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복음무문 (福音無門)
(진리는 문 안에 있는가, 문을 넘어서는가?)
(요 4:19–24; 막 2:27–28; 행 10:34–35; 갈 3:28; 요 1:9)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주 오래된
하나의 질문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진리는 문 안에 있는가, 아니면 문을 넘어서는가?”
그리고 조금 더 기독교적으로 묻겠습니다,
“복음은 기독교라는 제도 안에 갇혀 있습니까?,
아니면 기독교 자체를 끊임없이 넘어가게 합니까?”
우리는 문을 좋아합니다.
집에도 문이 있고, 교회에도 문이 있습니다.
국가에도 국경이라는 문이 있고,
학문에도 전공이라는 문이 있습니다.
종교에도 문이 있습니다.
정통과 이단이라는 문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사이의 문이 있습니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문입니다,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사이의 문입니다.
문은 질서를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인간은 문을 지키기 시작하면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길을 찾기 위해 문을 만들었는데,
마침내 문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순간 교회를 지키기 위해 복음을 희생합니다.
하나님을 증언하기 위해 교리를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가둡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아주 위험하지만 동시에
매우 복음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Ⅰ.大道無門― 큰 길에는 문이 없습니다
동양의 선불교 전통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문이 없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 자체가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문을 만듭니다.
“이것이 정통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 교리 안에 들어와야 한다.”
“이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가 정말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리보다 작으신가요?
진리가 우리의 신학보다 작을 수 있는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단보다 작으신가요?
오히려 반대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신학보다 크시고,
복음이 우리의 교단보다 크며,
진리가 우리의 종교보다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복음도 문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것을
하나의 신학적 명제로 제안하고 싶습니다.
大道無門이라면 福音無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큰 길에 문이 없다면, 복음에도 문이 없습니다.
Ⅱ. 예수께서 처음 허무신 문이 ―
사마리아인의 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아주 놀라운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오랜 갈등과 종교적 적대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다.
여인이 놀라서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여기에는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1) 하나는 민족의 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2) 또 하나는 성별의 문입니다. 남자와 여자.
3)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의 문이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이 질문은 단순히 예배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종교가 진짜입니까?”
“어느 성소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예수는 예배의 장소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장소를 하나님보다
크게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도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리심산도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성전도 하나님을 가둘 수 없습니다.
종교도 하나님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도 하나님을 전유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전보다 크십니다.
Ⅲ. 복음은 새로운 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문을 넘어섭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문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놀랍게도 예수께서 허무신 문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는데,
우리는 다시 사람을 묶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보다 사람을 앞세우셨는데,
우리는 다시 사람보다 율법을 앞세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사랑보다 정죄를 앞세웠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에게 다가가셨는데,
우리는 죄인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은 단순히
“옛날 문 대신 새로운 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은
“왜 인간은 끊임없이 문을 만들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Ⅳ. 안식일도 문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비판합니다.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이 말씀은 대단히 혁명적입니다.
안식일은 본래 인간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물을 법으로 만들고,
법을 경계로 만들고,
경계를 심판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그 순서를 뒤집으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복음의 중요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주신 것이지,
인간을 가두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교리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신학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정말 복음인가요?”
Ⅴ. 복음의 기독교인가요?, 기독교의 복음인가요?
여기에서 저는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기독교의 복음.”
그런데 이 표현에는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주인이고
복음이 소유물처럼 들립니다.
기독교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뒤집어 보면 어떻습니까?
“기독교의 복음”에서“복음의 기독교.”바꿔보세요
이때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기독교가 복음의 주인이 아니라,
복음이 기독교를 심판하고 새롭게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를 소유합니다.
교회가 진리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교회를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기독교는 진리에 의해서 계속 변화되고 있는가?”입니다.
Ⅵ. 베드로에게도 문이 있었습니다 ―
사도행전 10장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그에게는 음식에 관한 종교적 경계가 있었습니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우리와 저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그 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여기서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하나님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고넬료를 만나면서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배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교회가 세상에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을 만나면서 교회가 복음을 다시 배웁니다.
