓은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지구상의 신성한 장소를 표시한 것이라 추측할 뿐, 정확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물관의 유물들은 주로 연대순으로 10여개의 방으로 나눠 전시되어 있었다. 주요 유물들은 기원전 1500년 전 미케네 문명시대부터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문명시대, 기원전 7-8세기 청동 유물 전시실, 기원전 600년경 펠로폰네스의 아르고스에서 만들어진 델포이의 청년 나체상과 시코니안 봉헌창고에 있던 메도페가 있다. 그리고 은제 황소상과 금과 상아로 만든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조강, 낙소스 스핑크스상과 시피노스 봉헌창고 또는 보물창고의 프리즈, 아폴론 신전의 파사드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어 성스러운 길에 있는 아테네인의 봉헌창고에서 나온 메토페와 페디멘트의 조각들,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으며, 후기 고대와 전기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들로는 아테네인들이 기증한 델피의 무희들과 기원전 4세기 테쌀리 지방의 여주였던 아오코스가 기증한 봉헌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헬레니즘가 로마시대의 유물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미모의 비티니아 사람인 안티노우스의 조각상, 2세기 델피를 정복했던 로마 장군의 두상, 기원전 5세기경 만들어진 금엄한 스타일의 마차를 모는 사람의 마부상 (아마도 마차와 말 등이 포함된 큰 조각의 일부) 등이 있다. 마지막 방에는 주로 성역의 마지막 시대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리스 철학자 프루타르크와 허큘리스로 생각되는 두상 등의 대리석 두상이 있다.

메테오라로 가던중 만난 만난 테르모필레스 레오니다스 청동상
레오니다스 1세 (Λεωνίδας ο Α’)는 고대 그리스어로 ‘사자의 아들’이란 뜻으로, 아길라드 왕조 출신의 제17대 스파르타 국왕이자 헤라클레스의 후예로 추앙받던 아낙산드리다스 2세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레오니다스의 출생 날짜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기원전 480년 8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하게 확인된 기록이다.
스파르타 연구자이자 역사가인 Paul Cartledge는 레오니다스의 출생 날짜를 기원전 540년으로 좁혔다.
만약 그의 가정이 맞다고 추론한다면 레오니다스는 기원전 540년 어느 날에 태어났을 것이다.
기원전 489년 또는 기원전 488년경 레오니다스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클레오메네스 1세의 뒤를 이어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클레오메네스의 딸인 고르고와 결혼하였다.
그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으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져 후세에까지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자 레오니다스는 뒤를 이을 아들 후손이 있는 300명의 최정예 스파르타 병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방어전을 폈다.
그는 다른 그리스 연합군 7,000여 명과 함께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아 2일 동안 페르시아 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주면서 방어했으나 한 그리스인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페르시아에게 테르모필레를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주었고 이를 우회한 페르시아 정예부대에 맞서 다른 그리스와 노예병들을 모두 남쪽으로 후퇴시키고 자신과 스파르타의 300명의 용사만 남아 장렬히 전사했다(스파르타인 300명, 테베 400명, 모 국가 700명).
이 이야기는 수많은 유럽문화권의 영웅이야기의 모범이 되었고 스파르타의 용맹성을 아직까지도 후세에 알렸다.




메테오라, 정교회 아이세이도리수녀원
메테오라 인근에서 우리 일행은 정교회 아이세이도리수녀원을 방문했다. 은둔의 수도생활을 하기 위한 최적의 자연조건, “위를 생각하고 땅의 것을 멀리하라”는 성경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 최대한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선택한 이곳은 이런 입지 때문인지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을 휩쓸고 갔을 때에도 종교의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14세기쯤 최초의 수도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16세기에 여러 번 증축 과정을 거치는데 최전성기에는 24개 수도원이 밀집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메가로 메테오른 수도원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가장 큰 수도원), 루사노 수도원, 발람 수도원, 스테파니 수녀원 등 6개 정도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아이세이도리 수녀원 내부는 성경 (신약) 이야기 벽화로 가득한데,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이라고 한다.



수녀원 방문 후 우리 일행은 호텔 석식을 마치고 휴식시간을 가졌다. 메테오라 인근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간밤에 묵은 파트라스 (안드레 순교지)에서 델피로 향하던중 리오다리 근처(레판토 해전이 있었던 곳)에서 어려 꾸었던 꿈속에서 놀았던 (헤매던?) 척박한 돌산을 보았다.
이런 기시감 (旣視感, 프: Déjà Vu, 데자뷔)을 살며 여러번 느꼈다. 청소년기에, 호주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리오다리 근처에서 그런 느낌이 강했다. 이 여행은 오도록 계획되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피의 기운이 나를 부르는 것인가!
델피의 석산들은 웅장하고도 그 척박함은 가혹해 보였다.
델피박물관에서 여러 조형물들을 보며 현대 예술품으로도 손색없음에 놀랐다.
한편 신탁은 해석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지나는 길에 들른 스파르타 레오니다스왕의 청동상에서 스파르타의 기상을 생각했다.

메테오라 방문 후 터키로
10월 28일, 이른 아침 호텔조식 후 기암절벽에 세워진 천상의 수도원들이 위치한 메테오라로 이동했다. 특히 이곳은 007 영화 시리즈 중 하나인 “For Your Eyes Only (1981)”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나왔으며, 시나 이스턴이 ost를 담당했다. 오늘은 메테오라 방문 후 그리스 북쪽을 지난 터키로 이동한다.
오늘 일정은 메테오라를 방문하고 올림푸스산을 지나 데살로니키, 드라마 인근 카발라에서 중식, 이어 알렉산드로폴리를 거쳐 그리스-터키 국경에서 출•입국 심사, 안작부대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의 대 희생지인 겔리볼루를 거쳐 차낙칼레해협을 페리로 건너 아이발릭 숙소에 도착하는 장거리 일정이다.


메테오라 (Meteora) 수도원공동체
10월 28일, 새벽부터 메테오라 (Meteora) 수도원공동체를 순례했다. 산으로 산으로 오르는 버스는 이레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위에서 바라본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공중에 달려있는 듯 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에서 아토스 산 다음으로 정교회 큰 수도원이 많이 밀집한 지역이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칼람바카이다. 여러 수도원이 자연 사암 바위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위치상 중부 그리스의 핀도스 산맥과 페네이오스 강 근처의 테살리아 평야의 북서쪽 끝이다.
메테오라에는 여섯 수도원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메테오라 (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이다. 이 수도원들은 독특한 예술 작품이며, 어떤 장소를 수행, 명상, 기도의 장소로 만든 건축적 변형 중 가장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메테오라는 뛰어난 수도원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또한 14세기와 15세기에 토스카나 (Tuscany) 지방과 같은 서구 세계와 동방정교회 (Orthodox Church)에서 초기 기독교의 이상적인 은둔자 생활을 회복했을 때 수도원 공동체의 모습도 보여 준다.
메테오라의 거주지는 길이 없고 접근도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 있으며,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도 지금까지 굳건히 버텨 왔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면서 취약해졌다. 발람(Varlaam) 수도원이 자리한 계곡 절벽에서 용감한 순례자들을 수직으로 373m나 올리는 데 사용되었던 그물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수도원들은 원래 삼각주였던 메테오라의 바위 봉우리 위에 지어졌는데 이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 (Thessalian)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 (Peneas) 계곡과 칼람바카 (Kalambaka)라는 작은 도시에 400m 이상 우뚝 솟아 있다. 이 봉우리들은 화학적 분석을 통해 약 60,000,000년 전인 제3기 (Tertiary period)에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난 후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테오라는 사암 (sandstone)과 역암 (conglomerate)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잔괴 (residual masses)이다. 지진 활동으로 단층선과 균열 (fissure)의 수가 늘어나 형체가 일정하지 않은 덩어리로 절단되면서 개별적으로 가파른 암벽이 생겼다.
은둔자와 수행자들은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12세기 말에는 파나기아 두피아니 (Panaghia Doupiani)라고 하는 공주수도단지 (skete, 수도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마을)와 작은 교회가 ‘하늘의 기둥’에 있는 한 기슭에 들어섰는데, 이곳에는 이미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조직적으로 건축되었고, 15세기 말에는 그 수가 24개에 달했다. 수도원은 17세기까지 계속 번성했다. 현재는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Aghios Stephanos) 수도원, 아기아 트리아스 (Aghia Trias) 수도원, 발람 수도원, 메테오론 (Meteoron) 수도원 네 곳에서만 종교 공동체를 수용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언덕과 강변 계곡에 버즘나무 (Platanus orientalis) 숲이 있으며, 코니스코스 (Koniskos)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고유종인 수레국화 속의 두 종이 서식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보호 지역은 1979년에 만들어진 트리칼라 (Trikala) 휴양림 (면적 28㏊)으로서 알레포소나무 (Pinus halepensis)와 사이프러스 (Cupressus sempervirens)가 식재되어 있다. 잠재적인 식생은 초지중해 (supra-Mediterranean) 식생형인데, 참나무속 (Quercus) 식물과 새우나무속 (Ostrya) 식물, 700m 이상의 고도에 있는 유럽너도밤나무 (Fagus sylvatica) 숲이 극상을 이룬다.







.유네스코 등재
거의 접근하기 어려운 사암 (sandstone) 봉우리로 이루어져, ‘하늘의 기둥 (columns of the sky)’ 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엄청난 난관에도 불구하고 15세기에 이상적인 은둔자의 모습을 보여 주며 수도원 24개를 세웠다. 이곳에 있는 16세기 프레스코화를 보면 후기 비잔틴 회화의 발전상을 알 수 있다.
유네스코 등재기준은 I, II, IV, V, VII항에 해당된다.
.기준 (ⅰ) : ‘공중에 떠 있는’ 이 수도원들은 독특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어떤 장소를 수행, 명상, 기도의 장소로 변모시킨 건축적 변형 중 가장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준 (ⅱ) : 크레타 섬 출신의 테오파네스(Theophanes)가 1527년에 제작한 이곳의 프레스코화들은 도상학(iconographic)의 참고 자료로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
.기준 (ⅳ) : 메테오라는 수도원 건축 양식의 뛰어난 예이다. 또한 14세기와 15세기에 토스카나 지방과 같은 서구 세계와 동방정교회에서 초기 기독교의 이상적인 은둔자 생활을 회복했을 때 수도원 공동체의 모습도 보여 주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단계를 나타낸다.
.기준 (ⅴ) : 메테오라의 거주지는 길이 없고 접근도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 지어졌으며,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도 지금까지 굳건히 버텨 왔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 취약해졌다. 발람 수도원이 자리한 계곡 절벽에서 용감한 순례자들을 수직으로 373m나 감아올리는 데 사용되었던 그물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스 메테오라에서 터키로 향하며 지난 지역들
메테오라 수도원공동체 방문후 우리 일행은 드디어 터키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올림푸스산을 지나 데살로니키, 드라마 인근 카발라에서 중식, 이어 알렉산드로폴리를 거쳐 그리스-터키 국경에서 출•입국 심사, 안작부대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의 대 희생지인 겔리볼루를 거쳐 차낙칼레해협을 페리로 건너 아이발릭 숙소에 도착하는 장거리 일정이다.

.올림푸스산
올림포스산 (Όλυμπος)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마케도니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리스 제2도시인 테살로니키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봉인 미티카스 (Μύτικας)의 높이는 2,919m로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스콜리오는 2,912m이다.
올림포스 산 기슭에 위치한 리토코로 (신들의 도시란 뜻이다)에서 등산로가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의 무대로 유명하다.

.데살로니키
테살로니키 (Θεσσαλονίκη, 또는 테살로니카, 살로니카)는 아테네 다음으로 큰 그리스 제2의 도시이자 그리스령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이 도시는 명예 지명으로 그리스의 ‘공동 수도’ (Συμπρωτεύουσα)라고 일컫기도 하며, 비잔티움 제국 때에는 ‘공동 황제 수도’ (συμβασιλεύουσα)라 일컫기도 하였다.
기원전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드로스가 건설한 이 도시는 그의 부인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의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 왕국이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하자, 테살로니키는 로마 속주였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고 그때부터 1913년까지 2천년 이상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드라마
드라마 (Δράμα)는 그리스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에 속하는 현인 드라마 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면적은 833.0km2, 높이는 115m이다.
드라마라는 도시를 지나며 그 어원을 생각해 보았다.
현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드라마’라는 용어는 ‘행동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그리스어 ‘dran’과 ‘결과’를 뜻하는 명사 어미 ‘ma’의 합성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드라마는 행동한 결과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드라마는 극장에서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의 근원으로 드라마는 인쇄된 책 안에서 주로 대화 (dialogue) 배우가 말하게 되는 연속적으로 배열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 위에서 주고받는 대화는 종종 우리가 친구들과 평소에 나누는 대화와 비슷하게 여겨진다. 셰익스피어의 무운시나 그리스 비극의 복합적인 운문시로 보건데, 연극의 대화는 보다 형식적이다.
그러나 무대에서 나누는 대화는 극작가가 창조하고 배우가 말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대화와 크게 구별된다. ‘공연 가능성’ (Perfomability)은 극작가의 말과 배우의 대사를 연결시켜 준다.
그리스에서는 1년에 한두 번 국민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신을 위한 축제를 벌였는데 이때 드로메논이라는 연극을 상연했다. 이 말이 변해서 지금의 드라마가 된 것이며 드라마는 연속극이나 연극 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떤 극적인 사건”을 가리켜 드라마라고도 한다.
고대 희랍에서는 주신 ‘바카스’의 제례 때 행사의 하나로 희극 또는 비극을 경연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트래지디 (비극), 코메디 (희극) 등 갖가지 연극 용어가 전해지고 있으며 드라마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연출되는 것’이란 뜻이다. 지금은 연극 전반을 가리키지만, 본래는 종교적 사회적 리크리에이션으로 부족의 기분을 일신하고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카발라
카발라 (Καβάλα)는 그리스 북부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에 속하는 현인 카발라 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면적은 112.6km2, 높이는 0 ~ 53m이다.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이며 테살로니키에서 동쪽으로 160km, 드라마에서 남쪽으로 37km, 크산티에서 서쪽으로 5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당시에는 드라베스쿠스 (Δράβησκος, Drabescus)라고 부르기도 했다. 1371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고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이후에는 불가리아에 편입되었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이후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그리스에 넘어갔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불가리아가 이 곳을 점령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폴리
알렉산드루폴리 (Αλεξανδρούπολη)는 그리스 북동부 서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에 속하는 현인 에브로스 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면적은 642.245km2이다. 그리스 북동부의 주요한 항구 도시다.
오스만 제국 시대인 19세기부터 데데아아치 (Dedeağaç, Δεδεαγάτς)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도시이다. 데데아아치는 튀르키예어로 “할아버지의 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데데’ (dede)는 터키어로 “할아버지”를, ‘아아치’ (ağaç)는 “나무”를 뜻한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시기에 러시아 제국 군대에 점령되면서 러시아 군인들이 이주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군대를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위한 차원에서 도시 확장 계획을 실시했지만 종전 이후에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교역 중심지에 불과했지만 철도역 건설과 함께 파샤가 관할하는 행정구로 승격되었다.
1912년 11월 8일 제1차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와 동맹을 맺은 불가리아가 데데아아치를 점령했지만 1913년 7월 11일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와 적대 관계에 있던 그리스에 점령되고 만다. 그리스의 데데아아치 점령은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고 1913년 8월 10일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면서 데데아아치는 서트라키아 지방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불가리아에 편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패한 불가리아는 1919년 11월 27일에 체결된 뇌이 조약에 따라 서트라키아 지방을 그리스에 넘겨주는 대신 에게 해를 경유하는 데데아아치 항 사용권을 계속 소유했다. 1920년 5월 14일 불가리아 위병과 그리스 위병 사이에 교대식이 열렸으며 도시 이름 또한 그리스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국왕에서 유래된 알렉산드루폴리로 바뀌게 된다.

