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그럴 수가, 그럴지라도 (하박국 3장 17–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지난주는 에스겔서 36:26-27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새영과 새마음 그리고 내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새영은 거듭난 우리의 영이고, 새마음은 변화된 우리의 성품이고, 내영은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영을 통해서 ‘신분의 변화’를 받고, 새 마음을 통해서 ‘성품의 변화’를 받습니다. 신분의 변화를 칭의라고 하고, 성품의 변화는 성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은 하박국 3장 17-18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럴 수가, 그럴지라도’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순간들을 만납니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릴 때가 있고, 열심히 준비한 일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갑자기 찾아오면 우리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럴 수가”
현실이 믿기지 않고, 감정은 흔들리고, 마음은 멈춰 서 버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삶에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탄식 속에는 실망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씩 다듬어지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이 말은 마음에 여백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되고,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이 여백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가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럴지라도”
“그럴지라도”는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픔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전히 어렵고,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가지 마음의 상태를 통해 함께 피차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 ‘그럴 수가’는 마음의 충격입니다
“그럴 수가”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현실에 부딪힐 때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내가 기대했던 관계가 무너지고, 내가 생각했던 계획이 어긋날 때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이 말 속에는 실망과 분노와 슬픔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충격은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습니다. 가까울수록 더 많은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사랑하니까 등의 수식어를 통해서 많은 기대를 합니다. 자신의 기대가 무너질 때 마음의 충격을 받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쏜 화살은 멀리서 쏜 화살보다 더 정확하고 더 치명적인 상처를 줍니다.
신앙은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충격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놀랄 수 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울 수 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그럴 수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탄식이 하나님을 떠나는 원망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현실을 바라보며 마음에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되고, 정의가 무너지고, 폭력과 불의가 가득한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여, 왜 침묵하십니까.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십니까”
하박국은 하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세상에 불의가 이렇게 많습니까? 왜 악한 사람들이 득세합니까?”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합 1:6)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다의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더 악한 자를 통해 심판하시는 것이 옳습니까?” 유다도 죄가 있지만, 바벨론은 유다보다 더 잔인하고 악한 민족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신앙인의 깊은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현실의 모순 사이에서 하박국은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더딜지라도 악인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러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합 2:4)
- ‘그럴 수도’는 마음의 여백입니다
“그럴 수가”의 충격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면, “그럴 수도”라고 마음의 여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을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말도 아닙니다. 마음의 여백이 없으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여백이 생기면 사건 뒤에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 새신자가 늘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로님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개는 늘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뭐라고 말씀 좀 하시죠”, “그분은 지금 암 투병 중입니다. 독한 약을 먹다 보니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가 있습니다. 산을 다 그리지 않고, 물을 다 채우지 않으며, 하늘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비어 있는 공간이 그림을 허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여백이 산을 더 깊게 하고, 물을 더 넓게 하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림 안으로 초대합니다.
동양화의 여백이 그림을 살리듯, 마음의 여백은 사람을 살립니다. 여백이 있는 그림은 깊어지고, 여백이 있는 마음은 넓어집니다. 그 마음 안에서 분노는 성찰이 되고, 상처는 기도가 되며, 판단은 긍휼로 바뀝니다.
여백은 여유입니다. 여유는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얼굴에 미소가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인생의 성적표’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품어 온 감정은 결국 얼굴에 흔적을 남깁니다.
지속된 분노는 표정을 굳게 만들고, 감사와 따뜻함은 얼굴을 부드럽게 합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일수록 얼굴은 늘 긴장되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 저는 거울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옆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인사하시죠. “좋은 점수를 받으셨군요”
마음의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공간입니다. 자기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성령이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워 두면, 그 빈자리는 곧 하나님의 지혜와 위로와 인도하심이 채우는 자리로 변합니다. 성령 충만은 내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하덕규 목사님이 시드니에 집회차 왔습니다. 하 목사님이 작사하고 작곡한 ‘가시나무’를 마지막 찬양으로 불렀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우리 생각으로 우리 마음이 가득 차면 성령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7월 2일은 구세군 창립자 주일입니다. 1865년 7월 2일에 동부 런던에서 구세군이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일 Fairfield Corps에서 지역 지도자들이 함께하는 ‘Area Gathering’이 열렸습니다. 주제는 ‘Empowered faith community’로 침례교 목사인 ‘Mark’이 와서 인도를 했습니다.
