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논단
새 시대 포스트모던과 기독교 인간교육(2)
한상진 교수(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새 시대의 현상 2.1 모던 2.2 포스트모던 2.3 삶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위기 2.4. 과학주의의 위기 3. 기독교교육의 과제 4. 새 시대를 위한 기독교 인간교육의 방향성 4.1.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4.2. 죄인으로서의 인간 4.3. 구원의 대상으로서 새롭게 된 인간 – 화목하고 영화로운 인간 4.4. 교육을 필요로 하고 교육이 가능한 인간 4.5.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인간 존재 5. 나가는 말 |
2.3. 삶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위기
우리가 “위기”와 “비판”이라는 언어를 동일하게 비교하면, 그 연관성이 분명해진다. 이 두 단어는 가능한 한 많이 ‘구분하고’, ‘정화한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크리네인(Krinein)에서 유래한다(위기의 독일어 원어는 Krise이고 비판은 Kritik이다. 그러므로 독일어의 이 두 단어는 Krinein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개별적으로 분류한다면 이런 연관성은 난해해진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발전하여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만이 이 두 가지 의미들을 그 자체 안에서 합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지’(Krisis) 혹은 ‘위기’라는 단어는 인간의 삶의 과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개인 및 초개인적인 삶의 과정들도 가리킨다. 문화의 위기, 경제의 위기, 생태의 위기, 정신적인 위기 등의 실례에서 살펴본 공통점은 그것들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첨예화되고 위험스럽게 된 성격을 통해 파생되어져 나온 문제의 핵심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재난의 위험을 안고 있다. 어쨌든 위기의 극복은 위험의 예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비록 이런 의미가 안심의 감정과 함께 우선은 전면에 부각되어 있을 수는 있어도- 더 깊이 관찰하면 동시에 일종의 정화, 오래 전에 있었던 갈등 소재들의 제거, 즉 위기를 거침으로서 비로소 도달 가능한 수준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 위기는 삶의 사건에서 진행된다. 삶의 사건이란 개념은 유기체적 삶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삶도 포괄하는 이중적인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 방식은 인간의 삶 전체와 연관 하여 위기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은 충동적인 삶의 내적 불안정성 때문에 제도들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제도와 그 상황을 거부하는 곳에서는 근원적으로 혼돈에 빠진다. 인간은 모든 순간에서 혼돈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으며, 또한 모든 순간에서 그 혼돈을 이겨내고 그의 문화 체계를 새롭게 획득해야 한다. 그에 따라 역사적인 과정에서도 더 강하게 표출되는 혼돈과 문화적인 제도들을 통한 많은 편차가 있었다. 위기와 비판은 삶 자체의 본질에 속하는 동시에 잘못된 사항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다시 회수해 들이는 이중적 활동에서 삶이 향상되는 것이다. 앞의 고찰에서 이런 운동이 나태하면 죄책감으로 빠지고, 과거에 나태하고 태만하였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 인간적 삶의 본질에 속한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은 20세기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명파괴를 직접적으로 가져온 세계 1,2차 대전의 충격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껏 신뢰한 과학적인 발달과 문화가 삶의 가치를 풍요롭게 창조하기보다는 문명 전체를 어둠 속으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불안 때문이었다.
모던의 사유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고, 관찰자(인간)와 관찰대상(피조세계)이 분리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의 자동기계처럼 인식되었고, 관찰자의 주관성은 배제된 채 관찰 대상의 작동원리만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진리로 규명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 기계적 이성은 인간의 정서(정)와 의지적 요소(의)를 무가치하거나 진리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만듦으로서 과학발전은 곧 인간소외와 비인간화를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 이분법적, 기계적 세계관을 근본으로 추구되는 과학주의는 과학, 도덕, 예술 등의 학문적 분화는 이루어졌으나 다양한 학문을 통한 진리추구라는 통합성을 이루는 데는 미흡하였다.