타자를 만나는 것은 복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복음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발견하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Ⅶ. 가장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보다 먼저 이방인에게 임하셨다)
사도행전 10장의 절정은 이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 설교를 다 마치기도 전에
성령께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임하십니다.
사도행전 10:44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아직 교회의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먼저 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성령에게“여기까지 오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너희가 어디까지 나와야 하는지를 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교회의 경계를 넓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복음은 교회가 스스로 그어 놓은 경계가
정말 하나님의 경계였는지를 묻습니다.
Ⅷ.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습니다”(갈3:28)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선언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는 너무 쉽게 읽습니다.
“모두 사랑합시다.”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흔드는 것은 훨씬 더 큽니다.
당시 사회를 지탱하던 경계 자체를 흔듭니다.
민족의 경계,
신분의 경계,
성별의 경계.
복음은 인간에게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규정해 오던
신분증의 절대성을 무너뜨립니다.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헬라인이다.
나는 종이다.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정체성이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와 존엄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말합니다.
“너를 가두어 온 이름보다 네가 더 크다.”
그리고 더 깊이 말합니다.
“네가 다른 사람을 가두어 온 이름도
그 사람보다 작다.”
Ⅸ.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福音無門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복음에는 문이 없다”고 해서
“그러므로 모든 종교가 다 똑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오히려 다른 종교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새로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를 기독교의 미완성품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힌두교를 기독교의 예비단계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슬람을 단순히 기독교의 왜곡된 형태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 역시 우리가 다른 종교를
우리의 문 안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무문(福音無門)은
종교를 평준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도,
어느 인간도 궁극적 진리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우리의 재산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Ⅹ. “참 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요한복음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 빛은 한 집단 안에만 갇힌 빛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매우 깊은 신학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만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만난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의 경계를 넘어 세상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배타적 소유권이 아니라
보편적 책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심각하게 성찰해야할 자세입니다
Ⅺ. 가장 위험한 우상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생각하면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더 위험한 우상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러셔야 한다.”
“하나님은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순간 신학은 우상이 됩니다.
교리가 우상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조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만
우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Ⅻ. 그래서 바울은 지식보다 사랑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바울은 지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순간 문제가 됩니다.
나는 옳습니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진리를 모릅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당신은 심판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판단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의 마지막 기준을
사랑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더 급진적으로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믿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진리를 인간에게 되돌려놓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ⅩⅢ. 그러므로 복음은
“문을 없애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무문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福音無門은“모든 경계를 없애라.”라는
무정부주의가 아닙니다.
문은 필요합니다.
정체성도 필요합니다.
공동체도 필요합니다.
전통도 필요합니다.
교리도 필요합니다.
성경 해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은 집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문이 길을 막기 시작하면
문은 본래 목적을 배반합니다.
교리는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리가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하면
교리는 복음의 목적을 배반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의 주인이 되려 한다면
교회는 복음의 목적을 배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은 필요하지만
문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필요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교리가 복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필요하지만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하나님보다 커져서는 안 됩니다.
ⅩⅣ. 그렇다면 전 우주적 진리는
어떻게 공유되는가요?
이 질문이 남습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르고,
유대교와 이슬람이 다르고,
힌두교와 도교가 다르고,
각 종교의 신학과 세계관이 다른데,
어떻게 전 우주적인 진리를
함께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 답을 “같아지는 것”에서
찾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르면서
서로를 들을 수 있는 능력에서 찾고 싶습니다.
우리는 서로 같은 결론을 가져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깊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집착의 문제를 깊이 묻습니다.
기독교는 죄와 은총의 문제를 묻습니다.
도교는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길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자기 비움,
곧 케노시스의 길을 말합니다.
서로의 언어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탐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당신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당신은 타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당신은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진리가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ⅩⅤ. 진리의 최종 시험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아주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리는 단순히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나를 변화시킵니다.
진리는 나를 겸손하게 합니다.