그는 ‘모이는 교회’보다 ‘흩어지는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각자의 지역공동체를 신앙공동체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도자는 ‘Servant Heart’를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섬기는 마음입니다. 과거의 Top-Down식의 권위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남을 섬기는 마음이 마음의 여백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은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 이 말은 내가 받고 싶은 존중, 내가 듣고 싶은 말, 내가 원하는 배려를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뜻입니다.
- ‘그럴지라도’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럴 수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여백을 지나 마침내 “그럴지라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럴지라도”는 신앙의 가장 깊은 고백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픔이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럴지라도”는 여전히 어렵고,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 마음의 방향을 두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한국에 사는 정교님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란 찬양을 보내 주면서, “오늘은 주님께서 심금을 울리시네요~”라고 썼습니다. 찬양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가장 후회하지 않는 일, 예수를 따르는 일, 내 그물 버리고, 내 사랑들 뒤로 하고, 나를 부르신 주님과 동행하는 일, 나의 평생에 소원하는 일, 예수를 닮아 가는 일, 굳은 마음 제하시고, 사랑을 가르치신, 나의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
찬양을 듣고 답장을 했습니다. “정교님, 정말 그래요. 인생을 돌아보면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예수를 믿고, 예수와 동행하고, 예수를 닮아가며, 사관으로 헌신한 일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어떤 사람으로 변해 있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한국 Basic 교회를 섬기는 조정민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IMBC 사장이었습니다. 47세 때 예수를 믿고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믿기 전에는 자기중심의 세계를 살았는데, 믿은 후에 예수 중심의 세상을 살게 되어,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조금 더 일찍 믿었더라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것보다 잘 사는 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교회 조용석 부교님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부교님은 시드니에 와서 예수를 믿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은 믿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압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자기중심의 세계관에서 예수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됩니다. 세계관의 변화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이 새롭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두려웠던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하박국 3장 17-18절은 모든 것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습니다. 밭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활이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져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더라도 하나님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구원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이시로다.” (시편 18:2)
결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인생에는 “그럴 수가”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럴 수도”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마음의 여백을 주십니다. 사람을 더 깊이 보게 하시고, 상황을 더 넓게 보게 하시며, 내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시간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우리를 “그럴지라도”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모든 것이 다 이해되지 않아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아도, 모든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 마음의 방향을 두게 하십니다. 마음의 충격은 사람을 멈추게 하지만, 마음의 여백은 사람의 마음을 넓히고,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을 향하여 걷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럴 수가”의 충격을 넘어, “그럴 수도”의 여유를 가지고, “그럴지라도”의 결단으로 오늘을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침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럴 수가”라고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기대가 흔들리고, 믿음까지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그럴 수도”라는 마음의 여백을 주옵소서.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을 더 깊이 보게 하시며, 상황을 더 넓게 이해하게 하옵소서. 내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시간과 뜻을 인정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 마침내 우리에게 “그럴지라도”의 믿음을 주옵소서.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을 따라가게 하시며, 마음이 아플지라도 사랑과 충성을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박국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영과 새마음 그리고 내영’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서론
우리는 지금 에스겔 서를 읽고 있습니다. 어제 읽은 28장은 두로 왕의 멸망을 예언한 글입니다. 두로가 멸망하는 것은 외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외적인 풍성함으로 인한 내적인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두로 왕에게 많은 풍성함을 허락하셨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만하여 멸망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할 때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교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아킬레스건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교만이 믿지 않는 사람의 교만보다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적인 교만’이지만, 믿는 사람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금식이 교만이 될 수 있고, 헌금이 교만이 될 수 있고, 철야기도가 교만이 될 수 있고, 직분이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때, 축복은 우상이 되고, 능력은 교만이 되며, 번영은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착각하는 순간, 그 은혜는 축복이 아니라 교만의 도구가 됩니다.
간증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간증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랑으로 전락되어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고, 창세기 11장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교만 때문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타락도, 인간의 흩어짐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잃었고, 성전을 잃었고, 나라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상실이 아니라, 내면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이 바뀐다고 반드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가 바뀌고 형편이 나아지고 조건이 좋아져도,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같은 죄와 같은 불순종을 반복합니다.