터키 입국
우리 일행은 오늘 메테오라 방문 후 그리스 북쪽 길로 올림푸스산을 지나 데살로니키, 드라마 인근 카발라에서 중식. 이어 알렉산드로폴리를 거쳐 그리스-터키 국경에서 출•입국 심사 완료해 터키에 들어섰다.
그리스 출국과 터키 입국심사는 버스에 대기해 램덤으로 검문을 받아야 하기에 버스 안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줄은 깊었다. 하지만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리스 출국심사를 마칠 즈음에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분이 당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인사했다. 참 친절하게 안내했는데 아쉬웠다. 헤어짐은 늘 그런 것 같다.
터키 입국 심사를 마치니 터키 현지 가이드분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장거리로 고생했다며, 하지만 오늘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졌다며 어서 호텔로 가서 쉬자고 길을 재촉했다.
.안작부대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의 대 희생지 겔리볼루 / 갈리폴리
터키에 들어서 가장 먼저 의미있는 장소로 겔리볼루 반도를 만났다.
겔리볼루 반도 (튀: Gelibolu Yarımadası) 또는 갈리폴리 반도는 터키의 유럽 지역과 동트라키아에 위치한 반도로, 서쪽으로는 에게 해, 동쪽으로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접한다. 갈리폴리는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도시”를 뜻하는 단어인 “칼리폴리스” (Καλλίπολις, Kallipolis)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갈리폴리 전투 또는 다르다넬스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 반도에서 벌인 일련의 상륙 전투이다.
연합군은 1915년 2월 19일과 2월 25일, 3월 25일에 각각 다르다넬스 해협의 터키군 포대를 포격했으나 터키군의 반격과 기뢰 등으로 인해 3척의 함대가 격침되고, 3척이 대파되었다.
이로 인해 총책임자 윈스턴 처칠이 총관직에서 물러나고 영국 해군의 피셔 제독도 사임했다. 이에 연합군은 새로 임명된 영국의 I. 해밀턴 장군의 지휘 아래에 4월 25일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주축으로 한 영연방 및 프랑스군 7만 명을 갈리폴리에 상륙시켰다.
하지만 독일 제국의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휘하 터키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또 터키군의 병력을 잘못 파악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병사가 8,587명이나 전사하고 1만 9367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연합군 총사상자는 25만 명에 달했으며 터키군도 2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과정에서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했던 물리학자 헨리 모즐리도 전사했다.
결국 상륙 작전의 실패로 연합군은 6개월 뒤에 갈리폴리에서 철수했다.
이 전쟁에 참여한 호주-뉴질랜드 군단을 앤잭 군단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ANZAC)이라고 부르는데, 1915년 4월 25일 반도에 상륙했지만 작전을 지휘하던 영국 장군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많은 병력을 잃었고, 영국이 결국 그 작전을 실패로 결론지은 1916년에 철수했다. 이후 갈리폴리반도에 상륙한 날을 기념하는 ‘앤잭의 날’은 호주에서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 되었다.

.차낙칼레해협
우리 일행은 겔리볼루를 지나 차낙칼레해협을 페리로 건넜다.
차나칼레 (Çanakkale)는 터키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차나칼레 주의 주도다. 차낙 (Çanak)은 그릇, 칼레 (kale)는 성 (城)이다.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있고 다르다넬스 해협과 접한다. 북쪽에 있는 유럽 지역을 횡단하는 페리가 운행되며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 남아 있다.
터키 서부의 도시 차낙칼레는 부르사에서 서쪽으로 180km, 겔리볼루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진 해안도시로 인구는 30만 여명, 차낙칼레도의 주도이다. 다르다넬스 해협 최단 지점의 아시아 방면에 자리한 도시로, 1452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세워진 성채에서 기원한다. 1차 대전 시기에는 갈리폴리 전투의 주요 전장이었다. 북쪽 4km 지점 나라 칼레시가 있는 곶은 과거 미시아의 도시 아비도스가 있던 곳이다.
동북쪽 25km 지점에 차나칼레 1915 대교가 공사중이라 하니 개통하면 유럽 방면과의 교통이 활성화될 것이다. 2022년경 개통예정이라고 한다.
차낙칼레의 주요 볼거리로 시내의 해양 군사 박물관 & 치멘리크 성채와 해협 건너편의 킬리트 바히르 성채가 있다. 시가지 동남쪽에 차낙칼레 공항이 자리한다. 차낙칼레 항구에서는 해협 건너편 킬리트바히르와 에게해의 몇 안 되는 터키령 도서인 괵체아다 (임브로스) 섬으로 향하는 여객선이 운항한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갈리폴리 전투가 이곳 갈리폴리반도에서 벌어졌던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터키인들은 여전히 갈리폴리라는 지명을 매우 싫어하는데 이는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워터 디바이너’ (The Water Diviner, 2014년작)에서도 영국군의 휴즈 중령과 터키군의 핫산 소령과의 대화에서 휴즈 중령은 갈리폴리라고 하고, 핫산 소령이 차낙칼레라고 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묘사된다.
북쪽에 있는 유럽 지역을 횡단하는 페리가 운행되며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 남아 있다.

.트로이
트로이아 (Trōia)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언급되는 지명이다. 호메로스는 Τρωία 외에 이오니아방언 Τρωίη를 더러 쓰기도 하며 혹은 시운 때문에 Τρωες라고 쓰기도 한다. 호메로스는 자주 트로이아를 일리오스 (Ίλιος 혹은 드물게 Ίλιον)라고 부르기도하며 라틴어로는 일리룸 (Ilium)이라고 쓰인다. 영어식 발음을 따서 트로이 (Troy)라고도 하며, 표준어도 트로이로 등재되어 있다.
트로이아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트로이아의 지리적 위치에 관해서 고고학적으로 관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고고학을 취미로 하는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이 역시 고고학을 취미로 일삼는 영국의 프랭크 캘버트가 내세운 주장에 따라 1871년 현재의 터키의 북동쪽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히사를리크 (Hisarlik) 구릉에서 놀라운 유적물을 발굴한 것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의 연대기 작가들은 트로이아 전쟁의 시기를 기원전 12,13,14세기로 다양하게 잡고 있다. 에라스토테네스는 기원전 1184년으로,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1250년으로, 사모스의 두리스는 기원전 1334년으로 잡고 있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아를 트로이아 7기 유적에 비정하고 있다.
일리아스에서 아카이아인들은 그들의 캠프를 (오늘날 카라멘데레스강으로 알려진) 스카만더강 입구에 설치하고 타고온 배는 해변에 올려놓았다. 트로이아 시는 트로이아 전쟁의 전투가 일어난 스카만더강의 평원 건너편에 있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이 고대 도시는 오늘날의 해안선으로부터 5km 떨어진 지점에 있지만 약 3000년 전의 고대 스카만더강 하구는 내륙 멀리 있는 큰 만으로 흘러나갔다. 이 만은 천연 항구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지금은 고대 이래로 계속된 퇴적물로 인하여 막혀버렸다. 최근 지리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대 트로이아의 해안선이 원래 어떠했는지 재구성해 본 바,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아의 지형이 거의 정확했음이 확인되었다.

.아이발릭 / 아이발르크 (Ayvalık)
우리 일행은 오늘 하루동한 장거리를 이동해 늦은 밤에 되어서가 숙소가 위치한 아이발르크 (Ayvalık)에 도착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호텔 석식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 12시 전에 숙소에 들 수 있었다.
아이발르크는 터키 발리케시르주의 도시이다.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에게 해 연안에 있는 해변 도시로 도시 중심부와 아이발리크 군도의 쿤다 섬이 연결되어 있다. 불과 20km 근해에 그리스령 레스보스 섬과 마주하고 있다. 에게해의 주요 관광 도시로, 평상시 인구는 7만이지만 여름 성수기 철이면 인구의 반에 달하는 여행객들이 몰려와 활기가 돈다. 본래 그리스어로 키도니에스 (Κυδωνίες)라 불리던 도시에는 1922년까지 그리스계 기독교도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이들은 추방되고 그리스 본토의 무슬림들로 대체되었다. 다만 후자 집단 역시 대부분 그리스어 화자였음으로 여전히 그리스 언어나 문화적 요소가 남아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출신 인물로 그리스의 작가 엘리아스 베네지스, 화가 포티스 콘토글루 등이 있다.
시내에는 모스크로 전환된 성당을 비롯한 옛 건물이 즐비하며, 연륙교로 이어진 준다 섬에는 크고 작은 호텔이 즐비하다. 항구에는 미틸리니와의 연락선이 운행된다. 철도역은 없으나 발르케시르 코자 세이트 공항과 불과 35km 떨어져 있다. 인근 유적으로 서북쪽 50km 지점의 아소스가 있다. 인근 농지에서는 올리브를 재배하며, 양질의 올리브유를 생산한다. 1998년에는 아이발르크 국제 음악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세계 각지의 음악 지망생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준다 섬에는 하버드 대학교와 터키의 코치 대학교가 합작한 하버드-코치 대학교 오스만 & 튀르크 여름 집중 학교가 세워졌다.
오늘까지 그리스 6일차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그리스 국경을 넘어 터키로 무사히 도착했다. 터키에서 차낙칼레 해협을 페리로 넘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안작연합군이 큰 희생을 입은 갈리폴리 전투지 해안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인근에 ‘트로이’로 유명한 아이발릭에 도착해 터키에서의 첫날을 보낸다.
오늘 하룻동안 그리스 메테오라 방문 후 그리스 북쪽 올림푸스산을 지나 데살로니키, 드라마 인근 카발라에서 중식 후 이어 알렉산드로폴리를 거쳐 그리스-터키 국경에서 출•입국 심사 완료, 안작부대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의 대 희생지인 겔리볼루를 거쳐 차낙칼레해협을 페리로 건너 아이발릭 숙소에 도착하는 장거리를 이동한 것이다.
아이발릭에 위치한 호텔에 묵으며 오늘을 돌아본다.
새벽녘에 그리스 메테오라 언덕에 올라 수도원공동체들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그들을 높은 바위산 위에 수도원공동체를 이루게 한 그 시대가 불행인지 복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전통을 이어가는 현대 수도사들의 마음도 정진인지 회피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둘러보니 빈 바위산이 몇 곳 있었는데 누군가 “저기 빈바위산에도 수도원을 만들어 보자”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대 문명의 이기를 맛본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운둔이냐 개방이냐 쉽지않다.
바위산 메떼오라 수도원들과 또 다르게 앞으로 터키의 지하신앙공동체인 데린쿠유에서 느낄 그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터키의 에베소와 밀레토스
우리 일행은 어제까지 그리스 일정을 마치고 밤에 터키에 도착, 다르다넬스 해협 (차낙칼레 보아즈)을 건너 아이발릭에서 일박했다.
터키에서의 첫날은 트로이 인근 아이발릭에서 묵었다. 트로이 유적은 호메로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의 전승을 믿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로 그 모급이 드러난 고대 도시다. 10월 29일, 아침 일찍 숙소인근을 산책하며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헬레네, 목마, 오데세우스 등을 생각했다.
트로이 유적은 시대순 9개로 나뉘는데 1도시 (BC3000-청동기), 2도시 (BC2800-최초 번영기), 3-4도시 (BC2200-이민족 침입), 5도시 (BC1800-미케네 교류기), 6도시 (BC1280-BC1200), 7도시 (BC1200-폐허 방치기), 8도시 (BC700-알렉산더기), 9도시 (BC85-5C말)이다. 슐리만은 트로이네 이어 미케네도 발굴해 호메로스의 세계를 입증했다.
10월 29일, 오늘 일정은 아이발릭 숙소에서 조식 후 이즈미르를 지나 에베소로 이동, 중식 후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 누가의 무덤, 하드리아누스 신전, 셀수스 도서관, 원형대극장, 아카디아대로 등 방문, 이어 밀레투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원형경기장, 아폴론 신전 등을 방문 후 파묵칼레 숙소에서 묵는 일정이다. 오늘 일정도 빼곡하다.

이즈미르 (Izmir)
우리 일행은 본격적인 터키 일정으로 에베소를 향하며 이즈미르를 지났다. 성경에는 서머나로 알려졌다.
.이즈미르 개관
‘이즈미르’ (İzmir)는 터키의 3대 도시이며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이스탄불 다음으로 큰 항구이다. 역사적으로는 ‘스미르나’라고 불렸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스미르나’의 현대식 이름).
이즈미르는 에게 해의 이즈미르 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 주의 주도이다. 터키 제1의 수출 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으며,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철도 종점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과는 국내선 항공편이 통하고 있으며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항공 노선도 운행하고 있다.
도시는 11개의 구로 나뉜다 (발초바, 보르노바, 부자, 힐랄, 가지에미르, 귀젤바흐체, 카르시야카, 코나크, 날르데레). 2018년 전체 인구가 4,320,519명이며 그중 2,947,000명이 도시에 거주한다. 전체 면적은 855km²이다.

.계시록과 이즈미르
성경 요한묵시록에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중 하나 (스미르나 교회)가 소재했던 유서깊은 도시이다.
성경 시대에 ‘이즈미르’는 ‘서머나’로 알려졌고, 초기 로마 황제들의 시대에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이즈미르는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로 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계1:11, 2:8). 서머나, 에베소 그리고 버가모 등 초대교회의 유적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과거 고대 그리스가 건설한 대표적인 ‘이오니아 식민시’로서 세워진 이후 계속해서 그리스인의 도시로 있었으며 튀르크 세력이 아나톨리아를 석권할 당시에도 아나톨리아의 그리스 세력이 최후까지 항전한 거점 중 하나였다. 수백년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오스만 제국이 망국에 다다른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도시 인구의 절반인 15만 명이 그리스인이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의 수도 아테네보다 더 많은 인구였으며 이즈미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이어 그리스인이 두번째로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그 영향 때문인지 오스만 제국 시절 이 도시의 별칭은 바로 이교도 이즈미르 (Gavur İzmir)였다.
주변에 페르가몬 유적이 있고, 남쪽에 에페소스 (셀축), 북쪽에 트로이 (차낙칼레)가 있지만 정작 이곳에는 남아 있는 사적지나 유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즈미르 대화재로 대다수 문화유적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에베소
한참을 달려 우리 일행은 에베소 입구에 이르렀다. 우리 일행은 아르테미스 신전터에서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나눴다. 에베소 현지에서 나는 야채로 쌈을 나눴다.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도시 에베소는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요, 거대한 무역항이 발달한 항구도시였다. 에베소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황금기를 누리면서 많은 역사적 변환기에도 부를 축적했던 도시였다. 기원전 1세기에 에베소는 로마제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많은 로마식의 건축물이 세워졌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지금도 유명하다.
에베소 번성기에는 바닷가에서 근처에 자리 잡은 도시의 원형극장까지 대리석으로 된 도로가 이어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번성하던 도시가 260년쯤 유럽에서 이주해 온 고트족들의 약탈과 방화, 말라리아와 때마침 일어난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특히 7세기부터 강에서 유입된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에베소는 항구의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지진으로 에베소는 폐허가 되어 땅속에 잠겼지만 근대에 와서 유적이 발굴되어 과거의 위용을 일부나마 드러내고 있다.
성경에 보면 에베소는 사도 바울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바울 사도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에 교회를 세웠다. 그가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드는 사람과 이를 파는 상인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신전 모형을 팔아 엄청난 부를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해 힘주어 설교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교인의 신전 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으니 소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 19:19-40).
훗날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신자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로마에서 바울 사도가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이끌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끝까지 보살펴 드리는 제자였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 19:27).