진리는 나를 타자에게 열어 줍니다.
진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합니다.
진리는 나에게
“당신이 틀릴 수도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유욕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ⅩⅥ. 예수는 문이 아니라 길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정답을 제시하는 분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 자신이 길입니다.
길은 걸어야 합니다.
길은 멈추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걷는 사람은 계속 움직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완성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일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이해한 하나님이
내일 다시 깨뜨려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옳다고 생각한 해석이
내일 더 넓은 사랑 앞에서 수정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숙입니다.
ⅩⅦ. 복음은 기독교를 넘어
기독교를 완성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복음이 기독교를 넘어선다고 해서
기독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복음이 기독교보다 크기 때문에
기독교는 계속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복음이 교회보다 크기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교리보다 크기 때문에
신학은 죽지 않고 계속 질문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해석보다 크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넘어선다는 것은
기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복음무문입니다.
ⅩⅧ.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문이 아니라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정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문을 만드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만 옳다.”
“우리 교단만 옳다.”
“우리 신학만 옳다.”
“우리 성경해석만 옳다.”
“우리 정치적 입장만 옳다.”
이렇게 새로운 문을
세우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문을 열어 주는 사람입니다.
교회 문 밖에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종교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성별 때문에 차별받은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가난 때문에 소외된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민족과 인종 때문에 배제된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향해
내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ⅩⅨ. 복음무문 ―
마지막 문은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큰 문은
교회 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성전의 문도 아닙니다.
교리의 문도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두꺼운 문은
내가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문입니다.
“나는 안다.”
“나는 옳다.”
“나는 믿는다.”
“나는 구원받았다.”
“저 사람은 틀렸다.”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
바로 그 확신의 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니요. 진리가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복음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복음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를 독점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니요.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뿐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결론 ― 문을 넘어 길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도에는 문이 없습니다.
큰 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여기에 하나를 더하고 싶습니다.
복음에도 문이 없습니다.
복음은 기독교의 재산이 아닙니다.
복음은 교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복음은 어떤 교단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신학 안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아무렇게나 믿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더 엄격한 요구입니다.
복음에 의해 나의 모든 문을
끊임없이 열라는 요구입니다.
내가 세운 문을 열고,
내가 만든 경계를 넘어가고,
내가 가진 확신을 다시 질문하고,
내가 배제했던 사람에게 다가가고,
내가 미워했던 사람의 얼굴에서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고,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을
다시 신비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문이 아니라 길입니다.
복음은 나를 가두는 문이 아니라
나를 길 위에 세우는 사건입니다.
복음은 내가 진리를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소유하게 합니다.
복음은 기독교를 절대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복음 앞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게 합니다.
복음은 타자를 배제하는 문이 아니라
타자에게 다가가는 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가두는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가는 강물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진리가 문 안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의 문보다 큽니다.
복음이 기독교 안에 갇혀 있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기독교를 넘어가면서도
기독교를 끊임없이 새롭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문지기가 아니라
길을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문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확신은 커지되
우리의 교만은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되
우리의 사랑은 더 넓어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大道無門.큰 길에는 문이 없듯이.
福音無門.복음에도 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안에
아직 열리지 않은 문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열어야 할 문은
“내가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 문일 것입니다.
그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걷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음무문.
문이 없기에 길은 끝이 없고,
길이 끝이 없기에
하나님의 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아멘
설교 마침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세워 놓은
수많은 문들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진리이신 주님께 붙들려
겸손히 길을 걷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마음의 문은 더 넓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확신이 커질수록
사랑과 겸손은 더욱 깊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문을 넘어
고통받는 이에게 다가가게 하시고,
배제된 이에게 손을 내밀며,
서로 다른 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를 문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붙드시고
끝없는 사랑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글, 사진 = 전현구 목사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설교 배경음악/ Ubi Caritas by Alejandro D. Consolacion II / Krystl Buesa, Soprano & Leo Lanuza, Tenor
https://www.youtube.com/watch?v=sj86Z2-Gs0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