과학은 지식, 곧 진리를, 도덕은 의지적 결단을, 예술은 정서적 아름다움을 각기 추구하는 것으로 분화됨으로서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진리의 통합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 하이젠베르크(W.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 등은 인과론적 세계관과 기계론적 세계관의 오류를 밝혀냈다. 그동안 진리처럼 인식되었던 포스트모던적 과학이론들이 모순을 나타내므로, 세계의 질서는 비결정론적이요 기계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이요, 폐쇄적이기보다는 변화를 향해 열려 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인격적이요 관계적 세계관이다. 이 관계적, 인격적 세계관 속에서는 사유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할 때, 이것은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모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모던적인 주체적 결단과 비판적 성찰 외에 초월적 하나님의 실재(존재성)와 계시적 차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인본주의적 모더니즘으로부터의 탈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탈출은 인간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존재성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내재적 실재에 대해 일종의 절대성과 상위성을 가진 초월적 실재마저 거부해 버린다면 모순된 오류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중재자의 규범과 존재방식, 사역방식 자체가 참된 자유로움과 평등, 나눔에 근거하면서 자체의 삶(Leben)과 행동이 이런 정신의 원형으로서 존재할 때 절대성과 초월성 그리고 상위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간섭과 섭리를 인정하는 곳에 허무주의의 진정한 극복이 있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포스트모던의 위기의 시대에 있어서도 기독교 개혁주의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축자영감설에 의한 성경무오 사상을 수호하여야 한다.
현대후기(post-modernismus)를 말하려면 현대주의(modernismus)가 어떠한 시대였는가를 이해해야 된다. 현대주의를 가리켜 “기계화”, “산업화” 혹은 “주관주의적 지성화의 시대”라고 개념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적”이라고 말할 때, “현대”란 용어(terminus)가 단순히 시대적 구분에 의한 시간상의 “오늘” 혹은 “최근의 시대”를 뜻하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다. “현대적”이란 꽁트(1798-1857)가 주장한 것처럼 사유의 저편에서 볼 때, 신화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실증주의적 사고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적”이라고 표현하는 말은 고대와 중세의 사고 유형과 구별하여 합리주의적, 자연과학적 혹은 계몽주의적이며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라고 특징짓는다.
하버마스는 새로운 하이테크로 인한 정보와 기술의 혁신이 정보의 지구적 소통을 원활히 해주는 긍정성도 있지만, 동시에 정보의 파편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소수의 고립된 의사소통의 공동체를 증폭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변화와 격동의 상황은 비단 과학의 발전에만 있지 않다.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서 지금까지의 틀을 깨고 새로운 도전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예측할 때, 현 세기에는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우리의 제반 사회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음을 어렵사리 예고하는 것이다. 근대를 마감하고 탈근대적 양상 즉 포스트모던 양상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하신다는 복음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전했던 그 복음은 새 천년 새 시대에도 모순이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런 복음은 시․공간성을 초월하여 영원불변 항구적인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는 복음의 영원무궁성과 함께 우리는 시대의 변화 즉 상황의 변화에 대한 가변성을 새 시대에 맞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진리는 영원불변하지만 그것이 전달되는 상황(context)은 2000년 전의 그것과 종교개혁 시대의 그것과 우리시대의 것이 결코 같을 수 없다. 스펄전의 일화가 우리에게 교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이래로 결코 폐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흥왕하지만, 그런 상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한 교회는 쇠퇴하고 또한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교육적인 과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복음과 변하고 있는 상황 사이에서 계속적인 연구와 사명감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근대” 혹은 “현대”를 마감하면서 소위 “현대 이후(postmodern)”의 제반 양상을 가늠하는 논쟁에 있어서 일반철학이나 현상학에서는 주로 “기존 질서의 해체”, “보편 가치로부터 특정 가치로”, “일반적 관심사로부터 개별적 관심”으로의 이행이 중요한 패턴이다. 이런 경향성은 서구의 가치체계가 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유대 기독교전통을 근저에 깔고 있는 서구사회는 사회구조의 다양한 경제, 정치, 문화 등의 부분을 지배하는 통합적인 윤리가 엄연히 존재했었다. 그것의 공통분모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종교개혁적 논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으로 표현되는 산업사회로 옮겨지게 되자 사회 경제 부분은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관료제가 지배하고, 정치부문에서는 평등권을 위해서 사회 세력들이 다투게 되고, 문화 부문에서는 개인들이 자아의 확대와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자연스런 삶의 목표가 된 사회 분위기를 낳게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소위 현대 이후에 와서는 극적으로 전환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아실현이라는 명분 하에 지금까지 금기로 여겨왔던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고, 본능적이고 쾌락적인 활동 등을 생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내일도 계신 분으로 인식된다. :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2.4. 