.에베소 (에페소스) 개관
에페소스 (Ephesus, Έφεσος, Efes,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현재의 터키 Selçuk Efes),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이 전도와 목회한 교회중 하나가 에베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베소 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존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라고 한다.

.누가 무덤
에베소에 도착해 주차장에 내리니 누가의 묘지가 보였다. 이 무덤은 본래 의료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었던 것을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후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가져와 묻었다가 그 후 이곳에 안장을 했었는데, 이제는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머리는 로마 베드로 성당에 안치하고 몸은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보관 중이라 한다.
누가는 ‘빛을 준다’는 뜻으로 성경에 소개된 그에 관한 기록과 교회사가들의 증언 및 전승을 토대로 종합해보면,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출신이며 이방인 (그리스 사람) 개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수리아의 안디옥에 관한 기사가 유난히 많고 상세하게 기록한데서 알 수 있다 (행 11:22-30; 13:1-3; 14:24-28; 15:30-41 등).
수리아 안디옥 사람 누가는 (골 4:14) 알렉산드리아에서 의술을 배웠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압볼리로 가던 바울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바울의 개인 의사로 함께 하면서 2차 선교 여행을 동행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요한과 바울을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들을 모아서 (눅 1:1-2)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사도행전까지 기록한다. 혹자는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바울이 유럽 (네압볼리)에 첫발을 내딛게 된 데는 누가의 조력이 컸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바울의 동역자가 된 누가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타지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도 계속해서 빌립보에 머물며 사역했고, 후에 3차 선교여행에 나선 바울이 다시 빌립보를 방문할 때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 20:5-6).
그후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때에도 함께 동행하여 거의 2년 정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후반부 바울의 로마 여행 기록이 매우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행 28:8-9). 심지어 바울이 순교 직전 2차 로마 투옥 때는 누가만이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딤후 4:11).
터키 에베소 고대 유적지 입구 부근에 있는 ‘누가의 무덤’은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일부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 T. 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이 건물에서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새겨진 비석을 보고 누가 복음사가의 무덤으로 판명했다고 한다. 황소는 누가 복음사가의 상징이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누가 복음사가의 무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에베소 유적지 입구의 ‘누가의 무덤’은 생각지 못했다.
이 무덤은 본래 의료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었던 것을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후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가져와 묻었다가 그 후 이곳에 안장을 했었는데, 현재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머리는 로마 베드로 성당에, 몸은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안치 중이라고 한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Asklepios) 신전 옆에는 막대를 휘감고 도는 뱀들의 형상인 카두시어스 (The caduceus) 부조가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반신반인으로 의술에 뛰어나고 온갖 질병의 치료를 주재하였다. 그는 뱀이 휘감겨 있는 지팡이를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의료직종을 상징하는 기호로 쓰인다.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 유적가운데 전면이 원형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차례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재건되었고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 (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에페소는 바울이 서기 53년 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바울의 방문 이후 ,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9-10)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것으로 나와있어 이 셀수스 도서관이 바로 성경상의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은 이곳이 두란노 서원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지만 역사상으로 이 셀수스 도서관은 바울이 에페소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없는 추측일 뿐이며, 바울이 셀수스 도서관과 같이 도시 중심에 위치한 화려한 곳이 아닌 변두리에서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에서 강론했을 것이라는 것이 좀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에페소는 이곳에 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져 부흥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셀수스도서관은 에베소에서 가장 훌륭한 유산으로 꼽힌다. 폐허가 된 에베소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훼손과 재건을 반복해 왔지만 원형 그대로인 전면부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줄리어스 아킬라가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도서관에 문 세 개가 있는데 각각 상단에는 지혜와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여성상이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한다. 셀수스 도서관 앞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여신들로 지혜의 신 (Wisdom, Sophia), 미덕의 여신 (Virtue, Arete), 지성의 여신 (Intelligence, Ennoia), 지식의 여신 (Knowledge, Episteme) 상이다.
셀소스 도서관 옆에는 메제우스와 미트리아테스 문이 보인다. 셀수스는 로마에서 파견된 통치자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당시에 12000권의 장서를 소장했다고 한다. 도서관 지하통로로 유곽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로마제국 제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신전
하드리아누스신전 (Temple of hadrian)은 서기 138년경에 지어졌으며, 신전입구에는 코린트식 기둥 남아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제14대 황제이다. 네르바 – 안토니누스 조 (朝)의 제3대 황제이다. 제국령을 두루 시찰하여 제국 각지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 한편 트라야누스 황제의 팽창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토대로 변경 안정화로 전환하였다.
로마 제국 최전성기로 알려진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ii)시대 중 세 번째 황제이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이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로마제국 사람들에게는 전쟁보다는 교양과 예술에 뛰어난 황제로 인식됐다. 하지만 오늘날 금석문, 기록 등을 통해 가능한 전쟁을 피하고 제국의 내정 개선에 힘을 기울인 실용적인 명군으로 평가되며, 트라야누스가 최대로 확장한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이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고, 양성애자였으며, 까탈스럽고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트라야누스에 비해 하드리아누스는 한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늘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이루어진 특기할 만한 사실들은 ▷속주 메소포타니아와 아르메니아의 포기와 동부 변경 안정화, 방벽(防壁) 건조 등을 통한 제국 주변 지역 방어책의 정비 ▷로마 제국 전체의 통합과 평준화 ▷두 차례에 걸치는 장기간의 순찰 여행 ▷관료 제도의 확립과 행정제도의 정비 ▷법 제도 개혁 등이 있다.
에베소의 도미티아누스신전 (Temlpe of Domitian)은 에베소 사람들이 도미티아누스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을 신으로 모셔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만든 신전이라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플라비안 왕조를 연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황제의 아들이다. 그는 속주 통치와 영토 방위 등에서 많은 치적을 쌓았지만, 자신을 신으로 부르게 하는 등 전제적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또한, 원로원을 무시하고 많은 반대자를 추방 혹은 사형시켰으며 무자비하게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여 많은 지탄과 원성을 들었는데, 결국, 기원후 96년 근위대장과 결탁한 황후 도미티아 (Domitia)의 음모로 살해된다. 신전은 둥근 기초위에 50m×100m 크기의 넓고 높은 테라스가 있었으며, 테라스의 북쪽은 높은 이층이어서 계단으로 오르내렸는데, 그 계단은 현재도 볼 수 있다.

.바리우스의 목욕탕
바리우스의 목욕탕은 BC 2세기 경에 건립된 에베소에서 가장 큰 목욕탕이며 로마시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적으로 1926년에 발굴되었는데 냉탕과 열탕, 탈의실, 사우나로 나뉘어져 있으며, 지금은 욕장의 벽과 문 그리고 바닥의 잔해만 일부 볼 수 있다. 목욕탕의 난방은 하이퍼코스트 (hypocaust) 방식으로 바닥을 데웠다고 하는데, 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그 열기를 바닥과 벽체내에 뚫린 통기로를 통해서 배기하는 난방방식으로 로마시대 때 저택이나 목욕장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목욕탕 주변을 보면 땅에 묻힌 황토색 관이 보이는데, 물을 끌어들여 도시에 공급한 수로이다. 물은 생존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상하수도를 제대로 만들지 않고는 도시를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중화장실
공중화장실은 쿠레테스 거리 끝에 이르면 있는데 경사지의 가장 아래에 화장실이 있는 셈이다. 이곳은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거리가 만나는 지점으로 도시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며 벽을 따라 좌변기가 놓여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수도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수세식 화장실을 만든 것이다. 좌변기 형태의 대리석 바닥에 구멍을 내서 소변과 대변이 아래로 떨어지도록 했다. 이렇게 떨어진 오물은 바로 물에 씻겨 내려가도록 한 구조로 아래 하수도가 경사졌기 때문에 위생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발치 앞의 파여있는 홈에는 물이 흘러, 용변을 본 후에 허리를 굽혀 손을 씻었다고 한다. 재미있은 것은 위쪽에 있는 변기가 아래쪽에 있는 변기보다 이용료가 더 비쌌다고 한다. 아무래도 냄새와 청결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거 같다. 또 변기 앞에는 분수시설을 만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도록 했는데, 용변을 보면서 느끼는 쑥스러움을 줄이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한겨울에는 변기가 차가워 노예를 먼저 앉혀 데운 후, 주인이 사용했다고 한다. 때론 고관들이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 이곳에서 음악 연주를 하게하여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바실리카의 열주
바실리카 (Basilica)의 열주는 길이 160m의 전형적인 로마양식 건축물로 본당과 세개의 통로가 있는 구조이며 바리우스 목욕장과 연결된 문이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에서 재판소나 상업거래소 등으로 사용된 직사각형의 공공건축물로 지금은 기둥만이 남아있다.
바실리카의 유적으로 현재는 기단과 기둥 일부만 남아있다. 바실리카라고 하는 것은 고대 로마에서 재판소나 상업 회의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직사각형의 집회소라고 한다.
.플라타네이온
플라타네이온 (Prytaneion)은 바실리카 뒤편에 위치해 있는 공회당으로 사용된 건축물이며, 주로 고관들의 회의 및 종교 의식ㆍ공식 리셉션ㆍ연회가 개최된 곳이다. 이 건물은 본래 마케도니아의 리시마코스 (Lysimachos)가 3세기경에 지었으나, 지금 흔적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재건한 복합적인 건물 유적이라고 한다. 중앙에는 에베소의 정신을 상징하는 여신 헤스타의 신성한 성화가 항상 타올랐으며, 이 불은 단 한번도 꺼진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방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뒤쪽으로는 나무지붕이 덮였던 넓은 지역으로 현재는 제단의 기초부분만 확인되고 있다.
프리타네이온 (Prytaneion)은 당시 자치시의 시청사로서 모든 시정의 중심지 였다고 한다. 폴리타네이온은 시의회당, 고관 귀족들의 회의와 리셉션장소 이었으며, 로마총독이 거주하던곳이자 디모데가 순교한 곳이라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의 문 (Heracles Gate)은 크레테스 거리에 세운 헤라클레스의 조각을 새긴 문으로 그 맞은 편에 니케 부조가 있는데 이것은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형에 있었다고 한다. 6개의 기둥을 가진 2층으로 된 개선문 형태였으나 현재는 기둥 2개만 남아있으며, 기둥에는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 (Eurysteus)가 헤라클레스에게 명한 12가지 과업 중 첫번째 임무로 수행한 네메아 (Nemea)의 사자를 처치한 후 그 가죽을 지닌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기둥 사이를 좁게 만들어 진 것은 마차의 통행을 막았다고 보며 이는 크레테스 거리가 보행자 전용도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유명한 영웅 중의 하나이다. 제우스와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인간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남편의 자식이면 누구나 미워했다. 헤라클레스가 태어났을 때도 헤라는 두 마리 독사를 보내어 요람에서 자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죽이려 했지만, 독사를 한 손에 한 마리씩 잡아 목졸라 죽여 버리는 바람에 헤라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세 때 암피트리온의 소를 습격한 키타이론산(山)에 사는 사자를 퇴치한 것이 그의 첫 모험이었다. 그 후 이 사자의 가죽을 몸에 걸치고 그 머리를 헬멧으로 삼았다. 뒷날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간계에 말려 에우뤼스테우스의 부하가 되었다. 에우뤼스테우스는 목숨을 내놓고 해도 해내기 어려운 임무를 차례로 헤라클레스에게 맡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공적이다. ① 네메아의 사자 퇴치, ② 레르네에 사는 히드라(물뱀) 퇴치, ③ 케리네이아의 산중에 사는 사슴을 산 채로 잡는 일, ④ 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는 일, ⑤ 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 우리를 청소하는 일, ⑥ 스팀팔로스 호반의 사나운 새 퇴치, ⑦ 크레타의 황소를 산 채로 잡는 일, ⑧ 디오메데스왕 소유의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을 산 채로 잡는 일, ⑨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탈취하는 일, ⑩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소를 산 채로 잡는 일, ⑪ 님프 (妖精)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동산의 황금 사과를 따 오는 일, ⑫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산 채로 잡는 일 등이다.

.니케 여신의 이부조판
니케 여신이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왼손에 들고 있는 이부조판은 원래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 장식였다고 한다. 그리고 니케여신의 치마폭에서 나이키가 심볼을 따왔다고 한다.
.오데이온 음악당
오데이온 (Odeon)은 언덕 한쪽 면에 반원형으로 세워진 1400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음악당으로 마이크 없이도 맨 뒤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대형 원형극장이나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에서도 보여진다. 당시에는 나무로 된 지붕이 있었으며, 회의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AD 150년경 에베소의 부자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플라비오 파피아나에 의해 건립되었다. 소리나 음을 뜻하는 오디오 (Audio)의 어원이 바로 오데온에서 나왔다고 한다.
.의회
에베소에는 두 개의 의회가 있었는데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의회는 대극장에서 열렸고, 도시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결정을 하는 평의회는 작은 극장인 이곳에서 열렸으며 평의회 구성은 귀족 중에서 선발하였다고 한다.
.폴리오의 우물
폴리오 (Pollio)의 우물은 국영 아고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klepios)에게 치료를 받은 후, 샘물에서 목욕을 하면 치료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스클레피온 (Asklepion) 병원 근처에 있다. 정면에 있는 높은 아치는에는 많은 동상들로 장식되었는데, 그들 동상중에 하나는 제우스 신의 머리로, 지금은에페소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메미우스의 비 (Memmius Monument)
로마 공화정 당시 에페소는 과중한 세금 문제로 로마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BC 88년 폰토스 (Potos)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Mithridates) 6세가 로마에 대항하자 그를 지지하였으며 당시 미트리다테스는 하루만에 무려 이 지역 로마시민 8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에, 로마는 BC 88S년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며 개혁가인 술라 (Sulla), 술라의 후계자 루쿨루스 그리고 BC 65년 폼페이우스 (Pompeius)가 3차에 걸쳐 미트라다테스를 완전히 제압하였다.
그 후 에페소인들은 미트리다테스가 자행한 대학살에 동조한 댓가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어야만 했다.
이 멤미우스 기념비는 당시에 학살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BC 86년에 술라의 사위 ‘가이우스 메미우스 (Gaius Memmius)’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무차별 학살을 당한 로마인의 넋을 애도하고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의 공적을 칭송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트라야누스의 샘은 2c초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바친 샘으로 9m정도의 높이였다고 한다.