에스겔 1장 1절에 에스겔이 30세 때에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하여 말씀을 대언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 36장 26–27절은 에스겔서에서 중심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너진 백성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새 영, 새 마음, 그리고 내 영, 곧 성령입니다.
“새 영”은 “새 영”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살리신 거듭난 인간의 영입니다.
“새 마음”은 그 새로워진 영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삶의 태도 속에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내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영을 주십니다.
본문은 먼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새 영은 인간 안에 새롭게 된 영적 생명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 둔감해지고 죽었던 인간의 영이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과 육만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할 영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죄는 인간의 영을 어둡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은혜를 받아도 감사하지 못하게 하며, 죄를 지어도 아파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상태입니다. 종교적인 형식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교회의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영적 생명이 살아 있지 않으면 말씀 앞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새 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죽은 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새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난 영입니다. 새 영은 거듭난 인간의 영입니다. 새 영은 성령의 역사로 다시 하나님께 반응하게 된 인간의 깊은 중심입니다.
새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말씀을 들어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전에는 죄를 지어도 무감각했지만, 이제는 죄 앞에서 마음이 아파집니다. 전에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반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영을 두셨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은 새 영을 주실 뿐 아니라 새 마음을 주십니다. 새 영이 인간 존재의 깊은 영적 중심이 새로워지는 것이라면, 새 마음은 그 새로워진 영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옛 마음을 “굳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굳은 마음은 돌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셔도 돌이키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아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굳은 마음은 여러 이유로 생깁니다. 반복된 죄가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오래된 상처가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교만과 자기 의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실망과 두려움도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사람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지만, 닫힌 마음은 결국 하나님께도 닫히고 이웃에게도 닫히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사람의 마음 상태를 4가지 마음밭으로 비유합니다. 같은 씨가 뿌려져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어떤 마음은 길가처럼 굳어 있어 새가 와서 먹습니다. 어떤 마음은 돌밭처럼 얕아서 잠시 기뻐하다가 어려움이 오면 금세 흔들립니다.
또 어떤 마음은 가시밭처럼 염려와 욕심이 가득해 말씀이 자라지 못합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그것이 커져 보입니다. 문제에 집중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염려에 집중하면 염려가 커지고 육심에 집중하면 육심이 커집니다. 그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 집중하여야 합니다. 좋은 밭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굳은 마음이란 길가와 같은 마음이고 부드러운 마음이란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약한 마음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는 마음입니다. 말씀 앞에 떨 줄 아는 마음입니다. 죄 앞에서 회개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은혜 앞에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고통 앞에서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입니다.
새 마음은 새 영의 열매입니다. 속사람이 하나님께 살아나면 마음도 바뀝니다. 마음이 바뀌면 말이 바뀝니다. 말이 바뀌면 관계가 바뀝니다. 관계가 바뀌면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겉으로만 고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자동으로 부드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항상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익숙해지면서도 마음은 굳어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내 영’을 두십니다.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서 “내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십니다. 앞에서 말한 “새 영”이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된 인간의 영이라면, 여기서 “내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4장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 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릴지니라”(요 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란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오는데 ‘프뉴마’입니다. 첫 번째 영은 하나님의 영이고 두 번째 영은 거듭난 우리의 영입니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거듭난 우리의 영이 드리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식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새 영은 성령 그 자체가 아니라 성령께서 새롭게 하신 인간의 영입니다. 그러나 “내 영”은 성령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순종의 삶으로 이끄십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롬 8:9).
신앙생활은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자주 넘어집니다. 사랑해야 하는 줄 알지만 미워합니다. 용서해야 하는 줄 알지만 마음에 붙잡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줄 알지만 염려합니다. 순종해야 하는 줄 알지만 계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순종할 힘을 주십니다.
본문은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명령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성령을 주셔서 순종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신앙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됩니다.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 됩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됩니다. 섬김은 부담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가 됩니다.
성령의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계속 하나님께로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실패해도 다시 주님께 돌아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새 영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말씀을 지켜 행하는 백성이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신앙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 됩니다.
결론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새 영과 새 마음 그리고 성령을 주십니다.
새 영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인간의 영입니다. 죽은 영적 감각이 살아나 하나님께 반응하는 은혜입니다.
새 마음은 새로워진 영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새 영은 거듭난 인간의 영입니다. 새 마음은 변화된 인격의 중심입니다.