과학주의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더욱이 위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위기라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그 위기의 성격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삶 자체가 편리해지는 동시에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들과 여러 가지 도구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 위기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위기는 생태학적 위기이다. 산업의 발전이 가져온 공해의 발생과 환경의 변화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말한다. 원래 하나님의 세상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상호 의존하면서 생명의 현상을 유지하고 상호 조화하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 종래의 진화론이 생각했던 것처럼 생존경쟁과 이로 인한 승패가 가져올 수 있는 생명체들의 불균형적인 번성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삶의 조화를 깨뜨리고 생명체들의 파멸은 일부 동식물들이 떼죽음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형아들이 출산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두 번째 위기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다. 윤리적인 무질서와 점점 심화되어 가는 계층간의 대립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다. 공해의 위협과 전쟁의 위협, 무질서의 위협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심각한 위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은 공해에 대한 대책도 마련할 수 있지만 새로운 과학이 추구되기 전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시대의 단계마다 심각한 생태학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예고한 현대 과학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심각한 위기의 시대라고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지구촌에서 계속 생존할 수 있기 위하여 중대하고 복잡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위치’와 ‘자아 회복’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회개하며 각성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한 예를 ‘이스라엘민족’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의 다스리심을 알게 하셨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오늘날 위기 앞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의 교훈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법칙과 그의 다스리시는 주권을 인정하고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현세기의 위기를 벗어나는 필수적인 과제이다. 현대인들이 새 시대에 이성과 감성의 조화 속에서 과학적인 데이터를 진리라고 인정하지만 종교와 가치, 생명 존중의 문제 등은 과학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다머(G. Gadamer)는 그의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과학의 무전제성을 부인하면서 자연 과학적인 방법만이 진리라는 것은 허구라고 한다. 모든 과학적인 인식은 일정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지금 논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개념도 모든 인식과 이론들이 언제나 일정한 세계관, 일정한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되는 것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서 인식과 지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이 “신과학 운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과학 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대상의 지배를 지향”하는 과학적인 연구로부터 “대상의 이해를 지향”하는 과학적인 연구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과학들의 패러다임 전환은 가치관의 문제이며, 상대주의 문제이다 모던과 포스트모던에서는 종교의 절대성을 부인하면서 역사성과 함께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인정하는 상대주의를 인정하였다.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진리는 종교적인 상호이해와 정치적인 관계성의 대화를 차단하기 때문에 거부되어진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문화적인 환경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윤리적인 가치관의 제도도 변하고 도덕적인 규범도 달라진다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주의가 한편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처럼 인식되지만, 다른 면에서는 진리를 거부하고 도덕적인 삶의 의무를 업신여기는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근거 지우는 허무주의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선 구속력이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인간존재와 역사적 상황에서 교육은 교사가 자라나는 자들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질문들을 경청하고 신뢰할만한 질문으로서 성실하게 교사 개인적 답변을 제공할 때 신앙교육에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신앙은 자라나는 학생들을 교육한다. 우월한 자나 열등한 자가 따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게 하시고, 죄로 억압되고 사망에 빠진 비참한 상태에서 그의 앞의 영광에로 부르셨다는 동등한 파트너 의식이다. 이런 신앙의 경험으로부터 본 회퍼는 옥중에서 ‘누가 나약하게 물러서지 않는가?‘란 질문에서 그의 답변은 우리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단절시킬 것이다. 자기의 이성, 자기의 원칙과 양심, 자기의 자유로움과 덕망을 최종적인 표준으로 여기지 않고, 신앙과 하나님의 구속 안에서 순종하고 책임 있는 행위에로 부르심을 받을 때, 모든 것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삶이 하나님의 질문과 부르심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책임 있는 자만이 위기의 선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헤르만 놀은 신앙은 과학 분야에서 지식을 통하여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힘과 의미를 인간에게 현재화시키는 유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앙함으로서 존재한다.”는 논리를 피력했다. 야스퍼스는 오도된 모던은 지각하고 인식하려고만 하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야스퍼스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내가 일생을 바치는 진리는 내가 그 진리 안에서 동일화됨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방식이다.”<다음호에 계속>
한상진 교수(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