.에베소 원형 대극장
아카디아 (Acadia)의 끝에 위치한 이 원형대극장은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 확장되어 연극과 격투로 사용되었다. 이 장소는 또한 포소 축제의 주요 장소이자 대규모 공연의 주요 장소이기도하다. 전체 극장은 공연 무대를 중심으로 언덕을 따라 지어졌으며 반원형 모양으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완벽하게 조화 시켰다. 극장은 66행의 지름이 154미터, 최대 2만5천 명 수용이 가능하다. 웅장한 규모 외에도 극장의 시청각 효과 그리고 무대의 시작부터, 좌석의 각 행은 앞 행보다 더 가파르고, 위쪽 주변 관객들이 무대 중앙에서 들을 수 있도록 에코를 사용하여 잘들리도록 했다.
원형대극장은 피론산 비탈을 이용해 헬레니즘 시대인 BC 3세기경 마케도니아의 라시마코스 (Lysimachos)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로마 시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지름이 154m, 높이가 38m인 반원형 구조로 무대끝에 서서 무대에 있는 성인을 보면 작은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이다.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반원형로 그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극장으로, 좌석은 총 66줄로 세 개의 단으로 나눠져 있고,
각 단은 동심원 통로인 디오지마 (diazoma)로 분리되어 있다. 무대는 18m 높이의 3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제일 아래 단은 대리석으로 장식된 황제의 자리가 있었고, 그 뒤쪽으로 주요 인사들의 자리가 있었으며, 극장은 연극을 비롯한 각종 예술공연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ㆍ정치ㆍ토론 및 검투사와 동물과의 격투를 위해 사용되었다.

.아카디안 대로
아르카디안 대로는 원형 대극장과 연결된다. 원형 대극장 무대는 서쪽방향이다. 무대 뒤편 아르카디안 (항구) 거리가 보이고 멀리 에게해도 보인다. 사도 바울 당시 에베소는 유명한 항구도시였고, 도로양옆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 거리 이름에서 아케이드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는 퇴적작용으로 인해 항구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어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푸른 나무사이로 난 길로 가면 북측 출구가 나오고 ‘성모 마리아 (집) 교회’가 나온다.
.마리아의 집
바울이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이끌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끝까지 보살펴 드리는 제자였다.
전승에 따르면 에베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해 에베소 신자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에베소 언덕 위에 있는 마리아의 집은 순례자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마리아의 집이 발견된 과정도 신비롭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집의 존재는 잊혀 갔다. 그러다 1878년 한 번도 에베소를 와보지 않은 독일의 가타리나 에머리히 (1774 ~ 1824)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1891년 나자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데리고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됐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찾았다. 이후 많은 순례자들이 마리아의 집을 찾고 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임종했고, 565년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건축하였다. 훗날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개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요한 이후에는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가 지도자로 활동했다.

.아르테미스 신전
에베소를 나오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또는 Artemision) 터를 버스 창밖으로 보았다. 당대 최대였다는 신전은 무너지고, 127개였던 기둥들 중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 번째 지어진 신전이며, BC 356년 7월 20일, 헤로스트라투스 (Herostratus)라는 미치광이의 방화 (放火)에 의해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두 번째 지어진 신전이다.
방화범 헤로스트라투스의 신분에 관해 알려진 게 없다. 방화범은 에페수스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며, 노예였다는 설이 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이름이 길이 남을 방법을 찾다가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기로 했다. 신전의 지붕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는 불을 질러 신전을 태우고 붕괴시켰다. 즉시 에페소스 당국에 체포되어 형틀에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재판관들은 허명심에 불탄 그를 저주하기 위해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테오폼푸스 (Theopompus)라는 역사가가 자신의 역사서에 그의 이름을 기록했고, 그후에도 사가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페로스트라투스는 자신의 뜻대로 이름을 길이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이로부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현상을 일컬어 헤로스트라투스 명성 (herostratic fame)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두 번째 신전에 관해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 시인 안티파트로스 (Antipatros)는 7대 불가사의를 서술하면서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 (戰車)를 위한 길이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 (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두 번째 신전이 방화로 붕괴된 날은 BC 356년 7월 21일이었고, 그날은 우연하게도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탄생한 날이었다고 한다.
한편 아르테미스 신전은 드물게는 디아나의 신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이 신전은 2번이나 완전히 새로 세워졌는데, 첫 번째로는 거대한 홍수로, 두 번째로는 방화로 인한 재건이었고, 3번째로 지어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바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기원후 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괴된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대영박물관이 후원하고 존 터틀 우드가 이끄는 탐사대가 6년의 탐색 끝에 1869년 재발견하였다.

밀레토스
에베소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밀레토스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마치 인류학자들이 인류문명의 기원을 열망하며 찾듯 철학의 기원지 밀레토스를 찾았다. 밀레토스에서는 이오니아의 스토아, 원형경기장, 아폴론 신전 등을 방문했다.

.밀레토스 개관
밀레토스는 기원전 8세기까지 이오니아의 중심지로서 해외 무역이 번성하였고, 기원전 7세기 동지중해, 흑해 연안에 70여 곳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6세기 중엽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이 된 것이 원인이 되어,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인에게 함락당하고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미칼레 전투 뒤, 히포다모스의 도시 계획으로 재건되어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대규모의 야외 극장을 비롯하여 이오니아식 상점 터, 신전 터, 로마 목욕탕, 아고라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오리엔트의 풍부한 경험적 지식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밀레토스 학파 철학자를 배출하며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기도 했다. 세상의 기원을 최초로 탐구한 철학자 탈레스를 비롯해 만물의 기원을 탐구한 학자들을 밀레토스 학파 또는 이오니아 학파라고 한다. 밀레토스는 결과적으로 ‘이오니아 자연철학’을 탄생시켰고, 아울러 밀레토스 학파 철학자를 배출해 문화의 중심지를 이뤘었다. 호메로스는 이곳을 ‘갈리아인의 도시’라고 하였다.
밀레토스 학파는 BC 6세기에 성립된 그리스 최초의 철학 학파이다. 밀레토스 출신의 ‘탈레스’가 창시했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로 학풍이 이어졌다. 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자연 현상을 전적으로 의인화된 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당시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점에 반하여 새로운 견해들을 제시했다. 이들은 밀레토스의 자연에 경탄했으며, 그 자연의 바탕에 있는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연 철학으로 분류된다.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모든 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르케’라고 부른) 본질적인 물질로 정의하였다. 세계는 이 본질적 물질로부터 형성되었고, 이 본질적 물질은 모든 것의 원료이다. 탈레스는 이것을 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불과 같은 몇몇의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보이지 않는, 정의되지 않은 원소를 선택했는데 그는 이를 아페이론 (“한계를 가지지 않음”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그는 전통적인 네 개의 원소 (물, 공기, 불, 흙)가 각각 다른 것과 대립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이 대립하여 서로를 없애버린다면, 그것들은 물질의 안정적인 원천적 형태가 될 수 없다고 추론하였다. 결과적으로 다른 것들이 생성되고 진정으로 모든 것들의 원소인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무한함의 개념은 불멸에 관한 종교적인 개념에서 그리스인의 심리에 친숙한 것이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묘사는 이러한 개념에 부합하였다. 이 아르케는 “영원하며 불로한 것”으로 불린다. 아페이론의 특정되지 않은 성질은 비판을 받아, 아낙시메네스는 이를 더욱 명확하지만 여전히 애매한 원소인 공기로 정의하였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는 다른 원소나 물질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에너지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과 더욱 비슷하다.
세 철학자의 차이는 물질의 성질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우주에 대해서도 다르게 상상하였다. 탈레스는 땅이 물에 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땅을 속이 빈 불로 채워지고, 태양과 별로 나타나는 구멍이 뚫린 동심원의 바퀴로 구성된 우주의 중심에 놓았다. 아낙시메네스에게 태양과 달은 별들이 고정되어 있는 하늘의 덮개를 순회하는 평평한 원판이었다.
한편 성경에서 밀레토스는 사도 바울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했던 사람들 가운데 크레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타 섬에서 선교 활동의 새로운 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디도에게 크레타 섬 선교 임무를 맡기고, 그곳을 떠나 자신의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린도로 갔으며, 고린도에 에라스도를 남겨놓았다. 그 후 밀레토스로 갔다. 그곳에는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앓아누워 있었다. “에라스도는 코린토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드로비모는 병이 나서 내가 밀레토스에 남겨 두었습니다” (딤후 4:20).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이 끝나갈 무렵인 58년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로 향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후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라며 눈물의 작별을 했던 곳이다. 바울 사도가 왜 에베소에 다시 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일을 할 장소로 선택한 곳은 에베소가 아니라, 밀레토스였다. 이곳에서의 설교는 바울 사도의 15년 가까운 선교 여행의 최종 보고 같은 형식을 띠고 있다.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행 20:32). 설교를 들은 신자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울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 사도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신자들은 아쉬움을 안고 바울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했다 (행 20:1-38).

.밀레토스 디디마에 아폴론 신전의 충격적인 규모
후기 청동기 시대인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시대 밀레토스에 사람이 살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대에는 히타이트와도 경쟁하였다. 이후 그리스 암흑기 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오니아 인들이 건너가 도시를 세웠다. 당시 그리스 동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나중에 뤼디아와 경쟁하였고 결국 뤼디아에 굴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 제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페르시아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502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의 중심 도시였다. 페르시아가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하자 그리스인들은 모두 밀레토스의 함락을 슬퍼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밀레토스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 속해 있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완전히 페르시아에서 벗어났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 지방의 상업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밀레토스 학파는 기원전 6세기에 성립된 그리스 최초의 철학 학파이다. 아나톨리아의 에게 해 연안의 이오니아의 도시 밀레토스 출신의 탈레스가 창시했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로 학풍이 이어졌다. 이들의 활약 시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보다 백 년 이상 앞선다. 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자연 현상을 전적으로 의인화된 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당시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점에 반하여 새로운 견해들을 제시했다. 이들은 밀레토스의 자연에 경탄했으며, 그 자연의 바탕에 있는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연 철학으로 분류된다.
한편 아폴론 신전 (Temple of Apollo)은 지중해의 여러 곳에 세워졌으며, 역사적으로 문헌을 통해 유명한 것은 그리스 델포이이지만 델로스섬이나 고대 리키아의 크산토스, 로마 폼페이, 코린토스 등지에도 아폴론 신전들이 세워졌다.
특히 밀레토스 남쪽 20km, 디디마 (Didymia)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의 규모는 거대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 곳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과 더불어 2대 신탁 신전으로 꼽히던 곳이다. 헬레니즘기에 재건된 현재 아폴론 신전 (길이 100m, 폭 51m)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사모스 섬의 헤라 신전에 이어 세 번재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 석주 127개인데 이곳은 122개).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길이에서 2미터가 작을 정도로 규모가 거의 같은데다 현재도 비교적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km 떨어진 밀레토스로부터 포석이 깔린 참배로가 이어져 있어, 1년에 한 번 참배 대열이 4일간을 꼬박 걸어서 디디마에 도착해 아폴론의 제사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밀레토스 원형 극장
인근의 밀레토스 원형 극장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식으로 1만 5000석으로 지었다가,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 시절에 2만 5000석 규모로 증축한 대극장이다. 높이만 해도 30m가 넘는다. 예전에는 커다란 배들이 극장 바로 앞에서 닻을 내렸다고 한다.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극찬 받았던 버가모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에베소에서는 유적입구에 누가의 무덤, 에베소 거리,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 원형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아카디아거리, 마리아의 집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에베소에 이어 밀레토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흔적, 대 원형경기장, 대규모의 아폴론 신전 등을 볼 수 있었다.
에베소와 밀레토스를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다음행선지인 파묵칼레로 향하다 파묵칼레 인근에 예약된 호텔에서 일박했다. 숙소 침대에서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본다.
에베소에서는 참으로 유적과 유물의 보고였다. 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사역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거대한 아르테미스신전을 비롯,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참으로 많은 신전이 있었다.
에베소와 관련해 성경관련 인물로 바울, 요한과 마리아 만을 떠올렸는데 유적 입구 옆에 누가의 무덤이 있어 놀랐다. 이번 인문학여행에 개인적인 주제는 ‘나를 찾기’와 다른 주제는 ‘죽음 자리’ 그리고 ‘문학’이다.
그리스의 크레타에서는 디도와 조르바의 죽음을, 파트라스에서는 안드레의 죽음을 생각했다. 터키의 에베소에서는 누가, 요한, 마리아, 디모데를, 히에라 폴리스에서는 필립을, 이스탄불에서는 알렉산더석관 (현재는 알렉산더 부하의 석관으로 판명)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려 한다.
한편 밀레토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의 도시로 이곳의 소피스트들의 활약 시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보다 백 년 이상 앞선다. 그리고 소피스트들의 역사 만큼이나 밀레토스의 경기장이나 아폴론신전의 규모는 거대했다. 유적의 규모로 보아 학문과 문화 중심지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밀레토스 남쪽 20km, 디디마 (Didymia)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의 규모는 참으로 거대했다. 그리스에서 본 파로테논을 능가하는 듯했다. 헬레니즘기에 재건된 현재 아폴론 신전 (길이 100m, 폭 51m)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사모스 섬의 헤라 신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 석주 127개인데 이곳은 122개). 디디마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길이에서 2미터가 작을 정도로 규모가 거의 같은데다 현재도 비교적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놀라웠다.
밀레토스 원형 극장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식으로 1만 5000석으로 지었다가, 로마 트라이아누스 항제 시절에 2만 5000석 규모로 증축한 대극장으로, 높이만 해도 30m가 넘는다. 예전에는 커다란 배들이 극장 바로 앞에서 닻을 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해안에서 많이 들어와 있어 세월의 위력을 실감했다.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10월 30일, 아침 일찍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파묵칼레로 향했다.
파묵칼레에 가까워지자 다양한 칼러의 열기구들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파묵칼레
파묵칼레 (Pamukkale)는 튀르키예 남서부 데니즐리 주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붕을 말한다. 파묵칼레의 뜻은 터키어로 파묵이 ‘목화’를 뜻하고 칼레는 ‘성’을 뜻하므로 ‘목화 성’이란 뜻이다. 물속에는 석회 성분이 들어있어 피부에 좋다고 한다.
파묵칼레는 198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파묵칼레에는 1만5천명이 들어갈 수 있는 원형극장이 있다. 또한 수세기 동안 고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석회수에 의해 형성된 솜 같은 순백의 평원은 감탄을 자아낼만한 장관이다.
이 곳에서는 온천이나 문화 유적보다 개인적으로 죽음의 자리 생각 차원에 빌립 순교지에 대한 답사의 의미가 컸다. 초대 사도이자 한 신앙인이 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현장을 보고팠다.
잠시 온천물로 족욕을 하고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역시 유적은 지진으로 모두 파괴되고 그 흔적들로 당시를 상상토록 했다. 신전과 아고라, 공연장을 급히 둘러 본 후 빌립의 유적지를 찾았다.