성령은 그 모든 변화를 일으키고 지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오늘 이렇게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새 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 그리고 성령을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거듭난 새 영으로 주님께 예배하게 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게 하시고,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행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새롭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 (σωτηρία, Soteria)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입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은 단순히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합니다. 또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인적 사역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칭의, 둘째는 성화, 셋째는 영화입니다. 칭의는 이미 받은 구원이고, 성화는 지금도 이루어지는 구원이며, 영화는 장차 완성될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성령 안에서 구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몸의 부활을 통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한순간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과정이고, 또한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받은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 칭의는 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구원의 첫 번째 차원은 칭의입니다. 칭의는 영어로 Jus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완전하고 죄가 없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죄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몸은 살아 있고 생각도 하고 활동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존재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가 곧 영적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이것을 영의 거듭남이라고 한다. 칭의는 바로 이 영의 거듭남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죽었던 영을 살리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시는 사건이 칭의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말씀은 칭의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신분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죄인이었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버림받은 자였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정죄 아래 있던 자였지만 은혜 아래 서게 되었습니다.
칭의는 받은 구원입니다. 이것은 과거적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이 고백은 교만한 고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한 은혜의 고백입니다. 내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받은 구원입니다.
칭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 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죄인이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깊은 감사와 겸손으로 이끄는 은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해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 성화는 지금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은 성화입니다. 성화는 영어로 Sanc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성화란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 안에서 점점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칭의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이 바뀌는 은혜라면, 성화는 우리의 삶과 성품이 변화되는 은혜입니다. 칭의가 단번에 주어진 구원이라면, 성화는 날마다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성화는 지속적 구원, 혼의 새로움, 받는 구원, 현재적 구원이다. 혼은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와 관련됩니다. 사람은 영만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순히 영의 거듭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감정을 치유하시며,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변화시키십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화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붙들고, 자기 욕망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생각의 기준이 바뀌어야 하고,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성화는 혼의 새로움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우리의 감정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되며, 우리의 의지가 성령의 다스림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분노가 나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성령께서 오래 참음을 가르치십니다. 예전에는 두려움이 나를 끌고 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붙들어 줍니다. 예전에는 내 뜻이 가장 중요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화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즉시 모든 성품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연약함이 있고,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으며, 여전히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향해 편안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더라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성화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빚어 가신다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성화는 받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칭의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칭의는 완전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칭의 받은 사람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실 뿐 아니라, 죄의 습관과 상처와 왜곡된 욕망에서도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삶은 성령 충만의 삶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단순히 뜨거운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인이 되시는 삶입니다. 내 욕망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말씀과 순종의 길로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성화의 사람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말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고, 섬김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자기 영광을 구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이용하려 했지만, 이제는 사람을 사랑하려 합니다. 예전에는 받은 은혜를 자기 자랑으로 삼았지만, 이제는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영화는 장차 완성될 구원입니다.
구원의 세 번째 차원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영어로 Glor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영화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전히 완성하시는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현재 성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약하고, 세상에는 여전히 고난이 있으며, 죽음의 현실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영화는 궁극적 구원, 몸의 부활, 받을 구원, 미래적 구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혼만 변화시키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우리의 몸까지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놀라운 소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은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몸의 부활과 영화의 약속을 보여 줍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병들 수 있고, 늙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이 썩을 몸을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약한 몸을 강한 몸으로, 욕된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죽을 몸을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영화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마음의 상처와 눈물과 두려움에 묶이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질병과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화의 소망은 현재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몸의 약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마지막이 아님을 믿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의 고백처럼,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영화의 소망입니다.
결론: 구원은 전인적이며,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완성됩니다.
구원은 단순한 종교적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며, 마침내 완성하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칭의는 우리의 영을 살리는 은혜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혼을 새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영화는 우리의 몸까지 부활시키는 은혜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구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칭의 없는 성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화 없는 칭의의 고백은 삶의 열매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영화 없는 구원은 완성의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세 가지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첫째, 이미 받은 구원 앞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금 이루어지는 구원 앞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키실 때, 내 고집과 욕망을 내려놓고 말씀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장차 완성될 구원 앞에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의 고난과 연약함이 끝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부활과 영광으로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상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칭의도 은혜이고, 성화도 은혜이며, 영화도 은혜입니다. 시작도 은혜이고, 과정도 은혜이며, 완성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났습니다. 우리의 혼은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장차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