히에라폴리스
히에라폴리스는 성경에서 라오디게아, 골로새와 함께 언급되었는데 (골 4:13), 바울의 에베소 체류 기간 중에, 혹은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골로새 출신 에바브라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빌립의 사역지가 되었고 사도 요한의 제자인 교부 파피아스 (Papias, 70 ~ 130년경)는 이곳 출신이다. 키벨레 (Cybele) 신전, 극장, 목욕탕 등의 유물로 미루어 볼 때 무역이 성행하고 매우 번성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염색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이곳의 온천은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찾기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빌립이 말년에 전도를 하다가 87년경에 순교한 현장이다. 도미티아누스 (Domitian, Domitianus) 황제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성 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주후 5세기경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후, 빌립의 시체가 발견된 그 언덕 위에 빌립사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산언덕을 향해 웅장한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공간구성이 독창적인 평면이 팔각형으로 된 훌륭한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 빌립이 사도 빌립인지 전도자 빌립 인지는 명확히 구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사도 빌립이라고 추정한다.
20m×20m의 정사각형의 건물터에 중앙에 8각형 형태의 큰 방과 그 면을 따라 8개의 중간 방이 건축되어 있어 이를 팔복의 의미를 담아 8개의 작은 예배당으로 보면서 팔복교회로 말하기도 한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카파도키아까지 600여 킬로 이동하는 즐거움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일대를 둘러본 우리일행은 오찬을 나누고 카파도키아로 향해 장시간 달렸다. 카파도키아까지의 거리는 600여 킬로가 넘는다고 한다. 이날 오후 일정은 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창밖을 보이는 터키의 풍경은 시간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때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 졸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
땅은 건조했지만 곳곳의 농장에서는 동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넓은 땅에 일꾼들이 가꾼 농작물은 풍부한 햇빛 속에서 가지런히 재배되고 있었다. 새로운 도로가 펼쳐지면 어김없이 특이한 지형 등 멋진 자연의 풍광이 펼쳐졌다. 오가는 다양한 차량과 사람들의 모습도 정겨웠다.
여러 번 휴게소에서 쉬어갈 때마다 둘러보는 재미도 솔솔했다.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를 둘러보고 600여Km를 달려 카파도키아 인근 숙소에서 일박했다.
숙소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란 이름답게 환했고, 히에라폴리스는 온천요양으로 유명세가 날만큼 충분히 온천수가 샘솟았다. 히에라폴리스에는 고대 주거지역과 원형경기자, 필립 순교지 등의 유적이 있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장거리를 달려 다음행선지인 카파도키아에 도착해 일박한다.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를 방문하며 바울의 사역과 사도 빌립을 묵상했다. 후에 빌립의 사역지가 된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는 규모로 보아 상업과 휴양으로 매우 번성한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전도하다 도미티아누스 (Domitian, Domitianus) 황제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하고 그의 시신을 성 밖으로 내던졌다고 하니 순교자의 고난을 생각한다. 이후 주후 5세기경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후, 빌립의 유해가 발견된 그 언덕 위에 빌립사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교회가 세워졌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골짜기, 데리쿠유, 우치사르 바위산 그리고 이스탄불로
어제는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일대를 둘러본 후 장거리를 달려 카파도키아 인근 호텔에서 일박했다.
10월 31일, 오늘 일정은 호텔 조식 후 카파도키아 사파리 투어, 괴레메 골짜기,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간 지하도시 데린쿠유, 우치사르 방문 후 카이세리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카파도키아 (Cappadocia)
카파도키아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로부터 도망쳐 온 기독교도의 삶의 터전으로 시작됐다. 다음에 동로마 제국이 성상 파괴 운동을 일으키자 이 종파 운동을 반대한 신자들은 동굴이나 바위에 구멍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카파도키아는 네브세히르 (Nevsehir)와 카이세리 (Kayseri) 사이에 위치한 광활한 기암지대를 부르는 이름으로 수도 앙카라에서 300km 남쪽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카파도키아는 ‘아름다운 말 (馬)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로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슬기가 극치의 조화를 이룬,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명소이다. 지상의 기암괴석과 지하의 암반, 그리고 그 속에다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마련한 도시와 마을, 교회가 하나의 조화로운 복합구조를 이루고 있다.
카파도키아에는 현재 100여개의 교회가 남아 있다. 이 석굴 교회는 지상에 있는 교회와 다를 바 없는 십자 형태의 구조를 하고 있거나 둥근 천장을 가진 곳이 많다. 교회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보존 상태가 좋을뿐더러 내부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카파도키아 (Cappadocia)는 예전의 소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오늘날 터키의 카파도캬 (Kapadokya)에 해당된다. 아나톨리아 고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카파도키아는 실크 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으로 대상 행렬이 근대까지 이어졌다.

괴레메 (Göreme, Goreme) 골짜기 사파리 투어
우리 일행은 괴레메 골짜기를 사파리 투어형식으로 둘러 보았다.
괴레메 (Gereme)란 뜻은 “보이지 않는”이란 뜻으로 기독교 박해자들을 피해 눈에 띄지 않는 지하나 동굴 속에 교회와 생활공간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로마, 오스만 터키 시대에는 이슬람의 핍박을 피해 숨어든 기독교인들과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기 위해서 만든 거대한 동굴 교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괴뢰메 (Goreme) 근처에 위치한 ‘괴뢰메 야외 박물관 (Goreme Open Air Museum)’은 모자이크로 장식된 암굴 교회와 예배당의 복합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의 대규모 정착지로 이곳에는 ‘엘말르 교회’와 ‘성 바질 교회’, ‘성 바바라 교회’, ‘일라니 교회’ 등 아주 흥미롭고도 잘 보존된 교회들이 산재해 있다. 내부는 모자이크화나 성화로 장식되어 있고, 교회 근처의 바위를 깎아 만든 침실이나 테이블, 창고 등은 이곳에서 수도사들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림에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괴뢰메 골짜기의 교회들이 성지 순례의 장소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 교회들을 찾아온다.
카파도키아에는 3천 개가 넘는 동굴 수도원이 있다고 한다. 괴레메 골짜기 내에도 30여 개 이상의 동굴교회가 있는데 독거 수도생활에서 공동 수도생활로 변화해가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9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인데 내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등을 주제로 하는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대표적인 동굴교회로는 바실리우스 교회 (작은 교회), 엘말러 킬리세 (사과 교회), 성녀 바르바라 교회, 열라늘러 킬리세 (뱀 교회), 카란르크 킬리세 (어두운 교회), 차르클러 킬리세 (샌들 교회), 크즐라르 마나스트러 (수녀원), 엘 나자르 교회, 토칼러 킬리세 (버클 교회) 등이 있다. 교회 이름은 각 교회 내의 벽화에서 그 특징을 따서 부르고 있다.
카파도키아에는 자연의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다양한 모습을 한 계곡들이 여럿 생겨났다. 괴레메 골짜기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바위들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곳의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뾰족한 도구로 긁으면 돌가루가 떨어진다. 카파도키아의 지형은 본래 부드러운 사암 (砂岩, sandstone)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백만 년 전 화산방출로 인해 생긴 응회암 (凝灰岩, tuff) 층이 그 위를 덮어버렸고, 응회암 위로 또 다시 용암이 흘러넘치면서 단단한 새 지층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지층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신비로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사암과 응회암은 경도 (硬度)가 낮다. 이곳 주민들이 어렵지 않게 동굴을 만들어 그곳에서 거주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데린쿠유 (Derinkuyu)
게린쿠유를 방문하기전 우리 일행은 터키식으로 점심식사를 나눴다. 자기 속에서 음식이 나오는데 현지 식재료와 문화가 결합해 만들어낸 맛으로 별미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데린쿠유로 향했다.
데린쿠유 (Derinkuyu)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의 마을이름이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지하도시가 발견되면서 성지화되었다. 데린쿠유가 발견된 이유는 1960년 어떤 농부가 닭을 좇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슷한 지하도시가 계속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40여개나 된다. 데린쿠유는 깊이 55m 20층의 주거공간까지 조사되었으며 깊은 곳까지 맑은 공기가 닿을 수 있게 40m 깊이로 환기구를 만들어 놓았다. 시설규모로 보아 약 8천명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본다.
왜 이렇게 많은 지하도시가 만들어졌을까. 자연환경과 외부침략이라는 두 요인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카파도키아 일대는 여러 암층이 얽혀 있고 또 파내기는 쉽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굳어져가는 응회암 지층이 많다. 이것이 자연적인 이유라면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와 같은 거대세력이 휩쓸고 간 광풍의 역사는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자연조건은 선사시대부터 계속된 화산활동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카파도키아에는 대규모 기암지대가 많은데 이는 에르시에스(Erciyes)산의 분출 때문이다. 용암과 화산재 충적층은 적갈색 흰색 주황색 등 서로 다른 지층을 만든다. 이러한 지층변화는 지하공간을 만들 때 아주 유리하다. 예를 들어 응회암층을 파내면 그 위쪽의 단단한 용암층이 자연스럽게 지붕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현재 터키가 이스탄불은 유럽에 나머지는 아시아에 걸쳐있는 것처럼 카파도키아도 과거에는 유럽과 아시아 틈에 끼어 있었다. 이곳은 주요한 고대 통상로로 BC 3세기경에는 아바노스(Avanos) 위르굽(Urgup) 등 여러 왕국이 자리 잡은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때문에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등 거대세력의 패권이 바뀔 때마다 온 몸으로 전쟁의 광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파도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동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데린쿠유처럼 평지에서 아래로 파내려간 지하도시, 바위산을 옆에서 뚫어 만든 괴레매 동굴주거지, 깍아지른 절벽 중간에 지은 동굴교회 등. 이러한 동굴이 상당 부분 침략과 도피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굴 속에서 선사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이 처음 여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수렵 채취기인 4000년 이전으로 보인다.
데린쿠유에서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독수리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BC.18세기 이 지역을 지배하던 히타이트의 유물이다. BC.401년 크세노폰이 쓴 아나바시스(Anabasis)에는 프리기아인이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프리기아인은 히타이트와 비슷한 시기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다. 누가 만들었든 오랜 세월동안 조금씩 확장되었기 때문에 어떤 한 시기의 유물로 보는 것은 마땅치 않다.
응회암은 석기나 뼈조각 등 단순한 도구로도 쉽게 파낼 수 있다. 그래서 추위와 맹수를 피하기 위한 동굴이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지평면 근처에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겠지만 이후 광야로 쫒겨온 기독교인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종 완성된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처음에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연결통로를 확장하여 주변에 있는 지하도시와 소통하기도 했다.
변변한 측량도구도 없던 시절 도시간 연결통로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사막의 지하수로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두 개의 수직갱을 이용했을 것이다. 두 도시 끝에 수직굴을 파고 땅위에서 마주 보도록 막대를 놓는다. 그리고 수직굴 아래도 같은 방향으로 막대를 놓고 뚫어 나가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하도시 곳곳에 있는 수직갱은 환기와 햇빛을 받아들이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지하도시간 연결 작업에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하도시에는 지상에서 필요한 시설이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다. 방이나 부엌 외양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간은 물론 학교나 세례 제의를 위한 집회시설, 곡식이나 포도주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법을 어긴 죄수나 격리가 필요한 사람을 가두어 놓은 흔적도 있어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이외에도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물저장소, 환기시설, 매장공간도 보인다. 외부침입에 대비해서 통로 중간에는 비상 차단용 돌을 배치하였다. 이곳은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도록 좁게 만들었다.
동굴 안에 웬만한 주거기능이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적의 위협이 없는 평시에는 지상으로 나와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키우면서 지하도시에 식량을 공급한 것이다. 저장 공간에서 발견된 밀이나 포도주 그리고 교역을 통해 얻은 직물 그릇 제의도구는 지상과 지하생활을 병행하던 이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생활공간과 물자를 갖추었다 해도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지하에서 버텨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침략과 학살의 공포를 피해 일단 동굴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 곳에서 장기간 버티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특히 어둠과 폐쇄로 인한 공포는 육체적인 공포보다 더 심각했을 것이다. 연구 자료에는 지하생활을 견디지 못해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좀 넓은 공간에는 중앙에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어떤 기둥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이것은 밧줄이나 사슬로 정신질환자를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침략의 광풍이 지나간 뒤 지상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어둡고 좁은 지하생활로 인해 곱추나 기형이 되었으며 햇빛 때문에 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잘 느껴지는 기록이다.
기독교에서는 지하도시의 삶을 신을 향한 염원과 신앙의 결정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선택이 아니라 학살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임은 자명하다. 정복자의 입장에서 피정복자의 종교나 문화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노예로 부릴만한 가치가 없으면 무차별 학살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겠지만 데린쿠유는 바로 그 고난한 삶을 보여주는 흔적에 다름 아니다.

우치사르 바위산
데린쿠유 방문 후 우리 일행은 우치사르 바위산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은 모두 바위로 절경이었다.
우치사르 바위산은 300만년 전 인근 에르시예스 산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이 일어나 화산재에 덮여 굳어진 땅 위에 화산재와 용암이 쌓였고 이후 끊임없이 일어난 침식과 풍화를 거쳐 다채로운 형태의 기암괴석들이 가득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우치사르는 “뾰족한 바위”라는 뜻으로 특징은 기암괴석의 동굴교회들이다.
이곳들의 특징은 기암괴석의 동굴교회와 땅속으로 이어진 지하도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로부터 도망쳐 온 기독교도의 삶의 터전으로 시작됐으나, 7세기 중반에 이슬람의 침공을 받게 되자 기독교 신자들이 이슬람의 핍박을 피해 동굴이나 바위에 구멍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곳이다.
파샤바 계곡 (Pasabag Valley)은 일명 수도사의 골짜기로 불리는 카파도키아의 상징이며, 스머프 작가인 벨기에 피에르 클리포드가 이곳 파샤바 계곡에서 영감을 얻어 개구장이 스머프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카이세리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카파도키아 일정을 마치 우리 일행은 70킬로미터 떨어진 카이세리공항으로 이동해 항공편으로 이스탄불로 향했다.
카이세리공항은 카파도키아와 이스탄불을 오가는 직항 노선을 비롯해 폴란드, 독일, 벨기에 등으로 이동하는 국제선을 함께 운항하는 공항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카이세리 공항에서 이스탄불까지는 600여 킬로미터 거리로 1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예정된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 후 휴식시간을 즐겼다.
호텔은 쾌적하고 음식도 좋았다. 간만에 여유있는 저녁을 즐긴 날이다.
호텔 방에 들어와 침실에 누워 오늘을 돌아본다.
카파도키아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아 숨어 지내던 땅속 도시 데린쿠유, 기암괴석의 괴레메 골짜기,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은 우치사르 등을 신앙을 지키려 땅속으로 들어갔던 현장을 방문하며 드는 생각은 높은 곳으로 향했던 그리스의 메테오라 수도원공동체가 떠올랐다. 그리스 메테오라의 신앙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면, 터키의 신앙인들은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어느 곳이든 녹녹한 장소는 아니지만 두 곳을 방문한 입장에서는 그나마 높은 곳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그나마 신선한 공기를 맘껏 쉴 수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호텔에 편히 누워 이런저런 생각하다 잠이들었다.

이스탄불에서
11월 1일, 오늘은 호텔 조식 후 보스프레스해협 유람선 승선, 이집시안바자르, 톱카프궁, 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방문. 중식 후 이스탄불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일정이다.



보스포러스해협 유람선
이스탄불에 도착해 1박 후 첫 일정은 보스포러스해협의 전세유람선 승선이었다.
보스포러스는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30km이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m이다. 깊이는 36~120m 사이이다.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져 왔고, 18세기 이후에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해협의 항행권(航行權)을 둘러싼 ‘해협문제’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해협 양쪽으로 이스탄불 시가 자리잡고 있다. 해협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의 옛 수도이자, 현재는 터키 제1의 도시이다. 터키의 유럽 영토와 아시아 영토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로 나뉜다. 1973년에 완성된 해협 횡단의 보스포루스 교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해협을 횡단하는 3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며, 2013년 해저 터널을 통과해 이 해협 아래를 지나는 마르마라이 철도가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야르(yalı)라고 하는 물가를 바로 마주한 맨션이 약 620채 정도 있다. 이것은 주로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졌다. 보스포루스 해협 주변에는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등의 오스만 제국의 궁전이 들어서있다. 또한, 해협 주변으로 아야 소피아, 갈라타 탑, 셀리미예 병영 등의 주요 관광지가 즐비하다.
이스탄불의 에미뇌뉘와 흑해의 입구에 위치한 아나돌루 카바으까지 운항하는 페리가 있으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페리가 많다.



이집시안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
어느 나라를 가든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볼거리가 넘치고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시안 바자르는 원래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운반되어 온 향신료를 파는 시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집시안 바자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는 지붕이 설치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통시장으로 상점들이 마치 미로 같은 거리로 즐비하게 열결되어 갖가지 향신료와 수공예품을 볼 수 있었다.
바예지드 회교 사원과 누루오스마니예 회교 사원 사이에 있는 그랜드 바자 (카팔리 차르시)는 면적이 굉장히 넓었다. 입구가 무려 21개나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가 둘러보니 이곳이 세계 최대 규모의 전통상점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끝없이 연결된 시장지붕 아래에서 다양한 수공예품과 향식료 뿐만 아니라 타일, 도자기, 유기, 가죽 액세서리, 밸리 댄스 의상, 파이프 및 재떨이, 고서적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랜드 바자의 역사는 메메트 2세 (Mehmet II) 술탄이 섬유 거래를 전담할 특별한 장소를 건설하라는 명을 내린 14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이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체바비르 (Cevavir)에서 전형적인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모든 거리에서 특정한 유형의 수공예품을 제작해서 아직도 시장 이름에 반영되어 있지만, 더는 이 같은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거대한 시장은 마치 미로와 같아서 길을 잃을 것만 같아 왔던 곳들을 계속 확인해야만 했다.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고 인파로 굉장히 북적대므로 시간 조절이 필요했다.
양탄자나 전통공예품 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격은 정찰가가 아니므로 흥정이 필요했다. 꼭 무언가를 구입하지 않아도 대표적인 터키 시장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으므로 방문해 볼 만하다. 물론 인파가 북적대서 소매치기와 가방 날치기꾼이 시장을 활보하니 조심하면서 말이다.
톱카프 궁전 (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톱카프궁전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궁전에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 (외정)과 엔데룬 (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1중정: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은 메흐메트 2세 이후의 군주들이 손을 많이 대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많이 변형되었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여 별칭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 건축 재료와 구조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을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문은 대형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이며, 황제의 문에 연결된 중정 안쪽에는 톱카프 궁전 관람을 위한 매표소가 있다.
.2중정: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방추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 (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디완 건물은 중정의 왼쪽에, 주방 건물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디완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디완 건물을 ‘쿱베알트’라고 부른다. 콥베는 ‘돔’이라는 뜻이고, 알트는 ‘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톱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디완 회의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디완 회의는 총리대신이 주재하게 되었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3중정: ‘바쉬스 싸데’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하렘: 제3중정에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4중정: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꾸르안,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정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
.바그다드 쾨쉬퀴
바그다드 쾨쉬퀴는 테라스 중앙에 위치한 분수 오른쪽에 위치해있다. 이 정자는 1638년 무라트4세가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를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정자는 예레반 쾨쉬퀴와 매우 유사하다. 베란다의 세개의 문은 소파와 소파 사이에 있다. 외벽은 대리석, 반암, 휘록암으로 덮여있다. 포르티코 대리석 판넬은 케이렌 맘루크 스타일이다.

아야 소피아 / 하기아 소피아 (Ayasofya) 성당
하기아 소피아 (Ayasofya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537년에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됐다.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약 30여년 후,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했으나 화재로 유실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재건했으나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와 아야 이레네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에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나스가 축성을 집전한 가운데 약 5년 10개월 만에 아야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하였다. 다만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지라, 내부의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 소피아성당의 역사 개관
.비잔티움 제국 시대
콘스탄티누스 2세의 건립 :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약 30여년 후,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즉 위대한 교회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다른 성당에 비해 훨씬 그 크기가 컸기 때문이었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2월 15일에 처음으로 착공되어, 제국의 황궁 바로 옆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다 완공되기 전까지는 그 옆에 있었던 아야 이레네 성당이 대신 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성당으로 쓰였다. 이후 아야 소피아가 완공된 후에는, 이 두 성당이 나뉘어 제국의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아엘리아 에우도키아 황후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크리소스토무스는 수도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나 그가 쫓겨나며 함께 일어난 군중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야 소피아가 완전히 불타게 된다. 이 때문에 현재는 첫 번째로 건립된 성당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재건 : 아야 소피아는 소실한 지 약 11년 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 415년 10월 10일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은 건축가 루피누스가 지은 목조 돔을 가진 거대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대성당도 532년 1월 13-14일에 일어났던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와 아야 이레네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 아예 남아 내려오는 것이 없는 첫 성당과는 달리, 두 번째 성당 건물은 아직까지 남아 내려오는 것이 존재한다.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12명의 염소가 새겨져 있는 석재, 그리스식 기둥, 십자가가 새겨진 기둥 등 몇몇 석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1935년에 서쪽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발굴된 석재들은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건 : 532년 2월 23일, 두 번째 성당이 소실된 지 몇 주 정도 지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전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밀레투스의 건축가 이시도로스와 트랄리스의 수학자 안시미오스에게 새 성당의 설계를 맡겼다. 다만 안시미오스는 이 작업에 착수한 지 1년이 채 못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제국의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들이 공출되었으며, 심지어는 지중해를 건너오기까지 하였다. 이 때 로마나 에페수스 같은 고대 도시에서 워낙 많은 양의 기둥들을 빼왔기 때문에, 현재 아야 소피아를 이루는 기둥들은 건축을 위해 따로 다듬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각각 다른 크기와 색을 가지고 있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무려 10,000명이 넘는 인력들이 동원되었으며, 아야 소피아의 건축은 당대 최고의 건축학적 업적으로 여겨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에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나스가 축성을 집전한 가운데 약 5년 10개월 만에 아야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하였다. 다만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지라, 내부의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소재지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즉위식, 결혼식과 같은 제국의 중대 행사들이 이 곳에서 열렸다. 또한 이 곳은 절대적인 성소로 치부되어, 범죄자들이 이 곳 안으로 들어오면 아무리 군대라고 할지라도 그를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노아의 방주에 쓰였던 목재로 만들어진 문,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탁자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는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는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다. 이로 인해 중앙 돔과 동쪽의 반형 돔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 문제가 심화되어 558년 5월 7일에는 중앙 돔이 결국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돔의 엄청난 무게와 지나치게 낮았던 돔의 곡률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곡률이 너무 완만하여 돔의 하중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기둥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즉각 복구를 명령했고, 이시도로스의 조카였던 이시도로스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이시도로스는 더 가벼운 소재를 이용하여 돔을 만들었고, 돔의 높이를 30m정도 더 높여 하중을 최대한 아래쪽을 보낼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돔에 40개의 리브를 설치하고, 직경이 32.7m에서 33.5m에 달하는 4개의 펜던티브를 설치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하였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8개의 거대한 코린토스식 기둥들이 레바논 등에서 공수되어 560년 경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온다. 아야 소피아는 이후 562년 12월 23일에 복구가 완료된 채로 총대주교 유티키우스가 집전한 가운데 다시 축성되었다.
726년에 레오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며 아야 소피아는 또다시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모든 성화와 성물들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파괴하라 명했으며,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기독교 예술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아야 소피아에 있던 종교적인 인물상과 성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후 이리니 황후의 비호 아래 성상론자들이 다시 복귀하기 시작하는데, 테오필루스 황제 때에는 그의 이름의 모노그램을 새긴 청동 문을 성당의 남쪽 입구에 만들어 달 정도였다.
성당은 자연재해로도 큰 피해를 입는데, 첫 번째는 859년의 대화재, 둘째는 869년 1월에 있던 대지진으로도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반형 돔들 중 하나가 무너졌고, 바실리오스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인해 서쪽 돔 아치가 무너져 내렸고,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트르닷에게 재건 작업을 요청했고, 그는 서쪽 돔을 다시 세운 후 15개의 리브를 새로 만들어 이를 보강했다. 이 공사는 약 6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994년 5월 13일에 재개관하였다. 이 공사 때 펜던티브에 4명의 케루빔 형상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돔의 천장에 예수의 모습이 덧붙여졌고, 후진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아치들에는 예언자들과 교회의 주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야 소피아는 4차 십자군 원정 때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아야 소피아를 포함한 모든 건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고, 이때 성당 내부에 붙어있던 황금 모자이크, 보석, 성유물들이 유럽으로 대거 반출되었다. 또한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아야 소피아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보두앵 6세는 이 곳에서 1204년 5월 16일에 비잔티움 제국의 즉위 양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여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하도록 명령한 베네치아의 총독 엔리코 단돌로는 상부 갤러리의 동쪽 면에 무덤이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를 실제 무덤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진짜 무덤은 오스만 군대가 아야 소피아를 점령한 직후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복원한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1261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였지만 성당은 여전히 황폐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1317년에는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자신의 아내가 유산으로 남기고 간 재산으로 성당의 동쪽과 북쪽에 버트레스를 세웠다. 1344년 10월에 지진이 난 이후로 끊임없이 균열들이 발생했고, 1346년 5월에는 몇몇 구조물들이 붕괴하거나 떨어져 내리기도 하였다. 1354년까지는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 기간동안에는 간헐적으로만 성당을 열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병사들이 3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3일 동안의 대약탈이 끝난 이후, 술탄은 약탈이 끝나고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소유로 선포하였다. 당시 아야 소피아도 약탈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이 아야 소피아 속에 가장 값비싼 보물들이 쌓여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병사들은 성벽이 무너지자마자 아야 소피아로 곧바로 향했다. 당시 아야 소피아 내에는 기도를 드리던 사람들, 부상을 입어 싸움에 참여하지 못했던 병사들, 노약자, 여자들이 모여 일종의 피난처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병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후, 노인들과 병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젊은 남성, 소년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특히 여성들은 강간당하거나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아야 소피아 건물 자체도 무자비한 약탈에 시달렸고, 한때 성당을 가득 채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보물들이 이 때 대거 쓸려나갔다. 당시 성당 내부에 있던 정교 성직자들은 병사들이 쳐들어와 그들을 죽이기 직전까지도 신에게 미사를 올리는 등 기도를 드렸고, 전설에 의하면 이들이 살아남아, 나중에 아야 소피아가 다시 성당으로 되돌아갔을 때에 돌아와 미사를 끝낼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편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렸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행했던 한 이슬람 율법 학자가 성당의 강대 위로 올라가 샤하다(하나님 외의 다른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이시다.’를 외쳤고, 이는 아야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탈바꿈시키는 선언이었다.
당대의 아야 소피아를 방문했던 많은 여행자들의 기록과 같이, 비잔티움 제국 말기의 아야 소피아는 전체적으로 퇴락해가고 있었다. 성당의 문이 떼어졌거나, 타일이나 모자이크 등이 낡아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메흐메드 2세는 아야 소피아를 새롭게 보수하는 한편,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할 수 있게 일부 개조하고,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를 새롭게 설치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1453년 6월 1일에 아야 소피아에서 열린 첫 금요일 예배에 참석했고,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서 이름이 바뀜)의 첫 황실 소유 모스크가 되었다. 이 때 이와 함께 도시 내부에 남아있던 상당수의 건물들과 부지, 재산들이 아야 소피아의 소유로 기증되었고, 1478년 경에는 2,360개의 가게들, 4개의 여관, 30개의 주점, 23개의 양 가게가 아야 소피아의 자신들의 수입을 헌납하였다. 1520년과 1547년에는 제국 헌장에 따라 그랜드 바자르에 있는 상점들의 일부가 추가적으로 더 기증되었다.
1481년에 조그만 미나레트 하나가 건물의 남서쪽 모서리에 세워졌고, 후대의 술탄인 바예지드 2세가 아야 소피아의 북동쪽 모서리에 추가적으로 미나렛 하나를 더 건축하였다. 이 두 미나렛 가운데에 하나는 1509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졌고, 16세기 중반에는 미나렛 2개가 동쪽에 1개, 서쪽에 1개가 세워져 서로를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또한 이 때 쉴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정복하면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거대한 청동 촛대 2개를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 옆에 세워놓았다. 그는 아야 소피아 내부 문과 천장, 벽 등에 장식되어 있던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모두 흰 벽토와 회칠로 덮어버리게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 회칠은 1930년대에 터키 공화국의 감독 아래 다시 벗겨졌다.
셀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야 소피아는 눈에 띄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보강 작업에 들어갔다. 미마르 시난은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지어진 골조를 보강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나레트를 건물에 서쪽 벽면에 2개 더 추가하였다. 또한 그 작업과 동시에 술탄의 별장과 영묘를 1577년에 아야 소피아의 남동쪽 귀퉁이에 아름답게 지어놓았다. 참고로 이 영묘에는 나중에 43명의 오스만 왕자들의 무덤이 새로 설치되었다. 새로운 별장의 건축을 위해 아야 소피아의 남쪽 귀퉁이에 있던 건물들 일부가 해체되었고, 주변 24m 내에 있는 모든 주거용 집, 시장 건물, 구조물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또한 황금 초승달이 아야 소피아의 중앙 돔 맨 위에 세워졌다. 무라트 3세는 페르가몬에서 2개의 헬레니즘 시대 항아리를 갖고 와 모스크 본당 내에 설치해놓았다. 1594년에는 무라트3세의 영묘가 설치되어 그와 그의 아내, 황자들이 그 곳에 묻혔다. 1608년에는 무라드 3세의 후계자인 메흐메드 3세의 팔각형 모양 영묘가 만들어졌다. 이후 무스타파 1세는 부속 예배당을 자신의 영묘로 용도를 변환하여 사용하였다.
1717년에는 아흐메트 3세의 명령 하에 부스러져 떨어지는 회칠을 다시 칠했는데,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비잔티움 제국 시절의 모자이크들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당시에는 공사 인부들이 아야 소피아를 보수하며 간간히 나오는 옛 모자이크 조각들을 주워 부적으로 파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처럼 굳어져 왔었는데, 회칠을 다시 칠하며 인부들이 모자이크들을 훼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흐무트 1세는 1739년에 아야 소피아 내부를 새롭게 단장할 것을 명했고, 꾸란의 율법을 가르치는 이슬람 학교를 그 안에 세웠다. 현재 이 학교는 박물관의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 빈자를 구제하기 위한 식당, 도서관, 제례용 분수대 등을 세워 완전한 공공장소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이 때 새로운 술탄들의 영묘와 미흐라브를 새롭게 단장하여 꾸몄다.

.1847년의 보수 공사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1847년부터 약 2년 동안 800여 명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아야 소피아를 새롭게 보수 공사하였다. 이 때 스위스-이탈리아인 건축가인 포사티 형제들이 감독 하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 기둥과 벽들을 다시 똑바르게 세웠고, 돔과 천장의 균열을 메운 후, 아야 소피아 내부와 외부를 새롭게 칠하고 장식하였다. 또한 공사 도중 상부 갤러리에 남아있던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들이 노출되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인해 다시 회칠로 칠해졌다. 본당에 걸려있던 샹들리에들이 교체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캘리그라피 원판들이 새로 걸렸다. 이 원판에는 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4명의 정통 칼리파,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알리의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1850년에 포사티 형제들이 비잔틴 복고양식으로 모스크 뒤 황실 정원에 새로운 술탄용 개인 별장을 지었다. 그들은 미흐라브도 보수하였고, 미나레트 4개도 공사를 거쳐, 완전히 같은 높이가 되도록 맞추었다. 새로운 이슬람 율법 학교도 생겼으며, 이와 같은 복구 작업이 끝난 다음 1849년 7월 13일에 성대한 의식과 함께 다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

.터키 공화국
1935년에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새롭게 터키를 세운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도 치웠고, 이로 인해 바닥에 장식되어 있던 대리석 옴팔리온도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오스만 제국 시대의 회칠도 다시 벗겨내 옛 모자이크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아야 소피아 건물이 다시 약화되기 시작하자, 세계 기념물 기금은 아야 소피아를 관찰 대상으로 선정하고, 철저한 관리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 1988년에 박물관의 구리 돔에 균열이 갔고, 이 균열로 빗물이 새 점차 건물에 습기가 차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위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지반 아래에서도 습기가 올라왔는데, 지하수 상승으로 인해 박물관 내부의 습도가 더더욱 올라갔고, 건물의 석재와 페인트칠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세계 기념물 기금은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후원을 통해 돔을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터키 문화부의 감독 아래, 돔의 균열을 메운 후 안정시켰으며, 돔 안쪽에 칠해져 있던 내부 장식들을 복원하였다. 이 작업은 2006년에 끝났으나, 아야 소피아는 여전히 보수할 곳이 많아 추가적인 보강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추측된다. 아야 소피아는 2014년 기준 사람들이 터키에서 2번째로 많이 찾는 박물관이며, 매년 33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박물관 건물을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나, 2006년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 내의 작은 방을 기도실로 지정하고 아야 소피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2013년부터는 박물관의 미나레트에서 하루에 두 번씩 오후에 무에진들이 아잔 시간을 알린다. 2007년에 그리스계 미국 정치인 크리스 스피로우가 ‘자유 아야 소피아 위원회’를 결성하고 아야 소피아를 다시 성당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2010년대 초반부터는 뵐렌트 아른츠와 같은 전임 총리,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바꾸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2018년 7월 1일에는 85년만에 처음으로 아야 소피아에서 이슬람 의식이 행해졌다. 2017년 5월 13일에는 ‘아나톨리아 청년 연합'(AGD)가 주도한 대규모의 군중들이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한 대규모 기도회를 올렸다. 2018년 3월 31일에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우리의 선조들, 특히 이스탄불의 점령자”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며 꾸란의 첫 절을 낭송하였다. 이로 인해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바꾸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이 강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모스크
2019년 3월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 ‘아주 큰 실수’라고 하며 아야 소피아를 아예 다시 모스크로 되돌릴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다만 아야 소피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에, 아야 소피아를 실제로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유네스코의 허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터키 최고행정법원은 7월 2일부터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환원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법률 검토에 들어갔고, 이같은 움직임에 각국 정계와 국제기구, 종교단체들이 큰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정교회의 최고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박물관으로서 아야 소피아는 민족과 문화의 평화로운 공존과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간 상호이해와 연대를 의미하는 상징이자 장소”였음을 강조하며, 모스크로 전환될 경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이 이슬람에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고행정법원은 7월 10일에 오스만 재국의 황실 재산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한 1934년의 내각 결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으며,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곧바로 서명하였다. 이같은 조치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정교회 등 기독교계의 큰 우려를 샀으며, 그외에도 미국과 EU 등에서도 유감을 표시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공식적으로 모스크로 용도 전환됨에 따라 모스크 내부에 있던 동로마 제국 시대의 성화들과 유적들은 커튼이나 융단으로 가려졌다. 터키 정부 측에서는 모자이크나 유적들을 기도 시간에 가리기는 하겠으나, 훼손을 하지는 절대로 않겠다고 밝혔다.
7월 24일 아야 소피아는 예정대로 모스크로 개방되었으며, 86년만에 이루어지는 첫 금요 기도를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모스크 환원 정책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에 에르도안 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푸아트 옥타이 (Fuat Oktay) 부통령과 무스타파 쉔톱 (Mustafa Şentop) 국회의장 등 고위 공직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첫 금요 기도에서 대표로 쿠란 1장 파티하 (Fâtiha)와 2장 바카라 (Bakara)를 암송했다. 이날 에르도안 대통령은 파티흐 모스크에 소재한 오스만 황제 메흐메트 2세의 묘소를 참배한 후 “아야 소피아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였다가 재차 모스크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모스크 환원 결정에 대해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 이후 제2의 정복이 이루어졌다고 비유했다.

– 소피아성당 건축이야기와 구조
아야 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손 꼽히는 동로마 제국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 내부는 모자이크와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다.” (Νενίκηκά σε Σολομών)라는 유명한 말로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하에 완공되었을 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성당이었고, 스페인에 세비야 대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약 1,000여년 간 이 명예를 갖고 있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고대 후기의 건축 양식과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걸작이었다. 당대에 워낙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수많은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이슬람 사원들이 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아야 소피아는 그 거대한 크기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당의 신랑은 거대한 돔으로 덮여 있는데, 이 돔은 바닥에서 무려 55.6m나 되는 높이에 놓여져 있고, 또한 40개의 아치형 창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케이드 위에 올라가 있다. 성당이 지어질 당시에는 이 돔이 완벽한 원형으로 설계되었으나, 나중에 보수 공사를 거치며 돔은 약간 타원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때문에 돔의 직경은 최대 31.24m에서 최소 30.86m까지 그 길이를 달리한다.
성당의 서쪽 입구 부분과 동쪽 전례 부분에는 튀어나온 반원형의 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 거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이 부분 또한 별도의 반원형 모양의 추가적 돔으로 덮여 있다. 성당의 내부는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녹색과 백색, 자주색 반암들과 황금 모자이크들로 덮여 있다. 또한 현재의 성당의 외관은 붉은색과 노란색의 치장용 벽토로 덮여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복원하며 새롭게 칠해진 것이다.

.상부 갤러리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장구한 세월 동안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반달리즘과 같은 종교적, 사회적 테러 행위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대성당의 외관에는 이와 같은 피해 흔적들이 남아있어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혹시라도 성당의 내부 구조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성당의 상부 갤러리에 레이더 등을 이용한 검사를 실시했다. 연구팀은 이 검사를 통해 상부 갤러리의 구조에 약간의 결함이 생겼음을 발견하였으며, 돔의 곡률이 원래 지어졌을 때보다 약간 어긋나 비례를 이루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상부 갤러리는 성당의 후진 부분이 있는 동쪽 면을 제외한 성당의 3면을 둘러싼 말굽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부 갤러리에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몇몇 모자이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부분은 본디 황후와 그녀의 궁정 인사들이 미사에 참석하거나 회의를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으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모자이크 장식들은 남쪽 면에 있다.
.돔
아야 소피아 성당의 돔은 그 혁신적인 건축 방식과 모습으로 인해 수많은 건축가들과 미술가, 설계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돔은 4개의 삼각 궁륭이 받치고 있다. 이 궁륭들은 성당 바닥의 정사각형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기둥들로부터 솟아올라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며 휘어져 돔의 거대한 하중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돔의 무게가 측면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고, 하중이 아래로 곧바로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었다. 이 돔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펜던트형 돔이었으며, 이와 비슷한 양식을 지닌 다른 돔들과 비해 확연히 낮은 높이의 돔이었다.
돔의 지름은 107피트에 달하지만, 그 두께는 오직 2피트 밖에 되지 않는다. 성당의 주 재료는 벽돌과 모르타르인데, 돔의 벽돌 골재는 당시 설계자들이 돔을 짓는 것을 더욱 쉽게 하였고, 입방 피트마다 150파운드 밖에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무게는 당시의 석조 건축이 지탱할 수 있었던 평균적인 무게이기도 하였다. 본디 설계도에는 순수 석재를 이용하여 돔을 지으려 했으나, 벽돌 재질이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된 것이기도 하였다.
돔의 하중을 지탱하는 일은 아야 소피아의 건축가들이 가장 고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성당의 큐폴라는 558년의 지진으로 인해 이미 한 번 완전히 무너진 바 있는데, 이 돔은 563년에 이시도로스가 다시 복구하였다. 새로 복구된 돔은 40개의 리브를 가지고 있었으며, 20피트 정도 더 높게 지어져 하중을 더욱 많이 벽 쪽으로 분산하여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이 돔도 또 붕괴하거나 균열이 가며 문제가 생기는 등 복원, 복구 작업을 거쳐야만 했고, 지금까지 563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북쪽과 남쪽 부분 뿐이다. 참고로 563년에 지어진 40개의 리브 가운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남쪽에 6개, 북쪽에 8개 정도만이 남아있다.
사실 원래 이러한 구조와 설계들은 돔과 이를 떠받치는 벽과 아치들을 모두 효율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구조였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였다. 당대의 벽돌공들은 벽돌들을 서로 굳게 하기 위해 모르타르를 사용하였는데,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지을 때부터 워낙 건축 속도와 완공 시기를 빠르게 하여 짓기 위해 모르타르가 채 굳기도 전에 다음 층의 벽돌들을 끊임없이 올려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돔이 만들어졌을 때는 이미 그 벽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건축가 이시도로스가 성당을 복구할 때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이 벽의 내부를 다시 쌓아 기울어진 벽을 다시 수직으로 만드는 일이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새로운 돔의 높이를 20피트 정도 더 높여 최대한 하중이 옆으로 새지 않고 곧바로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에는 수많은 빛줄기들이 들어와 서로 부딪히는 효과를 내는데, 이 때문에 마치 내부 공간이 위에 떠있는듯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효과는 성당 중간중간에 나있는 수많은 창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창문들이 많으면 심미적 효과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도 있었다.
.미나레트
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총 4개의 미나레트들이 세워져 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후에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며 따로 세워진 것이다. 미나레트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인데, 공식적인 행사 개최나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메흐메드 2세는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직후 사원의 반원형 돔 위에 목재로 된 미나레트를 하나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 미나레트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나렛들 중 동남쪽에 있는 미나레트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바예지드 2세 때 만들어진 것이다. 나머지 3개는 백색 석회암과 사암으로 지어졌는데, 이 중 북동쪽 미나레트는 셀림 2세의 재위기간 동안에 바예지드 2세의 명에 의해 완공된 것이며, 서쪽에 있는 2개의 거대한 두 미나레트는 그 높이가 약 60m에 달하는데, 이는 셀림 2세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 두 미나레트는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수많은 복구, 추가 작업들을 거치며 미나레트들은 15세기, 16세기, 19세기의 건축 양식들을 복합적으로 지니게 되어 뛰어난 예술사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버트레스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수많은 버트레스들이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특히 건물 서쪽 부분에 있는 버트레스들은 원래 십자군 전쟁 시절 십자군 기술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후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비잔티움 제국 시기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이때 이미 버트레스의 건축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 건물의 붕괴나 균열 등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버트레스들이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감독 하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총 24개에 달하는 버트레스들이 만들어져 건물의 벽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다.

블루모스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t Camii)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대표적인 모스크로, 세계문화유산인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유서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따라 1609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7년이란 공사기간 끝에 1616년에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불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가운데 커다란 돔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은 형태로 구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 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4단을 이루며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른다. 직경 23.5m의 거대한 중앙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모스크의 안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 등 사회 시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퀼리예라고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 이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모스크 양쪽에 쭉 뻗어 세워진 미나렛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이중 모스크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로 이 남쪽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모스크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과 푸른빛의 260개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로 부르기보다는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 하여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은 현재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돔은 네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육중하게 만들어진 이 기둥은 직경이 5m가 넘어 일명 코끼리의 다리라고 불린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민바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설교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여름에는 모스크의 내부를 아름답게 밝혀주는 조명이 켜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의 바로 북쪽 자리에 히포드롬이라 불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경기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히포드롬에는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청동 뱀 기둥, 유스티니아누스 기념탑 등 세 개의 기념물이 독일이 만들어 기증한 분수대와 함께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Dikilitaş)는 터키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광장에 위치한 오벨리스크이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들여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경마장의 트랙 안쪽에 세우게 하였다. 붉은 화강암을 조각한 것으로, 원래는 기원전 1490년 투트모세 3세 시대에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 오벨리스크를 3개로 분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운반했다. 현존하는 것은 상단 부분이며, 대리석 받침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만들게 한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매우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광장의 한 가운데 있는 세 마리의 뱀이 기둥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한 청동기둥 셀펜타인 기둥 (Serpentine Culumn)은 BC 479년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 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녹여 만들어 아폴로신전에 바쳐진 청동 기둥으로 원래 8m 높이에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머리가 떨어져나가 현재는 5.5m 높이로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피 아폴로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다 세웠다고 한다.


발렌스의 수도교와 테오도시우스 성벽
이스탄불 시내를 버스로 이동하며 여러 번 발렌스의 수도교를 목격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발렌스 수도교 (Valens Su Kemeri or Bozdoğan Kemeri)는 로마 제국의 발렌스 황제 시대인 37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20m 높이에 2층짜리 아치가 지탱하도록 석조 수도를 만들었다.
고대 로마를 거쳐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이곳을 통해 많은 저수지의 물이 도시로 배달되었다. 1,700년이 넘은 유적 밑으로 차가 지나다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수도교 위로 올라가는 것이 제한되기 때문에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며, 밤이 되면 다리에 조명이 들어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수도교를 볼 수 있다.
이스탄불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해변가 거리에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끼고 걸어 이동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이 성벽의 높이는 약 12m나 되며 이중 삼중으로 건설되어 방패막 역할을 잘 하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가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가능했다.
이렇게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이스탄불 보스프러스 전세선으로 보스프로스 해협을 유람 후 이집시안바자르,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등을 관람했다. 관람을 마치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따라 이동하며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식당에서 생일을 맞은 일행 축하와 회고의 시간을 갖고 한국행 야간 비행기에 올랐다.
이스탄불에서 한국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는 1만 킬로미터 정도로 비행시간은 약 11시간 정도이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오늘을 돌아본다. 아침에 유람선 일정을 시작으로 소피아성당과 오벨리스크, 발렌스 수도교와 테오도시우스 성벽 등을 둘러보며 느낀 이스탄불의 이미지는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오스만제국 등 동서양이 혼합된 복잡다다한 사람들과 문화들의 용광로와 같다는 것이었다.

한국 도착해 다산의 유배지 강진으로
11월 1일 저녁비행기로 터키 이스탄불은 출발한 우리 일행은 밤새 대한민국 인천공항을 향해 달리고 달렸다.
밤새 자다 깨다 하며 그리스와 터키에서의 일정을 돌아본다.
10월 21일부터 27일 사이 그리스 방문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지형, 사건들을 접하고 정리해야 할 숙제거리가 참 많이 생겼다. 인생에 아련한 추억이 될만한 사진도 남겼다.
10월 28일부터 11월 2일 사이 터키를 방문하며 그리스에서 먼 거리지만 알렉산더의 영향력과 헬라문명 화려함과, 그리고 신앙수호의 치열함도, 터키식 캐밥과 심각한 교통문제도 맛봤다. 헬라문화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기독교와 이슬람 신앙의 통일성과 다양성, 상이성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꿈만같다. 그런 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비로은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11월 2일 정오경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입국수속 후 공항을 나와 대기중인 전세버스에 올라 곧바로 한국에서의 첫 방문지인 다산의 유배지 강진으로 향했다. 강진으로 향하는 우리 일행은 지난 여행의 소감을 돌아가며 나눴다. 무엇보다 날마다 일기를 쓰신 홍길복 목사님께서 여행일기를 읽어주시는 시간은 인상 깊었다.
강진가는 길에 단풍여행객이 많아서인지 시간이 지체되었다. 시간은 빨리 지나 저녁시간이 되어 한식당을 만나 저녁식사를 나눴다.
인천공항에서 전라도 강진까지의 이동거리와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강진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예약된 호텔에 짐을 풀고 한국의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며 고국의 정취를 만끽했다.
강진 일정 후 안동으로
11월 3일, 간밤에 도착해 강진에서 일박한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곧바로 오늘 일정을 시작했다. 오늘 일정은 만덕산과 백련사,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사의재, 영란문학관, 강진 갈대축제 등을 관람하고 다음 행선지인 안동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첫일정을 시작하려 버스에 오르자 해설사분이 자신을 소개하며 오늘하루 일정에 대해 나누고 강진에 대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만덕산과 백련사
우리 일행은 다산의 유배지 강진일대를 둘러보는 첫 일정으로 만덕산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다. 만덕산 (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 (萬德寺)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 (문성왕 1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 때부터 백련사라고 불렀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원묘국사 요세 (了世)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요세는 고려 후기 불교 정화 운동으로서 백련결사라는 신행 단체를 결성하였다. 다만 백련결사가 연구하고 설파한 내용은 관련 자료가 현재까지 전해진 게 없어 파악할 수 없다.
절 입구에 동백나무 군락이 유명하며 어느정도 올라오면 강진만이 보이며, 인근에는 다산초당이 있는데 이 절과 이어지는 오솔길이 만덕산 안에 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이 절에 있던 혜장 스님과 친하게 교류하면서 이 길을 자주 오갔다고 한다.


다산초당과 다산박물관
백련사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산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초당 (茶山草堂)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문화재이다. 1963년에 다산초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 일대가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공식 명칭은 강진 다산 정약용 유적 또는 강진 정다산 유적이다. 원래는 초가로 있지만 현재는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유적지로 불리고 있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 중 10년동안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1800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시련이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선 가톨릭 신자이자 다산의 조카딸 사위로 알려진 황사영이 청국에 있는 가톨릭 주교인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 (帛書)를 보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황사영 백서 사건) 여기에 보수 유학파 (儒學派) 신하들로부터 서학 (西學, 가톨릭 교리)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인신 공격과 모함까지 이르면서 결국 현재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 간의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 (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 (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사의재는 강진군이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 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 (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 (尹慱, 1744 ~ 1821)의 산정 (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 (尹奎魯, 1769 ~ 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 (1801 ~ 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 가량 (1808 ~ 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 (恭齋 尹斗緖, 1668 ~ 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다산초당은 1963년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초당 (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우리 일행이 방문하 2019년까지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우리 일행은 해설사분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다산초당을 내려와 다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다산박물관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 강진에 남겨진 흔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다산박물관은 다산선생이 생전에 남긴 친필 간찰과 저술, 주변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보관·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자료들로 다산선생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어린이와 가족·청소년·공직자와 단체가 참여하여 강진에서 다산선생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도록 다산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의재와 영란문학관
다산초당과 기념관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사의재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강진 사의재 (康津 四宜齋)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이 현재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 최초로 머물렀던 조선시대 주막집이다.
다산 정약용이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서 보수 유학파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 최초로 머물렀던 주막집이다. 다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되었으며 강진 고을에 들면서 지금의 이 곳에 4년 동안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죄인이 강진으로 내려왔다고 하여서 주막 손님들과 백성들이 기피하였으나 유일하게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주막 노파가 호의를 베풀어주며 4년동안 이 곳에서 머물도록 주선해주었고 다산은 이 곳에서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내왔다. 그리고 보은산방으로 떠나게 되면서 호의를 베풀어 준 주막 노파에게 감사의 뜻으로 주막을 사의재라는 이름으로 지어주었다.
사의재는 네 가지를 마땅히 뜻을 이뤄야한다는 방이며 용모, 말씨, 성품,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 강진군에서 다산 실학성지 조성에 따라 현재의 강진읍 동성리 일대에 복원하였으며 강진군 문화해설사가 주막을 운영하면서 해설사로 역할을 맡고있다.
시문학파는 1930년 창간된 《시문학》을 중심으로 시인 박용철(朴龍喆), 김영랑(金永郞) 정인보(鄭寅普), 변영로(卞榮魯), 이하윤(異河潤), 정지용(鄭芝溶), 그리고 뒤늦게 김현구(金玄鳩), 신석정(辛夕汀), 허보(許保)가 참여하여 순수시 운동을 주도한 것을 말한다. 이들 시인들은 당시 정치색이나 사상을 투영하던 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반발하여 순수서정시를 지향했다.
강진군 영랑생가길에 있는 ‘시문학파기념관’은 지난 2012년 개관했다. 정문에는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3인의 시인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선생의 동상이 작열하는 8월의 태양 아래 의연하다. 그리고 동상 뒤로 9인의 시인 얼굴이 동판에 새겨져 문학관을 기세 좋게 아우르고 있다. 그러고보면 이미 입구에서 시작된 김현구 거리와 문학관 측면에 잘 정리된 김영랑 생가까지 가히 강진군은 문학의 숨결이 도도히 흐르는 곳이다.

강진 갈대축제
시문학파기념관과 김영랑 시인 생가를 방문하고 강진만생태공원에서 열린 ‘강진 갈대축제’ 현장으로 이동했다.
강진만생태공원은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둑이 없는 하구로 다양한 생태자원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으며 1,131종 생태다양성의 보고로 매년 2,500여 마리의 큰고니가 방문하는 집단 서식지로 유명하다.
강긴 갈대축제 현장에는 갈대와 국화가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볼거리와 함께 먹거리도 풍성했다.
갈대축제 현장에서 우리 일행은 강진 일정을 마치고 안동으로 이동했다.
강진에서 안동까지의 거리는 280킬로미터 정도로 만만찮은 거리다. 부지런히 달려 안동에 도착하니 9시가 가까웠다. 감사하게도 그때까지 간고등어식당 사장님은 우리 일행을 기다려주셔서 맛나게 저녁식사후 가까이에 위치한 월영교를 한바퀴 도는 산책시간도 가졌다.
예약된 호텔도 정결하게 준비된 숙소로 만족도가 높았다.

안동 일정 후 상경해 ‘2019 시드니인문학여행’ 마무리
간밤에 안동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여독을 풀고 11월 4일 ‘2019 시드니인문학여행’의 끝날 일정을 시작했다.
11월 14일, 호텔에서 조식 후 곧바로 일정을 시작했다. 오늘 일정은 도산서원, 하회마을, 병산서원 방문후 상경하는 일정이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조식 후 도선서원으로 향했다.

도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어,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1975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1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도산서원 관련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 보물 제210호 :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기 위한 강당이다. 전교당의 맢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 보물 제211호 : 도산서원 가장 뒷쪽에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강세황필 도산서원도 – 보물 제522호
안동 도산서원 – 사적 제170호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안동 도산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 (安東 河回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전통 민속마을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들은 보물 2점, 국가민속문화재 9점 등을 포함하여 11점이고 이밖에 국보 2점이 있다.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제34차 회의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풍산 류씨 집안의 발상지이며 그들의 자손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과 겸암 류운룡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거의 제일은 평양이요, 계승의 제일은 하회’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류성룡은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 (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탈 중 가장 오래된 탈이다. 지금은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9개의 탈만 전해지며, 이 중 3개의 탈은 분실되었다.

하회마을은 무엇보다 고택이 유명하다.
.입암고택 또는 양진당
보물 제306호인 입암고택은 입암(立巖)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 또는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른다. 현재 풍산 류씨 겸암파의 대종택으로 보물 제306호이다. 사랑채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가지며, 안채는 조선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고려와 조선의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충효당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은 서애의 문하생과 삼림들이 장손 류원지를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류의하에 의해 확장된 조선시대 사대부 양식의 고택이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 선생의 저서와 유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작천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87호로 작천고택 또는 류시주 가옥이라고 부른다. 원래 작천 류도관의 호를 따서 작천고택이라고 불렀는데, 현재의 집주인인 류시주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도 한다.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다랐으며, 1934년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고 현재는 일자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는 작은 토담을 쌓아 사랑방 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만든 것이 재미있는 특징이다.
.하동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177호로 하회마을 동쪽에 있다고 하여 하동고택이라고 불린다.
.귀촌고택
풍산 류씨 귀촌파(龜村派)의 종가집이며, 사당에는 귀촌 류경심 공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의 어머니 영양남씨와 며느리 문소김씨는 모두 열녀로 정려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북촌댁
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로 북촌댁은 1797년 정조 21년에 지중추부사 류사춘에 의해 처음 건물이 세워졌고, 1862년 철종 13년에 경상도도사 류도성에 의해 증축되어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을 북쪽의 99칸 집으로 불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 별당,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 집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큰 사랑채인 북촌유거와 중간 사랑인 화경당, 작은 사랑인 수신와를 비롯하여 안채, 등이 있고, 류이좌의 유품이 몇 점 남아 있다. 2007년 2월 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2008년 한류스타 배용준이 이곳 화경당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남촌댁
국가민속문화재 제90호로 정종 21년 지은 99칸의 건물로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하였으나,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내부에 있던 진귀한 도서와 골동품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있다.
.주일재
주일재는 국가민속문화재 제91호로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랑채가 이고, 왼편으로 내외담이라고 하는 작은 담장이 있다. 안채로 통하는 문 앞에 쌓아서 안채가 보이지 않게 하였다.
.지산서루
지산서루(志山書樓)는 대문없이 널찍한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고택이다. 사랑채는 정사와 유사한 형태로 지어졌으며, 우승지와 대사간을 지낸 류지영이 독서에 매진하기 위해 지은 도사관이다. 그의 호를 따서 사랑채 이름을 지산서루로 하였다.
.하정재
원지정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택으로 사랑채의 마루에서 보면 부용대와 시내가 한눈에 보이며 동쪽으로는 화산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전형적인 선비의 음풍농월을 즐길 수 있는 고택이다.
.담연재
담연재는 신축된 전통양식의 저택이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때 이곳 앞마당에서 하회탈춤 공연이 펼쳐졌던 곳이다. 탤런트 류시원의 부친 소유의 저택이다.

병산서원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하회마을에서 오찬까지 나눈 우리일행은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사적 제260호로 1572년 서애 류성룡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서원이다. 서애의 사후 7년 후인 1614년 서애를 존경하던 사림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류성룡을 배향하였고, 서애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 사후에 그도 배향하였다. 1863년 병산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이렇게 우리 일행은 오늘 하루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병산서원까지 방문일정을 마쳤다.
모든 순례 일정을 마치고 상경하며 휴게소에서 차담도 하고 그동안 여행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갖으며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홍길복 목사님께서는 그동안 쓰셨던 여행일기를 읽어주셨다. 그때그때마다 드신 생각들을 진솔하게 써내려가신 목사님의 섬세함이 잘느껴지는 여행일기였다. 홍길복 목사님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 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며
10월 22일 시드니에서 출발한 인문학여행단은 아테네를 첫 행선지로 근대올림픽 경기장,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술관, 아크로폴리스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 감옥터 등을 방문 후, 야간 페리로 유럽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으로 이동했다. 크레타에서는 베네치아 성채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크로소스궁전과 고고학 박물관, 이라클리오 일대, 디도기념교회 등을 방문 후, 이어 다시 야간 페리로 고린도로 이동해 고린도운하,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 유적지(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등을 방문했다. 이어 올림피아로 이동해 최초의 올림픽을 시작한 곳, 성화채화 터, 김나시오, 올림픽 대경기장과 신전터 등을 둘러 보았다. 일정 5일차에는 델피로 이동해 아라호바 마을, 델피박물관, 옴파로스, 델피 유적지를 살핀후 메테오라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에서 수녀원공동체를 한곳 방문 후 인근 호텔에서 일박, 다음날 새벽부터 메테오라 수도원공동체를 순례했다.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공중에 달려있는 듯 했다.
6일차 일정을 마치고 인문학여행단은 그리스 국경을 넘어 터키로 입국했다. 차낙칼레 해협을 페리로 넘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안작연합군이 큰 희생을 입은 갈리폴리 전투지 해안을 볼 수 있었다. 이어 ‘트로이’로 유명한 아이발릭에 도착해 터키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7일차에는 에베소를 찾았다.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극찬 받았던 버가모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에베소에서는 유적입구에 누가의 무덤, 에베소 거리,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 원형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아카디아거리, 마리아의 집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에베소에 이어 밀레토스로 이동해 이오니아의 스토아 흔적, 대 원형경기장, 대규모의 아폴론 신전 등을 볼 수 있었다. 일행은 파묵칼레로 이동해 일박했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란 이름답게 환했고, 히에라폴리스는 온천요양으로 유명세가 날만큼 충분히 온천수가 샘솟았다. 히에라폴리스에는 고대 주거지역과 원형경기자, 필립 순교지 등의 유적이 있었다. 파묵칼레에서 장거리를 달려 다음행선지인 카파도키아에 도착해 일박했다. 카파도키아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아 숨어 지내던 땅속 도시 데린쿠유, 기암괴석의 괴레메 골짜기,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은 우치사르 등을 방문 후 카이세리공항에서 비행기로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이스탄불 보스프러스 전세선으로 보스프로스 해협을 유람 후 이집시안바자르,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등을 관람 후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식당에서 생일을 맞은 일행 축하와 회고의 시간을 갖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해 강진과 안동에서 한국일정도 잘 가졌다. 이렇게 상경해 일단 해산한 우리 일행은 2019년 11월 11일 인천공항에서 모여 호주로 귀국했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